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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깊게 아로새겨져 쉽게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자립형 인간>이란 영화다. 4~5년 전의 <인디다큐 페스티벌>이었을 게다.  

1시간 남짓의 다큐였는데, 일흔 일곱의 나이의 가장이 주인공인 영화다.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어느 날 자신에게 치명적인 불치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열정적인 삶을 지향하는 그에겐 병원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에 주인공은 병원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걸 포기하고 적극적인 죽음, 즉 <자살>을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협조을 구한다. 이런 그의 결정에 가족들은 그를 말리지만 결국 주인공은 가족들의 동의를 얻은 후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방법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카메라는 주인공이 자살이란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고뇌와 죽음을 위한 가족들과의 동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이 다큐가 나에게 던진 화두는 묵직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가지고 있던 (우울증과 같은) 질병으로 인한 도피로서의 자살과는 그 이유와 (죽음에 도달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순전히 자신의 삶의 존엄을 위해 적극적인 방법으로서의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태어남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죽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의 <자립성>에 경외감이 들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고 비로소 '자살 = 생명경시 풍조'와 같은 구태의연한 등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살 소식을 다루는 매스미디어의 기사가 항상 탐탁치 않았다. 한 사람의 자살에서 복잡다양한 원인과 목적, 의도가 뒤섞여 있을 터. 허나 <남녀문제>, <가정 불화> 등의 단편적인 사건을 원인으로 단정짓는 보도 행태말이다. 그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으로서의 예의가 아나라는 생각을 한다. 고통으로 잊기 위해 선택한 죽음이지만, 주검이 된 뒤에도 고통이란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다.(특히나 연예인은 심하다)  

 

 

 

 

 

 

 

  

오늘 한겨레에 실린 칼럼도 자유 죽음으로서의 자살에 대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대학 시절 읽다 만 뒤르켐의 <자살론>과 최근에 출간된 장 아메리의 <자유 죽음>을 읽고 자살에 대한 사유를 정리해 볼 생각이다.  

한겨레_[기고] 자살은 '질병사일 뿐이다'/정희진_2010.07.15  

 이 세상에는 몸 둘 곳이 없었을까? 무대 밖으로 영원히 몸을 숨긴 배우의 죽음을 수사한 경찰은, “(음주 후)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최종 발표하였다. 이유는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자살 사건의 90% 이상이 비계획적이지만, 그것이 곧 ‘충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찰이 잘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충동’이라는 표현은 죽음을 선정적으로 수사(修辭)할 뿐 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가로막는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자살은, 질병의 경과점 혹은 투병의 과정으로서 자살이다. 예전에 어느 신문에서 방한한 외국 가수를, “한때 우울증에 빠져 방황했지만 재기했다”고 소개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울증에 빠져? “빠져”는 자발적 탐닉이라는 의미로 대개 마약, 알코올, 도박 등과 결합하여 사용된다. “당뇨에 빠져”, “암에 빠져” 이런 말은 없다. 정신적 불편함(mental disease), 흔히 말하는 ‘정신병’은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육체적인’ 질병과 다르지 않다. 우울증은 독감이나 교통사고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정상적인 질병’으로 인구학적 특징이 ‘없다’.

우울증에 대한 일반적 통념은 “누가 진짜 미쳤는지”를 생각하게 할 만큼 대단히 모순적이다. 우울증은 결정권(권력)이 많은 기업의 리더처럼 스트레스와 관련 있다는 인식도 있지만, 반대로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사치스런 병이라는 통념 역시 집요하다. 이를테면, ‘일하는 건강한 민중’은 우울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 편견의 효과는 단 하나, 아픈데 돈 없는 사람들이 넘어서야 할 정신과 병원의 문턱만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아픈 이가 누구냐에 따라 우울증은 다르게 인식된다. 천재나 예술가의 우울증은 예민한 재능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평범한 사람의 우울증은 경쟁 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나약함으로 간주된다. 감기라는 비유처럼 가벼운 증상으로 치부하면서도, 우울증 병력자나 환자는 비정상, 비이성, 잠재적 폭력범 등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공포가 있다.

이런 모순된 인식의 배후에는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해(利害)관계와 담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양가적 인식들의 공통점은, 우울증에 대한 무지 그리고 이 무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무지를 자신은 그만큼 ‘정상’이라는 증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증이 자살로 연결될 만큼 고통스러운 질병이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살은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의미를 넘어 ‘패가망신’, ‘인생 실패’, ‘참극’ 등 과도한 낙인을 안게 된다. 새삼 지금 한국 사회의 자살사태(沙汰)를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자살을 예방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살 권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이고, 또 하나는 자살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병행되어야겠지만, 나는 후자가 좀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이는 우울증의 고통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표현한다. 나는 자살에 관한 사회적 대책이 자살을 생명과 대립시키는 ‘자살 방지 캠페인’에서, 우울증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니라, 고통이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다른 질병에 비해 위로, 간병받지 못한 병사(病死)일 뿐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통증의 해결이지 죽음 자체가 아니다. 자살은 ‘생명 경시 풍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생명의 고통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한 개인의 외로운 처방전이다. ‘병사로서의 자살’은 자살에 대해 관대해지자는 주장이 아니라 예방책에 대한 논의이다. 한때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는 병력이 이후 인생의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조금이라도 소통될 수 있다면, 자살은 줄어들 것이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말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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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제목처럼 한바탕의 여름 꿈 같았다. 단 하루짜리 휴가 얘기다. 월요일 하루 낸 휴가 가지고 뭘 그러냐는 핀잔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2010년이 절반이 다 지나도록 연차 하루 사용하지 못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나에겐 월요일 휴가 하루가 완소 그 자체다.  

휴가를 내면 꼭 해야겠다는 To Do List가 있었다. 크게 두 가지. 우선 밀린 독서 하기. 가만 보자. "나는 언제 읽어 줄거니?" 하고 책상 옆에 나를 미치도록 원하는 책이 13권 정도다. <한국 문단사>는 지난 2월에 읽기 시작해 아직도 마무리 짓지 못했으며, 삼두근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팬이 되겠다며 구매한 <가면의 고백>도 5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먼지만 쌓여간다. 그 외에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인생>,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 <어젯 밤>, <계급>, <발터 벤야민>, <녹색평론 5,6월 호>, <안나 카레니나>, <러시아 혁명> 모두 독서 중이다. 언뜻 나루케 마고토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의 정언명령을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권 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많은 대기자들이 나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습기 가득한 방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To Do List의 다른  한 가지는 지루하고 비루한 회사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취미 찾기다. 현재 생각하고 있는 취미는 크게 세 가지. 하나는 야구, 하나는 단편 영화 제작, 다른 하나는 독서 클럽 만들기다. 야구는 가입할 클럽을 찾아봐야 했고, 단편 영화 제작은 영화 제작을 배울 수 있는 미디어센터(미디액트 등이 있겠다)의 강좌 일정 및 가격 등을 알아봐야만 했고, 마지막으로 독서 클럽을 만들기(혹은 활동하기) 위해서는 개설 장소(네이버 카페, 다음 카페 등) 및 커리큘럼을 구상했어야 했지만, 역시나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노트북 앞에서 무언가를 찾아보고 작성하기엔 아직까지 그만큼의 열정도 없었고, 역시나 무더위가 너무 심했다. 

일단 영화관을 찾기로 한 이유는 단지 더위를 잊기 위해서였다.   



영화 관람을 포함한 오늘의 스케줄은 대략 이랬다.     

1. 종각역 하차, 인사동으로 향함. 

2. 인사동 야구 연습장에서 야구 한판 : 나오는 공의 갯수가 늘어난 대신 가격이 정확히 100% 올랐다. 

3. 인사동 오락실에서 총 싸움 한판 : 최근에 게임을 접한 후 흥미를 느꼈지만 역시 못한다. 나는 총과 어울리지 않는 평화주의자. 

4. <시네코드 선재>에서 <작은 연못> 예매 

5. <시네코드 선재> 옆 테이크 아웃 커피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구매 

6. 상영 전 남은 시간 동안 <나는 공산주의자다> 독서 

7. <작은 연못> 관람 :  단선적인 줄거리 큰 울림, 배우와 제작진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엔딩 크레딧이 끝나기 전에 단 한명도 자리를 뜨지 않았던 7명의 수준 높은 관람객에 더 큰 존경을 

8. 삼청동으로 향해 <아이스크림 와플> 음미 

9. 삼청동에서 냉모밀 먹음 

10. 계동 골목길 탐방 : 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동네다. 내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 있을 것만 같이 매력적인.

적고 보니 생각한 것보다 알찼다. 특히 계동 골목길을 휘젓고 다니다 여름 휴가까지 계획했으니 특히나 더. 올 8월 휴가에는 일주일 간 <제주 올레>를  혼자 배낭을 배고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올레가 "차가 다니지 않은 도로에서 집 앞 대문까지 이어지는 작은 길"이라는 뜻이라서. 계동의 골목길을 걸었을 때의 감흥 그 이상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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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은 습기를 잃고  

모든 길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 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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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쉽지 않은 계절이지만, 이런 근사한 시를 보게 하는, Henri Seroka의 음악을  

듣게 하는 감성 충만의 계절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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