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매품인 줄 알았건만 혹시나 검색히 보니 엄연히 판매 중인 책이었다. 맙소사!  

도서분류 : 대학교재>전문서적>사범계열>교육학 일반 

난 오늘부터 내 자신을  감히 <교육학 교재 공저자>라 부르고 싶다.  다른 공저자는 어디에서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시청자의 방송 읽고 쓰기>를 격려하기 위해서 시민의 비평상을 시행한지 올해 9회를 맞았습니다. 이번에 수상을 하게 된 한 비평문에서 ‘톺아보기’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주 접하지 못했던 ‘찬찬히 살펴보다’라는 뜻의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선하면서 새롭고, 천천히 가면서도 알차게, 방송을 바르게 읽고 쓰려고 했던 첫 취지를 되새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방송을 ‘톺아본’ 여러 시민들의 힘과 성숙된 모습을 이번 수상작들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목차> 

발간사

최우수작
'차이'를 '차별'로 학습하는 아이들_이선옥

우수작
다큐멘터리 감수성 혁명 중_봉지욱
TV 도시, 노인 시민을 출산하다_서지민
스타다큐멘터리의 조건_소미연
'가족주의'의 굴레를 넘어 외친다, 굿바이 솔로_이대범

가작
연민을 넘어 성찰의 장으로_김우성
농촌 드라마에 농촌은 없다?_이용운
죄와 벌_이지연
라디오, 아직 죽지 않아!_장수연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환상_장정우
TV를 잃다-_정민지
'왜곡'과 '환상'을 넘어_최재훈
가부장 개그는 가라_한병채

수록작
누구에게나 사랑하고 즐길 자격이 있다_권예지
드라마의 교육적 가치를 말한다!_김덕남
타자의 고통을 통한 자아의 이해,_김범수
성장 드라마의 색다른 화장, <궁>_김 순
세상을 보는 두 개의 눈_김순배
진심이 주는 매력, 그리고 실재가 가진 무게_김인현
인생의 의미를 되짚게 만드는 <굿바이 솔로>_김혜옥
코미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다_박성덕
굿바이, 솔로 굿바이_안재현
함께 있기에 행복한 시간, 추억으로의 유쾌한 길동무_유수현
재미있는 뉴스가 뜨고 있다_유우현
골든 벨, 더 이상 미래의 자랑이 되지 않는다_윤은지
'고발'에서 '해결'로 시사 프로그램의 새로운 장을 열다_이선주
픽션-영웅신화에 대한 재해석_이준목
폭풍의 하늘에 걸린 무지개_이태연
TV와 책의 아름다운 결혼을 위하여_정민호
진실을 찾아가는 색다른 여정,_정재호
'마이너리티 버라이어티'를 꿈꾸다_조철희
스포츠 패스트푸드점들을 고발한다_천현정
소통과 배설의 경계에서,<야심만만>, 허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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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 <인물과 사상>을 비롯해 그의 책들은 언제나 학과 과방에 놓여져 있었다. 다른 지식인들을 제쳐두고 그는 항상 과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고 존경받는 저자이자 지식인이었다. 금기에 도전장을 내민 그의 비평을 읽는다는 것은 신문방송학도라면 기본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필수 과목과도 같았다. 나 역시 <인물과  사상>은 거르지 않고 챙겨 먹어야 하는 영양제마냥 빼먹지 않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2006년 KBS <TV, 책을 말하다>에서 "현대사 산책" 소개를 했을 때 방청 가서 사인 받은 그의 책을 얻고 기뻐했던 추억도 떠오른다. 그의 책은 현대사 산책을 읽은 뒤로 한 동안 보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미국사 산책> 전권(17권)이 완간 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다음 달 생일 선물은 저걸로 하자고 마음 속 위시리스트에 담아 놓고 있던 찰나에 미 교환교수로 떠난다는 강준만 교수의 아래 기사를 접했다. 그렇게 괴물같이 강단있어 보이던 이 분도 자신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모진 비난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말에 괜시리 가슴이 아프다. 원래 교환 교수란 게 휴식을 겸해 가는 걸로 알고 있지만 강준만 교수는 1년 동안 또 몇권을 책을 쓰고 돌아 올지 모를 일이다.

조금만 계시다 돌아와 원숙함이 듬뿍 배인 그의 치열한 실명 비판을 다시 듣고 싶은 게 애독자로서의 소박한 바람이다.   

 

   “치열한 실명비판 다시 할 생각이다, 원숙하게”  

[한겨레가 만난 사람] 미 교환교수 떠나는 ‘지식 전사’ 강준만 교수 

  

 강준만은 ‘문제적 인간’이다. 1990년대 한국 사회의 금기와의 싸움에는 그가 있었다. 비판자들을 냉혹한 실명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 생체 해부에 가까운 비평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피 흘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의 피도 흥건했다. 200여권의 책을 지치지도 않고 “써대고” 있는 괴물 같은 근성은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런 그가 최근 <미국사 산책> 17권을 완간했다. <한국 근·현대사 산책> 시리즈도 각각 18권과 10권을 냈다. 한 해에 스무권이 넘는 책을 낸 적도 있는 그에게 저술의 양은 뉴스 거리도 아니지만, ‘산책’이란 책의 제목에서 기자의 직업적 후각이 발동했다. ‘천하의 강준만’은 날카롭고 긴 창을 옆구리에 끼고 단기필마로 적진을 피 튀기며 누비는 지식 전사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역사 속을 한가로이 산책이나 하고 있다니. 인터뷰를 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빨리 답변을 보낼 줄은 몰랐다. 전주에 오시면 술 한잔 하자고. 전북대 연구실로 찾아간 것은 1월12일이었다. 추운 날씨였는데 그의 연구실은 더 추웠다. 사람 참, 썰렁하게 사네…. 테이블에 마주 앉았더니 비타500 두 상자를 준비해 놓았다. 결기가 느껴졌다. 맺혔던 그 무엇이 실밥 터지듯 툭툭 터지고, 다시 평정으로 돌아가길 몇 번. 2시간 반의 토로였다. 인터뷰 말미에 두 사람은 비타민 음료를 나눠 마시며 치열함과 원숙함이 양립할 수 있는 명제인가에 대해 스쳐가듯 대화를 나눴다. 가능했으면 좋겠다, 라고 그가 말했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2003년 ‘민주당 분당-우리당 창당’때 좌절
“문제 지적한 것인데 돌아온 건 모진 비난
”‘분노·증오서 소통·성찰로’ 삶의 자세 전환

-최근 활동이 뜸한 것 같다. 근황을 먼저 소개해달라.

" 활동이 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더 썼는데, 독자들이 요즘은 덜 읽어주더라(웃음).”

-핸드폰은 왜 없나? 불편하지 않은가?

“24일 미국 콜로라도대학에 1년간 교환교수로 나간다. ‘강준만식 한국학’을 소개하러 가는데, 그걸 핑계 삼아 생활방식을 조금 바꿔보려는 중이다. 미국 생활 하려면 차가 있어야 된다고 해서 얼마 전 운전면허를 땄다. 핸드폰도 하나 준비중이고.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획기적인 변화다. 허허.”

그는 89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래 23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에 간다고 한다.(대학교수가 그동안 차도, 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신문방송학 교수가 미국 여행 한 번 안 하고 여태껏 버티다니!)

-생활의 변화가 강준만이라는 사람의 삶의 태도나 방식의 변화를 예고하는 건가? 확대해석인가?

“솔직히 전에는 사람 만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 만나는 일에도 시간을 내고 있다. 동창회도 나가고. 주변에서 그러더라. 야, 강준만이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사람이 그리워지는 걸 보니. 인생이란 큰 차원에서 볼 때 내가 조금 달라지는 국면에 서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 얘긴 뒤에 또 하고, 초기의 강준만은 우리 사회의 금기였던 지역감정, 정치갈등 문제 등에 대해 강렬한 발언을 많이 했다. 왜 전라도, 김대중, 안티조선(일보) 같은 결코 유리할 것 없는 화두에 자신의 학자적 생명을 걸었나?

“원천적으로 지역문제에 대해서는 내 안에 쌓였던 분노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다 내가 본래 삐딱해서인지 우리 사회의 내면화된 금기를 깨고 싶었다. 비교적 학맥에서 자유로웠던 입장도 작용했고. 실제적인 측면에서는 개마고원 출판사 장의덕 사장의 영향이 컸다. 당시 김대중이란 호남 출신 정치인에 대한 여러 편견에 도전하는 글들을 여기저기 썼는데, 장 사장이 그걸 가지고 책을 만들자고 해서 낸 게 <김대중 죽이기>(1995)다. 이어서 <전라도 죽이기>도 썼고. 그런 책들이 큰 반향을 일으키니까 그때부터 그런 쪽으로 나선 거다. 한 십년 갔나….”

-말이 나온 김에 노무현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싶다.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고, 비판자이기도 했다.

“그가 죽은 뒤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시간적 거리를 두고 그를 보게 된다. 나는 노무현을 정확히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말한다.(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한국 사람의 피에, 민족성에는 아웃사이더의 피가 흐른다. 외세의 침탈과 수탈, 식민지, 미군정과 동족상잔, 개발시대의 디아스포라와 고난에 찬 민주화의 여정 등 역사의 격랑을 한국인들 대부분은 주체가 아닌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소위 우리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이런 피가 흐르고 있다. 이중성의 피가. <노무현과 국민사기극>(2001)에서도 썼지만,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뒤집어 엎어야 하는 세상이지만, 이해가 걸려 있을 때는 이기는 편에 서야 살 수 있는 세상이 한국 사회다. 뒤엎어야 한다고 거품을 물다가도 정작 뒤엎겠다고 나서는 사람한테는 절대 표를 안 준다. 그래서 내가 대한민국 국민들아 사기 좀 그만 치라고 한 것이다. 그에 대한 호오를 떠나 노무현의 명암과 부침은 한국 사람들 대부분의 내면 속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엄청나게 뻔뻔한 인간들이 쌔고 쌨는데, 바보같이 그 정도로 죽냐고 통곡할 때의 그 원통함과 서러움의 응어리가 바로 노무현이고 나의 얼굴이다.”

비타500을 또 하나 깠다.

-하나 더 물어보자. 당신이 천착한 주제 중의 하나가 지역주의였다. 스스로 ‘전라도주의자’로 매도될 정도로. 민주화 이후 호남지역의 정치를 어떻게 보는가?

“내가 그 주제로 진보 쪽 분들한테 욕을 많이 먹은 적이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를 주도한 지역이 호남이니 앞으로도 호남이 진보·개혁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본다. 진보정치가 가능하려면 사회경제적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호남이 (노동자가 많이 모여 사는) 울산인가? 과거 지역차별을 받은 것을 가지고 역할을 더 떠맡으라는 것은 호남을 두번 죽이는 짓이다. 차별해소, 지역 균형발전 같은 명제와 진보정치의 실현은 별개의 사안이다.”

-호남 민중과 디제이 집권으로 덕을 본 토호나 정치적 기득권자들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더라.

“진보적인 분들 가운데서도 지역문제를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는 분들이 많다. 토호니 지방건설업자니 이런 사람들 문제가 많은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지역에 살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토호와 서민의 이익은 분리될 때보다 같이 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자꾸 계급적으로만 보려 한다. 그러니 이론과 현실이 안 맞게 되는 거다. 새만금 문제가 대표적이다. 나도 새만금 공사에 반대했지만, 지역에서 그 문제는 환경문제 이전에 차라리 인권문제였다. 절박한 삶의 터전의 문제였단 말이다.”

-유시민, 문성근씨 등 그간 논쟁했던 분들과 털고 갈 것은 없는지.

“보통 비판을 해도 인간에 대한 애정만은 운운하는데, 사람인 이상 그거 잘 안되더라. 밉고 괘씸하지. 그런데 요즘은 밉고 괘씸한 게 없다. 내가 그런 쪽으로 생각을 안 하니까, 오히려 소통의 여지가 더 생기고, 사람 보는 시각도 달라지더라. 그렇다고 비판이 의미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되, 중간의 영역이 좀더 넓다면 의미가 더 크지 않겠느냐 하는 게 요즘 생각이다. 중간영역이 아직 좁다면 내가 그쪽으로 더 옮겨가서 좀 넓혀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 그러다 보니 죄송스럽지만, 그분들이 뭘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젠 별 관심이 없다.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열심히 일하고, 나는 나대로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거다. 누가 되든, 민주당이든 참여당이든 한나라당 사람이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요즘 내가 그런 쪽이다.”

-그런 변화가 세월 탓인가? 아니면 어떤 깨달음이 온 건가?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나이다. 야, 천하의 강준만이도 이젠 나이가 들었네, 늙었네, 그런다. 사람에게 세월은 아마도 가장 강력한 변인이겠지만, 그것 말고도 내게 변화를 강제한 것이 있다. 민주당 분당(열린우리당 창당) 사건이다. 그 사건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비타500 한 상자를 더 가져왔다.

미 콜로라도대서 1년간 ‘한국학’ 소개 예정
귀국뒤 중립지대서 비판하고 칭찬할 생각
“치열함과 원숙함, 양립 가능했으면 좋겠다”

-결정적인 전환점이란 말씀?

그렇다. 완전한 전환점. 당시 민주당 분당, 즉 열린우리당 창당은 내가 보기에 지역주의에 기반한 기회주의였다. 그래서 반대한 것인데, 내게 돌아온 것은 모진 비난이었다. 쉽게 하는 말로 전라도주의자, 김대중주의자였다. 민주당을 분당하고 노통 권력 중심으로 당을 새로 짜는 걸 지지하는 건 나로서는 내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남지역에서조차 심리적으로 왕따가 되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사람들, 독자들이 나에게 등을 돌렸다. 아, 그때 받았던 비난 중에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게 너무 많았다. 니 책을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니 책을 몽땅 불태워버렸다…나도 화가 났다. 이게 제대로 성찰이 있는 나라냐고. 그래, 성찰 따윈 애시당초 없는 사회다,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거다. 사람들도 독자들도 사실은 자기가 필요로 할 때 내가 떠들어주니 호응한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심하게는 이래서 지식인을 졸이라고 하는구나 하는 비하까지 했다. 그 뒤론 나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게 되더라. 그런 걸 안 겪고 그냥 세월의 힘으로 원숙해지고 그랬더라면 좋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비타500을 이번엔 기자가 깠다.

-인간적인 고통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실명비판하고 그럴 때가 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쪽이 더 쉬웠다. 그때는 내 뒤에 확실한 내 편이 있어서 아무리 극한의 대치를 해도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 민주당 분당 때처럼 양쪽이 싸울 때 중간쯤에 서서 양쪽의 문제점을 지적하니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못 받더라. 그래서 투쟁보다 성찰이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된 거고. 그러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남은 인생은 분노, 증오, 그런 따위가 아닌 다른 세계로 가봐야겠다고. 그런데 그 길로 가려니, 글을 ‘싸납게’ 써서는 안 되는 것이더라. 그 길로 가기로 작정하면 글쓰기도 달라져야 하는 걸 알았다. 생각이 바뀌면 문체가 바뀌고,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그때 내 앞에 떠오른 주제가 이 지긋지긋한 승자독식 문화에 도전해 보는 거였다. 승패에 따라 10 대 빵으로 갈리는 이놈의 사회, 7 대 3, 6 대 4 정도라도 될 수는 없을까… 그런데 그런 심심한 주장을 정색하고 하면 누가 열광하겠는가? 상대편한테까지도 비웃음을 살 게 뻔하지. 그래서 직접적인, 직설적인 글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또 깨닫게 되는 거고….”

-그래서 요즘 당신의 글쓰기가 역사 속으로 가고, 미국으로 가고, 문화로 가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논문 몇 편을 들고 왔다. <빨리빨리의 문화정치학> <자동차의 미디어 기능에 관한 연구> <아파트의 문화정치학> <죽음의 문화정치학> <간판의 문화정치학>….

“이런 것들이 요즘 내 관심사다. 예컨대 <빨리빨리…>는 한국의 속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논문이다. 이걸 연구해보니 민주당 분당 사건이 조금 이해가 되더라. 기회주의라고 내가 공격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사실 기회주의라기보다는 빨리빨리 뭔가 개혁도 하고 바꿔도 보고 싶은 조급증이었다는 것을….”

-거친 분류지만 진보에서 중도로 건너간 게 맞나? 아니면 내용은 진보이면서 소통의 영역을 넓혀간다는 차원에서 중간영역의 확장이냐?

“굳이 따진다면 후자이다. 내가 중도로 옮겨간다는 게 아니라, 내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을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소통하고, 그것을 통해 좀더 바람직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 보자는 거다. 낮은 단계의 권모술수라 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중들에게 내 이야기가 더 다가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오늘 주제는 성찰인 것 같다. 분노나 증오 같은 센 단어가 소통이나 성찰 같은 부드러운 단어로 바뀌어가는 과정… 개인적으로 성찰의 의미를 찾는다면?

“<한겨레>에서 한의사 고은광순씨가 계룡산 밑에 한의원을 새로 연 기사를 봤는데 그분이 ‘지금까지는 사회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많이 냈지만 앞으로는 나와 주변사람들이 좀더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라. 전적으로 공감한다. 거대 주제에서 작은 주제로 사고의 대상을 옮기고 싶다. 그걸 후퇴 또는 보수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큰 것에서는 성찰의 기회를 얻기 어렵다. 예컨대 당장 엠비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되찾는 게 목적인 사람에게는 성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렇다고 투쟁만이 승부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큰 것을 놓고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곁에서 작은 것의 의미를 축적해 가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그들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때 승부도 이기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걸 원숙해진다고 해야 하나? 당신의 치열함과 원숙함은 공존할 수 있을까?

“원숙해진다고 치열함이 사라지는건 아니다. 나도 노력해 보련다. 귀국하면 다시 실명비판을 시작할 생각이다. 중립지대에서의 실명비판도 가능하지 않겠나? 양쪽을 다 비판하고 견인도 하는. 그러나 과거와 같이 분노를 자극하고, 증오를 증폭시키는 그런 방식은 아닐 것이다.”


자리를 옮겨 술을 마셨다. 사실상 초면이나 다름없는데도 편했다. 기자는 그의 변화가 결실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했고, 연장의 그는 기자의 건방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혹한의 전주에서, 익산으로 옮겨가며 마지막 열차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즐겁게 대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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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1-02-11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뷰 정말 안 하는 분인데 미국사 산책 은 엠비시12시 뉴스에도 인터뷰가 실리고 여기저기

인터뷰기사가 나와서 반가웠는데 이건 처음 보네요.

정말 강준만 샘은 대단한 분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로틱번뇌보이 2011-02-15 12:29   좋아요 0 | URL
정말로 괴물 같은 분이신 것 같아요~
 

오늘 자 <한겨레>의 김규항 칼럼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다. 교활하면서도 어리석은 우리. 우리에게 희망은 있기나 한걸까? 

왕들의 구멍 


엠앤엠(M&M) 대표인 최철원이 제 회사 직원들 앞에서 저보다 열두 살 많은 노동자 유홍준씨를 한 대에 100만원씩 야구방망이로 때렸다. 유씨는 자기 트럭을 가진 사업자지만 실제론 고용되어 일하는 이른바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다. 최는 유씨의 탱크로리 값과 맷값으로 7000만원을 지급했는데 교활하게도 이미 열흘 전 유씨를 상대로 7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해놓았다. 최의 패악질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다. 그 집안인 에스케이(SK) 불매운동도 벌인다. 그러나 과연 최철원이 한국에서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자본가일까? 대법원 판결조차 무시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공장에 가두어놓고 교섭조차 거부하는 정몽구보다?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노동자의 산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건희보다?

오늘 한국의 대자본가들은 마치 왕이라도 된 듯 인륜도 법도 무시한 채 포악하고 잔인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노동자에 대한 야만적인 폭력이 허락되고 그에 항의하는 건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던 군사독재 시절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촛불시위에서 충분히 드러났듯 이제 한국인들은 군사독재 수준의 억압은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시민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왜 박정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이런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질까? 그것은 오늘 우리의 시민의식에 어떤 구멍이 있음을 알려준다.

정치적 악행엔 저항하면서도 자본의 악행엔 그리 저항하지 않는, 이명박의 악행에 대해선 들고일어나지만 정몽구나 이건희의 악행은 결국 방치하는 구멍 말이다. 그 구멍은 왜 생겼을까? 시민들은 왜 정치적 시민의식에 걸맞은 자본에 대한 시민의식을 갖지 못했을까? 물론 그 주요한 사회적 배경은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즉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래 진행된, 자본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변화일 게다.(우리가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는가’ 추억하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 동안에만 983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는데 2006년 한해 구속자 중 91%가 비정규직이었다.) 그 기간에도 정치적 시민의식은 계속 발전했지만 자본에 대한 시민의식, 즉 시민의식의 구멍 또한 더욱 커졌다.

우리는 정몽구와 이건희를 욕해도 잡혀가지 않는 시민의 권리를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정몽구와 이건희를 부러워하는 내면을 갖게 되었다. 현대와 삼성을 욕하는 우리는, 동시에 그곳의 머슴인 조카와 자식을 짐짓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적인 사람들이 흠모하는 급진적 생태주의자 스콧 니어링처럼 대자본가의 머슴이 된 아들과 절연까지는 않더라도, 좀더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심에 저 짓을 한다는 불편함은 가질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정몽구와 이건희는 바로 그 구멍을 통해 왕으로 등극했고, 왕족의 일원인 최철원은 천한 것들을 손수 매로 다스린다.

우리는 이 빌어먹을 왕들의 세상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막막하지만 분명한 한가지는 그 구멍부터 막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욕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부러워하는 우리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가장 치열한 전장은 역시 교육이다. 한국 부모들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될 것인가에 몰두한 역사는 그 구멍의 역사와 일치한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고민이 남아 있지만 양보할 수 없는 첫째 고민은 역시 ‘얼마짜리’인가다. 우리는 그 구멍을 막을 수 있을까? 막는다면 정몽구와 이건희와 최철원은 여전히 왕처럼 호의호식할지언정 적어도 우리 앞에서 왕 노릇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막지 못한다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권위와 영화가 한층 더해진 왕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살 것이다. (한겨레)/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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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 중인 <녹색평론> 이번 호(115호) 첫 글에서 김종철 발행인은 '돈과 자유'라는 제목으로 <기본소득>의 도입과 의제 확대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몇 호였는지 생각나진 않지만 전에도 일본의 어느 경제학자가  <기본 소득>의 필요성을 주창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번 글은 읽고 난 뒤에는 머리 속에서 <기본 소득>이란 개념이 쉬이 떨쳐지지 않는다.      

 

 

 

 

 

 

 

 

<기본 소득> 혹은 <시민 배당>이라 불리우는 이 개념은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재의 천민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소득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배당금을 주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기초생활수급자들에게 지급했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선별적 복지 혜택이 아닌 이 나라에게 태어난 국민들 전체를 위한 국가의 의무라고 김종철 발행인은 말한다. 

 <기본소득>이란 개념은 현재 일반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8년 전 민주노동당이 처음 무상급식이란 의제를 정치권에 던졌을 때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무시되었던 것이 2010년 지방선거의 가장 큰 캐스팅보트로 떠올 랐던 걸 보면, 기본소득이란 의제도 무상급식 같이 언제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와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김종철 발행인도 책에서 언급했지만 <기본 소득>과 관련하여 가장 크게 문제시 되는 게 바로 재원확보이다. 책 안에서는 명쾌한 해법을 제시 하지 않아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는데 사회당의 부속 강령에 <기본소득>의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기에 사회당 강령을 찾아보니 <기본 소득>의 재원 확보 방법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재원 확보 방법은 다음과 같다.

 " 신자유주의는 복지를 시장화하고, 공공재를 사유화하고 사영화하여 공공의 것을 수탈해 왔다. 이와 같은 특혜 경제와 수탈 경제는 기본소득과 의료ㆍ교육ㆍ주거ㆍ보육ㆍ노후에서의 기본복지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사회적 기본권 체계로 수립될 때만 해소될 것이다. 투기소득과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기본소득과 기본복지의 재원을 마련한다. 이자ㆍ배당ㆍ지대에 대한 중과세는 턱 없이 낮은 현행 세율을 최소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높이는 것과 함께 보편적 복지의 재원을 형성할 것이다. 보편적 복지 체계 수립이 복지의 시장화 이전에 원래 공공의 것이었던 복지를 다시 공공의 것으로 되돌리는 행위라면, 기본소득과 기본복지의 재원 충당 방식은 금융 수탈에 대한 역수탈(逆收奪)이다. 기본소득의 도입을 위한 조세와 재정의 정책은 신자유주의 수탈 경제를 제어하며 또한 강력한 소득재분배 효과도 낳는다. 이는 금융 공공성에 입각한 통제 및 사회화 정책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수탈 경제를 극복하는 두 종류의 중요 수단이 될 것이다."
                                                                                     - 사회당 강령 中 부속강령 4 -  

 즉, 투기 소득과 불로 소득에 대한 중과세을 통해서 마련한다는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나 이를 통해 얼마만큼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 또한 드는게 사실이다. <기본 소득>이라는 개념이 경제학 분야에서는 얼마나 논의되었던 혹은 논의 중인 의제인지는 경제학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다. 관련 서적을 찾아 현실성을 따져 내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 봐야겠다. 알라딘에서 기본 소득 관련하여 검색해 보니 '분배의 재구성(나눔의 집)'이란 책이 한권 나온다. 한번 일독해봐야겠다. 이와 더불어 지난 10월 31일 사회당 새 대표로 선출된 안효상 대표의 선거 공약 중에는 "<기본 소득>의제 확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행보 또한 관심있게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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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3대 세습. 이에 대한 진보 내의 3대 체제 비판, 이에 대한 재반박.  황장엽씨의 죽음과 현충원 안장 논란.  일련의 북한 관련 논란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한겨레 칼럼(http://hook.hani.co.kr/blog/archives/13785)이 인상적이어서 옮겨본다.  어라 근데 칼럼니스트의 나이가 83년생. 제법 어리다. 오우~

황장엽과 리콴유, 어떤 반민주주의자들의 판타지
 

공교롭게도 황장엽은 노동당 창건 65주년 되는 날에 세상을 떠났다. 적국으로 망명 온 (전향도 하지 않은) ‘주체사상의 창시자’의 죽음은 한반도 이북에 있는 권력집단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조선노동당은 황장엽과 함께 욕실에서 사망했고, 저 텔레비전 화면 속의 열병식의 주최자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온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체계화에 기여를 했지만, 조선노동당이 ‘맑스-레닌’을 벗어던지고 ‘김일성의 당’임을 선포하게 되는 시대 변화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황장엽의 망명은 북한 체제가 그들이 말하는 ‘우리식 공산주의’에서도 이탈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의 장례는 ‘통일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있고, 정부는 그를 대한민국을 위해 몸바쳐 싸운 이들이 묻혀 있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고 싶어 한다. 남한 망명 후 여생을 암살의 위협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인간적 정리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황장엽이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공헌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수십 년의 생애를 대한민국을 절멸하려는 욕망을 가진 저 북쪽 ‘공화국’의 ‘리론가’로써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그가 망명 후 북 권력집단의 추악한 실체를 폭로한 ‘공로’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 것은 아니다. 반성하기는커녕 자신이 만든 주체사상은 문제가 없는 아름다운 사상이었는데, 김일성이 이것을 개인적인 우상숭배에 활용하면서 북한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해왔다. 안기부는 황장엽이 망명한 직후 ‘황장엽의 주체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해설서까지 내주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황장엽에 대한 한국의 자칭 ‘보수 우파’들의 반응은 그들의 머릿속에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곧잘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자’라고 칭하지만, 이때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 체제를 부정한다는 차원에서의 ‘자유민주주의’다. 그들은 대체로 ‘밥 먹이는 독재자’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고, ‘밥 굶기는 독재자’를 경멸하려 든다. 이것이 그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황장엽이 북쪽에서 가지고 내려온 ‘주체사상’이 지도층에 대한 인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이념이란 것은 이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다. 이들에게 문제는 김정일이 밥을 굶기고 있다는 것이고, 밥을 굶기지 않으려면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민들이 사유재산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동하면서 북한 김정일 체제를 규탄하는 정부의 입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주체사상 이념의 정권”이 한국 사회의 ‘보수 우파’들의 바라는 사회상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에게 반대하는 소위 민주화 세력,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사회는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황장엽이 사망하던 날의 열병식과 함께 공식화된 북한 체제의 ‘3대 세습’ 문제는 이미 그 이전부터 남한 ‘진보 세력’의 화두가 되어 있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내정간섭이 부당하다는 민주노동당의 논평에 대한 경향신문 사설의 비판이 있었고, 이에 맞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국가보안법의 논리’로 사태를 재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몇몇 지식인들이 갑론을박했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프레시안에 실린 역사학자 김기협씨의 글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국 현실에 맞는 ‘진보’를 추구했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무현이 보수면 뭐 어떠냐?’라는 앞뒤가 안 맞는 질문으로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좌파’들을 질타했던 이 노무현 지지자는, 싱가포르 리콴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습은 절대악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권력세습 문제를 우리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김기협의 주장은 좌파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김기협의 발언은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리콴유의 권력세습’으로 ‘인민을 굶기는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옹호할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오류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소위 ‘민주화 세력’이 한국 보수 우파들이 독재자를 변별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대체로 리콴유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박정희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박정희의 ‘위인전’을 완성한 월간조선 전 편집장 조갑제씨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리콴유와 박정희는 ‘지도자’를 좋아하는 아시아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위대한 지도자’들이다. 우익들이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김정일을 변별하는 방식이 ‘밥’이라면, 김기협에겐 무엇이 있는가?

 

차라리 김기협이 아예 박정희까지 긍정해 버린다면 그의 발언을 ‘소신있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되 그의 방식이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사회에선 통용될 수는 없고 이제 우리에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김기협은 <뉴라이트 비판>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긍정 평가하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을 매섭게 쏘아붙인 사람이다. 뉴라이트를 비판한다고 박정희를 전면 부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김기협의 저술에서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인정하는 구절을 찾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리콴유의 ‘세습’을 옹호하는 것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공로를 옹호하는 것보다도 훨씬 독재자에게 친화적이다. 언론자유를 부정하고 도시의 청결함에 과잉집착하는 그의 통치행위는 전두환의 3S정책보다도 더 이전에,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박정희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발전된 자본주의와 결합한 박정희식 ‘한국적 민주주의’의 체제”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적어도 한국 사회는 3S 시대를 넘어 문화산업 정책을 펼쳐낸 지난 ‘잃어버린 10년’ 동안 싱가포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자생적인 대중문화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이 대중문화의 자본친화성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대중문화가 김기협이 그렇게 신봉하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김대중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적 특수성’을 주장한 리콴유에 맞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더랬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느 노무현 지지자의 리콴유 찬양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어떠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를만큼 몰역사적인 거다.

 

이 두 개의 반민주주의적 판타지의 실상을 들춰보니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주체사상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대립, 한반도의 1970년대를 남북으로 가르던 그 대립이 한반도 남부를 동과 서로 가르며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웃긴 것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 ‘주사파’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믿는 그 집단인 것이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독재자의 딸’에 이를 벅벅가는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김기협의 논리는 김대중·노무현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논리가 아니고,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라도 박정희를, 리콴유를, 그리고 박근혜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김기협이 가지고 있는 1970년대의 환상은 우리가 말했던 ‘민주화’가 민주주의 이론을 제대로 체현한 것이 아니라, 독재자들의 ‘무능함’을 민주화 세력이 대체할 수 있다는 차원의 논리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리콴유를 규탄할 때라도, 김대중과 노무현을 예찬할 때 우리는 은연 중에 그런 관점을 가지고 그들을 과거의 독재자들과 비교한다. 그리고 두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들이 독재자들보다 ‘유능’했던 점은 역시 ‘시장자유’를 더 제대로 인정했다는 점에 있는 바, 우리의 민주화는 곧바로 ‘신자유주의’를 향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김기협의 ‘오버’는 그가 속한 집단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지 못하지만, 어째서 민주화 세력의 지지자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외설적인 대상이다.

 

그리하여,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은 2007년엔 이명박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고, 오늘날엔 다시금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명박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 한윤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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