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 노트 움직씨 퀴어 문학선 1
구묘진 지음, 방철환 옮김 / 움직씨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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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나를 너무 잘 알고 세상과 영원히 타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그건 더 큰 불행이 아닐까? 대만의 천재적인 소설가 구묘진의 < 악어 노트 > 는 시대를 앞서갔던, 그리고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한 젊은이의 실험적인 소설이다. 사회가 규정하는 젠더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젠더 감수성으로 가득한 이 작품은 퀴어문학 장르라고 할 수 있겠다. 평소에 이런 작품을 대해보지 못해서 읽는 동안 혼란스러움을 좀 느꼈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자신을 특정 성에 묶어두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을 동시에 " 그 " 라고 일컫는 바람에 생경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즉, 일반 사람들처럼 인간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레즈비언이었던 구묘진 작가가 자신의 삶을 소설에 많이 투영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 " 라즈 " 는 본인을 악어로 규정한다. 악어는 태어날 당시 수온에 따라서 수컷이 될 수도 있고 암컷이 될 수도 있다. 젠더 정체성과 감수성이 남달랐던, 아니면 규범적으로 정해진 젠더 정체성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을 악어에 비유하여 성적 소수자에게 무지하고 차별적이며 편견에 찬 대만 사회를 냉소적으로 비판한다.

 

" 악어를 보도할 때는 영상 기술적 측면에서 반드시 특수 처리를 해야 하며, 시청자들이 봤을 때 안개 뿌린 효과가 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 효과는 다른 나라의 위성이 영상물을 받아

최신식 영사기로 카피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입니다. (..)

 만약 우리 나라의 악어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면

앞으로 우리는 국제 사회에서 퇴출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시대를 너무 일찍 태어난 것일까? 아마도 그녀가 대학생이었을 당시는, 특히 대만과 같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였으리라. 그런 외부 상황을 내면화시켜버리면 스스로를 혐오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악어 뿐만 아니라 자신을 괴물과 동일시하고 있다.

 

 

“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이 나란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는 한 여자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 사람의 환영이며,

 이 환영은 그들의 범주에 든다. 하지만 나만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그리스 신화 속의 반인반마 괴물이다 .”

 

 

 

 

 

 

스토리는 간단하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수령과의 사랑. " 라즈 "와 " 수령 " 은 서로 마음 깊이 사랑하지만 주류에 속하지 않는 사랑 때문에 서로를 밀어낸다. 특히 주인공 라즈는 수령을 일부러 잔인하게 대한다. 마음 속 피눈물이 흘러내림에도 불구하고. 라즈와 수령 커플이 있고, 또 몽생과 초광 커플이 있다. 자신의 성적 지향성 때문에 절망하고 목숨을 끊으려했던 초광을 구해줬던 사람이 바로 몽생이다. 그러나 몽생은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초광을 괴롭힌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사랑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몽생은 자신만의 확고한 사랑 철학이 있다.

 

"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복수하려는 것이고, 복수심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또 싸웠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거든.

 이 세 가지는 함께 어우러져 있는 거야. 

 사랑에 의한 강력한 좌절감이 어떤 지점에 이르렀을 떄,

 그러니까 애정 욕구에 집착헤 온몸을 던져 버리는 짓을

아직 지속하거나 끝내지도 못하고 있을 때,

 허무의 동굴에서 빠져 나오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가벼운 공기 속으로 승천하지도 못했을 때는

 오히려 더 큰 절망으로 사랑의 대상에 치명적으로 달라붙게 되는 거야."

 

세상은 그녀에게 어딘가에 속하라고 강요했을 것이다.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매일매일 범죄를 짓는 듯한 느낌을 가지거나 괴물처럼 느꼈다면 삶이 얼마나 피곤했을까? 이 소설은 소설의 일반적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작가의 소설 작법이 특이하다.

아방가르드 영화 및 실험 영화의 비서사적 구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물 흐르듯 읽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싶다. 마치 콜라쥬를 완성하듯 주인공의 삶의 부분 부분을 찢어다가 소설 속에 녹아내는 저자. 주인공의 일생일대의 사랑인 수령과의 이야기와 자신을 따라다니는 괴짜 몽생 그리고 몽생을 사랑하는 게이 초광 의 이야기가 드문드문 흩어져서 나타난다. 파편화된 느낌의 소설을 읽다가 이해가 잘 안되어서 그녀가 영향을 받았다는 2명의 소설가 데렉 저먼과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에 대한 조사를 해보았다.

 

 

데릭 저먼은 극단적으로 실험적인 영화 형식에 자서전적 색채를 입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하려 했던 사적 이야기는 동성애라는 자신의 그리고 타인의 성 정체성과 그 정당성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이 플라톤적 사랑이건 혹은 잔혹한 성 역할의 폭로건 간에 호모섹슈얼리티의 형상화는 그의 영화에 불변의 주제였다.

 

 

장 뤽고다르. 고다르는 장르 관습을 타파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장르 구조를 해체하고 그 문법을 실험 수단으로 역이용했는데, 이는 촬영 및 편집에서부터 믹싱에 이르기까지 영화 창작의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각본 없이 즉흥적으로 촬영한 <네 멋대로 해라>에서 그는 연속 편집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파편화된 콜라주를 도입했다. 그가 창안한 점프 컷(jump cut)은 연속성의 부재라는 영상 논리의 파괴를 한층 더 강화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스물 여섯 살의 나이에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그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작가 구묘진이 남긴 작품은 그녀의 죽음 이후 성 소수자 인권 운동과 이성애 중심인 혼인법 개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논 바이너리 ( 여성도 남성도 아닌, 성별 이분법에 따르지 않는 성 ) 문학의 효시이자 고전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악어는 스스로 소멸하는 방법을 택하는데 세상에 대한 어떤 회한도 품지 않는다. 작가는 말한다.

 

" 세상은 결국 잘못한 것이 없다. 나의 정신이 나약할 뿐. 우리가 세상의 폭력을 막을 수 없으니 오래도록 마음의 병을 앓게 되는 것 "

 

이 반어적인 표현을 통해 편견에 찬 우리 사회의 벽이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지 알 수 있다고 옮긴이는 말하고 있다. 천재적인 젊은이의 방황과 절망 그리고 탈출을 그린 < 악어 노트 >. 많이 난해하고 어려웠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작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만들고 싶은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꼼꼼히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대학 제도는 좋은 것이다. 사망 제도에 비하면 좀 부족해서 차석이 되었지만, 대학은 세 가지 제도인 강요된 교육, 강요된 일자리, 강요된 결혼이 첩첩이 잘 맞물리는 교차점에 있다. 이 세 가지 제도는 인류가 고안한 것 중 최고로 위대한 발명이다. 세 가지 위대한 것이 함께 올라타서 힘을 보태니 오히려 너무 무거운 위대성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이다. 대학과 사망은 모두 일종의 비상구 같은 도피 제도다 .”

 

 

“ 스스로의 근원과 성욕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움이 두려움을 휘저어 섞으며 덩어리로 변하더니 결국 삶 전체가 두려움에 지배되는 공포 괴물로 변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본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면 반드시 동굴에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

 

 

“ 어려서부터 가족들이 내 주변을 에워싸며 아무리 사랑을 줬어도 나를 구하지 못했다. 우선 기질이 맞지 않았고, 나 역시 근본적으로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마음의 곁을 내주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서 비교적 그들의 상상에 가까운 나를 던져 주었다. 그들은 나의 꼭두각시를 안고 화목한 춤을 춘다. 그것은 인류가 평균적으로 상상하는 반경으로 정확하게 원심을 그린 중심이며, 계산을 통해 투영된 가짜 나의 허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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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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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가가 시리즈는 < 기린의 날개 >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두운 가족사를 가진, 그러나 천재적인 추리력을 가진 형사 가가. 다른 시리즈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 기린의 날개 > 가 생각나면서 매력적인 등장인물인 " 가가 " 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시리즈물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등장인물이 성장하면서 동시에 능력을 발휘하길 바라는 마음과 사건과는 별도로 본인이 가진 가족 혹은 개인 문제를 해결하길 바라는 마음을 동시에 가진다. 비극적인 가족사를 가진 가가 형사를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도 같지 않을까?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작품은 탄탄한 스토리 플롯과 치밀하게 깔린 복선으로 유명하다. 특히 트릭을 현란하게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예상치 못한 반전에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 < 기도의 막이 내릴 때 > 는 좀 더 전통적인 추리 소설? 정통 수사기법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건을 휘감는 트릭보다는, 미궁 속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활약하는 사복형사들의 탐문 수사법이 빛난다고 해야 할까? 안개에 가려진 듯, 도저히 내막을 알 수 없는, 사건을 해결할 만한 단서가 미미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경찰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단서는 바로 살인 피해자들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듯한 사람인 아사이 히로미라는 연극 연출자이다.

 

가쓰시카구 고스게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여성 한 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그녀의 이름은 오시타니 미치코. 부검 결과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이다. 시신의 목 주위에 끈으로 조른 흔적들이 보인다. 타살 가능성이 짙다고 본 경찰은 특별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녀가 자신의 집이 아닌 별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낯선 남자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고시카와 무쓰오. 그는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한편 오시타니 사건과 거의 비슷한 날짜에 노숙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하천 둔치에 있는 오두막에서 불탄 채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실제 사인은 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이다. 오시타니 사건과 비슷한 방식으로 타살된 그 시신을 두고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분에 무게를 두고 경찰들이 집중 탐문 수사에 들어가는데...

 

현재 경찰은 오시타니 미치코와 중학 동창이었던 아사이 히로미라는 여성과 피해자가 발생한 집에서 발견된 달력, 그리고 거기에 쓰인 다리와 관련된 메모를 제외하고는 별 단서가 없다. 가가를 비롯한 형사들은 아사이 히로미의 30년 전 중학교 시절에 일어났던 일을 중심으로, 그리고 불에 타 죽은 시신의 몽타주를 들고 적극적인 탐문 수사에 들어간다. 히로미의 어머니의 가출과 파탄난 집안, 자살한 아버지 그리고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중학교 때 선생님까지... 메마른 땅에 조금씩 물줄기가 솟아나듯 조금씩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 엄청난 비밀을 품고 있는 아사이 히로미. 그녀는 도대체 어떤 비밀을 품고 있을까?

" 얼마 전에 아는 간호사분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그랬답니다.

저세상에서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육체 따위는 없어져도 좋다고요.

부모란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켜도 좋은가 봅니다.

히로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이것이 마지막 가가 시리즈라니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가가가 신참자가 되어 니혼바시 일대를 맴돌았던 이유를 알게 되어서 속이 시원하다. 가출했던 어머니가 이번 사건에 연관되었던 사실을 알고 뛰어들었던 것인데 결국엔 사건 해결에 한몫을 하고 집을 나가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도 알게 되었으니까. 이 책을 계기로 처음부터 다시 형사 가가시리즈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사에는 냉철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 가가. 그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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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걷는 시간 커플 D-DAY 캘린더
이규영 지음 / 넥서스BOOKS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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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낯선 인연이 만나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소중한 관계를 이어간다.

어색했던 처음의 만남, 조심스러웠던 관계의 발전, 담아두고 싶은 추억의 시간들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나가고 있는 현재의 관계.. 등등을 캘린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캘린더라고 하면 그냥 날짜, 숫자만 떠올릴 수 있는데 귀여운 일러스트가 동반된다니,

일석이조구나!

말로 표현다면 날라갈까봐,,, 편지를 쓰자니 어색할까봐 꽁꽁 감춰뒀던 사랑의 언어를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꾸민 캘린더.

< 우리가 함께 걷는 시간 >

 

 

 

 

요즘은 블로그나 인스타와 같은 SNS 를 통해서 연인과의 추억을 많이 남기는 듯 하다.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너무 디지털화 되어있어서 감흥이 덜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요즘같이 바쁜 때에 자칫하면 소중한 추억 담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이 캘린더를 이용하면 커플이 언제 데이트를 시작했고, 언제 손을 잡았고 등등

같은 날짜를 간직할 수 있다.

보다 쉽게, 보다 간편하게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캘린더.

 

 

 

 

 

캘린더의 앞면에는 날짜가 있고 뒷면에는 귀엽고 예쁜 일러스트와 연인에게만 말하고 싶은 사랑의 언어가 적혀 있다.

각 일러스트 속의 연인들은 나와 너와 우리를 떠올리게 하는 친근한 모습이다.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면 흐뭇함을 감출 수 없다.

 

 

 

" 원래부터 늘 함께였던 것처럼

편안하고 좋은 사람 "

 

 

 

 

" 우유를 더 맛있게 만드는

우리만의 귀여운 비법 "

 

 

 

 

" 사랑은 그런 거잖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

맞잡은 손 놓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등 떠밀어주는 예쁜 캘린더.

지은이 이규영님은 밋밋한 캘린더를 보고 있기 아쉬웠나보다.

커플끼리 보면서 걸어온 나날들을 되새길 수 있는 작지만 알차고 귀여운 캘린더를 만들었다.

일러스트는 따뜻하고 편안하게 그려져있다.

글귀는 서정적이고 사랑스럽다.

연인들이 각자 보관하면서 들여다보면

영원히 사랑이 유지될 것 같은,, 그런 마법같은 캘린더.

< 우리가 함께 걷는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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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 알베르토 모라비아 Alberto Moravia 시리즈 1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본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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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을 경멸해. 이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야. 

 이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이유야.

난 당신을 경멸해. 당신 몸이 닿을 때마다 언제나 몸서리쳐졌어.

 진실을 말했어. 난 당신을 경멸해. 난 당신이 싫어!"

네오리얼리즘 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알베르토 모라비아 작가. 그의 작품은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을 잘 묘사한다고 한다. 이 작품 [ 경멸 ] 속에도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 에밀리아를 바라보는 남편 리카르도의 절망과 좌절이 그의 독백에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열정적인 이탈리아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서 그런가?   감정 중심의 매우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표현이 인상적이다.

 

사랑은 그렇게 경멸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돌아왔다. 결혼 2년만에...

 

주인공 리카르도는 신문사에 글을 기고해서 받는 수입으로 아내 에밀리아와 근근이 살아왔다. 월셋집에서도 나름 행복하게 살아왔던 신혼커플. 그런데 리카르도는 집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아내 에밀리아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서 아파트를 장만한다. 많은 액수의 할부금을 갚아야 하는 부담감이 생긴 현재, 아내를 원망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런데 마침 바티스타라는 영화 제작자로부터 시나리오 의뢰가 들어오고 이제 집값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뛸 듯이 기뻐한다. 그리고 에밀리아가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웬걸, 언젠가부터 냉담해진 그녀. 갑자기 각방을 쓰자고 하는데...

 

사랑하던 사람을 경멸하게 되는 계기는 뭘까?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지닌 단어. 뭔가 엄청난 일이 일이 에밀리아의 내면에서 몰아쳤음이 틀림없다. 예전에 에밀리아는 리카르도에게 " 나는 당신을 미칠 듯이 사랑해요 " 라고 사랑고백을 했었다. 무엇이 이 부부를 사랑과 경멸이라는 극단과 극단을 오고 가게 만들었을까? 소설은 책의 중반까지도 명백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않은 채 독자들이 에밀리아가 그를 경멸하게 된 이유를 추측하게끔 만든다.

 

리카르도가 무리한 대출을 내서 아파트를 구입한 것도,

비싼 차를 산 것도,

바티스타의 시나리오 의뢰를 받은 것도,

다 에밀리아 때문인데,

리카르도라는 지구는 에밀리아라는 태양을 돌고 있는데,

그녀가 자신을 경멸한다니.

 

" 에밀리아는 마치 내게서 굉장히 먼 곳에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녀는 내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이 미칠 수 없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49쪽)

 

" 에밀리아가 나를 더 이상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현실을 인정했다면 나는 아내를 떠날 용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믿기지 않을 만큼 괴로운 일에 맞닥뜨렸다 ." (73쪽)

 

"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마음이 불안했다.

마치 기하학 문제를 푸는 사람처럼 이성과 감성의 틈바구니에 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을 잠시 반성했다." (99쪽)

 

새롭게 영화를 제작하려는 바티스타와 함께 손을 잡고 시나리오를 쓰게 된 리카르도. 바티스타는 종교적인 영화가 히트를 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오디세이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감독 레인골드를 리카르도에게 소개한다. 그런데 그는 오디세이 내용에 대한 감독 레인골드의 독특한 해석을 듣고는 당황한다. 감독은 오디세이의 주인공 율리시스와 페넬로페의 심리적인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난, 아내를 사랑했으나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한 남자 얘기를 영화로 만들려는 거니까."

 

영화 제작자 바티스타와 리카르도 그리고 에밀리아 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걸 모른채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마냥 에밀리아와의 문제를 붙들고 있는 주인공 리카르도... 책 속엔 소중한 걸 잃어버릴까봐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남자의 내면 묘사가 너무나 잘 그려졌다. 사랑과 절망에 대한 남성의 언어가 이렇게 짙은, 그리고 다양한 색깔로 표현될 수 있다니... 마치 한편의 어두운 시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영화로도 나와 있다는 책 [ 경멸 ]. 리카르도의 극과 극을 오가는 감정 변화를 어떤 배우가 표현했을까? 꼭 한번 감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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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여자들
설재인 지음 / 카멜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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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목고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무급 복싱선수가 되었다는 설재인 작가의 단편 소설집 [ 내가 만든 여자들 ]. 우선 작가 소개글에 매일 불행한 눈동자들을 마주하다가 한강에 몸을 던질뻔 했다는 대목에서 크게 공감했다. 나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내가 혹시 입시 괴물들을 낳는 건 아닐까? 고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전직 수학 선생님의 화려하고 맛깔나는 글솜씨에 깜짝 놀랐다. 입시가 낳은 시험 기계들의 공허하고 우울한 눈동자 앞에서 반드시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걸.... 제때 말하지 못해서일까?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풍성하게 풀어놓고 있다.

 

그녀가 이 책에서 다루는 13편의 단편집은 여성의 이야기이다. 남성들이 보기에는 약간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은 엄청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소설인가? 음... 잘 모르겠다. 누군가를 비난한다거나 날선 목소리가 크지는 않지만, 공동체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실려있다. 국가 차원에서 ( 결혼 이주 여성 ) 회사 차원에서 ( 남성 위주의 조직 속 여성 ) 가족 차원에서 ( 도움이 안되는 남자친구와 아버지의 의미 )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여성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공감도 가면서 매우 신선하고 독특하다 !!! 각 단편들은, 현실 혹은 초현실이라는 옷을 입은 채 독자들을 만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들자마자 후딱 읽어버리게 된다.

 

[ 엔드 오브 더 로드웨이 ]

두 명의 엄마를 두었던 주인공의 태국 방문기 [ 엔드 오브 더 로드웨이 ]. 엄마의 애인이었던 혜순 아줌마가 아무 말없이 태국으로 이주를 한 이후로 엄마는 말이 없어졌다. 엄마는 유언으로 유골함을 혜순 엄마에게 전달해달라는 말을 남기는데...

"그 십여년 동안 가장 아픈 사람은 엄마도 나도 아니었다.

아줌마였다.

아니, 그냥 우리 모두 아팠다.

똑같이, 한 몸처럼 아팠던 것이다 ."

 

[ 리나, 찡쪽 ]

한국으로 시집왔다가 불행한 일을 겪은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태국 여성 리나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를 찡쪽이라는 초록색 태국 도마뱀이 들려준다. 이주 여성의 결혼 문제가 얼마나 엉성한지.. 제대로 제도화되지 않은 그 문제를 일깨워주는 이야기.

" 그러니까 가장 큰 문제는 이거지. 리나가 태국에선, 서류상으로 유부녀라는 거지.

혼인신고도, 아이 출생신고도, 할 수가 없어.

없는 부부이고, 없는 아이야.'

 

[ 내가 만든 여자들 ]

비밀을 잔뜩 품고 있는 수상한 임차장님을 추적하는 한 회사의 신입 이야기. 전혀 예상치 못한 기가 막힌 이야기. 그녀는 조직의 보스인가? 혹은 킬러인가?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통쾌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도시 괴담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처럼 다소 괴기스럽다.

" 손끝에 그런 게 있었어요.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달린 살가죽 같은 게요.

그 작은 조각이, 차장님의 손가락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죠.

손톱 밑은 김장한 것마냥 약간 벌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고요.

그러고 보니 파우치도 아까보다 불룩해져 있었어요. "

 

[ 바지락 봉지 ]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슬픈 이야기. 인연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지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

" 남편이 쓰러진 날부터 온 세상은 논리와 개연성,

인과관계를 무시한 채 멋대로 돌아갔다.

' 왜 ' 를 찾을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둥그런 연속체를 이루었다.

그 연속체가 그녀의 팔다리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설재인이란 작가가 글을 안 썼으면 큰일날 뻔 했다. 누가?    독자들이.. 진흙 속의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다.  세상에는 시스템이라는 틀 속에서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만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설재인이라는 작가는 두 번째 케이스인 것 같다. 현실 속에서 또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틀에 갇히지 않은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간 사람. 그렇기에 독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많은 모양이다. 완전 통쾌한 이야기, 분노하게 만드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그녀의 펜 끝에서 각양각색의 색깔을 가진 이야기가 흘러내려와 무지개빛 강물을 이룬 느낌이다. 추천해주고픈 단편 소설, 특히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를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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