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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아래아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역자의 후기까지 합해봐야 100쪽 겨우 될 정도로 짧은 이 소설은 성공한 세일즈맨 트랍스가 출장길에 자동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길가 어느 집에서 하룻밤 신세지는 데서 시작한다.문제는 이 집에 혼자사는 노인이 은퇴한 판사라는 것이고,친구 노인들 역시 전직 검사, 전직 변호사란 것.이들은 밤마다 소크라테스 등 역사적 인물을 피고로 해서 모의 재판을 하는 게 취미인데, 오늘 밤 트랍스에게 피고 노릇을 해달라고 제안한다. 댓가는 아주 멋진 저녁 식사와 공짜 민박! 자기가 지은 죄라곤 옛날 하룻밤 외도를 한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트랍스는 재밌는 놀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수락한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면서 트랍스의 외도 상대는 상사의 부인이었고, 그 상사는 아내와 부하직원의 외도를 아는 바람에 심장 마비로 죽었으며 덕분에 트랍스는 승진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평소 트랍스는 전혀 이 사건들의 연계성을 깨닫지 못했지만 재판이 진행되면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수긍을 하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는다. 노인네들은 즐겁게 밤 시간을 보냈다며 트랍스에게 인사를 하지만 진짜 사건은 그날 밤 일어난다. 사형선고를 받은 트랍스가 스스로에게 형을 집행해 버린 것이다. 소설은 이것으로 끝.
왜 트랍스는 자살을 해야만 했을까? 죄책감 때문에? 게임과 현실을 분간 못할만큼 멍청한 놈이라서? 역자는 이 얘기를 비록 법적으로는 죄가 아니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부도덕성을 고발했다고 썼다.한편으로는 주인공 트랍스가 자신의 소시민적인 무가치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얘기라고.
아닌게 아니라, 트랍스가 자살을 한건 무슨 죄책감이나 반성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자기가 사형 선고를 받을만큼 '뭔가 있는' 존재가 된 걸 기뻐했으니까. 게임은 끝났어도 여전히 '뭔가 있는' 존재로 남기 위해서 사형을 집행한 게 아닐까? 그럼...우리는 뭔가 내 인생이 의미를 갖기 위해선 살인범이 되고, 사형수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만큼 우리는 우리 삶이 지루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걸까? 이왕 태어났으니 훌륭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숙제를 낸 것도 아닌데, 왜 늘 그런 부채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하는건지..
지구촌 탐험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오지의 원주민을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사람은 저렇게 단순하게, 명쾌하게 살 수도 있는 존재인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버린걸까...하고. 홈페이지를 만든다면 제목을 심플라이프로 할까, 싶다.
추신-
이 소설을 쓴 뒤렌마트 할아버지는 노벨상에도 단골후보라는데 읽고 나서 내내 머리 복잡한 얘길 너무도 짧고, 너무도 유쾌하게, 너무도 유머러스하게 써놓고선 에필로그에 이렇게 써놨다.'이 세상엔 아직도 작가가 쓸 이야깃거리가 남아있는 걸까?' 못된 영감탱이 같으니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