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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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브라질, 멕시코, 페루 등 남미 여행을 꿈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불안감이 스며든다. 치안이 위험하다고 하던데 여행을 가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들. 그럼에도 언젠가 남미 대륙을 꼭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쉽게 접지 못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부풀려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읽다 보면 그것이 괜한 걱정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작품에는 목이 잘린 아이, 어린 아이만 살해하는 연쇄 살인마, 빈민가의 오염된 물 때문에 고양이 코를 가지게 된 아이 등 온갖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와 여성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들을 지켜줘야 할 공권력은 썩을 대로 썩어, 오히려 자기들 이익에 어긋날 때는 가차 없이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단지 소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섬뜩하리만치 생생하다. 실제로 이 책에 실린 여러 단편은 대부분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니 이 생생함이 괜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첫 작품인 <더러운 아이>부터 무척 섬뜩하다. 한때는 부촌이었지만 이제는 퇴락한 어느 동네. 그곳에는 거리의 아이들이 넘쳐난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어린 나이부터 마약에 취해서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 얼마 뒤 목이 잘린 채 죽은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다. 주술사의 짓일까 마약에 취한 미치광이의 짓일까. <오스테리아 호텔>의 배경이 되는 호텔은 과거 군사 독재 시절 경찰학교로 쓰였으며 <마약에 취한 세월>에서는 그야말로 마약에 절어  사는 청소년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 그려지는 아르헨티나 풍경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하루하루 버틸 수 있을지 끔찍하기만 하다. 한여름에는 전력난으로 여섯 시간씩 번갈아 전기가 끊어지고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월급을 받아도 빵과 싸구려 고기를 사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심지어 신임대통령은 전화 가입 신청을 해도 몇 년이나 걸리던 관행을 없애겠다는 공약을 자랑스레 내세운다. 통신 회사가 일을 얼마나 엉망으로 하는지, 10년 전에 신청했는데 아직도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웃도 있다. 그래서 기사가 와서 전화기를 설치하면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의 아르헨티나의 모습이다.

이렇게 아르헨티나의 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작품을 읽어나가다가 <아델라의 집>과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 : 페티소 오레후도를 떠올리며>를 읽는 순간에는 공포로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왼팔이 없는 소녀 아델라와 나, 그리고 나의 오빠는 우연히 어느 폐가에 대한 소문을 들은 뒤 날마다 폐가 앞을 서성인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여름밤, 그곳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폐가에 도착하자,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아델라는 정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와 오빠는 그저 환영을 본 것일까?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에도 환영을 보는 인물이 나온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기 관광 상품인 범죄 및 범죄자 투어의 가이드인 ‘파블로’의 앞에 어느 날부터 어린이 연쇄살인마 ‘페티소 오레후도’의 환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관광 가이드 일을 할 때마다 그 살인마의 환영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것들은 모두 그저 환영일 뿐일까? 사라진 아델라는 무참한 아동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며, 그것을 지켜본 다른 두 아이들은 충격으로 그것이 실제인지 환영인지 영원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내가 아이를 낳은 뒤 부부 관계가 엉망이 되어 버린 ‘파블로’가 아이가 거추장스러운 나머지 아이가 사라지면 좋겠다는 욕망을 품게 되고, 그것이 어린아이만 연쇄 살인한 살인마의 환영을 보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렇게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기묘한 이야기는 <이웃집 마당>에서도 이어진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해고된 ‘나’는 우울증을 앓으며 복지사로 일하던 무렵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침대에 묶인 아이들, 쇠사슬에 묶인 아이들, 방에 갇혀 지낸 아이들……. 그러다가 급기야 이웃집 마당에 감금된 아이가 있는 환영에 시달린다. 그런데 이 환영은 정말 단지 환영일 뿐일까? 아니면 ‘나’의 죄책감의 발로일까.

<검은 물속>은 아르헨티나 현실을 한층 더 생생하게 전달한다. 부패 경찰관들이 소년 두 명을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 남부 지구의 경찰관들은 사람들을 보호하기보다 청소년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곤 한다. 아이들이 ‘협조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 협조란 대부분 마약을 훔쳐 자기들에게 갖다달라거나, 경찰이 압수한 마약을 팔아달라고 하는 부탁이다. 아이들이 빠진 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리아추엘로강이다. 강은 플라스틱과 기름 찌꺼기, 공업 약품 등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쓰레기가 한꺼번에 떠내려 오는 바람에 강물이 흐르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피나트 검사에게 빈민굴의 임신한 여자아이가 찾아온다. 여전히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소년 중 한 아이가 2주 전 강물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제보를 확인하려고 피나트 검사는 몸소 그 위험한 빈민가에 찾아 나서는데, 그곳에서 맞닥뜨리는 풍경은 지옥도 그 자체이다. 시체는 정말로 살아 돌아온 것일까? 울부짖는 사람들과 뒤섞여 점점 위험에 빠져가는 피나트 검사와 절망에 찬 빈민가 신부의 외침은 암흑과도 같은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잔인하게 보여준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썩어 문드러진 이 강이 우리의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도 말자. 쓰레기는 모두 여기 내버리자. 어차피 강물은 다 떠내려갈 테니까! 결과가 어떻든 일절 생각하지 말자, 뭐 이런 식이죠. 모두가 천하태평인 정도로만 여겼어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마리나, 이 강을 오염시킨 모두에게 책임이 있었던 거예요. 그들은 무언가를 감추려고 했어요. 세상에 나타나거나 알려져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말이죠.” (<검은 물속>, 294쪽)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강렬한 무엇인가를 남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하철에는 모두가 아는 ‘지하철 여인’이 있다. 그녀는 몸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어 온통 녹아내리고 일그러진 모습이다. 그런 모습으로 구걸하고 다니니, 사람들은 끔찍하게 여겨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거나 돈을 내던지고는 도망가기 일쑤이다.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그녀는 집세 식비 등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늘도 구걸에 나선다. 어쩌다 그녀는 그렇게 된 것일까? ‘지하철 여인’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녀의 남편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가 남편을 버리고 떠날 참에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남편은 아내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려버린 것이다. 그녀 몸에 불을 질러 다른 남자와 떠나는 것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처절하게. 그러고는 지하철 여인의 남편은 그녀가 자기 몸에 스스로 불을 지른 거라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지하철 여인’처럼 남편이나 남자 친구, 아버지 등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불을 지르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여자들을 불태우는 건 아랍이나 인도 같은 데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지껄인다. 참다못한 많은 여자들이 ‘불타는 여성들’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불길 속에 몸을 던지는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한다. ‘여자들이 자기 남자들을 감싸주고 지켜주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무서워한다고 믿고 싶어’(328쪽)한다는 이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깨부수고 싶은 것이다.


“얘야 불을 지르는 건 남자들이란다. 그들은 예전부터 우리 여자들을 불태웠지.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를 거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절대 죽지 않아. 이제는 우리 몸의 상처를 당당하게 보여줄 거라고.”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334쪽)


스스로 불을 지르는 여성들이 속출하자, 국가는 이제 불 지르는 여인들을 색출하려고 혈안이 된다. 그때 ‘지하철 여인’은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신매매만큼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까요. 불에 타 괴물처럼 변한 여자에게 욕정을 느낄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언제 자기 몸에 불을 지를지 모르는 미친 아르헨티나 여자들을 좋아할 남자는요?”(340쪽) 어쩐지 웃기면서도 슬프고 한편으로는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아내나 여자 친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그녀들이 잠자는 틈을 타 알코올을 뿌려 불을 지른 그 남자들. 그들은 이제 여성이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저항하자, 제 몸에 불을 지른 여인들을 색출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들 뜻대로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르헨티나 남자들과 그들의 권력, 공권력의 폭력 앞에 힘없고 약한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은 약에 취하거나 우울증을 앓거나 거식증에 시달리거나 그도 모자라 분신을 하기에 이른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빈민가로 변해 해가 지면 주민들은 절대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곳. 괜히 나갔다가 강도를 당하기 일쑤고, 골목에 끼리끼리 모여 포도주를 마시다가도 급기야 총질까지 해대는 일이 잦은 곳, 군인들이 자신들이 죽인 민간인의 시신을 숨기기 위해 시멘트에 죽은 사람들을 섞어 그 시멘트로 다리를 만든 곳……. 한때 부유했지만 군사 독재와 경제 불황을 겪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가난한 이들, 그런 이들에게 일상처럼 일어나는 폭력, 기형아가 속출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만큼 심각한 환경오염까지 겹친 아르헨티나의 참혹한 현실은 결코 환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시무시한 공포라고 이 작품은 생생하게 증언한다. 작가는 <검은 물속>의 한 인물이 말을 빌려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드러낸 것은 아닐까. “차라리 불이 나서 그 빈민가가 다 타버렸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모두 물에 빠져 죽든지, 당신 같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라요. 눈곱만큼도 모른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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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0-07-1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편히 읽을 수 없는 책인 것 같네요. 아르헨티나... 남미에선 그래도 부유한 측에 속하는 나라 아닌가요? 근데도 저런 지옥이라니. 너무 충격적입니다. 멕시코, 브라질, 콜럼비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차라리 장시간 국경을 닫았던 쿠바가 남미의 청정지역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잠자냥 2020-07-15 15:57   좋아요 0 | URL
일단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와서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요. ㅎㅎ 이 책 작가가 1973년생이던데요, 작가가 10대 20대였던 90년대~2천년대 아르헨티나 상황이 아주 나빴더라고요. 부유하게 살던 나라에 군사독재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거의 몰락 직전까지 간 모양인 거 같습니다. 그런 현실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고요. 물론 아르헨티나에도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 분명 있지만 빈부격차가 정말 어마어마한 거 같고요.

비단 아르헨티나 뿐만 아니라, 남미를 보면 권력자들이 부패하고 그걸 제어할 공권력마저 썩어빠지면 정말 답이 없는 거 같아요(요즘 코로나 피해만 보더라도 브라질 같은 곳은 정말.... 빈부격차로 그 폐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