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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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쳐버린 기회, 한마디 말, 몸짓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떠났고, 그녀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고, 나는 일하러 갔다.   
- '앨버커키의 레드 스트리트' 중에서, p.172

 

십 년 전에 세라는 둔기에 머리를 맞아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시 치과 의사인 애인이 그녀를 죽이겠다고 몇 번이나 위협했었다. 그는 세라보다 열다섯 살 정도 어렸는데, 알코올중독자로 자주 그녀에게 위협을 가한 전력이 있었지만 살해 흉기도,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아 끝내 기소되지 않았다. 청소부인 나는 원래 매주 화요일에 세라의 아들 에디의 집을 청소했는데, 세라가 죽은 후 에디가 그녀의 집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결국 세라의 집을 청소하게 되었다. 침실을 처음으로 청소한 날에는 너무도 끔찍했는데, 그녀의 피가 튀어 굳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다 침대 밑에서 권총과 엽총을 발견하게 된다.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지만, 총을 보자 범인을 총으로 날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나는 청소부가 탐정인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세라와 친구였던 나는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작정하고 보니 범인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용의자 명단은 계속 늘어났다. 판사, 경찰관에서 유리창닦이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이 용의자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사건 당일 밤에 대한 알리바이가 없으니 용의자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사실 내가 세라의 죽음에 집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건 당일에 세라는 여러 차례 나에게 전화해서 애인이 그녀를 위협한다고 말했었다. 비슷한 상황이 너무 많았음에도 그와 헤어지지 않고 끌려 다니는 그녀에게 짜증이 나 있었던 터라 당시 그녀에게 경찰을 부르라는 얘기만 하고 끊었던 것이다. 그때 그녀에게 바로 도움을 주지 못했던 자신에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이 책에 수록된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작품인데, 단 9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담고 있는 것들이 풍부해 마치 장편처럼 읽히는 작품이었다.

 

 

오클랜드에서는 날마다 저녁 해가 태평양으로 넘어가면 그건 또다른 하루의 끝을 의미했다. 여행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살아온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직선적 시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행위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건은 소설처럼 우화가 되고 불멸성을 얻는다. 담 위에 앉아 휘파람을 부는 멕시코 소년. 젖소에 머리를 기대는 테스. 그런 정경은 기억 속에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해는 언제까지나 계속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 '초승달' 중에서, p.350

 

이 책은 <청소부 매뉴얼>로 처음 만났던 루시아 벌린의 두 번째 단편소설집이다. 그녀는 평생 77편의 단편소설을 썼는데, 전작에서 43편이 소개되었고, 이번 신작에서 22편을 만날 수 있다. 루시아 벌린은 2004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11년 만에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문학 천재라고 불린다. 무명작가였던 소설가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로 사후 20년 만에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루시아 벌린의 작품들은 상당수가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해서 네 아들을 부양하는 가운데 밤마다 글을 썼다. 세 번의 실패한 결혼, 알코올중독, 불안정한 생활 반경,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했던 삶의 경험들이 모두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때가 무엇무엇의 시작이었다, 라거나 그때, 또는 그 전에, 또는 그 후에 우리는 행복했지, 라고 한다(p.218)' 라는 문장처럼 루시아 벌린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도시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과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공감과 이해를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루시아 벌린 특유의 반짝이는 유머와 통찰력, 담백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이 더해져서 근사한 재미를 안겨 준다. '레이먼드 카버의 근성과 그레이스 페일리의 유머에 루시아 벌린만의 독특한 위트를 더한 기적 같은 일상을 만날 수 있다'는 소개 문구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건져 올린 보석 같은'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루시아 벌린의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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