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 뇌과학이 밝혀낸 중년 뇌의 놀라운 능력
바버라 스트로치 지음, 김미선 옮김 / 해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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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똑똑하고 더 침착하며, 더 행복하고, 한 중년 과학자의 말대로 "온갖 것들을 그냥 안다." 이 새로운 중년의 뇌는 중년에 다가가면서 실재로 재조직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 P14

43-46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의 심리학자인 윌리스Sherry Willis와 남편 샤이 K.Warner Schaie는 가장 장기적이고, 규모가 크며 가장 존중받는 수명 연구 중 하나를 이끌고 있다. 통칭 시애틀 종단 연구(Seatle Longitudinal Study라 하여 1956년에 시작해서 40년이 넘는 동안 6,000명의 정신적 기량을 체계적으로 추적해온 연구이다. (중략) 검사한 여섯 범주들 가운데 네 범주, 어휘, 언어 기억, 공간 정향, 그리고 귀납적 추리 (인용자 주 - 계산 능력, 지각 속도 제외)에서 최고의 수행력을 보인 사람들의 나이는 평균적으로 40세에서 65세 사이였다.
- P43

78
매더Mara Mather에 따르면 긍정적인 것에 대한 편향이 가장 심한 뇌는 게으른 뇌가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뇌, 즉 가장 명석한 뇌다. 또한 긍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현상은 죽음같이 가장 덜 긍정적인 관념으로 간주되는 것과 관계가 매우 깊을지도 모른다. 카스텐슨Laura Carstensen은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삶에 남은 시간이 전보다 적다는 것을 훨씬 더 많이 자각하게 되기 때문에 감정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고 믿는다. 안정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나쁜 것을 비껴가고 좋은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깨닫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주의와 기억 두 가지를 모두 그 목표에 맞도록 조종한다는 것이다.
- P78

80
소위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가설이 있는데, 인간과 영장류의 경우 도움이 되는 할머니들과 같이 사는 집단의 일원들이 더 오래 살았다고 가정한다. 카스텐슨은 ’할머니 가설‘에 대해, 앞날을 보다 밝게 보는 할머니들 때문에 그 집단이 보다 융성하고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면서 평온하고 긍정적이 되는 것은 강력한 역할을 해요. 나이 든 사람들이 그와 같으면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죠." 카스텐슨은 말했다.
- P80

98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이 성장하면서 그물에 농구공을 넣고 또 넣을 때마다 그의 슈팅 뉴런들을 둘러싼 미엘린의 피막은 아마도 점점 더 두꺼워졌을 것이다. 미엘린이 더 많다는 것은 뇌 신호전달이 더 훌륭함을 뜻하고, 조던의 경우는 슈팅이 더 훌륭함을 뜻한다.
- P98

116
굴레트Margaret Gullette는 서구 문화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위로 비처럼 쏟아지고 있는 쇠퇴의 이념"의 희생자들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스스로가 "문화에 의해 노화되도록" 허락했고, 인생을 단순히 "나이로 등급이 나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배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바탕에는 "중년에는 몸이 망가지며 이러한 신체적 감퇴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심각"한 반면, 노화의 긍정적인 측면들 즉 "성숙함, 경쟁력, 동정심 등"은 "나이와는 연관이 없다는" 오도된 생각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들이 존속하는 큰 이유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름 방지 크림"을 팔 수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굴레트의 생각이다.
- P116

133-134
그레이디Cheryl Grady는 자신의 요청에 따라 청소년들이 방금 접한 단어나 사진들, 즉 일종의 고난도 일화기억을 떠올리라고 했을 때 예측대로 우리가 집중하는 데 사용하는 뇌의 주요 부위이며 뇌의 아주 중요한 부분인 dorsolateral prefontal cortex가 (뇌 스캐너에서-인용자 주)빨갛게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반면 중년이 되면 아주 어떤 사소한 것도 쉽게 집중된 사고를 밀쳐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레이디는 발견했다. 연구 참가자들의 뇌를 스캔하면서 그레이디는 복잡한 정보를 떠올리려고 애쓰는 나이 든 사람들 다수가 주요한 이마엽 영역들은 약간 덜 사용하고 뇌의 더 아래 부분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중략) "예컨대, 당신이 뇌 스캐너 안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면, ‘아이고, 좀 불편하군.’ 또는 ‘이따 가게에서 가서 우유를 사야 한다.’ 등을 생각할지도 모르죠. 이것이 우리가 초기 모드Default mode라 부르는 뇌의 부분이에요. 뇌가 백일몽을 꿀 때 사용하죠." 중년기부터는 뇌가 초기 모드를 꺼버리는 능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 P133

148-149
이 견실하지 못한 주의력이 때로는 예술을 낳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여러 연구들로 인해 차단을 덜 하는 뇌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음이 밝혀졌다. 해셔Lynn Hasher의 말처럼, 창의성의 특징 중 하나가 "평소 분리되어 있는 아이디어들을 합치는 것"이라면, 나이 든 되는 거의 그 본성상 기발하고 새로우며 아름답기까지 한 무언가를 생산해낼 가능성이 더 크다.
- P148

172
과학 연구에서 체스 선수teh Chess Player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 교수는 체스 두기를 매우 좋아했고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체스를 두는 동안 그는 쉽게 일곱 수를 앞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알아차렸다. 아내와 가족들은 그가 멀쩡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거걱정이 되었다. 체스에서 네 수까지밖에 앞서 생각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무언가 끔찍하게 잘못되었다고 확신한 그는 University Collaege London의 신경학연구소의 신경과 의사 Nick Fox의 진료소로 찾아갔지만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중략) 이삼 년 뒤 교수는 뇌와 무관한 원인으로 사망했다. 부검을 하자 알츠하이머 플라크와 엉킨 매듭 투성이의 뇌가 드러나면서 교수의 가족과 폭스를 깜짝 놀래켰다. 교수는 치매 말기로 보이는 병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겉으로 드러난 유일한 징후는 교수가 체스의 수를 일곱 수 대신 네 수밖에 앞서 생각할 수 없었다는 점뿐이었다.
- P172

179
인지적 비축분cognitive reserve의 현주소에 관해 언급하던 카츠만Robert Katzman 박사에 따르면, "교육은 뇌를 바꿉니다. 이제는 분명해요. 정확히 어떤 경로로 바꾸는지는 모르지만 교육은 뇌를 바꿉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연구를 통해 교육 수준(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문맹의 수준)과 뇌의 건강한 노화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선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 P179

183
스턴Yaakow Stern의 팀은 교육이나 직업 수준이 높은 치매 환자들이 일단 진단을 받은 뒤에는 더 빨리 쇠약해져 사망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표면적으로 직관에 반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인지적 비축 이론과 완벽하게 들어맞는 결과다. 더 많은 뇌력을 호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병의 징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더 오래 저지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병이 겉보기에도 명백해질 시점이 되면, 병증이 뇌 안으로 훨씬 더 멀리까지 진행된 상태이므로 환자들은 더 빨리 쇠약해져 죽는다는 것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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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9-04-27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대부터 60대까지의 독자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면서 실질적인 도움도 주는 좋은 책.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과학 이야기만큼이나 미국 상류 사회의 세련되고 명민한 중년들의 일상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번역이 조금만 더 자연스러웠다면 별 네 개도 줄 수 있었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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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원리는 ‘법고의 묘’다. 그것은 처음 글을 쓰고자 할 때 명심해야 하는 원리일 것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법고의 묘를 익히지 않으면 진전된 글쓰기를 할 수 없다. 책을 정밀하게 읽고 대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은 법고의 묘를 익히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둘 번째 원리는 ‘법고창신의 묘’다. (중략) 옛것을 따르되 변화를 수용하고, 새것을 받아들이되 옛것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고루하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글을 쓸 수 있다. 세 번째 원리는 ‘사이의 묘’다. (중략) 두 사람의 시선이 사이의 지점에서 교차하듯 글도 법고와 창신 사이에 자리해야 한다. 물론 어설픈 타협으로 만들어지는 중간 자리는 옳지 않다. 구별과 대립을 포섭하는 동시에 그 단계를 넘어서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 P189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글쓰기 수칙 11가지 (1)명확한 주제 의식을 가져라. (2)제목의 의도를 파악하라. (3)단락 간 일관된 논리를 유지하라. (4)인과관계에 유의하라. (5)시작과 마무리를 잘하라. (6)사례를 적절히 인용하라. (7)운율과 표현을 활용하여 흥미를 더하라. (8)참신한 비유를 사용하라. (9)반전의 묘미를 살려라. (10)함축의 묘미를 살려라. (11)여운을 남겨라.-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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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9-04-28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잘 쓰는 데에 도무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어쩌다보니 읽게 되었지만 읽는 데에 쓴 시간이 아까운 책. 무엇보다도 박지원이라는 좋은 소재를 가져다가 이런 식으로밖에 얘기를 못 하나 싶어서 화가 났다. 이런 식의 감성이 잘 팔리는 세상인가 생각하면, 시대와 불화했던 박지원의 울증이 나에게도 옮겨올 것 같다ㅋ.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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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갈 수도 있다. 그 결과 까닭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건 괴로운 체험이다. (다음에 계속)
- P39

(앞에서 계속)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중략)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代價인 것이다.- P40

올림픽 마라토너인 세코 도시히코瀬古利彦 씨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 S&B팀의 감독으로 취임한 지 얼만 안 됐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세코 씨 같은 레벨의 마라토너도 ‘오늘은 어쩐지 달리고 싶지 않구나. 아, 싫다. 오늘은 그만둬야지. 집에서 이대로 잠이나 자고 싶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브니까?‘라고 질문해 보았다. 세코 씨는 말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야‘라는 어조로 "당연하지 않습니까, 늘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 P75

매일 계속해서 달리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 P73

대형 버스와 트럭이 시속 80킬로쯤 되는 속도로 나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간다. 마라톤 가도라고 하는 말의 여운에는 왠지 모르게 옛 정취가 느껴지지만, 지금은 그저 통근 산업도로일 뿐이다. (중략) 멀리 도쿄에서 이 아름다운 나라를 찾아와, 왜 이처럼 살풍경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업도로를 일부러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런 일 말고도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결국 개 세 마리, 고양이 열한 마리가 이날 마라톤 가도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동물의 수였다. 죽은 고양이와 개의 수를 헤아려보면서 의기소침해졌다.
- P98

평범한 작가들은 젊었을 때부터 자기 스스로 어떻게든 근력을 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훈련에 의해서 집중력을 기르고 지속력을 증진시켜 간다. 그래서 그와 같은 자질을 (어느 정도까지) 재능이 ‘대용품’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 P125

이것이 나의 육체이다. 한계와 경향을 지닌 나의 육체인 것이다. (중략) 불평하지 않는다. 있는 것만으로 참는다. 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얻게 되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다.
- P132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저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중략)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위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 P148

달리고 있는 동안 몸의 여러 부분이 차례차례 아프기 시작했다. (중략) 그들에게 있어서도 100킬로를 달린다는 것은 미지의 체험이었고, 모두 각기 할 말이 있는 것이다. (중략) 강한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ㄹ고 하는 급진적인 혁명의회를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 같은 이들이 변론을 구사해서 설득하는 것처럼, 나는 신체의 각 부위를 열심히 설복한다. 격려하고 매달리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질책도 하며, 고무도 한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일이 아닌가, 지금은 어떻게든 참고 힘내다오, 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하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은 두 사람 다 목이 뎅강 날아가 버렸잖아.
- P169

이렇게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면서 어떻게든 계속 달리는 사이에, 75킬로 근처에서 뭔가가 슥 하고 빠져나갔다. (중략) 한때는 들끓고 있던 근육의 혁명의회도,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 일일이 시비를 거는 것을 포기한 듯했다. 더 이상 누구도 테이블을 두드리지 않고, 아무도 컵을 던지지 않았다. 그들은 피로에 지친 모습을 역사적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혁명적 성과로 그저 묵묵히 수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규칙적으로 팔을 앞뒤로 흔들며, 다리를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딛기만 하는 자동적인 존재로 변해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자 육체적 고통마저 거의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사정이 있어서 처분할 수 없는 보기 싫은 가구처럼,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린 것이다.
- P172

요절을 면한 사람에게는 그 특전으로서 확실하게 늙어간다고 하는 고마운 권리가 주어진다. 육체의 감퇴라고 하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 P187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중략) 그런 사람이 누구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 P228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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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9-05-06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을 빼고 기대도 불안도 내려놓고,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담담하고 꾸준하게 해 나가는 삶이 좋아 보인다. 산다는 게 별로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능이다.
 
윤치호의 협력일기 - 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박지향 지음 / 이숲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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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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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이제 서양에서 저항과 협력을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중심과제가 되지 못한다. 강제력에 대한 협조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협력은 복잡한 이슈이며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는 사실도 당연시된다.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저항하지 않으면 다 협력자"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은 서양 학계에서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 중국 지역을 연구한 브룩(Timothy Brook)은 언뜻 보기에 협력은 민족주의의 반대 같지만, 20세기에 나타난 협력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 용어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협력주의자나 민족주의자는 그 신념에서 다를 바 없으며 그들은 모두 민족의 언어로, 민족을 대신해서, 민족의 이익을 위해 발언했다는 것이다.

80
한편, 저항과 협력은 권력의 분배와 연관되어 있었다. 호프만(Stanley Hoffmann)은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가 권력 구조 밖에 있던 많은 사람에게 기득권층과의 사적인 관계를 청산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 토착사회에서도 억압받은 집단들의 권위주의자적 지배자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에 협력하였다. 일본에 점령된 중국에 대한 연구도 협력자들은 국민당 정부하에서 닫혀 있던 정치적 기회의 개방을 바랐고 그 기회를 이용했으며 중국인 협력자 가운데서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도 많이 포함되었다고 지적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대중은 굳이 협력에 동좋지 않았다고 해서 저항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놀랄 정도의 수동적 태도를 보였는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하루하루 삶의 어려움, 그리고 당국의 정책이 그러한 태도를 더욱 조장하였다. 최근 연구는 평범한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에 지배되기에 저항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 될 수 있으며, 지배체제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대결을 피하며, 레지스탕스에 적대감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어찌 되었든 일상생활을 영위한 대중의 협력 행위와 그들의 상충하는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98-99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윤치호에게 자유란 우선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의미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영국을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으로 인정하였는데, 그는 영국인들이 이 세상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이유를 "개인의 독립을 공동체적 의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데서 찾았다. 윤치호는 민족을 위하여 개인의 복리를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폭력을 거부하였다. 당시 위세를 떨치던 민족주의의 조류 속에서도 ‘민족’이라는 집단적 관념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고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점은 놀랄 만하다.

101-102
19세기 말 조선왕조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윤치호는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영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 해도 조선 사람들은 많은 부분 "고통이 제거"된 상황을 맞을 것이고 "여러 이득"을 향유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국가가 사라지도 지배층이 변하여도 국민 개개인이 예전보다 더 많은 안정과 행복을 얻게 되면 그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국가의 목적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해 주는 것이고 만약 정부가 포악하여 국민을 압제하고 수탈한다면, 그런 정부하의 독립이란 무의미한 것이 되며,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보다는 오히려 이민족에 의한 관대한 지배가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06
"물지 못하면 짓지도 마라"가 이를테면 윤치호의 좌우명이었고, "물지도 못하면서 방바닥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조선 사람들을 가엾게 여겼다. 3.1운동 당시 윤치호는 만세만 가지고는 절대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으며 일본인들은 무장하지 않은 저항에는 꼼짝도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다. 외치는 것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리 정당해도 일본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힘이 없는 한, 그러한 선동은 조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쫓아내는 곳이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 "조선 민족은 이 철과 혈의 세상이 어린아이 같은 울음으로 제거되기라고 믿는 어리석음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윤치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나 그리스같은 작은 나라들이 히틀러의 잔인한 세력에 저항했을 때 감탄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여긴다.

120
윤치호는 무엇보다도 3.1운동에 동조하지 않았기에 친일파라는 악명을 얻었는데, 그가 반대한 이유는 국민이 독립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단지 선동에 따라 독립을 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즉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듯이 독립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선동가들에게 설득당하거나 협박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과도한 반응을 비난하고, 애국심이 발동한 젊은이들이 위험을 향해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동시에 그들을 그런 死地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선동가"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111-113
조선 정부의 행태에 대한 윤치호의 비판은 러일전쟁 시기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2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이 러시아를 묵덴에서 몰아내고, 일본 정부는 조선을 노예로 만들려는 정책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데,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조선의 황제는 "관직을 팔아넘기고, 장난감 궁궐을 짓고, 굿을 해서 산천의 신들에게 러시아가 이길 것을 빌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치호가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황제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략) 또한 왕비 민씨에 대해서 윤치호는 한 마디로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오늘 안전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권좌에 있는 내내 왕비의 신념은 "우리 세 사람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상관없다"였다. 그 세 사람은 왕, 왕비, 왕자인데, 그러한 극단적인 이기심이 파멸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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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경제적 도움을 줄 때에도 실용성 여부를 가장 먼저 고려하였다. 많은 사람이 윤치호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예를 들어 하루 한나절 사이에 아홉 명이 찾아와 돈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그는 실용적인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실용적 결과과 예상되는 제안을 하는 사람에게 돈을 대주었다. 그러나 그는 철학을 공부한다는 조선 학생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 유하한 5촌 윤보선이 "단지 문학공부를 위해!" 학비로 800파운드를 보내 달라고 했다는 사실에 고소를 금치 못한다. 윤치호는 또한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들의 99%가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에 "코를 묻고" 있는데 그들의 "게으른 혀를 굴리는 데 사회주의는 이상적인 분야"라고 조롱조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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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를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지만, 사실상 그 혐오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유교 사회의 윤리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조금 먹고 살 만한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친척, 친구들을 볼 때 조선은 옛날 옛적부터 공산주의를 해왔다는 것이 윤치호의 주장이다. 조선 사람들이 볼셰비즘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유교와 공산주의의 기생주의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데 공산주의는 유교보다 더 나쁘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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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사키 류조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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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노키즈 이와오의 젊은 시절 별명은 센이치(千一)였다.

천 마디 말을 하면 그 중에 하나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라는 의미.

사람을 죽이고 도피하면서도 그는 숨을 쉬듯이 거짓말을 계속하며 사기로 도피 자금을 마련해 간다. 

체포된 후 취조 과정에서 그는 도피 중에도 여자는 계속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는데, 

여자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잘난 척하는 것이 이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느낌이다.

그 감각으로는 중학교 중퇴에 전과가 있는 가난뱅이라는 자신의 본모습에 만족할 수 없으니까,

부잣집 아들이라느니, 교수라느니, 변호사라느니 하는 거짓말을 계속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나가는 사람은 잘 없지만, 

비슷하게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사실 적지 않다.

이번 생은 망했지만, 나는 사실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야....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

주인공이 대대로 내려온 가톨릭 집안의 자식이고, 어렸을 때 신부가 될 생각을 했다는 것도 씁쓸한데,

종교라는 것의 본질도 결국은 허세와 거짓말이 아닌가 해서이다.

사형을 앞둔 주인공을 찾아가는 신부가 시신을 인수하러 온 친척에게

사실은 자기가 주인공의 중학교 1년 후배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래서 좀 소름이 돋았다.

종교도 국가도 본질은 거짓말이라면,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나왔듯이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라면)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인간의 가장 깊숙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에 대해서는 

작가가 주인공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으니, 그대로 받아들여주면 된다.

주인공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 

거기에 대해 판단하고 갚아주는 것은 신의 역할.

그러니까 '나'는 신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 범죄가 세상에 대한 주인공의 복수라고 보는 것은 재미는 있지만 너무 나간 해석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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