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의 시칠리아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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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가 인기 있는 것을 보고 조금 궁금했던 김영하의 여행기. 달리기를 하지 않고 출신 대학을 사랑하는, 한국 남자 버전의 무라카미 하루키? 읽기 편하게 글을 잘 쓴다는 건 인정. 그러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다시 찾아 읽을 것 같지도 않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동네들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무엇보다도 선생에게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이 없다면 수업은 맥이 빠진다. 내겐 그게 없었다. 과연 소설 쓰기라는 게 배워서 되는 것일까? 내가 가르치면 뭐가 좀 나아지는 것일까? 오히려 재능 있는 학생들을 망치는 것이 아닐까? 늘 이런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 P22

1960년대 갓 취업한 이십대의 젊은이는 첫 월급의 반 이상을 양복을 구입하는 데 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방직기술의 발전과 값싼 재료의 등장으로 옷값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낮아졌다. 덕분에 옷장은 입지도 않는 옷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 P33

그때까지 나는 방송 프로듀서나 카메라맨도 나와 같은 일종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들은 예술가라기보다 군인에 가까웠다. 밤늦도록 일하고도 새벽이면 벌떡 일어나 카메라와 삼각대를 지고 밖으로 나갔다. 아그리젠토의 신전 위로 떠오르는 해를 찍고 그 위로 흘러가는 구름떼를 찍었다. 아무리 시칠리아라도 12월의 새벽은 추웠다. 카메라맨은 홑겹의 윈드브레이커 하나로 묵묵히 새벽 추위를 견디며 뷰파인더를 노려보았다. ‘느린 다큐’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오랜 촬영이 필요했다. 몇 시간 동안 타임랩스로 찍은 화면을 삼 초에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느린 다큐’의 정체였고 우리가 이런 영상을 TV에서 자주 보지 못하는 이유였다. (중략) 카메라맨과 프로듀서는 아무 불평 없이 이런 화면들을 찍었다. 이십 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사이라더니, 눈빛만 봐도 손발이 척척이었다. 나약한 소설가가 이불 속에서 끙끙대는 동안 그들은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르고 벌판으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촬영을 했다.
- P48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로서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지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 머리의 여성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 예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장사치들, 약삭빠른 도시인들과 척박한 사람, 테마파크를 닮은 번드르르한 대리석 건물들만 보았던 것이다. 내가 꿈꾸던 이탈리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영화나 관광엽서, 여행사의 팸플릿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니, 그것들은 모두 시칠리아에 있었다. 나는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팔레르모 공항을 떠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아내와 함께 다시 그 섬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 P50

배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며 정세를 살피는 우리에게 바르톨로 빌리니 씨와 한 명의 노파가 다가왔는데 모두 자기 아파트를 설명하는 명함 크기의 광고지를 들고 있었다. 그 광고지는 하나같이 ‘발코니, 냉장고, 샤워, 부엌’을 강조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발코니에서 맥주를 마시고 동네에서 사온 신선한 토마토로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또한 그것은 다소 억지스럽지만, 세계가 물, 불, 흙, 그리고 공기라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리스 철학자 (그러나 그는 지금의 그리스가 아닌 시칠리아의 아그리젠토에서 태어났다) 엠페도클레스의 학설을 연상시켰다. 샤워는 물, 부엌은 불, 발코니는 흙, 마지막으로 냉장고는 (차가운) 공기와 관련돼 있다. 이 네 가지는 현대의 인간이 조금이라도 오래 어딘가에 머물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 P83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연기과 대학생들이 이런 무거운 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은 사실 역부족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출가가 붙어도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연기하는 그리스극을 보는 맛은 따로 있다. 장황한 그리스 운문을 번역한 부자연스런 한국어 대사, 인물의 내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연기, 코러스와 대사의 부조화 때문에 관객들은 극 속으로 결코 깊이 빠져들지 못한다.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효과’가 여기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달성된다. "오레스테아"를 보는 내내 나는 연극이 촉발한 딴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 P161

돌아보면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여행하기에 가장 안전한 시대였다. 민간 항공기가 출현했고 해적이나 산적, 마적은 거의 사라졌다. 나라와 나라 간의 이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단했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가치가 안정돼 있어 달러만 가지면 어느 나라에서든 밥을 사 먹고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 9.11 테러 이후로 그런 시대는 이제 서서히 저물고 있다. 위험지역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우티스들도 부유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다. (중략) 지금 와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20세기만이 오히려 예외처럼 보인다. 중세에는 유럽과 지중해 일대에서도 해적질과 인신납치가 성행했으며 귀족들조차 친지들이 몸값을 내주지 않으면 엉뚱한 곳으로 팔려가곤 했다.
- P200

시라쿠사는 그리스문명의 토대 위에 로마문화를 더하고 그 위에 기독교적 색채를 가미한, 일종의 크레이프 케이크 같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눈에 그리스문명과 로마문명을 일별할 수 있는 도시는 흔치 않다. 시라쿠사에서는 그리스인들과 로마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야기를 사랑한 그리스인들과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로마인들의 차이는 그들이 지어놓고 떠난 극장과 경기장으로 드러난다. (중략) 그리스극장과 로마경기장 사이에는 거대한 채석장이 있다. 기원전 413년에 사로잡힌 아테네 포로들이 노역을 하다가 노예로 팔려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본래는 꽤 높은 언덕이었던 이곳은 유명한 1693년의 지진과 오랜 세월의 채석으로 인해 지금은 한 입 크게 베어 문 사과처럼 아래로 푹 꺼져 있고 군데군데 올리브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리스 후예들이 비극 "아가멤논"을 보고 있는 동안 로ㄴ마의 후예들은 유로2008에 출전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러 카페에 모여 있었다.
- P220

우리가 묵은 호텔의 주인은 아그리젠토 남자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가자 그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나비넥타이를 매고 흰 양복 윗도리를 걸치고서야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정중했다. 자신의 힘과 위세를 충분히 과시하면서도 필요한 친절은 잊지 않았다. 허겁지겁 메뉴를 결정하려는 우리를 만류하며 그는 우아한 태도로 차가운 물 한잔을 권했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중략)
그후로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힘든 일을 당하며 낙심할 때마다, 혹은 당황하여 우리 중 누군가가 허둥댈 때마다 그 멋쟁이 사장의 느긋한 대사를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이탈리아 원어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이 된다. "Signora, prego. E caldo."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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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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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것과 별도로, 정치적인 맥락도 재미있게 읽힌다. 노무현 시대를 살던 좌파들의 순수하고 지적인  태도가 흥미로웠다. 위험한 선동가들이 좌파의 목소리를 독점하고 있는 지금,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건축가들은, 쉽게 말하면, 땅을 바라보고 교감하는 능력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땅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독특한 판단력이 축적되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건축가들에게는 우연한 만남이지만, 안성면에서 펼쳐진 흔치 않은 땅과 필자 사이의 교감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한 남자가 평생 그리워하던 여인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버갯불이 튀는 듯한 사건이라고 할까? 그런 정도의 열정적인 교감이 안성면과 필자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기억한다. 바로 이것이 한 건축가를 10여 년 동안 무주에서 일하게 한 계기다. - P28

무주에서 10년을 작업하면서 느낀 것은 군청의 모든 직원은 감사원을 두려워한다는 이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들이 다 같은 처지다. 직원들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일이 잘되느냐 못되느냐가 아니라 감사에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무서워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감사원이거나 여러 법의 저촉 여부인 것이다. 이 일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러나 진정한 군수라면 감사원이나 검찰이 아니라 군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군민, 주민의 삶을 향상시키려면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물어야 한다. 김세웅 무주군수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지금의 시스템, 지금의 건축 발주방식으로는 좋은 건축을 할 수 없다는 아주 확고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 P39

필자는 수의계약을 통해 무주 프로젝트를 10년간 진행할 수 있었다. 군수는 여러 가지 일로 검찰에 두 차례나 소환당했다. 심지어는 필자도 검찰에 불려갈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차라리 필자는 검찰이 정말로 필자를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의계약이라는 것은 규모가 큰 설계 일도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 진행해야 하는 터라 일을 할수록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검찰이 부르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게 근거자료를 만들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 P40

건축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식물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지, 건축가가 처음부터 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으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식물은 무엇으로 건축을 완성시키는 것인가? 바로, 흐르는 시간이다. (중략) 특히 불특정 다수의 삶과 관계있는 공공건축은 다중의 삶을 미리 확정하는 일이기도 해서 보편적이면서도 시간에 따르는 변화 또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가장 큰 어려움은 지금까지 축적된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오늘 결정해야 하는 데 있다. 그래서 건축가가 이런 어려움에 대응하는 방법은 건축이 지닌 근원적 모순을 직시하고 그 한계를 미리 예측하며, 불확정적인 것까지 오늘 확정할 수 있는 지혜와 상상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P43

도시는 자연을 먹고사는 짐승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도시라 하더라도 안성면처럼 자연에 세우는 도시는 자연이 파괴되는 것보다 1000배, 1만 배 이상의 이익을,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연에 또 그 땅을 지킨 주민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런 한도 내에서만 기업도시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가치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 P87

건물에서의 창은 풍경을 오려내고 안으로 불러들인다. 불려온 풍경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안에 있는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 P95

부남면을 논하면서 어떻게 하늘의 별들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필자는 부남면이 별을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부남면에 별 보는 집을 지은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 주민들에게 필자가 선사하고 싶었던 부남면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결되었다. 건축가는 건물만 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의미 있게 조직해 주는 사람인데, 부남면 같은 오지의 면사무소를 리노베이션 한다는 것이 바로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 P100

공공건축이란 ‘공공이 발주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람, 주민, 시민)가 원하는 동시에 땅이 원하는 건축이며, 시대가 원하는 건축이고 그리고 끝으로 지구가 원하는 건축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대단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이런 것이 진정한 공공건축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실 아무리 작은 공공건축이라 해도 건축을 제안한다는 것은 한 사회를 상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P113

관공서 건물은 두 가지 점에서 선도적이어야 한다. 하나는 도시 환경 속에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도시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줄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건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어서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시민들과 호흡하는 편안한 장소, 그런 공적 영역의 특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관공서 건물은 지금이라도 개선의 여지를 두고 노력해야 한다. - P139

어떻게 보면, 어른들은 ‘형식’을 아이들은 실재하는 ‘현실’을 더 잘 포착해 낸다. 건축의 내외부 공간을 미끄러지듯 즐겁고 유쾌하게 넘나드는 아이들의 몸짓 속에 진정한 건축이 있다. 아이들이 자기 삶을 공간 속에서 조직해 내는 능력은 신비할 정도다. (중략) 어른 건축가들은 유쾌하게 놀 줄 모른다. 유쾌한 어린이집. 그것은 아이들만이 설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른 건축가들은 그것을 찾는 방식을 개발해야 할 것 같다. - P186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전쟁 무렵 북한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소실되지 않았을 만큼 깊고 특별한 산인 적상산은 가을에 단풍이 들면 여인이 붉은색 치마를 두른 것 같다 하여 적상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정상에 올라가 보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P202

섬세하고 작은 것들의 축적을 고마워하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때, 사회는 진정으로 한 발자국씩 진보할 것이다. 진보란 소위 좌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마음과 손길 속에 있는 것이다. 필자 생각에 무주군 보건의료원은 큰 건물이 아니라 보건의료원을 작동시키는 작은 마음들의 결집 속에 큰 위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P262

지난 10여 년간 필자가 무주에서 한 작업들은 그래서 필자에게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것은 사람과 식물들에 의해 헤어려지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이것이 바로 건축을 오브제처럼 단독적이고도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으로 확장된 전일적 접근holistic approach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297

건축이 탈산업사회에서 농촌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능과 공간으로 포섭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사람들을 유혹할 일이 아니라 근접성의 법칙과 체험에 각인되는 삶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체험은 정신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갈등까지를 포함하는 ‘가까운 것들’. 사랑, 평화, 애정이 깃든 모든 것은 근접한 데서 시작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생길 수 있겠는가! - P298

필자가 공설운동장만이 아니라 무주에서 한 수많은 일은 건축가의 새로운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조절자social coordinator’로서의 역할을 한 것과 같다. 그래서 현대 건축가는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판단력 있게 조절하고 건축의 행위로 이행시키는 사람이다. - P306

감응. 감응이라고 하는 키워드. 무주의 모든 일은 감응인 것 같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correspondence. 쌍방적인 것. 무엇을 느끼고 응하고...... (중략) 무주 공설운동장도 그렇고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도 그렇고 또 부남면 주민자치센터 등도 그렇고, 내가 보통 때 건축하던 방식과 전혀 다르게, 감응은 쌍방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는 사실 자연과 풍경과 말씨와 음식 등의 친근함에서 오는 프록시proxy의 미, 내가 무주에 살지 않지만 무주에 사는 사람의 풍경에 감응되어서 거기에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 P330

무주 프로젝트를 돌아보면서, 이런 공공건물이 들어서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시설이라고 판단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쓰임새와 구조, 생김새 등을 협의해 결정지은 건축가가 있었기 때문이고, 양쪽의 관계가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기용 선생은 이를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다.
"우선은 김세웅 전 무주군수가 일방적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종의 ‘전횡’이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가 또한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가지고 있는 ‘폭력’이란 게 있다. 건축가들은 이처럼 자기가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상황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한다. 사실 건축가들이야말로 그런 상황을 빠져나가는 데 무시무시하게 빠른 사람들이다. 무주를 냉정하게 바라보면, 지방자치단체장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과 건축가들의 숙명적인 직업적인 권력, 그 두 권력이 우연히도 충돌하지 않고 결합된 것이다. 그 두 권력이 결합돼서 마치 새로운 사건처럼 탄생한 것이다. (계속) - P365

(위에서 계속) 하지만 권력이 모였을 때 공공건축물을 가능하게 한 걸 보면서, 과연 공공건축이란 게 꼭 그렇게 나와야 하느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 P365

당시 무주군 조례는, 용역비 3,000만 원 이상이면 공개입찰, 그리고 3,000만 원 미만이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정해 놓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공건축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정기용 선생은, 무주군과 수의계약을 맺기 위해 설계비, 감리비 한도를 모두 3,000만원 이하로 낮춰야 했다. 때로는 실비도 안 나올 때도 있었다. 이는 고스란히 사무실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당시 기용 건축이 입은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컸느냐고 물어보니, 한 실장은 "무주 프로젝트 때문에 밀린 월급 700만원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퇴사한 직원들도 아직 ‘무주 월급’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회사가 얼마나 골병이 들었을까 짐작이 간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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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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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신입생 때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 읽었다. 생물학 관련 교양 과목들의 필독 도서여서 내 또래의 이과 대학생들 대부분이 읽었을 것 같다. "생명의 이해"라는 꽤 재미있었던 3학점 짜리 수업에서, 이 책과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를 가지고 레포트를 써서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24년 만에 다시 읽은 <이기적 유전자>는 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스무 살 때는 그냥 열심히 공부하면서 읽었던 책인데, 마흔넷에 다시 보니 대박 재미있다!!!. 그 동안 나의 인생,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책에 나오는 설명들을 나의 삶에 대입시켜서 생각해 보는 것이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하고 관찰해 온 많은 인간 행동과 사회 현상들이 도킨즈의 이론을 통해 심플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되고 해석된다. 이 책에서의 도킨즈는 머리가 좋고 유머러스하며, 냉철하지만 망설임 없이 싸움에 임한다. 책 전체에 매력이 철철 넘친다.이제 중년이 된 20여 년 전의 대학생 독자가 혹시 이 책을 다시 읽을까 생각하며 나의 리뷰를 보고 계신다면, 꼭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지금 바닷속을 유유히 떠다니는 자기 복제자(replicators)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미 먼 옛날에 자유를 포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기 복제자는 덜거덕거리는 거대한 로봇 속에서 바깥세상과 차단된 채 안전하게 집단으로 떼지어 살면서, 복잡한 바깥세상과 의사소통하고 원격 조정기로 바깥세상을 조종한다. 그들은 당신 안에도 내 안에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다.
- P75

개체는 안정적이지 않다.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다. 염색체 또한 트럼프 카드의 패처럼 섞이고 사라진다. 그러나 섞인 카드 자체는 살아남는다. 바로 이 카드가 유전자다. 유전자는 교차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고 단지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을 계속할 따름이다. 물론 유전자들은 계속 행진한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다. 유전자들은 자기 복제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우리의 임무를 다하면 우리는 폐기된다. 그러나 유전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영원하다.
- P100

사자는 영양을 잡아먹고 싶어 하나 영양은 전혀 생각이 다르다. 보통 이것을 자원에 대한 경쟁이라고는 보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때의 자원은 고기다. 사자의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의 먹이로서 그 고기를 ‘원한다’. 영양의 유전자는 자기의 생존 기계를 위해 일하는 근육이나 기관으로서 그 고기를 필요로 한다. 그 고기의 두 가지 용도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이다.
- P179

대개의 경우 (영역 동물의: 인용자 주) 암컷은 영역이 없는 수컷과는 짝짓기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짝지은 수컷이 다른 수컷에게 패해 그 영역의 주인이 바뀌면 암컷이 재빠르게 그 승자에게 들러붙는 일도 종종 있다. 성실하게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종의 경우에도 암컷이 수컷 그 자체와 결속하기보다는 오히려 수컷이 소유하는 영역과 결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230

복지 국가란 지금까지 동물계에 나타난 이타적 시스템 중 아마도 가장 위대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이타적 시스템도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그것은 그 시스템을 착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기적 개체에게 남용당할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키울 수 있는 것 이상의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므로, 그들이 의식적으로 악용을 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나는 다수의 아이를 낳도록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지도자나 강력한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혐의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 P237

여성이 자기가 낳은 아이가 어른이 될 평균 확률이 동갑내기 손자가 어른이 될 확률의 1/2보다 낮아지는 연령에 도달할 때, 자기 아이보다 오히려 손자 쪽으로 투자하게 하는 유전자가 유리하게 되어 번창할 것이다. 이 유전자는 손자 네 명당 한 명의 비율로 전해지는 반면, 그것과 경쟁 관계에 있는 유전자는 자식 두 명당 한 명에게 옮겨지지만, 손자의 기대 수명이 이 관계를 역전시키기 때문에 ‘손자에 대한 이타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널리 퍼지게 된다. 자기 아이를 계속 낳는 여성은 손자에게 충분히 투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년기에 이른 여성이 번식 능력을 상실하도록 작용하는 유전자가 점점 증가했을 것이다.
- P255

(물고기의-인용자) 암컷은 수컷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난자를 빨리 방출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난자는 비교적 크고 무거워서 잠시 동안 한 덩어리가 되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암컷은 먼저 산란하는 ‘위험’을 감수할 여유가 있다. 반면 물고기의 수컷은 이런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컷이 서둘러 정자를 방출해 버리면 암컷이 준비되기 전에 정자가 흩어져 버릴 것이고 그러면 암컷은 난자를 방출할 가치가 없으므로 산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확산 문제 때문에 수컷은 우선 암컷이 난자를 방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정자를 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암컷은 실로 귀중한 몇 초를 얻을 수 있다. 그 사이에 사라짐으로써 난자를 수컷에게 떠맡겨 수컷을 트리버스의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이론은 수컷의 자식 돌보기가 왜 물속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건조한 육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지를 깔끔하게 설명한다.
- P304

현재까지 핸디캡 원리를 타당한 모델로 만들려는 수리유전학자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는 핸디캡 원리가 타당성 없기 때문이거나, 도전한 수리유전학자들이 총명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중에는 메이너드 스미스도 포함된다. 내 생각으로는 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 P311

바이러스는 도망친 ‘반역’ 유전자에서 진화한 것으로, 이제는 정자와 난자라고 하는 일반적 운송 수단에 얽매이지 않고 생물의 몸에서 몸으로 직접 공중을 여행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이 가설이 옳다면 우리 자신을 바이러스의 집합체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일부는 상리 공생적 협력 관계를 맺고 정자와 난자에 실려 몸에서 몸으로 이동한다. 이들이 관례적인 ‘유전자’다.
- P346

인간의 비대한 대뇌와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성향이 더 교활하게 사기를 치거나 남의 사기를 좀 더 잘 간파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진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돈은 지연된 호혜적 이타주의의 공식적인 징표다.
- P356

밈 풀(meme pool) 속에서의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 가치는 그것이 갖는 강력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준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는 고쳐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을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는 마치 의사가 처방하는 가짜 약과 같이 상상을 통해 그 효력을 갖는다. 이것이 신의 관념이 세대를 거쳐 사람의 뇌에 그렇게 쉽게 복사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높은 생존 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로만 실제한다.
- P365

맹신이라는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하여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맹신은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신을 믿고 있거나 같은 신을 믿고 있거나 같은 신을 믿더라도 다른 의식을 행한다면 맹신은 그 사실만으로도 그가 죽어야 한다고 선고할 수 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화형을 시키거나, 십자군의 검으로 찌른다거나, 베이루트의 노상에서 사살한다거나, 벨파스트의 술집에서 폭탄을 날린다거나, 그 무엇이든 정당화시킬 수 있다. 맹신의 밈은 특유의 잔인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번식해 간다. 애국적 맹신이든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 P373

우리가 사후에 남길 수 잇는 것은 유전자와 밈 두 가지다.
- P375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 P378

크리스마스에 영국과 독일 부대가 중간 지대에서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하고 같이 술을 마신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암암리에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live and let live‘라는 불가침 협정이 모든 전선에서 1914년부터 적어도 2년간 착실히 지켜졌다는 사실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나에게는 이 사실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 P416

TFT(tit for tat)류의 전략에서 중요한 것은 경기자가 배신에 의해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보복의 위협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 보복할 수 있음을 과시하는 것은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리자‘ 방식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양 진영에서의 일급 사격수들은 적군 병사들이 아니라 적군 병사들 가까이에 있는 무생물의 표적을 향해 놀랄 만한 사격 솜씨를 과시한다. 이 기교는 서부 활극 영화에도 나온다. (촛불을 쏘아 끄듯이). 왜 최초의 두 원자 폭탄이 (그 개발을 담당했던 일류 물리학자들이 강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촛불 사격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고 두 도시를 파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누구도 만족스러운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 P418

여태까지 병목형 생활사가 왜 분명히 구분된 단위 운반자로서 생물 개체의 진화를 촉진하는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 세 가지에는 각각 ‘제도팜으로의 회귀’, ‘주기의 규칙성’, ‘세포의 획일성’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
- P478

옌Yan Wong은 옥수퍼드대학 뉴 칼리지 소속 내 학부생 제자였는데, 그가 나한테 배운 것보다 내가 그한테 배운 것이 훨씬 많다. 옌은 대학원 시절에는 애런 그라펜Alan Grafen의 제자였는데, 앨런도 학부생 때는 내 제자였고 학부를 졸업하고도 내 제자가 되었으며 지금은 내 지적 스승이 되었다. 그리 옌은 내 학생이기도 하고 내 손주 학생 -앞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는 근연도에 대한 멋진 밈적 비유- 이기도 하다. 물론 문화가 유전되는 방향은 이런 간단한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말이다.
- P495

개인적으로 나는 오히려 컴퓨터 프로그램이 (체스의-인용자) 세계 선수권을 석권할 것을 기대한다. 인간성humanity은 겸손humility의 교훈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 P514

철학 교육을 지나치게 받은 일부의 사람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에도 그 학문적 도구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싶어 안달이 나는 모양이다. ‘고도의 문학적, 학문적 취미를 가졌으나 자신의 분석적 사고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교육을 받아 온 많은 사람들’이 ‘허황된 철학 이야기’에 매력을 갖는다는 메더워의 말이 생각나다.
- P515

형제가 공유하고 있는 1/2은 모든 개체가 공유하는 90퍼센트( 그 수치가 어떻든 간에)를 빼고 난 나머지 유전자의 1/2을 말한다는 것이다.
- P531

로즈, 카민, 르원틴은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에서 ‘환원주의’라는 두려움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최고의 환원주의자는 ‘결정론자’일 것이며, 더 적합하게는 ‘유전자 결정론자’일 것이라고 말한다. (중략)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믿기 어렵겠지만), 유전자가 인간 행동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견지와, 그 영향력이 다른 요인에 의해 무효가 되거나 전혀 반대 양상이 나타나거나 하는 식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견지를 동시에 갖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유전자는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한 모든 행동 양상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력을 반드시 행사한다. (아래에 계속) - P596

(위에서 계속)
로즈 등도 다른 모든 형질이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적 욕구가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했다고 믿을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가 다른 무엇에라도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적 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있었다는 것에도 동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마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싶을 때에는 별문제 없이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원적 아닌가? 분명히 아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대한 반역’을 내가 옹호하는 것도 이원적이 아니다.
- P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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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50주년 기념판)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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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 출간된 책이고, 내가 읽은 번역판은 1999년에 나온 것이라, 옛 시대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문체는 예스러워도 내용은 2020년의 현재에도 전혀 문제없이 잘 들어맞는다.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극성스러운 이 원숭이 집단이 나무에서 내려와 무리지어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일 년 내내 지속되는 발정기로 결속력을 강화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다른 동물들을 길들이며 폭발적인 속도로 개체수를 늘려온 과정이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이 원숭이들이 이야기를 꾸며내고 과학과 문명을 건설해가는 속편 격의 책이 하라리의 <사피엔스>라고 생각한다.

인구가 오늘날처럼 무서운 속도로 계속 늘어나면 통제할 수 없는 공격행위가 극적으로 늘어나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실험으로 분명히 입증되었다. 인구가 지나치게 과밀한 상태는 사회적 긴장과 정신적 압박을 추래함으로써, 우리를 굶어죽게 하기 전에 우리의 공동체 조직부터 먼저 무너뜨릴 것이다. 과밀상태는 지적 통제력이 강화되는 것을 직접 방해하고, 감정이 폭발할 가능성을 크게 높여준다.
- P191

요컨대,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피임이나 낙태를 널리 보급하는 방법이다. 낙태는 너무 과격한 수단이어서 감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일단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형성하면 그것은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을 이룬 셈이므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사실상 우리가 억제하려고 애쓰는 행위와 똑같은 유형을 가진 공격행위이다. 따라서 피임이 더 바람직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피임에 반대하는 종교적 또는 도덕적 파벌은 자신들이 전쟁을 조장하는 위험한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 P192

종교는 결코 다루기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는 동물학자이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과학적인 의미에서, 종교 활동은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지배적인 존재를 달래기 위해 오랫동안 복종의 몸짓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중략) 이런 존재에 대한 복종적인 반응으로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애원하는 몸짓으로 두 손을 깍지끼거나, 무릎을 꿇거나, 땅에 입을 맞추거나, 완전히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경우도 있고, 울부짖거나 노래하는 발성행위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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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속삭임 - 합본개정판
기시 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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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는 책을 참 재미있게 쓴다.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게 쓰지?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달인이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읽었다.
즐거움을 주려는 책이고 교훈이 목적은 아니지만, 가끔 오래 기억나는 얘기들도 있는데,
주인공의 선배가 했던 인간관계의 스프링 네트 얘기는 잊기 전에 적어두고 싶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네트워크를 만들며 산다고 생각해? (중략) 정보 따위는 어차피 9할이 쓰레기고 나머지도 독이 든 거야.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라는 것은 말이야, 정보망 같은 게 아니라 트램펄린 네트야.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무너질 테니까. 그럴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충격을 분담시켜서 네트 전체가 흡수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알겠어?"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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