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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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매우 고효율의 장치다. (중략) 철학이 생산되는 순간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이다. (중략) 철학 수입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울퉁불퉁함이 지적 사유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런 울퉁불퉁함은 특수하다. 공간과 시간에 갇혀 개별적 구체성으로만 있다. - P9

원래 동양에는 ‘철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 특별한 지적 형식이 없었다. ‘철학’이라는 지적 형식에 맞출 수 있는 내용은 있었지만, 그런 제목을 단 독립적 형식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양 철학’ ‘중국 철학’ 혹은 ‘한국 철학’이라고 하면, 다루는 자료가 과거의 것들이기 때문에 매우 오래된 학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신흥 학문에 속한다. ‘동양 철학’은 동양의 사상적 혹은 지적 자료를 철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을 말한다. ‘한국 철학’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사상적이고 지적인 자료를 철학적으로 다룬다는 뜻이다. 철학적으로 다룬다는 이 방법이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것이다. - P36

‘인문人文’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이다. 인간의 활동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개괄해 이해한다. 인간이 구축한 문명이란 모두 이 인간의 동선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면 전략적이다. 그 차원에서라야 비로소 상상이니 창의니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상상이니 창의니 하는 일들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일 뿐, 그 아래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 P73

조선의 많은 철학자들은 사실 철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주희(주자)를 닮으려고 안달이었다. 조선의 종속성은 이런 태도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에도 "조선의 철학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종교인이 철학적이기 어려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 P90

나는 자연과학이나 부강함이 바로 문화력에서 나온다고 본다. 행복, 인의, 자유, 사랑과 같은 덕목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의 높이가 바로 문화적이고 예술적이며 철학적인 단계다. 행복이나 인의나 자비 등과 같은 덕목은 그냥 개인적인 마음 씀씀이 정도로 치부될 일이 아니다. 이런 덕목들이 기능한다는 것은 이런 덕목들이 발휘될 정도로 고양된 인격을 가진 구성원들로 사회가 채워져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런 고양된 인격의 소유자들이 발휘하는 시선이나 활동성은 단계가 매우 높다. - P111

나는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자주 가지 않았었다. 가서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까? 그것은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높이와 내 시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발산하는 높이와 보는 사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으면 거기서 재미가 생길 수 없다. 일치해야만 비로소 재미가 생긴다. 무엇을 즐긴다는 것은 그것이 발산하는 높이와 자신의 시선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박물관이나 갤러리는 인간의 지성을 성장시키는 데 중요하고, 또 성장된 지성의 높이를 가져야만 즐길 수 있다.
- P126

건국-산업화-민주화를 직선적으로 완수한 탄력으로 바로 선진화로 진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정체를 알기 힘든 투명한 (추상적인) 벽 앞에 서서 당황하고 있다. 그 벽에 막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심지어는 건국 세력까지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건국 세력은 건국할 때의 틀로, 산업화 세력은 산업화의 틀로,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의 틀만 가지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을 뿐이다. - P138

인간이 독립을 시도하면서부터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 역사에 책임성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책임성은 믿음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독립적으로 발휘하는 태도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 P167

한국 학생들은 단체 여행을 할 때 여행 내내 개별적인 행동은 전혀 없이 집단으로 똘똘 뭉쳐 행동한다. 집단으로 모여 있고 뭔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서로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 학생들의 단체 여행은 그렇지 않다. 모두 함께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프로그램이 아니면 단독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기차 타고 이동할 때도 우리 학생들은 게임 등을 하면서 다 함께 뭉쳐 있는데, 미국 학생들은 혼자 책을 본다든지 혼자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해서 우리가 함께 여행 온 사람들인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어떤 모습이 더 좋고 나쁘고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일 것이다. - P176

공동체나 집단에 선험적 절대성을 부여하게 되면 마치 공동체나 집단을 절대선을 가진 고정 불변의 존재로 받아들이기가 십상이다. 집단에는 그런 힘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개별과 보편, 개인과 집단, 개별자와 공동체 등으로 나누어놓고 저울질하다 보면 당연히 무게중심이 보편이나 집단이나 공동체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집단은 대개 ‘보편’이라는 탈을 쓴 이념의 지배를 받고, 그러면서 권위가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 P177

우리가 보통 개별적 주체들의 주체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집단적으로 공유된 보편적 이념을 내면화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래서 주체라고는 하지만 기실은 보편적이거나 집단적 이념에 종속되어 있다. 더군다나 내면화된 보편성은 우주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정치적 이념의 공유자들끼리 나누는 보편성이거나 진영의 좁다란 보편성이어서 그렇게 넓고 높지도 않다. 이런 주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공동체는 주체들의 자발성이 발휘되지 못하여 사회가 경색되기 쉽다. 이런 구조에서는 문명의 진행 방향에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반응할 수 없어 종속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 P177

장자는 가치의 결탁물인 자기를 ‘아我’로 표현하고, 가치의 결탁을 끊고, 즉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난 자기를 ‘오吾’로 새겼다. 가치관으로 결탁된 자기를 살해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날 수 없다. 자기 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한다.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도 글자 그대로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다. 그래서 무아는 ‘진아眞我’와 같아진다. 진인으로 새롭게 등장한달지 진아로 우뚝 서는 일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그것을 반성이라고도 하고, 각성이라고도 하며,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자기살해 이후 등장한 새로운 ‘나’, 이런 참된 자아를 독립적 주체라 한다. - P216

능동적 주체를 장자 식으로 표현하면, 자신을 지배하던 규정적 관념, 즉 성심成心으로부터 벗어난 소요逍遙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일반화하여 ‘자유自由’라고 표현해도 된다. ‘자유’라는 말 자체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중략) 자기 이외의 것들은 자기를 키우고 단단하게 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 P220

고전에 있는 ‘진리적’인 것들이 당시의 구체적인 세계와 어떤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한 후,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유기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시대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포착된 자기만의 문제가 자기에게서 먼저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관건이지, 경전에 있는 진리를 묵수하는 것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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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자유
밀턴 프리드먼 지음, 심준보 외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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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은 국가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각자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저마다 목표와 목적을 이루며, 무엇보다도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나와 내 동료 시민들이 정부를 통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인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자유를 보호하고자 세운 정부가 바로 그 자유를 파괴하는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덧붙일 것이다. - P23

문명의 크나큰 진보는, 건축이나 회화에서건 과학이나 문학에서건 또는 공업이나 농업에서건 간에, 결코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이룩한 것이 아니다. (중략) 그들의 업적은 개인의 뛰어난 재능, 완강하게 고수한 소수 의견, 다양성과 차이를 용납한 사회 분위기의 합작품이었다. - P25

자유주의자는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본다. 그는 사회조직의 문제를 ‘좋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못지않게, ‘나쁜’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소극적인 문제로 본다. 물론 누가 판단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 수도,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 P41

빵을 사는 사람은 그 빵의 재료의 밀을 재배한 사람이 공산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 입헌주의자인지 파시스트인지, 혹은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비인격적 시장이 어떻게 경제적 활동을 정치적 견해로부터 분리하는지, 그리고 경제활동에서 생산성과는 무관한 이유는 – 그 이유가 그들의 견해와 관련된 것이건 피부색에 관련된 것이건 간에 –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 P54

목공이든 배관공이든 교사든 직종을 막론하고 노동자들 대다수는 표준급여체계를 지지하고 성과에 따른 차등에 반대하는데, 그런 현상의 분명한 이유는 특별히 재능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 P162

만약에 어떤 사람이 순전히 사악한 의도에서 혹은 사적인 복수를 위해 차를 뒤엎거나 물건을 파손했다면 그들을 법적으로 면책시켜야 한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노동쟁의 중에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들은 무죄 방면될지도 모른다. 당국이 묵인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혹은 잠재적으로 물리적인 폭력과 강제를 수반하는 노동조합 활동들은 거의 생기지 않을 것이다.
- P211

이러한 효과들을 고려해볼 때, 나는 면허제도가 의료행위의 양과 질을 함께 감소시켰고,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덜 매력적으로 여기는 다른 직업을 갖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감소시켰으며, 공중으로 하여금 덜 만족스러운 의료 서비스에 보다 큰 비용을 지급하도록 강요했고, 의학 자체는 물론 의료업 조직의 기술적 발전을 지체시켰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의료업의 요건으로서의 면허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 P246

서방 국가들이 지난 2세기 동안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경험하고, 자유기업이 가져다주는 혜택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절대적 의미의 빈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빈곤이란 상대적인 문제이며, 사실 서방 국가에서조차도 일반적으로 빈곤하다고 여겨지는 여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하나의 수단이자 여러모로 가장 바람직한 수단은 바로 사적인 자선행위다. 자유방임주의의 전성기였던 19세기 중후반의 영국과 미국에서 민간 자선기구와 단체가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정부의 복지활동이 늘어남과 동시에 민간의 자선활동은 쇠퇴해왔으니, 후자야말로 전자로 말미암아 사회가 치르게 된 주요한 대가 중 하나다. - P296

자유주의 철학의 핵심은 개인의 존엄성을 믿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행동할 다른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스스로 판단한 바에 따라 각자의 능력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의 동등성에 대한 믿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불균등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 P302

자유주의자는 자유사회가 실제로는 지금껏 시도된 다른 어떤 사회체제보다 물질적 평등에 가까운 사회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이것을 자유사회의 바람직한 부산물로 볼 뿐, 자유사회를 정당화하는 주요한 근거로 보지는 않는다. (중략) 그리고 어쩌면 빈곤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국가의 활동이 사회의 절대다수 구성원들이 공동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더욱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수긍할지도 모른다. (중략) 평등주의자도 여기까지는 같은 입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빼앗는 일을 옹호할 텐데, 바로 그 ‘어떤 사람’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어서가 아니라 ‘정의’에 입각하여 그렇게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평등은 자유와 첨예하게 충돌하며, 개인은 그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느 누구도 평등주의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 P303

과거 수십 년 동안 정부가 새로 시작한 전례 없는 사업들은 대부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계속 발전해왔다. 국민의 의식주나 교통사정도 더 좋아졌고, 계급 및 사회 격차는 좁혀졌으며, 소수집단이 겪어야 했던 불이익도 줄어들었고, 대중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유시장을 통해 서로 협조하는 개인들의 창의력과 추진력의 한물이었다. 정부가 취한 조치들은 이런 발전을 방해해왔지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오직 시장의 경이로운 창조성 때문에 이러한 조치들을 감당해내고 극복해올 수 있었다. 보이는 손이 뒤로 끌어당기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앞으로 끌고나가는 힘이 더욱 강력했던 것이다.
- P310

자유의 보존과 확장은 오늘날 양 방향에서 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매우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다. 우리를 매장시키려는 크렘린의 악당들로부터 오는 외부적 위협이 그것이다. 다른 위협은 훨씬 더 미묘한 것으로, 이는 좋은 의도와 선의를 갖고 우리를 개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내부적 위협이다. 설득하고 모범을 보이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계획한 사회적 대변혁을 이루고 싶어 안달이 난 나머지,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몹시 사용하고 싶어하며, 자신들의 능력으로 국가권력을 휘둘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따는 데 대해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권력을 잡는다 해도 그들은 당면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며, 결국에는 집산주의 국가를 만들어내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그들 스스로 그 결과에 기겁할 것임은 물론, 그로 인한 최초의 희생자들 중 하나가 되고 말 것이다. 집중된 권력은 그것을 창출한 사람들이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해서 당연히 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 P313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체계, 그리고 자유로운 제도들이 짜여 이루어진 그물망은 굳세게 버텨낼 것이다. 국방계획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또 경제력이 이미 워싱턴에 집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자유를 유지하고 확대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직면한 위협에 경계심을 풀지 않고, 강제적인 국가권력보다는 자유로운 제도들이, 비록 그것이 때때로 우회로일지는 모르나,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할 확실한 방도임을 동시대 시민들에게 납득시킬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지적인 풍토에서 이러한 변화의 실마리가 뚜렷해졌다는 것은 희망적인 조짐이라 할 수 있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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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들이 말해주는 그림 속 드레스 이야기
이정아 지음 / 제이앤제이제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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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불편하기는 처음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권 스타일의 좌익 민족주의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읽지 말 것을 권한다. 실려있는 그림들이 예뻐서 글이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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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 하이에크 -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니컬러스 웝숏 지음, 김홍식 옮김 / 부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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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존 네빌 케인스는 경제학 서적을 여러 권 저술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의 관리자였다. 어머니 플로렌스도 지식인이었는데 케임브리지 내 여자 대학인 뉴넘 칼리지의 초창기 졸업생이었으며 케임브리지 최초의 여성 시장이 되었다. 케인스는 그런 부모보다 더 독립적이고 더 독창적인 사고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누렸다. 영국 귀족 집안 자녀들이 다니는 일류 고등학교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고는 킹스 칼리지 학부에 입학해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케인스는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선생님은 허연 수염이 성성한 부친의 스승 앨프리드 마셜이었다. 마셜은 영국 경제학계의 거장으로, 영어권의 대표적인 경제학 교과서인 "경제학 원리(1890)"를 저술했다. 이 책은 공급과 수요가 일치할 때 가격이 형성되며 어떤 물건의 가치는 그 효용이 결정한다는 등의 기초적인 경제학 개념 체계를 처음으로 구축했다. 케인스의 영민함에 큰 인상을 받은 마셜은 케인스에게 수학을 그만두고 경제학을 더 공부하라고 독려했다. - P30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때 하이에크는 열다섯 살의 학생 신분이었다. 자기 또랭 비해 키가 큰 탓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더러 어째서 군에 입대하지 않았느냐고 묻곤 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독일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하자, 애국심 있는 가문이었던 폰 하이에크 집안은 황제의 판단에 추호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이러한 집안 정서는 19세기 말 빈의 분위기에서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세 형제 중 맏형이었던 하이에크가 오스트리아 군대의 장교가 되겠다고 서명한 것은 막 18세가 된 1917년 3월이었다. - P49

그의 아버지 아구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원래 대학 강사가 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사로 생활했다. 상근직 학자의 지위를 얻지 못한 패배감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아우구스트는 빈 대학엣 시간제로 식물학을 강의하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 케인스 집안처럼 하이에크 집안도 학문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다. 아우구스트의 부친 구스타프 폰 하이에크는 고등학교 과학 교사였고, 아우구스트의 장인 프란츠 폰 유라셰크는 오스트리아의 유명 경제학자였다. - P49

케인스도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걷잡을 수 없는 물가 상승의 위협을 언급한 바 있다. (중략) 케인스는 독자들에게 통화가치 붕괴가 혁명을 자초하는 것임을 환기시키며 이렇게 언급했다.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하려면 통화를 망가뜨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단언했다. 지속적인 물가 상승 과정을 통해 각국 정부는 자국민의 커다란 재산을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은밀한 방식으로 몰수할 수 있다." - P59

미제스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나 화폐의 사용에서 이탈하는 길로 나가는 것은 곧 합리적 경제 논리에서도 이탈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미네스의 주장은 사회주의는 시장가격을 무시함으로써 개인이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즉 가격을 지불할 의사를 통해 물건이나 서비스의 값어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제각기 표현하는) 행위를 박탈한다는 하이에크의 최종적 입장 중 하나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이에크는 나중에 중앙계획은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박탈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 P76

1929년 10월 미국 주식 시장 붕괴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중략) 세계는 10년이나 끌게 될 기나긴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대량 실업과 빈곤의 이중고는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고통의 심연이었다. 어찌 손쓸 방법도 희망도 없는 험악한 새로운 환경에서도 낙관주의자 케인스는 혼란에서 벗어날 참신하고 명확한 출구를 순발력 있게 제시했다. 반면 비관주의자 하이에크는 경제 시스템을 교정하려는 모든 시도가 왜 아무 소용이 없는지 그 원리를 제시하는 길로 나아갔다. 암울한 상황에서 케인스가 제시한 생각은 한 가닥 희망이었꼬 세상에서 두루 환영을 받았다. 하이에크가 제시하는 침울한 진단은 옳든 그르든 별로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 P96

198센티미터의 큰 키로 허리 자세가 약간 구부정했던 케인스는 주변을 압도하는 풍모가 있었다. 움푹하게 들어간 훈훈한 느낌의 밤색 눈동자와 감미로운 목소리가 남자든 여자든 그의 매력에 빠지게 만들었따. 블룸즈버리 그룹의 리턴 스트레이치, 덩컨 그랜트 등과 한때 연인 관계였고,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한 은행가 카를 멜키오르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케인스의 정적들은 케인스를 비판하는 데 그의 동성애 성향을 갖다 대기도 했다. - P100

하이에크는 케임브리지에서 내놓는 해결책들은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논리적 결함이 많다는 것을 보여 줬다.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정책이라도 그것만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 경제 불황을 돈을 차입해 투자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면 사태는 더욱 나빠질 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그 대신 하이에크는 냉정하지만 진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신속한 해결책을 포기하라는 것, 달갑지는 않지만 균형을 상실한 경제는 시간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것, (중략) 시장은 그 자체의 논리, 그 자체에 맞는 자연적 해결책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 P154

하이에크는 히틀러가 독일 경제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지 지켜보며 자유시장이야말로 경제학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자유 사회를 지키는 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치솟는 물가를 경험한 것이 하이에크가 오스트리아 학파의 자본 이론을 신뢰하는 밑거름이 됐듯이, 가까운 가족을 비롯해 나치의 폭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그가 자유시장의 부정이 어떻게 전체주의를 부를 수 있는지를 경제학을 넘어 철학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 P261

1936년 2월 4일, "고용, 이자, 화폐에 관한 일반 이론"이 나왔다. 책에 대한 관심을 고무하기 위한 케인스의 사전 작업이 아주 잘됐기 때문에, 400쪽 분량에 담긴 새로운 내용을 일찌감치 알아 두려는 열의에 찬 젊은 경제학자들이 특히 책을 많이 찾았다.
- P272

하이에크는 1937년 월터 리프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의 ‘진보적’인 친구들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과 집산주의적 실험은 불가피하게 파시즘을 초래한다는 것을 좀처럼 알아듣지 못한다. 이 점을 꼭 납득시키고 싶다."라고 썼다. - P354

"노예의 길"은 1944년 3월 10일 영국에서 라우틀리지 출판사를 통해 2천 부가 출간됐다. 그런데 단 며칠 만에 2500부를 더 인쇄했고, 얼마 안 가 책을 찾는 독자의 수요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물량이 달렸다. 미국에서는 주력 출판사 다수가 출간을 거절했지만, 1933년 9월 18일 시카고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 P355

하이에크는 통상적으로 극좌와 극우를 서로 정반대인 양극단으로 여기는 인식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극좌와 극우 모두 시장의 작동을 폐기하고 포괄적인 국가 계획을 동원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공격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경제를 계획하는 사람은 다른 사회 구성원의 의지를 알 도리가 없는 탓에 경제를 계획하려고 들면 어쩔 수 없이 독재자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다시금 강조했다. - P355

케인스는 1944년 6월 미국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에서 열리는 ‘브레턴우즈 회의(1944년 7월 1-22일 개최됐으며 정식 이름은 ‘국제연합통화금융회의’다)‘에 참석하러 대서양을 건너고 있을 때 "노예의 길"을 읽었다. (중략) 케인스는 배에서 내린 뒤 뉴저지 애틀랜틱시티의 클래리지 호텔에 도착해 푹 쉬는 참에 그의 숙적에게 짤막한 편지를 적어 보냈다. "여행하면서 자네 책을 찬찬히 읽어 볼 기회를 얻었따네. 훌륭한 책일세. 정말로 꼭 언급해야 할 이야기를 유려하게 언술했으니 우리 모두 대단히 감사할 일이지. 자네도 책에 담긴 경제 관련 언명을 내가 전부 수긍할 거라고는 여기지 않겠찌. 하지만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견지에서는 거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네. 단지 동의하는 차원을 넘어 깊은 감동까지 느꼈네." - P361

1946년 4월 30일 오전, 케인스의 약해진 몸은 아주 분주하고 빡빡한 여러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부담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케인스는 주로 머물던 이스턴서식스 틸턴의 농가에 있는 자기 침대에서 숨을 거뒀다. 사인은 중년 때부터 발병한 심장병이었따. 그의 마지막 순간에는 리디야와 어머니가 곁에 있었다. 그의 나이 고작 62세였따. 케인스가 영국의 전쟁 차관을 협상하러 미국에 갔을 때 동행했던 예전의 적수 로빈스는 리디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케인스는 "전쟁에서 쓰러진 것과 다를 바 없이 자기 삶을 나라에 바쳤습니다."라고 썼다. 하이에크도 리디야에게 편지를 보내, "정말로 위대하고 무한히 존경하던 분이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가난한 곳이 됐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 P372

케인스가 인간성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했다면, 하이에크는 회의론자이며 비관론자였다. 하이에크의 논지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종국적으로 뜻하지 않은 결과를 부르기 쉽다는 것이었다. 또 자유시장은 개인의 자기 잇속에 바탕을 둔 합리적 결정을 준거로 삼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며, 이상주의가 끼어들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낙관론자와 이상주의자는 케인스를 따르는 편이었고, 비관론자는 하이에크에게서 실망스러운 현실 세계를 바라볼 냉정한 길잡이를 발견했다. - P381

하이에크는 사람들이 "노예의 길"을 적대시하는 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거세게 표출된 혐오감은 쉽게 가시지도 않았다. 언론인 랠프 해리스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1950-1960년대에 하이에크는 증오와 혐오의 대상 취급을 받았다. 좌파 진영 학자들은 각 개인의 면면을 볼 때는 결코 모나고 거친 이들이 아닌데도 하이에크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중략) 그와 같은 혐오감에는 종교 전쟁 같은 면이 좀 있었다. 사회주의와 공정성, 평등이라는 고귀한 이상을 비판하는 것은 무언가 아주 훌륭한 것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사회주의는 분명히 다가올 현실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문명사회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아주 많았는데, 그들의 눈에는 하이에크가 그렇게 비친 것이다." - P382

하이에크는 케인스주의에 대항하는 반대파를 자신이 앞장서서 이끌고 싶었다. 자신과 함께할 사람들이 전부 오스트리아학파를 따르지는 않더라도 ’경제적 자유주의자 economic liberals’로 묶일 수 있을 것이며, 경제와 시장이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자 liberal economists’의 기본적 입장이라고 봤다. 하이에크는 자신이 찾는 협력자들이 미국 ‘자유주의자들 liberals’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적 관습의 제약에 구애되지 않고 사적인 삶에서 자기 뜻대로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주창하고 있지만, 정작 경제적 주장에서는 자유주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또 ‘자유주의적 liberal’이라는 말 자체를 그처럼 어지럽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 P383

하이에크는 1947년 4월에 열흘 동안 ‘정상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문자 그대로 산꼭대기에서 하는 회의였다. 스위스 브베 인근 제네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몽펠르렝 (펠르렝 산) 정상의 파르크 호텔을 회의 장소로 선정한 것이다. (중략) 하이에크는 필요한 경비는 모두 해결됐다는 말과 함께 60여명 가량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10개국에서 37명이 참석하겠다고 확답했다. - P384

이 첫 회의에는 미제스, 로빈스, 나이트, 룁케, 시카고학파 경제학자 조지 스티글러를 비롯해, 1933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도피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프리츠 마흘루프, 경제 계획에 반대하는 영국 경제학자 존 주크스, LSE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 "뉴욕 타임스"에 우호적인 서평을 써서 "노예의 길"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데 기여한 바 있는 헨리 해즐릿, 제네바 고등학술연구원 학장 윌리엄 라파르트,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영국 내전을 연구하는 역사가로 정치와 문학을 다루는 잡지 "타임 앤드 타이드"에 기고하던 베로니카 웨지우드 등이 참석했다.
- P386

이 첫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하이에크의 사상을 실질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아마도 밀턴 프리드먼이었을 것이다. 시카고 대학 경제학자 프리드먼은 당시 35세의 약관으로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이 첫 해외여해이었는데, 시카고 대학 법률대학원 교수이자 그의 처남인 에런 디렉터의 추천으로 회의에 초대받았다. (중략) 프리드먼은 나중에 몽펠르랭 회의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젊고 순진한 미국 촌사람이었던 내가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모두 자유주의 원칙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고, 전부 자기 나라에서 어려운 처지에 몰려 있었다. 이미 국제적으로 유명한 학자도, 나중에 유명해질 학자도 있었다. 모두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친분을 나눴꼬, 자유주의 사상을 보존하고 키워 가는 모임을 설립하는 일을 거들었다." - P386

하이에크의 생각과 시카고학파의 개념은 아주 많이 달랐다. 프리드먼은 경제와 정치를 바라보는 하이에크의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을 옹호했지만, 오스트리아학파의 ‘생산 단계’ 개념은 무시했다. 또 프리드먼은 정부가 통화량을 규제하는 정책이 옳다고 봤는데, 통화량 규제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생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에크는 자유시장만이 유일하게 좋은 것이라고 봤던 반면, 나이트 같은 시카고학파 자유시장도 정부 개입 못지않게 비효율적일 수 있다고 봤다. - P386

프리드먼은 불필요한 통화량 제한과 그에 뒤따르는 경기 후퇴의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경제학에서 새 돌파구를 열었는데, 이 점에서도 시카고학파가 오스트리아학파와 얼마나 다른지 드러난다. 경제 활동은 수량으로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며 평균값은 개인들이 가격을 설정하는 과정을 제대로 대변하는 지표가 아니라는 것이 하이에크와 미제스의 생각이었다. 이와 달리, 프리드먼은 경제를 전체로 취급하는 케인스의 생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꼬 평균값을 경제적 변화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 P386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유럽은 케인스주의의 실험장이 됐다. 서유럽의 문턱에 소련을 둔 상태인 만큼 미국은 ‘극단주의가 싹틀 조건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남긴 교훈을 중히 여겼다. 미국 납세자들은 패전국을 빈곤에 몰아넣어 처벌한 게 아니라 마셜 플랜을 통해 그들이 다시 잘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 P411

1960년 11월로 다가온 대선에서 케네디는 "침체에 빠진 나라를 다시 살리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간발의 차이로 승리했다. (중략) 이 35대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난 명백하고도 냉정한 교훈을 이후 미국 대통령 모두가 열심히 배웠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길은 경기 순환을 4년의 대선 주기에 맞출 수 있도록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며, 재정수지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용감하게 나섰다가는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된다는 교훈이었다. - P421

실업률과 물가가 동시에 오를 수는 없다고 봤던 케인스주의자들의 생각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더불어 그들의 이론에 대한 신뢰도 많은 부분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경제를 관리하기 위한 케인스의 도구들은 한동안 확실하게 작동했지만, 이제는 그 확실성이 무너졌다. 밀턴 프리드먼은 "스태그플레이션은 케인스주의의 종말이었다."라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한때 모든 걸 다 아는 듯했지만 이제는 허겁지겁 설명할 방도를 찾아 나서는 신세가 됐다. - P435

카터는 결국 1980년 11월까지 물가를 잡을 수 없었고, 그 덕에 형형한 눈빛에 상냥한 호남형인 공화당의 적수 로널드 레이건이 승세를 잡았다. 레이건은 유권자들에게 "4년 전보다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대답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니요"였따. 심판은 카터만이 아니라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게도 내려졌다. 케인스가 사망한 지 34년이 지나고 또 그의 "일반 이론"이 세상에 나온 지 40여 년이 지난 뒤, 케인스주의는 마침내 수명을 다한 듯했다. 특효약도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듯이 그의 처방을 내미는 사람들은 그 묘약을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처방한 듯했다. 바야흐로 경제 이론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할 때가 찾아왔다. 하이에크와 그 동맹자들이 오랫동안 기획해 왔던 일이었다. - P436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프리드먼은 뉴저지 주립대학과 시카고 대학,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 무렵 루스벨트의 뉴딜에 참여하려고 몰려드는 젊은 경제학자들의 흐름을 따라갔으므로 1930년대만 해도 그는 넓은 의미의 케인스주의자였던 셈이다. 이어서 프리드먼은 워싱턴에 있는 국가자원위원회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어서 프리드먼은 "뉴딜은 개인적으로 우리가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이었따."라고 말했다. - P444

프리드먼은 케인스와 하이에크처럼 경기 순환에 매료되어 대공황의 원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부터 미국의 경기 순환을 쭉 훑으면서 각 고점과 저점을 연구했는데, 경기 후퇴 국면마다 그에 앞서 통화량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따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대공황기의 자료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만일 1929-1933년에 미 연준이 통화량을 급격히 줄인 것과는 반대로 금리를 내려 통화량을 늘렸따면 불황이 서너 해 정도에 그쳤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러한 추론에 따라 프리드먼은 대공황은 통화량이 대폭 줄어든 "대수축 great Contraction"이었고 피할 수도 있었던 인재였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기 순환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으로 통화량이 완만한 속도로만 증가하도록 통화량 증가를 엄격하게 통제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이 "통화주의 monetarism"라고 알려진 정책이다. - P445

프리드먼은 케인스주의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얼마나 놀라운 처방인가. 소비자들은 버는 돈에서 더 많이 지출하면 된다. 그러면 소비자들의 소득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정부는 돈을 더 많이 쓰면 된다. 그러면 총수요가 추가적 지출의 몇 배수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또 정부는 세금을 낮추면 된다. 그러면 총수요가 감세분의 몇 배수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케인스가 정치인들에게 백지 수표를 주었다고 한탄하면서도 케인스에 대해 하이에크만큼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케인스의 이론은 이론으로서 갖춰야 할 간결함 면에서나 서너 가지 핵심적인 변량에 집중하는 면에서나, 또 잠재적 효력 면에서나 올바른 유형의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케인스의 이론을 배격하게 된 것은 증거에 의해 반박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 P446

하이에크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했다. 정치와 가까워지면 타협하고 절충하다 원칙을 양보할 위험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그보다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시스템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라면서 프리드먼은 이렇게 언급했다. "지금 정부에게 주어진 권력이 유감스러울 수도 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그러한 정부의 여러 권력을 제거하기 위해 동료 시민을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권력이 존재하는 한, 그 권력이 집행이 비효율적인 것보다는 효율적인 것이 나을 때가 많다. 항상 그렇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 P448

일리노이 유리카 칼리지에서 레이건은 케인스 경제학 이전의 오래된 정통파 경제학을 공부했다. 지식인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만 레이건은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촬영 현장에서 한참 대기하는 일이 잦고, 항공 여행을 두려워한 탓에 오랜 시간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책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농담을 잘하는 겉모습과 달리 책을 찾는 그의 취향은 전혀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레이건은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경제 이론을 읽었다". - P452

1964년 레이건은 골드워터의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캘리포니아 주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나서는 데 동의했다. 레이건은 로스앤젤레스의 코코넛그로브 나이트클럽에서 평소 견해대로 높은 세율과 큰 정부를 비판하는 연설을 한 뒤, 전국으로 방송되는 텔레비전 유세에 나가 골드워터의 불안한 대선 운동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선택의 시간 Time for Choosing"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된 레이건의 지원 연설은 패세가 굳어 가는 골드워터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에 이뤄졌다. 하지만 이 연설은 충실한 보수주의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하룻밤 사이에 레이건을 보수파의 총아로 만들어 놓았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되고 이어서 백악관으로 입성하는 레이건의 여정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
- P452

스태그플레이션의 출현과 더불어 1974년은 케인스주의자들에게 끔찍한 해였다. 반면에 하이에크의 명성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경제적 자유주의에 다시 힘을 불어넣고자 했던 하이에크의 기나긴 모색은 이 때 큰 탄력을 받았다. 바로 그해에 하이에크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는 특히 케인스주의자들에게 충격이었다. - P455

대처의 철학은 어릴 적부터 조그만 상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곁에서 배운 확신에서 비롯됐다.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 줄 지적 근거를 찾아 나선 대처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던 시절 "노예의 길"을 읽었고, 1974년에는 하이에크의 그 책이 새삼 시의적절하다고 느꼈다. 보수당의 당권을 자악한 직후, 대처는 보수당 내에서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 있는 연구 조직과 회동하게 된 어느 날 가봉 속에서 하이에크의 "자유의 권느을 세우다"를 꺼내더니 탁자에 쾅 하고 던지며 큰 소리로 말했따. "이게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요!".
- P459

전후 영국의 양당은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간 지대의 유권자들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정치적 합의점에 도달한 바 있다. 보수당이 복지 국가와 경제를 관리하는 문제를 놓고 노동당과 절충한 정책들로, 국가가 공공 서비스와 기간산업을 소유해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가 전화, 전기, 가스, 수도, 철도, 벗, 항만, 공항을 소유하는 데 더해 조선소와 제철소도 모두 소유하고, 영국항공과 영국석유, 그 밖의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됐다. 대처는 이 합의점들을 하나하나 따져 해체하려고 작정했다. 감리교 신자인 대처는 전쟁을 선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형제들이여, 나는 합의를 원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내 신앙이다. 내가 열렬히 믿는 것이다. 당신도 이걸 믿는다면 나를 따르라.’" - P459

그후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부 개입이 폭정으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한 하이에크의 주장은 인기를 더해 갔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한 것은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변화였따. 이로써 75년 동안 러시아인의 삶에서 자유시장을 제거하는 무자비한 공산주의 실험은 막을 내렸고, 구소련과 동유럽에 자유시장을 표방하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 체코의 1, 2대 대통령인 바츨라프 하벨과 바츨라프 클라우스, 폴란드 부총리 레셰크 발체로비치는 가장 암울했던 시절에 희망과 의욕을 주는 존재였다며 하이에크를 칭송했다. - P475

케인스주의적 개념들이 수세에 몰리고 자유시장 개념들이 다시 고개를 드는 와중에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붕괴되는 모습을 본 하이에크는 자신의 정당성이 입증됐다고 느꼈다. 말년에 베를린, 프라하, 부쿠레슈티 등에서 버러지는 사건을 지켜보며 하이에크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봐라, 내가 말했잖니." 1992년 3월 23일 독일 남서부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에서 하이에크는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P475

나라 경제를 관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경제 성장을 극대화하고 물가 상승을 억제하려면 케인스와 프리드먼을 배합해야 한다는 합의가 폭넓게 형성됐다. 그럼에도 오래전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 구도에 따라 대체적으로 갈라지던 학계 경제학자들 사이의 간극은 1970년대 이래 여전히 컸다. 한편에는 ‘민물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이 학자들이 자리 잡은 대학들이 북미 오대호 인근에 모여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다른 한편에는 미 동부 대서양 연안 대학 출신이거나 그곳에 자리잡은 ‘짠물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민물 경제학자들은 하이에크처럼 물가 상승이 나라에 가장 해로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짠물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처럼 시럽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 P476

기본적으로 경제를 관리하는 기조하에 주로 프리드먼적인 통화 정책을 펼침으로써 케인스와 프리드먼 양쪽의 접근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 앨런 그린스펀이었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연준을 지휘하고 관리한 그린스펀은 능수능란한 기량을 가진 대가로 일컬어졌따. 그의 퇴임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의 실책으로 지적되는 일은 드러나지 않았다. - P480

2008년 2월 부시는 의회에 케인스주의적 경제 부양 조치로 1680억 달러의 소득세 환급을 요청했다. 미국 재무부는 은행이 보유하는 7000억 달러 상당의 ‘문제 자산’을 구매해 줬다. 최후의 순간에 돈을 쓰는 주체인 국가는 경제가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대대적인 개입에 나섰다. (중략) 2008년 10월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은 그 밖의 위태로운 금융 회사들을 구제하는 데 쓸 자금으로 7천억 달러를 의회로부터 승인받았다. 2008년 12월 16일 연준은 금리를 0퍼센트로 낮췄다. 전 세계 정부와 중앙은행들도 유사한 조치를 취했다. 케인스는 대단한 기세로 다시 돌아왔다. (중략) 시카고 경제학자 중에서도 케인스를 파묻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루커스는 "참호 속에 몸을 숨길 때는 모두가 케인스주의자가 될 것으로 짐작한다." 라며 농담조로 말했다. - P495

그 얼마 전 영국은 독일 잠수함 유보트 기지가 위치한 중세 도시 뤼베크와, 하잉켈 폭격기 제조 공장이 몰려 있는 로스토크를 폭격했다. 그 보복으로 독일 폭격기가 1942년 봄에서 여름 사이 전략적 가치도 없는 영국 도시들을 줄지어 폭격하는 바람에 엑서터, 배스, 요크의 오래된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이며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 영국 언론의 머리기사에는 "베데커 공습"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독일군의 공습 표적이 된 도시들이 마치 문화적 가치에 따라 도시 등급을 매긴 독일 베데커 출판사의 여행 안내서에서 선택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략) 폭탄의 폭발에 맞설 수는 없지만 건물 지붕에 닿기 전에 날아드는 불덩이를 난간 너머로 떨어뜨리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의 화재 감시 경험을 통해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제 예순을 앞둔 케인스와 마흔을 갓 넘은 하이에크는 지붕의 석회암 난간에 삽을 세워 놓고 곧 들이닥칠 독일의 공습에 대비하며 앉아 있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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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 시리즈 71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자유기업원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경제 서적을 기대하고 읽었는데, 정치적 팜플렛에 가까운 책이어서 예상과 달랐다. 그렇지만 자유의 위기에 대해 저자가 느끼는 절박한 위기감과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려는 정직하고 헌신적인 태도가 감동을 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의 인생 책인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연상시키는 책이었다. 

사회문제에 대한 전문연구자가 정치서적을 쓸 때 첫 번째 의무는 정치서적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정치서적이다. 사회철학 에세이라는 우아하고 야심적인 제목을 붙여 이 점을 감출 생각은 전혀 없다. 어떤 제목을 붙이든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이, 특정한 궁극적 가치들로부터 도출되었다는 핵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에서 첫 번째 의무보다 경시할 수 없는 두 번째 의무도 잘 수행했기를 바란다. 그 두 번째 의무란 바로 전체 주장이 기초하는 궁극적 가치들이 무엇인지 의심의 여지없이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비록 이 책이 정치서적이지만, 이 책에 서술된 신념은 나의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점을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 P25

내가 사회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까닭은, 내가 성장하면서 접해 본 친숙한 이론들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사실 그 견해란 젊은 시절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자 경제학 연구를 나의 직업으로 만들었던 것이기도 하다.
- P25

요즈음 정치적 견해를 드러낸 서적이 출판되면, 저술의 경제적 동기를 찾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이 책을 쓰는 나의 경우는, 개인적 이득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책을 출판하지 ‘않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유를 가진 아주 별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출판은 분명 친하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다. 이 책을 쓰느라 나는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제쳐 두어야 했고, 이 책보다 장기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정치서적을 출판하고 나면, 사람들은 내가 정말 소중히 여기는 나의 엄격한 학문적 연구성과들에 대해서조차 분명히 편견을 가지고 읽을 것이다.
- P26

그럼에도 이 책이 저술을 피하지 말아야 할 의무로 여긴 주된 까닭은, 일반대중들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미래의 경제정책에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이하고도 심각한 현상 때문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최근 수년 동안 전쟁기구에 소속되어 거기에서 부여받은 공식 직책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데 반해, 결과적으로 딴 속뜻이 있는 아마추어와 가짜 만병통치약을 파는 돌팔이들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고 있고, 이에 따른 위험수위가 너무 높아져 여론에 경고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나처럼 전쟁기구에 속하지 않아서) 아직도 글을 쓸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킬 걱정들을 모른 체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이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기꺼이 국가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일을 나보다 권위 있고 적격인 사람들에게 양보하였을 것이다.
- P26

자유주의는 경쟁이 유익하게 작동하려면, 세심하게 배려된 법적 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리고 과거 혹은 현재의 법 규칙들이 중대한 결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조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또한 만약 경쟁이 유효해지도록 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다른 방법에 의존해 경제활동의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주의는 개별적 노력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경쟁보다 더 열등한 방법들이 경쟁을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경쟁이 대개의 경우 알려진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권력의 강제적이고도 자의적인 간섭 없이도 우리의 행위들이 서로 조정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경쟁을 옹호한다. 사실, 경쟁을 선호하는 핵심적 주장의 하나는 ‘의식적인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며, 특정한 직업이 그 직업과 연관된 불리한 점과 위험요소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전망이 있는지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각자에게 부여한다는 점이다.
- P76

경쟁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일, 경쟁이 유효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을 때에만 비로소 경쟁을 대체하는 일,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거대 사회에 가장 유익하지만 어떤 개인이나 소수의 개인들이 그 비용을 보상할 수 있을 만큼 이윤이 나지 않는 성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 이 일들은 확실히 국가가 해야 할 광범위한 분야들이다. 국가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으로 방어될 수 있는 체제는 없을 것이다. 효과적 경쟁 체제는 그 어떤 다른 것만큼이나 현명하게 제정되고 지속적으로 조정되는 법적 틀을 필요로 한다.
- P79

개인주의자들은 개인이 정해진 한계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가치나 선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와 선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즉 이 영역들 안에서는 개인의 목적체계가 최고의 선이며, 다른 그 누구의 그 어떤 지시에도 종속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개인주의 입장의 본질은 바로 개인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 재판관으로 인식하는 것, 즉 가능한 한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 P105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수단이다. 즉 민주주의는 내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a utilitarian device)이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거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 P117

경쟁 하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어떤 사람이 큰 부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만 달려 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 있지 않다. 경쟁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영국의 미숙련노동자가 모든 진정한 의미에서 형편없느 임금을 받지만, 자신의 삶의 틀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독일의 무수한 소규모 기업가, 혹은 더 좋은 보수를 받는 엔지니어, 혹은 러시아의 매니저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 P161

아이들이 훌륭한 프롤레타리아로 성장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을 가장 어린 나이에서부터 정치조직 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시작한 사람들은 파시스트가 아니라 바로 사회주의자였다. 회원들이 다른 견해에 전염되지 않도록 당의 클럽 안에 스포츠와 게임, 축구와 하이킹을 조직화할 것을 처음으로 고안해낸 사람들 역시 파시스트가 아니라 바로 사회주의자였다. 당원은 서로 환영하는 방식과 연설하는 형식이 독특해 다른 이들과 달라야 한다고 처음으로 역설했던 이들도 사회주의자였다. ‘세포조직’의 양성과 사적인 삶의 영속적 감독을 위한 장치를 통해 전체주의 정당의 본보기를 창조한 이들도 바로 사회주의자였다. 나치스의 바릴라와 히틀러 청년당, 도폴라보르, 기쁨의 힘 단원, 정치제복과 정당의 군대식 편제와 같은 것은 모두 과거 사회주의의 조직을 모방한 데 불과하다.
- P174

자유는 오직 가격을 지불하고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심한 물질적 희생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 P196

사람들이 긍정적 과제보다는 적에 대한 혐오, 부자들에 대한 질시와 같은 부정적 강령일 때 합의에 이르기 쉽다는 것은 거의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대립, 집단 외부인에 대한 공동투쟁은 공동행동 집단을 견고하게 묶는 신조에 언제나 들어 있는 필수적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부정적 강령은 항상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거대한 대중의 무조건적 충성을 추구하는 사람에 의해 채택된다. 그들의 관점으로 볼 때, 이런 부정적 강령은 대부분 어떤 긍정적 강령보다 그들에게 더 많은 재량을 주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유태인’ 혹은 ‘툴락’과 같은 내부의 적이든 아니면 외부의 적이든, 이 적은 전체주의 지도자의 무기목록 속에 들어 있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 P202

일단 개인이 사회 혹은 국가라고 불리는 개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실체의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를 전율케 하는 전체주의체제의 특징들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집단주의 관점에서 보면, 반대자에 대한 가차없는 억압, 개인적 삶과 행복에 대한 완전한 무시는 이런 기본적 전제의 본질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결과들이다.
- P214

지금 별로 존중받지 못하고 별로 실천되지 못하는 미덕, 즉 독립식, 자조(自助),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 다수에 대항하여 자기의 소신을 지키는 각오, 기꺼이 자신의 이웃과 자발적으로 협력하려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 사회의 작동에 원천이 되는 미덕이다. 집단주의는 그 자리에 대신 집어넣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이 미덕들을 모두 파괴하였다면 개인으로 하여금 그저 복종하고 집단적 결정을 실행하도록 개인들에게 강제하는 것은 옳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채울 수 ㅇ벗는 공백이 남겨질 것이다.
- P285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만들어졌던, 우리의 길을 막았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개인들을 ‘지도’하고 ‘명령’하기 위한 또 다른 기구를 고안하기보다는 개인의 창의적 에너지를 분출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 P316

만약 자유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창출하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다시 시도해야 한다. 실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핵심적 원리는 19세기에 진리였듯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리이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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