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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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 작가가 아키노 마츠리의 '펫숍 오브 호러즈'를 읽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안으로 들어갈 수록 점점 더 알 수 없어지는 근원적 공포의 공간인 '펫숍'과 어딘가 인간을 초월한 듯한 '삼촌', 그리고 의심을 품고 다가오는 형사의 존재가 아무래도 저 작품을 연상시킨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불만이 스며 있는 것 역시 공통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넘쳐 나는 원색적이고 동물적인 폭력의 에너지는 '목화밭 엽기전'과 '펫숍 오브 호러즈'를 비교하는 일 자체를 망설이게 만든다.

'그래 우리 소풍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 '16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불쌍한 꼬마 한스'를 모두 재미있게 읽었지만, 작가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이 작품의 파괴적인 피냄새는 두드러진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사정 없는 폭력이다. 여기에서 강함은 곧 남성성과 통한다. 남편을 조종하며 권력에 편승하려던 박태자의 비참한 최후는 '남성=강자=폭력의 주체', '여성=약자=폭력의 대상'이라는 공식에 쐐기를 박는다. 더 남성적인 놈일수록 더 강한 이 위계의 피라미드가 남성 동성애와 맞물려 있는 것은 인상적이다. 더 이상 자식을 낳아 사회를 유지하는 생산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낭만적 사랑의 환상과도 결별한 채, 짐승같은 힘겨루기의 상징이 되어 버린 성행위는 독자의 상식에 대한 또 하나의 주먹질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걱정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뱃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야만성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노예 노동을 연상시키는 '목화밭'은 우리 안에 잠재된 짐승의 성향, 폭력 유전자의 존재를 끊임 없이 일깨워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상냥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질서를 사랑하는 강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성이라는, 학문이라는, 도덕이라는 이름의 바벨탑 안에서 자연의 본성으로부터 몸을 숨긴 채 죽는 날까지 안온하게 지내고 싶은 작은 소망을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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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세계제국 - 아시아총서 제7권
임대희 / 신서원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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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도 더 전에 키아누 리브스가 나오던 할리우드 영화에서 희화화된 칭기스칸을 본 기억이 있다. 공중전화 박스를 타고 과거로 날아간 주인공들이 만난 칭기스는 전형적인 야만인이었다. 이런 영화를 만든 미국인들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역시 몽골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역사적으로 몽골 제국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한국인이 가진 몽골상은 말을 탄 침략자 정도인 듯 하다.

저자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팽배한 몽골에 대한 편견이 명대에 편찬된 악의에 찬 元史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포함했던 이 거대 제국을 기록한 다른 기록,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제국의 正史인 Jami at-Tavarikh 즉, 集史를 바탕으로 대제국의 역사를 조망한다. 한문과 페르시아어 유럽어 등으로 기록된 많은 사료를 두루 아우르는 저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번영하던 세계 제국의 화려한 모습이 독자의 눈앞에 펼쳐진다. 강한 전사이고 실리에 밝은 상인이며, 태양을 숭배하고 부족의 결정을 존중하는 소박한 유목민이기도 했던 수백년 전의 몽고인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저자의 펜 끝에서 연구 대상에 대한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인 나에게는 몽골 제국과 고려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 특히 재미있었다. 저자는 '이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을 계속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칭찬하면서도 '민중을 희생하고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시킨 반세기 가까운 장기전을 치르는 것 외에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나라인 일본에 대한 '국가로서의 상대에 대한 응대감각이 극히 희박했다'라는 엄격한 비판에 비하면 정말로 조심스런 표현이지만, 삼별초의 활약만을 거듭 강조하는 학교 교육이 애써 무시했던 당연한 질문을 일깨운다. 무신정권과 '왕정 복고'에 대한 외국인 시점의 해석도 획일화되고 미화된 역사를 배운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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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 개정증보판
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 / 일조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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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문화인류학 맛보기'이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 강좌를 듣는 학생과 일반인을 위해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원들이 선정한 열 아홉 편의 민족지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는 확실히 재미있는 글들도 있지만 많은 글들이 어딘지 꺼끌꺼끌한 언어 탓에 부드럽게 삼켜지지 않는다. 그 결과, 다 읽은 후 '문화인류학의 맛'을 한 마디로 평가하려 했을 때 떠오른 단어는 저것이다. 밍밍함.

내가 최초로 읽은 인류학 관련 서적은 마빈 해리스의 '작은 인간'이었다. 수능을 앞둔 정신없는 시기에 금쪽 같은 시간을 쪼개 가면서 푹 빠져 읽었다. 그 때 느꼈던 짜릿한 기쁨과 지금의 밍밍함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 본 결론은 역자들의 어정쩡한 태도이다.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흐릿하긴 하지만 해리스의 책은 대중을 겨냥해 확실히 '재미'를 추구하고 있었다. 다양한 민족의 사례들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형태로 재구성되어 최소한도로 간략히 서술되었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거기에 비해 이 책은 포퓰러와 아카데믹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학에 몸을 담고 있는 학자인 이상 역자들의 글에 딱딱한 논문투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완역을 통해 '민족지 사례 논문집'을 내는 쪽이 좋지 않았을까? 학자가 학자답게 냉철한 것은 결코 허물이 아니지 않은가? 반대로 대중에 가까운 쉽고 발랄한 책을 내고 싶었다면 '논문번역'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내용을 재구성해야 했다. 잘 된 논문을 골라 대충 줄여서 쉬운 부분만 번역하겠다는 태도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차라리 학회 회원들이 직접 수행한 현지 조사 이야기를 이 책에 이미 수록된 사진들에 덧붙여 들려주는 쪽이 훨씬 생생하고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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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 창공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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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무라카미 류의 소설도 이걸로 다섯 권째 읽는다. 별 생각 없이 재미있게 본 '69'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고 '5분 후의 세계'나 '인 더 미소수프'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나 이 책이나 하나같이 어렵다. 막 빨려들어가서 정신 없이 읽는데 다 읽고 나서 정리가 안된다. 재미있기는 한데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글은 무지하게 잘 쓰지만 어딘지 이상한 작가.

이 책의 원제는 '엑스타시'이고, 주된 소재는 마약과 섹스, 그 중에서도 하드한 SM 플레이이다. 한국에서 출간됐으면 법정 시비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지만, 전혀, 조금도, 에로틱하지 않다. 너무 놀라워서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에로 따위는 저만치 도망가 버린다.

화자의 눈을 통해 제시되는 야자키, 게이코, 레이코라는 삼인조는 돈을 물쓰듯 쓰며 마약과 섹스에 탐닉하는 인물들이다. 더욱 나쁜 것은 이들이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장난감으로 끌어들여 폐인 만들기를 즐긴다는 것. 게다가 세 남녀 모두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불가사의한 매력을 가졌댄다.

사디스트, 님포마니아, 코카인과 엑스타시와 LSD... 전부 다 내 평범한 인생하고는 너무나 너무나 동떨어져서 조금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단어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그냥 판타지' 라고 밀어버리기엔 어딘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 것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질척질척한 음울함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도대체 이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참 고민한 끝에 결국 평가를 보류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가능성만을 보고 지나가자. 내가 알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면에서부터 산산히 부숴버리는 무언가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그렇게만 생각하자. 내 앞에 놓인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무엇 또는 기괴하기만 한 누군가와 마주쳐도 당황해서 흥분하지 않도록. 삶이란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고, 쉽게 풀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소설이 해야할 일 중의 하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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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샤워를 하지 않는다
이동훈 지음 / 다락원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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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책을 읽기 전에 저자의 약력을 꼼꼼히 살피게 되었다. 의외로 내용을 이해하는데 꽤 도움이 된다. '일본인은 샤워를 하지 않는다'라는 제목부터 소박한 이 일본론의 저자는 50년대에 한국 남부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오랫동안 경제 관련 관청에서 근무해 온 공무원이다. 자수성가했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중산층 중년 남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자를 '평범한 한국 아저씨'라고 불러 보자.

평범한 한국인 답게 일본을 싫어하고 좀 경멸하기도 했던 아저씨가 직장 일로 도쿄에 파견되어 2년간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일본이 보여 준 여러 모습들은 그가 가진 평범한 상식과 평범한 윤리에 의외로 상당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 작은 일에도 배려하는 것, 규칙을 잘 지키는 것, 근검절약하는 것, 공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 이런 모습들은 저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읽으면 실망하기 딱 좋은 책이다. 평범한 아저씨에게 일본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독특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요구하는 것은 실례다. 그러나, 단순한 '관찰기록'이라 하더라도 이 책은 꽤 재미있다. 샤워를 하지 않는다든지 세뱃돈을 봉투에 넣어 준다든지 자전거에는 꼭 전조등을 단다든지 하는 신변잡기적인 얘기가 뭐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대단치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데서 알지 못했던 일본 정보를 꽤 얻었으니 만족한다.

한편으로는 공사 구분 확실히 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며 집단의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저자의 논조가 고리타분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아저씨가 솔직하게 쓴 평범한 놀라움과 평범한 감동은 독자를 슬며시 웃음짓게 한다. 우리 아버지가 하실 법한 얘기라는 느낌. 내용과 크게 상관 없는 아들 딸 사진을 한 장씩 슬쩍 끼워 넣은 것도 애교다. 좋은 아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 관계된 이야기는 극단적인 것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21세기를 함께 걸어가야 할 가까운 이웃인 두 나라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상식일지도 모른다. 서두에서 말했듯 소박한, 어딘지 어설픈 책이지만 읽고 난 느낌은 별로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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