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
사이먼 프리스.윌 스트로.존 스트리트 엮음, 장호연 옮김 / 한나래 / 2005년 9월
절판


Simon Frith "대중 음악 산업" 中
음악은 항상 집단의 정체성에 중요한 것이었다. 공동체는 그들의 음악적 기억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한다. 또한 음악은 늘 민족주의 정치인들에 의해 조작되었는데, 이는 국가나 민요로 만들어져 비민족주의자들을 '우리의' 노래를 저버린 '타자'로 규정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상업적 음악 산업이 행한 것은 음악이 소속감(그리고 배타성)을 제공한다는 것을 판매 전략으로 이용한 것이다. 스타 시스템을 통해서든(팬들은 우상과 일체감을 느낀다) 혹은 더욱 중요하게는 장르 마케팅을 통해서든(컨트리나 헤비 메탈 같은 음악 유형은 이데올로기적 공동체를 나타낸다) 음반 판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음악 선택이 그저 개인의 몰입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공동체로 편입시키는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음악 취향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헛될지언정 사람들이 취향을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진술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86-87쪽

Will Straw "소비" 中
분명한 것은, 사춘기 시절에 사람들이 소비자로서 자신의 취향과 솜씨를 탐구(하고 개발)하기 시작하는 하나의 영역을 음악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음악 관련 일용품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구입한 최초의 물품에 해당한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쉽게 들고 다닐 수 있으며, 반복해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개인의 미적 판단 기준이 소비자 거래에서 형성되고 개척되는 핵심적인 영역이 된다. 이러한 거래를 통해 사람들은 소비자로서의 선택이 갖는 사회적, 개인적 의미를 처음으로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어린 시절부터 소비자는 상업성과 진정성, 진실한 것과 가식적인 것, 뒤쳐진 것과 유효한 것을 저울질한다. 이러한 선택은 새로운 스타일과 품목이 계속적으로 교체되는 흐름을 배경삼아 일어난다. 이런 변화에 의의를 부여하거나 어떤 태도를 취함으로써 근본적인 사회적 도전을 바꾸는 굳건한 또래 문화에 속한 것은 청년들뿐이다. (중략) 음악은 젊은이들이 지위와 정체성의 복잡한 게임에서 타인과의 차이를 구별짓는 중요한 징표를 제공한다.-126쪽

스타 프로필 James Brown 中
단순하게 정리하면, 1950년대 리듬 앤 블루스 이후 흑인 미국 음악의 역사는 소울(레이 찰스Ray Charles가 발전시킨)과 펑크(제임스 브라운이 발전시킨)라는 두 조류로 나뉜다. 이는 동일한 음악적 요소(재즈, 블루스, 가스펠)가 다른 사회적 목적을 위해 발전한 것이다. 소울 음악은 유혹의 형식이며 개인적 신념을 담은 언어로서의 음악이자 애교부리기의 연주다. 펑크는 당신의 얼굴에 내지르는 것으로 음악가가 우쭐거리며 뽐내는 사운드이며, 당신의 욕망이 아닌 그들의 욕망의 힘에 저항하도록 당신을 부추긴다. 대체로 소울은 이제 현대 팝의 지배적인 형태가 되었고(상업적인 판매 과정에 더 어울리기 때문에), 펑크는 아직도 불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제임스 브라운의 어떤 트랙도 이지 리스닝으로 분류될 수 없다.-155쪽

스타 프로필 - Marvn Gaye 中
모타운은 흑인 음악을 백인 청중에게 팔려는 것을 목적으로 베리 고디Berry Gordy가 설립한 레이블이었다. 모타운의 정책은 제작(그리고 이윤 추구)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었고, 경제적 성공을 위해 백인 청중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었다. 인종 정치의 관점과 민권 운동, 흑인 미국인 의식의 개발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은 경제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모타운은 실로 가장 성공한 흑인 기업이자 흑인 소유의 메이저 으만사로서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문화적으로는 혼란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모타운의 음악가들은 누구를 위해 연주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록과 그 반상업주의 이데올로기의 맥락에서 보면(1960년대 말이 되면 모타운은 록 팬들과 평론가들에 의해 '상업적 쓰레기'라는 비판을 수시로 받았다) 레이블이 백인 시장에서 성공한 것조차 정치적인 문제였다. 레이블 자체도 그랬지만 마빈 게이 역시 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록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공신력 있는 상업적 성공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백인 댄스 플로어가 모타운을 영감을 준 모태로 재평가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158-159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팝 음악은 너무도 친숙하고 너무도 쉽게 사용되는 개념이라 정의하기가 모호하다. 팝은 한편으로는 클래식, 또는 예술 음악과 구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속 음악과 구별되지만, 이를 제하면 모든 종류의 스타일을 포괄할 수 있다. 이는 엘리트를 겨냥하거나 일종의 지식이나 청취 기술이 필요한 음악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이다. 이윤을 위해 상업적으로 제작되는 음악으로 기획의 문제이지 예술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정의할 때 '팝 음악'은 록, 컨트리, 레게, 랩 등 현재의 모든 대중적 형식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괄적 정의에는 문제가 있으며, 이는 국가가 팝을 법적으로 정의하려 시도할 때 분면하게 드러난다. 1990년 (음반 라디오의 컨텐츠를 규제하려는 목적에서) 영궁의 입법자들이 '팝 음악'을 "강한 리듬 요소가 있고 연주를 위해 전자적 증폭에 의존하는 특징을 갖는 모든 음악"으로 정의했을 때, 이는 음악 산업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아래에 계속)-165-166쪽

(위에서 계속) 이러한 음악적 정의가 팝('10대를 겨냥한 싱글 중심의 인스턴트 음악')과 록('성인을 위한 앨범 중심의 음악') 사이의 사회적 차이를 간파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팝은 포괄적 범주가 아니라 잉여적 범주가 된다. 다른 형식의 대중 음악을 모두 제하고 남은 것이 팝이며, 록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이들만이 팝을 경멸의 용어를 써가며 멀리하는 것이 아니다. 컨트리 음악 연주자들도 Olivia Bewton-John 같은 '팝 스타들'이 컨트리 음악상을 가져가는 것을 마찬가지로 싫어하며, 오늘날 랩의 팬들은 Will Smith 같은 크로스오버 스타를 그저 '팝 행위'일 뿐이라고 무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팝은 그것이 무엇인가보다 그것이 무엇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더 잘 정의된다.-165-166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대부분의 팝은 가족 음악이라 불릴 수 있다. 예컨대, 유로팝은 1966년 Los Bravos의 밀리언 싱글 "Black Is Black" 이후 여름 휴가의 사운드가 되었다. 로스 브라보스는 독일인 리드 싱어와 영국인 프로듀서로 된 스페인 그룹이었다. 이들의 성공 이후 상업적 기회를 노린 유럽인들이 국경을 넘어 협력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유로팝(이는 프로듀서 중심의 형식이다)의 프로듀서가 갖추어야 할 솜씨는 고등학교 수준의 외국어를 구사하는 자라면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유럽 언어로 된 가사와, 대륙의 모든 디스코텍과 휴양지에서 집단적으로 불릴 만한 코러스에 최신 유행 사운드를 붙이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독일 프로듀서 Frank Farian이 조직한 카리브해 지역 출신(영국과 네덜란드를 경유한)의 4인조 그룹 Boney M은 1975-8년까지 5000만 장의 음반을 팔았고, 스웨덴 그룹 아바ABBA는 1974년 유로비전 송 경연 대회를 석권한 후 18곡의 유럽 차트 톱 10 히트곡을 연속적으로 내놓았다. (아래에 계속)-167쪽

(위에서 계속) 두 그룹 모두 휴양지 전문 디스코 댄서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청중에게 (주로 텔레비전을 통해) 인기를 얻었는데, 그것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코러스에 볼품 없는 성적 매력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바는 1970년대 말 게이 음악 문화에 주요 영향력을 행사한 캠프적 매력을 발산했다.-167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팝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다. 그것은 개인의 비전을 실현하거나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 상실, 질투처럼 흔해 빠진 감정을 표현하는 대중적 곡조와 클리셰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팝의 작동 방식은 개별적인 청자로서 우리에게 각별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결은 팝 가수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지, 자신의 개성을 노래에 담아 우리가 이를 우리의 노래로 여기게 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Noel Coward가 싸구려 음악의 '위력'이라고 기술했던 팝의 역설이다. 우리는 팝 음악 일반을 시시한 상업적 속임수라고 무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특정한 팝을 우리의 살 ㅁ속에 예기치 않은 깊은 울림을 주는 소리로 들으며 감동한다.-169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팝의 관점에서 마이크로폰의 중요성은 그것으로 인해 크게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소리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기 마이크로폰의 즉각적인 효과는 무대보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감지되었다. 마이크로폰은 새로운 보컬 기교(크루닝, 토치 싱잉torch singing)를 낳았고 횡격막의 통제보다 마이크 기술에 더 의존하는 새로운 종류의 가수를 등장시켰다.
이러한 가수들 중 최고의 이들(대표적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와 Billy Holiday)은 새롭게 표현적인 친밀감을 갖고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이제까지 사적 대화에서만 가능했던 음조와 음고가 이제 공적으로 재생될 수 있었으며, 물론 이러한 친밀한 대화의 중심은 사랑 고백과 욕망의 암시였다. 청자들은 이제 자신이 가수를 알고 있고 가수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처럼 가장할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종류의 정서주의와 에로티시즘을 팝에 가져왔고, 새로운 종류의 스타덤인 아이돌 팝 가수를 출현시켰다.-171쪽

Simon Frith "팝 음악" 中
폴 매카트니는 한때 팝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랑 노래'라고 요약한 바 있으며, 1940년대(1942-3) J G Peatman이 미국의 히트 퍼레이드 내용을 분석한 것에 따르면 "성공적인 팝송은 모두 낭만적인 사랑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피트먼은 미국 팝의 특징을 세 가지 서술적 범주로 정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랑에 빠져 행복한 노래, 사랑 때문에 좌절한 노래, 그리고 섹스에 흥미를 나타낸 노벌티 송이 그것이다.-178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어떤 스타일과 어떤 연주자도 '록'이라는 외투를 두를 자격을 자동적으로 부여ㅏㄷ지 않는데, 그것은 록 문화가 배제의 과정을 통해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록이라는 개념에는 부드럽고 무해하거나 시시하다고 여겨지는 대량 유통 음악을 거부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것은 보통 가치 없는 '팝'으로 무시당하는 음악으로, 바로 록의 정반대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대신 '록'이라는 이름을 누릴 만하다고 생각되는 스타일, 장르, 연주자는 어떤 식으로든 진지하고 중요하고 적법하다고 간주된다.-192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록의 등장에 영향을 준 포크 음악 문화는 사실 1950년대 내내 폭넓은 관심을 얻어가고 있던 포크 리바이벌이었다. 그것은 주류의 대량 생산 음악을 인공적이고 하찮은 것이라고 거부한 식자층의 도시 사람들에게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주류 대신 그들이 찾아 나선 것은 음악적으로 'ㅈㄴ정한 것', 즉 흑인이든 백인이든 시골과 관련되고 산업화 전 단계의 공동체 음악 작업과 ㄱ연관된 주변부의 음악 전통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어쿠스틱 악기, 구전되는 노래, 토속적인 양식의 연주를 받아들였다. 오래된 스타일과 노래를 부흥시킴으로써 포크 문화는 동시대 음악을 암암리에 비판하는 일을 했다. (오래되고 농민적인 형식의) 블루스를 강조했다는 것은 바로 포크가 아프로-아메리칸 음악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백인 중산 계층에 전파되는 결정적인 통로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210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성인'은 대량 사회의 모든 악을 저장하고 있는 장소였다. 따라서 청년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거의 하위 문화의 함의를 띤 '反대량'의 하위집단으로 여겼다. 이런 차이의 인식, '타자' 인식은 청년들로 하여금 권능이 박탈당한 소수자의 문화에 호감을 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수많은 백인 중산 계층의 록 팬들은 인종적, 성적, 계급적 차이가 있는 다양한 형식들을 전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록 문화가 오갖 종류의 주변과 타자에 매혹되고 이를 전유하는 밑바탕이 된다. '흑인' 음악이든, 양성적 스타일이든, 노동자 반항이든 록은 각각을 분면한 차이를 가진 기표로 처리하여 청년의 주변성에 접목시켰다.-215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록의 신화는 주류 음악 씬 외부를 주요 무대로 하는 창조 이야기를 내세운다. 주변에 위치한 블루스와 컨트리 전통이 부정하게 만나 사생아를 낳았고, 이는 잠깐 동안 진정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음악 산업에 으해 포획되고 흡수되고 타락했다는 이야기다. 원래 대량 문화의 외부에서 유래한 록은 이렇듯 대량 유통의 과정('상업화'라 불리는)을 겪으며 길들여진다. 이런 신화는 록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원칙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1960년대 주안 록의 탄생에 부유하고 대량 매개된 청년 문화가 행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무시한다. 3년 만에 잘 팔리는 10대 우상에서 잘 팔리는 록 아티스트로 변모한 비틀스의 경력은 진정 대중적인 것의 지대에서 록이 탄생하고 성장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3-64년 경만 해도 비틀스는 대항적인 시인/몽상가가 아니라 그저 엄청난 성공을 거둔 10대 팝그룹에 불과했다. 그런데 1967년이 되면 비틀스는 여전히 수백만 장의 음잔을 팔았지만 앨범의 비중이 증가했으며, 이제 대중적 주류의 새로운 계층을 대표하는 그룹이 된다.-216-217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록ㅇㄴ 가사와 음악을 만드는 '작가'가 못 되는 가수와 음악가를 매우 수상쩍게 바라본다. 싱어 송 라이터는 1960년대 말에 진정한 록의 이상으로 등장하여, 작가 정신과 연주의 통합이 윤리적 완전함의 증거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많은 대중 음악 문화가 음악 작업의 분업 (작곡가는 곡을 쓰고, 편곡자는 편곡을 하고, 반주자는 반주를 하고,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에 대해 별 문제를 느끼지 않지만, 록 문화는 이를 잠재적으로 왜곡과 소외의 소지가 있는 매개 형식으로 보아 진정한 사고와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을 방해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록은, 이런 분업을 극복하고 창조와 소통, 착상과 연주의 통합을 통해 유기적인 표현력을 드러내는 연주자를 선호하는 것이다. 특히, 록 밴드가 자체적으로 완전하고 완비된 단위라는 생각은 매개로부터 벗어나 자율성을 표현하는 것을 장려했다.-228쪽

Keir Keightley "록을 다시 생각하다" 中
록 이전에는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 문화적 주류와 문화적 주변이 분명히 구별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록이 대량 문화와 생각 없는 순응 사이의 상징적 연결고리를 끊자, 대중적인 것의 지대 속에서 새로운 구별을 만드는 것과 상업적 대량 매개 문화를 통해 대항적 감수성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록은 지배 문화와 지배받는 문화 사이의 관계 재배치를 도와 주변이면서 주류이고, 反대량이면서 대량이고, 종속적이면서 지배ㅈ적인 무언가를 생산했다. 이렇게 록은 '하위지배subdominant' 문화라 불릴 만한 것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서 오랫동안 행사해 왔다. 그 결정적인 몇몇 특징이 이제 다른 영역의 문화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량의 상업 문화 내에서 '대량'에 반대하는 경향은 불량 소년 이미지의 영화 스타, 의전을 위반한 서민의 왕세자비,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토크쇼, TV에 방영되는 외설 만화, 법과 조직 심지어는 논리의 한계마저 넘어 활동하는 허구의 FBI 요원 등 오늘날 널리 유행하고 있다. 이 모두는 하위 지배 문화의 충동이 록이라는 출생지를 넘어 널리 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238쪽

Russell A Potter "소울에서 힙합으로" 中
'소울'은 로큰롤이 점차 음악 산업을 지배하던 시기인 1955년에서 1967년에 이ㅡ는 바로 그 시기에 리듬 앤 블루스를 다음 차원으로 이끌었던 이런 음악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일까? 소울은 보다 서서히 타오르지만 더 뜨거운 음악이며, 보다 즉흥적이고 연주자의 보컬 개성의 향취가 더욱 독특하며, 좀더 참여적이다. 로큰롤이 빠른 템포의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과 더불어 어떤 면에서 외향적이라면, 소울은 좀더 내향적이고 '소울' 형제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는 호소력있는 구심점이다. 가스펠로부터 보컬의 예를 많이 취했지만, 비트는 1950년대 중반 손뼉으로 장단 맞추는 리듬 앤 블루스에 비해 감정이 많이 투여되었다.(템포가 느릴 때조차 그렇다). 1년에 수백 회의 라이브 공연을 가졌던 제임스 브라운의 페이머스 플레임스 같은 밴드의 녹음을 들어보면 활력이 넘치면서 거칠고, 분노에 차면서도 사려 깊고, 춤추기 좋으면서 예측이 불가능하다. (아래에 계속)-243-244쪽

(위에서 계속) 백인 프로듀서나 음반 레이블이 음악가에게 스튜디오에서 테이프를 걸어둔 채 '잼jam' 세션을 갖자고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소울 음악가들은 언제나 이렇게 했다. 신시내티의 킹 레이블에서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음반을 낸 제임스 브라운은 비닐 싱글의 두세 면 내지 네 면까지 이어지는 스튜디오 잼을 녹음한 적이 있다. 브라운은 그저 가수가 아니라 훈계자였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괴성은 그의 밴드와 청중 모두를 새로운 차원의 흥분으로 몰아갔다. 브라운의 음악은 라이브 연주뿐만 아니라 자신의 곡의 끝없는 재작업을 통해 청중과 나누는 대화의 일부가 되었다. 한동안 공연장에서 연주하던 곡을 보다 갱신된 형태로 녹음해 발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식의 청중과의 대화는, 주로 라디오와 판매 차트에 의존하여 발매 음악의 가치를 평가했던 메이저 음반 레이블 관계자들이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243-244쪽

Russell A Potter "소울에서 힙합으로" 中
스택스Stax가 소울의 양지라면 모타운은 소울의 음지였다. 모타운은 스택스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어지만, 음반 산업이 흑인 음악 형식과 벌인 불편한 거래의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모타운의 베리 고디는 소속 아티스트를 심하게 부려먹고 홍보를 위해 고단한 버스 순회 공연에 내몰면서 고작 표준적인 로열티의 5분의 1 정도만 지급했다. 고디는 팝음악 라디오와 소매업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크로스오버에 주력하여 주로 발라드와 가벼운 댄스곡들을 취급했다. 그리고 이런 곡들은 모두 모타운 스타일에 확실히 잘 들어맞도록 레이블 내의 '품질 관리' 팀의 검사를 거쳤다. 악기 연주자들은 기본 수당만을 받았으며 자신들이 실현에 도움을 준 곡의 크레딧을 받는 겨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자신의 명의로 레코딩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반면 스택스는 하우스 밴드를 중심으로 구축된 독특하게 무거우면서 '생동감 있는' 사운드를 추구했다. 스택스의 하우스 밴드는 부커티앤더엠지스Booker T and the MGs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펼쳤고, 필요하다면 작곡 크레딧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래에 계속)-245-246쪽

(위에서 계속) 소유주와 A&R 매니저가 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택스는 흑인 아티스트와 송라이터에 보다 헌신적이었고 흑인 라디오를 통해 이들을 홍보하는 데도 주력했다. 모타운이 직접적으로 팝 차트 -그리고 백인 소비자- 를 겨냥했다면, 스택스는 언제나 리듬 앤 블루스 청중을 먼저 생각했으며, 1963-5년 "빌보드" 잡지가 리듬 앤 블루스 차트 집계를 중단했을 때에도 이는 변함이 없었다. 고디가 처음으로 계약을 맺은 음악가 가운데 한 명인 Marble John은 1965년 모타운을 떠나 스택스로 옮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타운은 기본적으로 소울 회사가 아니라 팝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팝 가수가 아니다. 고디는 소울 작곡가나 프로듀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계약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존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모타운은 마빈 게이와 스티비 원더 같은 아티스트들이 실력을 펼치는 토대가 되었으며, 이들은 하우스 중심의 포맷이 갖는 한계에 도전하여 결국 오티스 레딩, Sam and Dave, Carla Thomas 같은 스택스의 거인들만큼이나 '소울'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245-246쪽

Russell A Potter "소울에서 힙합으로" 中
보통 힙합은 랩 음악뿐만 아니라 그래피티와 브레이크댄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브레이크댄싱은 이후 세월이 흘러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이런 힙합 예술에는 스크래치 미학이라는 공통성이 있다. 그것은 도시의 벽, 낡은 비닐 음반, 마분지 상자 같은 쇠퇴하는 하부 구조에 새겨진 예술을 재평가하는 것을 뜻한다. 전당포 기타와 깨진 병이 블루스를 토착 예술로 만들었듯이, 1970년대 '공원 파티'의 낡은 턴테이블과 응급 장비용 페이더, 가로등의 전기는 힙합을 본질적으로 도시 청년의 예술로 만들었다. 푸에르토리코인과 백인 디제이, 브레이크댄서들이 힙합의 초창기 씬의 본질적인 부분을 담당했지만 그것은 흑인 예술이며, 대중 매체의 그림자에서 결코 멀리 벗어난 적이 없지만(그리고 나중에는 대중 매체에 의해 과도하게 가려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토착 예술이다.-254쪽

John Street "록, 팝, 그리고 정치" 中
좌파와 우파 음악가들은 대중 음악을 자신의 정치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자신의 견해를 공란의 節이나 라임이 들어맞는 對句에 넣고, 쿵쿵거리는 베이스 드럼에 실어 날랐던 것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음악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게 된 계기는 예부터 음악이 정치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쉽고 유연한 발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하의 사람들에게 노래(시와 마찬가지로)는 정치적 견해를 은유와 제스처에 숨겨, 즉자적이고 시각적인 것을 중심으로 조직된 검열 제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점이 있다. 록과 팝을 정치적 발판으로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음악이라는 형식이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쉽고 이를 조직하는 제도가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팝 음악은 상업적이고 산어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중문화 형식처럼 훈련과 테크놀로지, 자본의 장벽이 높디 않다. 그리고 팝음악은 상업적이고 산업적인 속성 때문에 (연극처럼) 보조금을 받는 예술이나 (영화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상업적 산물에 따르는 감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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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1-2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말 레포트에 각주 한 줄을 추가할 수 있었을 뿐이지만, 시작할 때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본 듯한 대중음악의 장르 명칭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소득이 크다.
 

초반에는 공부 좀 하다가 후반에 좌절해서 막나가버린 10월. 그래도 책 읽은 건 정리를 해 두자. 

김대행 <노래와 시의 세계>, <시와 문학의 탐구>. ....그러니까 공부도 좀 했다고.   

 

 

 

 

 

 드레슬러 <텍스트언어학개론>, 반데이크 <텍스트학>, 냅&워킨스 <장르, 텍스트, 문법>, 박태호 <장르 중심 작문 교수 학습론>. 위와 같음.  

 

 

 

 

 

 이영미 <한국대중음악사>, 프리스 외 <케임브리지 대중음악의 이해>. 전공 공부랑 전혀 무관하지는 않지만 보는 동안에 슬슬 다른 쪽으로 새기 시작했다. 특히 저 <케임브리지 대중음악의 이해>는 엄청 엄청 재밌더라. 난 어쩔 수 없는 딜레탕트였고, 그걸로 지도교수님께 들입다 혼났고, 그 사건을 즈음하여 비뚤어지기 시작해서 학교도 잘 안 가고 마구 타락함.

 

 

 

 

 

 

  나의 베스트 도피처 미야베 미유키. 봐도봐도 재미있는 <괴이>, <이유>, <나는 지갑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3권만 남아있어서 3권만 다시 본 <모방범>. 덤으로 미야베 여사가 추천한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 상>도. <모래그릇>이 보고싶구나.

 

 

 

 

 

 그 와중에 동생집에도 하루 갔다. 완비되어 있는 레이먼드 챈들러 시리즈 중 이번에 본 것은 <호수의 여인>. 모즈메 타카유키 씨가 아르바이트하는 술집 이름이 <레이디 인 더 레이크>였었지. <빅 슬립>이나 <안녕 내 사랑>보다는 좀 마음에 들었다. 챈들러 씨도 쓰면서 솜씨가 느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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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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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대학생이 되어 도쿄에 올라온 평범하지만 꼭 평범하지만도 않은 청년 또는 소년이 겪은 슬프지만 꼭 슬프지만도 않은 죽음과 삶, 연애와  일상에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내가 처음으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기도 하다. 이걸 계기로 푹 빠져서 도서관에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모조리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과는 달리 갖고 싶은 걸 그다지 참지 않던 시절이라 용돈을 털어 열심히 사모으기도 했었다.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다. 와타나베가 미도리 아버지의 병실에서 오이를 깎아 먹는 이야기 같은 것들. 죽음을 앞둔 서점 주인과 말없이 마주앉아 먹는, 간장에 적신 오이의 맛. 미도리의 학창 시절 에피소드 중에 계란말이용 후라이팬를 사기 위해 브래지어 살 돈을 써버려서 덜 마른 브래지어를 입고 다닌 적이 있다는 것도 묘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간사이 풍의 산뜻한 계란말이와 눅눅한 브래지어.  미도리가 다녔던 여학교는 엄청난 부자 학교여서 그애는 가난한 동네 출신이 자기 밖에 없다는 것에  컴플렉스를 느꼈었다. 지바 현에 사는 아이가 같은 컴플렉스를 느끼는 것 같아서 좀 친해졌는데, 걔네 집에 놀러갔더니 대저택의 정원에서 송아지만한 개가 소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더라나. 이 이야기가 유달리 우스웠던 것은 나에게도 부자 동네 학교에 위장전입으로 들어간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 대한 경구로는 비스킷 통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인생이라는 비스킷 통에는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섞여 있다. 맛있는 것을 먼저 먹어버리면 맛없는 것만 남는다. 맛없는 걸 먹다 보면 맛있는 것도 나온다. 또다른 경구로 "남들과 같은 것만 읽고 있으면 남들과 같은 생각밖에 못하는 법이야. 제대로 된 인간은 그런 짓은 안 해."라는 말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남들과 같은 생각을 못하는 게 인생을 얼마나 고달프게 만드는지를 알게되었고, 스스로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침울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멋진 남자 나가사와 선배의 저 말은 여전히 멋지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주제에 해당하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 시인은 스무 살에 죽고 혁명가와 록가수는 스물 넷에 죽는다는 말도 여기에 나왔었나? 삶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관찰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인생은 확실히 조금쯤 살기 쉬워질 것이다. 

이러한 관찰자적 거리감과 담담한 태도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어깨에 힘주고 무리해서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삶이란 건 살다 보면 그럭저럭 살아진다고 담담하게 말을 건네오는 것같은 기분이 든다. 무뚝뚝하고 데면데면하지만, 그게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친구들 중에는 "스무 살 때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지금 다시 보면, 내가 왜 이런 걸 좋아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이도 있지만, 무사히 안정된 일상에 안착한 그와 달리 여전히 삶이 버겁기만 한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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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독서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를 보니 영 보잘것없다. 시간을 들인 게 아닌가? 그러고보니 요즘 대부분의 시간은 교양수업 예습복습에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애당초 나는 전문인이 될 자질이 없었던가? 그저 이것저것 뒤적이는 게 좋을뿐. 

그 와중에도 전공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게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읽었는데도 해석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앞으로  딜타이랑 가다머를 읽어야 한다는 것만 알겠다. 갈 길이 멀다.   

 

 

 

 

 

 

 

프롭의 <민담형태론>은 너무너무 유명한 책이라 꼭 읽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민담의 형태와 기원>도 같이 읽으려고 했으나 바빠서 결국 못 읽고 반납. 참고삼아 빌려온 <러시아민담>은 재밌더라. 난 옛날부터 세계전래동화 류에 약했다. 

  

  

 

 

 

 

 

박수밀의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조금은 의무감으로 읽었고, 읽으면서는 고만고만하게 재미있었다. 감상을 한 마디로 한다면, 역시 한문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번역이 조금 난감했고 키케로의 <수사학>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번역이었다. 읽고난 후 감상은 우리가 잘난척 하고 있는 작문교육이란 게 2500년 전에 하던 것보다 낫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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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박수밀 지음 / 태학사 / 2007년 5월
절판


조선조는 거대 담론으로 통하는 시대였다. 추상적이며 보편적 언어로 세계를 규졍했다. 미미한 존재는 몰가치했으며 일상의 사물들은 관심 너머에 있었다. 존재는 道를 드러낼 때 의미를 지녔으며 거창하고 고상한 것만이 인정받았다. 고정된 가치체계와 전범을 숭상하고 절대 이데올로기를 추구하였다.
그런데 어느 시저기에 이르자 전범이 부정되고 주류 이데올로기가 도전받는다. 이른바 이단 서적이 암암리에 유행하고, 주변의 존재들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개별적 존재의 발견, 하찮은 사물에 대한 관심, 자연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가냘프고 감성적인 속성의 小品文이 한 흐름을 혀성한다. 무엇보다 소품은 몰가치해 보이는 세계를 은밀히 드러내어 정통 고문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문체상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16쪽

일찍이 주희는 도연명과의 만남을 두고 "나는 천년 뒤에 태어났지만 천년 전 친구와 벗한다네."라고 읊은 바 있다. 맹자 또한 천하의 좋은 선비와 벗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못한다면 거슬러 올라가 벗하라 가르쳤다. 이후 상우천고(尙于千古)는 수많은 중세 학자들에게 우정을 가늠하는 시금석과도 같은 용어가 되어 왔다. (중략) "논어", "맹자" 등의 경서, "사기"를 비롯한 각종 역사서에서는 늘 友道를 언급하며 바람직한 우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43쪽

마음에 꼭 드는 시절을 만나 마음에 꼭 드는 친구를 만나서 마음에 꼭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꼭 맞는 시문을 읽으면,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즐거움인데 그런 일이 어찌도 적은가. 일생을 통해 몇 번쯤이나 될까?
(필자주: 이덕무 "청장관전서", '선귤당농소" 値會心時節 逢會心友生 作會心言語 讀會心時文 此至樂 而何其至稀也 一生凡幾許番)-48쪽

연암은 또다른 글에서 벗에 대해 풀이하기를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양 손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벗은 '제2의 나(第二我)'이자 자질구레한 일까지 두루 도와주는 사람, 곧 '주선인(周旋人)'이라 하였다. 제이오(第二吾)는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중국에서 펴낸 "교우론"에서 붕우의 소중함을 역설하기 위해 한 말이다.
(필자주: 박성순, "우정의 운리학과 북학파의 문학사상", "국어국문학" 129, 국어국문학회. 2001. 12. 263쪽. 조선중기 실학자 이수광이 秦請使로 연경에 갔을 때 명나라에 와 있던 마테오리치의 저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교우론"을 가져오게 된다. 이후 "교우론"을 읽은 많은 지식인들이 벗은 '제이의 나'라는 견해를 수용했던 듯하다.)-51쪽

글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성인의 도를 싣는 그릇이라는 재도지문(載道之文)과 글은 도를 꿰는 그릇이라고 하여 상대적으로 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는 문이관도(文以貫道)는 전통적인 언어관을 압축하는 용어다. 조선조 학자들은 글은 성인이나 현자의 정신세계를 담은 그릇으로 생각했다. 곧 글이란 도를 구현해주는 수단으로 인식하여 글에서 성현의 마음을 읽어 성현의 도를 체득하고자 했다. 도는 인간과 사물의 마땅한 것으로서, 도덕과 윤리를 담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글은 성정지정과 온유돈후, 민심교화를 담아야 한다는 효용론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가졌다. 글은 언제나 도의 종속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초정(인용자주-박제가)은 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꾼다.

신은 글(書)이란 도와 더불어 생긴 것이라 들었습니다. 도는 형체가 없기에 글로써 보였고, 도는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기에 글로 인도하였으며, 도는 언어가 없기에 글로써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물을 떠난 물고기가 없듯이 또한 글을 떠난 도는 없습니다. 글이란 하늘에 있어선 해와 별이 환히 빛나는 것이요,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도는 것이며, (아래에 계속)-239-240쪽

(위에서 계속) 구름과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땅에 있어선 강물이 흐르고 산악이 치솟는 것이며, 초목이 피고 지고 벌레와 물고기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있어선 신체의 온갖 동작과 머리카락의 모습이며 의복과 음식, 움직임과 말하는 모습이니 모두 글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필자주: "六書策": 臣聞 書者與道俱生者也 道無形體 則書以視之 道無方所 則書以導之 道無言語 則書以達止 故世無離水之漁 亦無離書之道矣 其在天也 則日星之昭明也 寒暑之消長也 雲霞之絢爛也 其在地也 則江河山丘之流崎也 草木蟲魚之榮落變化也 其在人也 則身體毛髮屈伸偃仰之態 衣服飮食動靜語默之象 無非書也
-239-240쪽

글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양수의 말과 같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면 가능할까?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훌륭한 문장가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배치에 주목한다. 글이란 도(내용)를 드러내는 수단이라 인식했던 조선조에 형식은 단순히 내용을 실어 나르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문의 독자적 가치를 모색하는 조선후기의 많은 문인, 학자들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형식적 장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른바 사법(死法)이 아닌 활법(活法)을 못개했으며 편장자구(篇章字句)의 구성에 관한 이론들을 세워 나갔다.
(필자주: 정민 "고문관의 세 층위와 활물적 문장 인식", "시학과 언어학" 1, 시학과 언어학회 2000)-267쪽

강력한 규범과 맞서기 위해선 글쓰기 배치가 중요하다. 말하려는 주제가 심각할수록 억압이 크게 작동하는 사회일수록 글의 배치, 곧 형식은 내용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글의 배치에 따라 설득의 효과가 달리지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럴 경우 연암은 주변을 가볍게 위장하거나 혹은 우언의 방식을 즐겨 쓴다.-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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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9-10-0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세기 연암 그룹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돼 있는 것 같다. 역시 좀 더 이전으로 올라가 보지 않으면......
그건 그렇고, 원문 타이핑하다가 어라? 하고 생각한 게... 모르는 글자가 한 개뿐이었다. 이거 기뻐해도 되는 거지? 연암 그룹이 쉬운 글자를 쓰는 애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도 반 년 동안 좀 는 거 맞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