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히 소설이 읽고 싶어서 집 앞 도서관에 들렀다가 무코다 구니코 씨의 단편집 <수달>을 빌렸다.
















방송 작가 출신이 쓴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는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순문학풍의 잘 된 단편집이었는데,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작품의 내용이 아닌 작가 쪽이었다.
1929년생. 평생 원고마감에 시달리며 살았던 여성 방송작가...
이거 어디서 본 듯한 얘기인데 혹시.... 하고 찾아본 것이 10년 전에 산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














 혹시가 역시였다.  드라마 극본이 늦어져서 제작진이 모두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원고를 받으러 간 스탭에게 질그릇 냄비를 건냈던 그 아줌마가 바로 이 무코다 씨였다.
  "어머나, 무코다 씨, 예전에 세노 갓파 씨랑 같이 뵈었었지요. 드디어 무코다 씨의 글을 읽게 되다니 정말이지 감개무량!! 이야~ 그 동안 세월 많이 흘렀네요. 그 때만 해도 쌩쌩한 20대 초반이었는데, 이젠 저도 중년이에요. 호호호"  ^^;;

실은 10년 전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을 읽을 때도 나는 '10년 지인'을 한 사람 만났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었던 <창가의 소녀 토토짱>의 작가 구로야나기 데츠코 씨 이야기가 여기에 나왔던 것이다. 그 때도
"어머나 이게 누구야? 토토짱 아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초등학교 때 봤는데 그새 어른이 됐구나. 이야~ 하지메 짱도 그렇지만 당신도 정말 훌륭해졌네."
하면서 꽤나 감격했었다.
하지메 짱이라는 것은 세노 갓파 씨의 본명으로, 이 양반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 <소년 H>를 나는 그  2년 전에 읽었었다. 즉 무대미술가 세노 갓파 씨와 아나운서 구로야나기 데츠코 씨를 나는 그들이 꼬마였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나이로는 나보다 쉰 살이나 많은 분들이지만 그런 게 전혀 상관 없어진다는 것이 책읽기의 재미있는 점이다.








 








얘기가 이리저리 섞여버렸지만,  이 글의 마지막에는 역시 10년만에 떠올린 질그릇 냄비의 추억을 옮겨놓아야겠다.

<원고 대신 받은 질그릇 냄비>

나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무코다 씨에게서 받은 질그릇 냄비를 소중히 사용하고 있다.
그녀의 각본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 때 나는 미술 담당이었다. 이 질그릇 냄비는 그때의 인연으로 그녀에게서 받은 것이다.
하루는 연출자가 내게 무코다 씨를 찾아가 직접 각본을 받아오라고 부탁했다. 미술 디자이너는 작가에게서 각본을 받아오는 담당은 아니다.
그러나 연출자는 "내가 가는 것보다 갓파 씨가 가는 게 덜 재촉하는 것 같지 않겠어요?"
하며 듣기 좋은 말로 나를 설득했다.
"한숨도 안 자고 쓰는데도, 아직 열일곱 장밖에 못 썼어요.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와주세요."
그녀는 자기 원고를 읽어 주는 것이, 뒷부분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뛰어갔는데, 가는 도중에 두부를 샀다. 전화 목소리로 보아 아직 식사도 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췌한 모습의 그녀는 들고 간 두부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조금 깊긴 해도 두부를 데칠 땐 이 질냄비가 맘에 들어요. 다시마가 있던가? 가다랭이포밖에 없지만 괜찮지요?"
하며 그녀는 재빠르게 두부 데칠 준비를 했다.
나는 완성되어 있다는 열 몇 장의 각본을 아직 받지 못했기에 초조해서 은근슬쩍 책상 위를 보았지만 쓴 것은 서너 장뿐이었다.
"배우들은 앞부분 연습을 하고 있나요?"
"네, 뒷부분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연출가도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결국 그 날은 한 장도 못 받았다. 그녀는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하면서 마치 원고 대신이라는 듯이 질냄비를 신문지에 싸서 나에게 주었다. 물로 씼었을 냄비가 아직 따뜻했다.
                      - 세노 갓파, 박국영 옮김(1998): <펜 끝으로 훔쳐본 세상>, 서해문집, 112쪽

(옆 페이지에 세노 씨의 훌륭한 세밀화로 그려진 문제의 질그릇냄비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위와 아래에 "높이 13센티, 직경 23.5센티, 무게 13650그램. 크기에 비하여 얇고 가벼워서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무코다 구니코씨가 준 질그릇 냄비에 속아서 그냥 왔습니까? 갓파씨는 물건을 받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문제예요." 라고 디렉터에게 비난을 당했다."라는 메모가 더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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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잔인한 달이라고? 5월도 잔인하다. 5월의 초입은 레포트를 쓰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해서, 이 책을 읽었다. 레포트는 여기서 왕창 베껴 냈다. 김일렬의 <숙영낭자전 연구> -_-  연구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숙영낭자전>이다. 나 이 소설 싫어. 매력을 못 느끼는 책을 가지고 어쩌고 저쩌고 떠들려니 진짜 죽을 맛이다. 횡설수설 하며 페이지만 넘기며 각주만 하나 둘 달고 있었다. 아아 진짜 싫어.

 

 

 

 

 

 

 

그 와중에 '이 숙영이란 여잔 도대체 왜 죽는 거야?' 하면서 토마스 브로미쉬의 <자살>을 읽었다. 정신과 의사가 쓴 자살론인데, 사회학적 입장, 심리학적 입장, 정신 의학적 입장들을 간결하면서도 요령 있게 소개한 좋은 책이다. 답답했던 머리가 이거 읽는 동안만은 좀 상쾌해졌다. 레포트에도 각주 한 줄 넣었다. 없어도 별로 상관 없는 각주이긴 하지만. 

 

 

 

 

 

 

 

 신화를 테마로 한 책들을 좀 읽었다.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옛날 정진홍 선생님 수업을 청강할 때부터 읽으려고 벼르던 책인데 7년만에 겨우 읽었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일단 분량 면에서, 다 읽고 뿌듯해 해도 될 책인 듯. 전공 공부랑 연관짓고 싶었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 

 

 

 

 

 

 

 


<삼국유사> 읽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읽었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었다. 이 민음사 판은 책도 예쁘고 잘 읽히더라.

 

 

 

 

 

 

 


김병모의 <허황옥 루트> 읽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김수로 왕비 허황옥>을 밤을 새우며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 후 15년이 흘렀지만 저자는 여전한 듯. 지도교수님은 센세이셔널한 것만 좋아하는 신뢰할 수 없는 필자라고 혹평했다. 그래도 신선하고 재미있잖아? 사고가 자유롭고 행동력도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치만 옛날 여자친구 얘기는 체신머리 없어 보이니까 좀 그만했으면 싶더라. ㅋㅋ) 

 

 

 

 

 

 

 

<민족주의의 역사> 발제를 위해 페미니즘 관련 책도 하나 읽었다. 일레인 김, 최정무 편역 <위험한 여성>, 기지촌 얘기가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한국계 미국인인 대학교수 집필진이라는 건 너무 부러워서 조금 싫을지도...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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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4월. 레포트를 쓰느라 읽는 책은 아무래도 필요한 부분만 읽게 되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책이 드물다. 김만중, 박지원, 이광수, 최서해와 관련해서 이것저것 발췌해 읽었지만 제대로 다 읽은 책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책을 생각해 보니 공부보다는 취미를 위해 읽는 책이 많은 것 같다. 

 우한용의 <채만식 소설 담론의 시학>을 대출 기한이 임박해서 허겁지겁 다 읽었다. 덕분에 <탁류>도 읽고, <과도기>, <냉동어>, <소년은 자란다>도 읽었다. 내가 보기에 채만식은 균형 감각이 뛰어난 작가이다. 인간에 대해 덮어놓고 신뢰하지 않는, 냉소와 의혹의 눈초리가 좋다. 그의 냉소와 의혹은 자본가와 지식인과 기층민중 모두를 향하며, 군국주의 일본뿐만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도 놓치지 않는다. 전쟁 전에 험한 꼴 안 보고 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더 오래 살아서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글들을 조금 더 써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주의의 고전이다. 서양사학과의 민족주의 수업을 청강하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막연했던 민족주의가 머릿속에서 어렴풋하게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레포트를 하나 써 보면 또 한 발 나갈 수 있겠지.

 

 

 

 

 

 

 

 

어느 우울한 오후에 공부를 걷어치우고 도서관에서 미사키 아키의 <이웃 마을 전쟁>을 빌려 잠적했다. 이 작가의 단편 <버스 탈취 사건>을 퍽 재미있게 봤는데, 장편은 아직 멀었다는 느낌. 아이디어는 상쾌하나 이야기를 구성해가는 역량이 조금 부족하다. 

 

 

 

 

 

 

  


좋아하는 선생님과 같이 주경철의 <문명과 바다>를 대상으로 한 독서토론회 포스터 옆을 지나다가 "저 책 읽어."라는 말씀을 들었다. 도서관에 있는 두 권은 모두 대출중이어서 서점에서 네 시간 만에 독파했는데, 서점에서 독파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책이다. 지도와 그림이 아름답고 글이 쉽다. 선원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한 것과 노예 무역에 대한 것이 특히 좋더라.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려 드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 무역의 바탕에 서양인의 탐욕 뿐 아니라 아프리카 인들 자신의 생활양식도 존재한다는 것은 조금 충격적인 발견. 저자가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 토론회에서는 이 쪽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문학사를 따라 현대 소설을 설렁설렁 살펴보는 중이다.  경향을 지나 모더니즘에 도달했는데, 말만 많이 들었지 그게 뭔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상희의 <한국 모더니즘 소설론>은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중요한 점들을 짚어 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품을 다 읽으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겠지만 도서관에서 찾기가 쉽지 않은 것들도 많군. 

 

 

 

 

 

 

 

 


그래서 레포트 주제는 박태원으로 결정했다. 크게 도움은 안 되겠지만 사진도 많고 지도도 있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조이담의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를 읽었다. 박태원은 부잣집 아들이었구만. 아버지는 약사, 삼촌은 의사, 고모는 고등학교 교사인 초인텔리 집안. 구보 하나 정도 소설 쓰고 있어도 아무 문제 없는 경제 환경이었다. 쬐끔 재수 없어졌다. 그치만, 그런 도련님이 월북했다니, 만년은 엄청 고달펐겠구나 싶어서 동정하는 마음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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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TV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 나온 '초난강'을 보고 아이돌 그룹 SMAP(스마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전에도 "기무라 타쿠야" 정도는 들어 봤었지만, 인터넷 동영상 검색으로 버라이어티쇼 <SMAP×SMAP(스마스마)>를 보고는 좀 충격을 받았다. 이건 단순히 웃기다 재미있다 하는 수준이 아니다. 내년이면 그룹 결성 20년. 중학생 때(막내인 싱고는 소학교 5학년 때) 만나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에 10대, 20대를 다 바쳤다. 노래, 댄스, 드라마, 토크, 개그 뭐든지 다 한다. 당구도 하고 요리도 하고 25km 크로스컨트리에 해발 3800m 후지산 등산에 풀마라톤까지 한다. 피로로 축 늘어져 있다가도 카메라가 향하는 순간 전등에 불이 켜지듯 '팟'하고 최상의 미소가 만들어진다. '프로'라는 표현을 넘어 '달인'의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다.


왼쪽부터 기무라,싱고,츠요시,나카이,고로

거기에 멤버들 각자의 개성이 다 다른 것이 또 즐겁다. 우선 완벽한 남자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가 있다. 역대 일본 드라마 시청률 1위부터 5위까지의 주연으로 NG를 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 배우. <스마스마>에는 무슨 게임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의욕적으로 덤벼들어 이겨놓고 보는 그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머리도 운동 신경도 손재주도 좋은 데다 성실하고 겸손한 이미지. 유치원 다니는 애가 있는 아저씨임에도 불구하고 14년째 일본 남자 연예인 인기 순위 1위를 지키고 있다. 다음으로 데뷔 때부터 한결같이 팀을 위해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열정적인 노력가로, 위기에서 더욱 빛나는 리더십의 소유자 나카이 마사히로(中居正廣)가 있다. 두 사람보다 5살 연하로 팀의 막내인 카토리 싱고(香取愼吾)는 커다란 덩치에 귀여운 얼굴, 발랄한 장난끼를 가진 분위기 메이커지만 때때로 보이는 진지한 표정이 또 상당히 임팩트가 있다. 도회풍의 말끔한 외모와 엉뚱한 몽상벽의 갭이 포인트인 네번째 멤버는 상냥한 남자 이나가키 고로(稻垣吾郞).  마지막으로 한국 마니아 쿠사나기 츠요시(草彅剛)는 튀는 데 없이 조용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화려함에 기죽지 않고 탄탄한 기본기에 자신만의 성실함을 더해 팀의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다.


뒷 줄 왼쪽부터 츠요시,기무라,싱고,나카이. 앞 줄 모리(96년 탈퇴해 바이크 레이서가 됨),고로

재능 있는 어린 소년들을 찾아 이렇게 완벽한 스타로 만들어낸 것은 <쟈니즈 예능사무소>라는 이름을 가진 시스템이다. 이 회사는 일본 전국에서 10대 초반의 미소년들을 오디션으로 선발하여 노래, 춤, 연기의 레슨을 시킨다. 이렇게 훈련받고 있는 수십 명의  <쟈니즈 주니어>들은 사무소 소속 선배의 백댄스와 선배 주연 드라마의 단역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설령 유명해진다 해도 주니어로 대우받을 뿐. 매니저는 없고 촬영장에는 전철로 혼자 가야 한다. 이 <쟈니즈 주니어> 중에 톱에 속해 그룹이 결성되면 비로소 데뷔의 희망이 보인다. 그룹 결성 후 드라마도 하고 버라이어티 쇼도 하고 콘서트도 하면서 2~3년간 지명도를 높여 드디어 대망의 CD 데뷔에 이르면 비로소 한 사람의 연예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출연료와 광고 수입은 주니어 시절부터 먹여주고 길러주고 레슨시켜 준 사무소로 들어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쟈니즈 사무소에 엄청난 돈을 벌어 주고 있는 "아이돌"로는 91년 데뷔한 SMAP 외에도 TOKIO (94), V6 (95), KinKi Kids (97), ARASHI (99), 타키 앤 츠바사(02), NewS (04), 칸쟈니8 (04), KAT-TUN (06) 등이 있다. 얘들 단합대회는 매년 도쿄돔을 빌려서 한다.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그걸 또 5만명이 넘는 팬들이 들어가서 보고....


뒷줄 왼쪽부터 츠요시,고로,기무라,나카이,모리,싱고. 앞줄은 SMAP의 백댄서였던 KinKi Kids의 도모토 츠요시(堂本剛)와 도모토 코이치(堂本光一)

이 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교토에 남아 있는 전통 연예인 "게이샤(藝者)"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지만 게이샤는 몸을 파는 여성인 유나 (湯女)와는 다르다. 물론 일본 전통 사회에서는 매춘업도 무척 번성해서 도쿄의 요시와라(吉原)나 교토의 시마바라(島原)에는 불야성의 홍등가가 있었고, 오이란(花魁)으로 불리던 최고 등급의 유나가 시대의 스타가 되기도 했지만, 게이샤의 거리는 유곽 거리 시마바라가 아닌 기온(祗園)이었다. 게이샤가 되려는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오키야(置屋)에 소속되어 의식주를 제공받으며 노래, 악기 연주, 춤 등의 수업을 받는다. 그 후 16세 전후에 시험을 거쳐 마이코(舞子)로 데뷔, 선배 게이코(藝子)를 따라 연회석에 다니며 실무를 배운다. 연회인 오자시키( お座敷 )는 기온 지역에 퍼져 있는 특수한 작은 가게인 오차야(お茶屋)에서 열린다. 단골 손님의 요청을 받아 장소를 제공하고, 요리를 주문하고, 가무를 담당할 게이샤를 섭외하는 것이 오차야의 역할 . 밤마다 오차야에 다니며 3년 정도 견습 생활을 한 마이코는 붉은 옷깃을 흰 색으로 바꾸어 다는 '에리카에'라는 의식을 마치면 비로소 정식 게이샤가 된다. 이제 그녀에게도 상당한 수입이 생기지만, 그것은 생활비와 의상비, 그 동안 쌓인 레슨비 명목으로 소속 오키야로 들어간다.


저 의상과 장식은 18kg정도의 무게가 나간다.

1960년대 기온 최고의 게이샤로 불린 이와사키 미네코가 구술한 <게이샤 A Life>를 읽으며, '예능 사무소=오키야', '그룹 결성=마이코 데뷔', 'CD데뷔=에리카에'라는 공식을 떠올리고 웃었다. 게이샤의 손님들이 하룻밤 수백만원의 술자리에 흔쾌히 돈을 쓰며 그녀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안겼던 것처럼, 그들만큼 부자는 아니지만 사랑의 크기에서만은 결코 뒤지지 않는 아이돌 팬 여자들은 CD를 사고 콘서트 티켓을 사고 잡지와 사진과 팬시 상품을 사기 위해 흔쾌히 지갑을 연다. 21세기 연예계의 명멸하는 조명 뒤에 숨은 이 어마어마한 고루함이라니,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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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7-10-18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어떤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꽤 재미있네요. 그리고 꽤 적확한 비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mizuaki 2007-10-1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 님, 동의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
저 냐오 님이 쓰시는 BL리뷰의 오래된 독자랍니다. 아이돌계가 그쪽으로도 마굴이더군요. 관심 생긴 김에 킨키의 드라마 <인간실격>을 찾아 봤는데, '지금이라 다행이지 10년 전에 봤더라면 나 상당히 위험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 원칙을 줄이기


정치/메타-비평 : 2002/01/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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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던 이의 고민이 드러나는 글이다. 김영민이 로티를 좋아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흉내내는 행동패턴은 사실 로티의 '아이러니스트' 개념과 비슷하다.

안티조선 우리모두에 이가엘로 올렸던 글. 스무살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볼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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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그렇게 잘났니?


안티조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운동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듣기 쉬운 소리는 "너희는 다른 사람을 바보로 아느냐?"라는 말일 것이다. 스스로를 변호하고 운동에 대한 혐오감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논변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권정도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모두 사이트 탄생후 거의 2년 동안 이른바 "독자선택론"에 근거하여 수천 개의 비슷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리라.

사실 이 독자선택론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문시장은 신문의 정치적인 논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반영한다. 따라서 자본의 반영물인 독자수를 가지고 "독자들의 지지를 받는 논조"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성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너희들만 잘났어?"라는 정서적인 요인으로 독자선택론에 공감을 느끼고, 안티조선에 반감을 가진다. 일전에 나는 "계몽주의가 촌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말은 계몽주의보다 더 촌스러운 시대의 것이다."라고 빈정거린 적이 있으나, 그것이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칙을 말하지 않기


김영민 선생님과 함께하는 [장미와 주판] 독서여행에서 바람직한 신앙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할 때의 일이다. 어느 참석자가 교인으로써 비교인과 바람직하게 의사소통하는 방법으로 "신을 말하지 않기"라는 언어게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하느님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나는 언어는 너무나도 빈곤하다. 그리고 빈곤한 언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교인이 정말로 자신의 정서와 감동을 타인에게 전하고 싶다면, 그러한 언어게임은 오히려 확신에 찬 전도보다 훨씬 효력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종교의 문제 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한 동질적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서 집단 바깥의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균일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종교집단과 같은 획일성과 배타성을 느끼고 멀리 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이 소위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안티조선과 같은 언론운동 진영에도 정서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적인 차원에서는 언어 사용에 대한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스포츠 이야기, 가벼운 음담패설, 사는 이야기 정도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민주화, 투쟁, 운동, 상징조작, 반미, 언론개혁, 수구기득권 등등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살벌해 보일 것이다. 이 나라의 상황에서 보자면 거의 종교집단 처럼 보일 듯 하기도 하다. 필자 역시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옳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바탕색은 자신은 색깔이 없다는 듯 다른 색을 가진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불편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고, 우리는 나름대로 거기에 대비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내 말은 "바보들과의 타협"을 이루어 내라는 뜻이 아니다. 꼴통은 꼴통이고, 바보는 바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은 반쯤 인정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무시를 해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바보로 규정하는 작업이 우리 내부의 언어가 아닌, 보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쓰이는 공통의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안티조선 측의 패널들이 매번 TV 토론에 나가서 [수구기득권]이니 [독재세력]이니 [극우]니 하는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물론 저들을 재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글을 새로 써야 한다. 그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라면, 우리는 좀 더 꼼꼼히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리라.


최소한의 원칙을 세우기


개인적으로 고백하면 나는 아무런 원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원칙이 있으면 "이게 왜 생겨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그의 절대성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나는 자신을 "허무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것은 매사에 의미를 못 찾는 다는 뜻은 아니고, 내가 모든 전제를 다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나는 내가 믿지도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면서 설득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결국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원칙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사는 동물이며,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최소한의 공통지반 없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우리가 누구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언어게임에 있어서 상대방과 동의할 수 있는 룰을 이미 깔아놓고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최소한의 원칙 위에서 그를 옭아매는 것일 것이다. "나를 바보로 아느냐!"라는 질문은 무시하자. 거기에 대답하려 들다가는 피로해진다. 필요한 것은, 공통지반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의사소통이 힘들다면, 사람들이 이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과잉된 원칙으로 남을 재단하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원칙 자체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논리와 진실성을 따지는 사람이 조소받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 사회는 뼛속까지 마키아벨리즘에 물들어 있긴 해도 [확신범]들의 나라는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배워온 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는 데 인색할 뿐, 자신이 배워온 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화는 이런 양상으로 전개되야 한다.

"당신은 A에 동의하는 가."
"그렇다."
"당신은 B에 동의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A와 B의 기준에 의해, 결론은 C가 된다."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기준이다."
"아니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합의한 기준이고, 그 기준위에 결론이 서 있다."

여기서 상대방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수도 많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본인 스스로 뭔가를 느끼기는 할 것이다. ( 못 느끼면 꼴통이다. ) 물론 대한민국은 원칙이 남용되는 만큼이나 원칙이 없는 사회라 이 시점에서,

"사고가 논리정연해야 한다는 것은 당신의 기준이다. 나는 논리를 믿지 않는다."

고 나오는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나도 논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데, 우리 인간의 대화는 논리와 합리성, 진실성이라는 지반 위에 서 있다. (좀 현학적으로 보이려면, 진중권이 하듯 "소크라테스 이후로"라는 말을 붙여라.)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

이것은 정말로 지극히 공통적인 지반이므로 그대로 밀어붙여도 된다. 사태는 이렇게 종료시켜야 한다.


적은 수의 원칙으로 말하기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효용성 뿐만이 아니라, 많은 원칙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언어생활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칙의 남용은

첫째로, 배척할 것을 많이 만든다. 원칙에 벗어나면 걍 배척하면 되므로.

둘째로, 고민을 줄인다. 원칙에 맞추면 고민할 필요가 없으므로.

셋째로, 정답을 만든다. 원칙은 보통 정답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므로.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민없이 쉽게 배척할 수 있다면 정답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의 끈을 놓지 않을 때에야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칼로 무자르듯이 하는 원칙의 적용은 정답과 거리가 멀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본다. 립싱크 가수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퇴출되어야 한국 가요계가 정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정적이다. 사실 나는 아이돌 가수와 립싱크 가수는 다 사라져야 한다는 류의 말이 너무나도 귀에 거슬린다. 보통 인디 가수만을 인정하는 듯 보이는 평론가들의 말도. 이러한 언어게임은 립싱크를 배척하고, 고민을 줄이고, "립싱크를 없애자"라는 정답을 만든다. 그러나 생각의 여지를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양성을 옹호하는 말하기 방식이 아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문제는, 아이돌 가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금 왜곡된 방법으로 시장의 상당부분을 점유한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수만은 "립싱크도 하나의 장르다. 인정해 달라"고 주장했다. 립싱크를 그렇게 욕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반론이 될 수 있겠다. 둘이 붙었을 때, 일반 사람들에게 누가 더 편협적으로 보일까? "안된다"는 말과, "하나의 장르다"는 말 중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된다.

첫째, 립싱크가 우선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마치 진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진실성의 문제다.

둘째, 최소한 라이브를 시도했을 때 음반에 담겨 있는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와야 우리는 그사람을 "가수"라고 인정해 줄 수 있다. 이것 역시 진실성의 문제다.

셋째, 만일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다른 현상이다. 시각문화의 추세다"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을 인정하되 대중에게 혼돈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그들을 "립싱커" 혹은 "댄서" 혹은 "행위예술가"라고 불러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언어 사용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다.

넷째, 만일 라이브 불가능한 립싱크를 이수만처럼 "장르"로 만들어달라고 주장한다면, "블랙커피"나 "허리케인 블루" 등을 포함시킨 립싱크 차트를 따로 만들어서 일반 가요와 구분해야 한다. 이것 역시 진실성에 대한 문제다.

다섯째, 라이브할 수 있는 가수의 립싱크라도 그것보다는 라이브가 바람직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자유경쟁을 통해 라이브 비율을 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립싱크를 하고 있는 지를 명확히 표시하여 대중에게 평가를 받게 해야 한다. 이것 역시 가수의 정의에 대한 진실성의 문제다.


말장난 같고, 귀찮은가? 하지만 나는 이게 진짜라고 생각한다. 논증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원칙에 적용해서 사태를 일단락 시킨다면, 그것이 상대편의 편협함과 다를 게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말을 풍성하게


사람에게 신을 말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가 대안이다! 그밖에 없다! 나는 진실로 그렇게 느낀다! 감정적으로 행복하다! 그를 믿어라!!"라는 말 이외에 할 말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설득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원칙"을 일단 접고, 사회성원 공통의 원칙에서 출발해 주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지 않을 까 싶다. 그것이 "우리모두"라는 이름을 가진, 안티조선 사이트의 이름이 뜻하는 바가 아닐까?

우리는 이미 공통적인 지반을 가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진실성과 합리성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단지 위에 서술한 최소한의 원칙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민족주의 성향이 지극히 강하고 일반국민들이 보통 거기에 동의를 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가치를 공통요소로 어느 정도 활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내가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이 그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그 원칙을 적용시켜 사태를 판단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를 공통요소로 활용하지 않고도 예를 들어 친일문제나 대북문제를 제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반민족, 반통일, 민족반역자, 수구기득권, 민주화 등의 귀중한 단어를 최대한 아껴쓰는 안티조선을 보고 싶다. (이 중 일부는 아예 쓰지 말았으면 싶다. ㅡㅡ;;;)

이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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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아이의 글이라고는 믿기 힘든 秀作.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읽으려고 퍼왔다.

출처는 한윤형 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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