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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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것과 별도로, 정치적인 맥락도 재미있게 읽힌다. 노무현 시대를 살던 좌파들의 순수하고 지적인  태도가 흥미로웠다. 위험한 선동가들이 좌파의 목소리를 독점하고 있는 지금,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건축가들은, 쉽게 말하면, 땅을 바라보고 교감하는 능력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땅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독특한 판단력이 축적되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건축가들에게는 우연한 만남이지만, 안성면에서 펼쳐진 흔치 않은 땅과 필자 사이의 교감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한 남자가 평생 그리워하던 여인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버갯불이 튀는 듯한 사건이라고 할까? 그런 정도의 열정적인 교감이 안성면과 필자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기억한다. 바로 이것이 한 건축가를 10여 년 동안 무주에서 일하게 한 계기다. - P28

무주에서 10년을 작업하면서 느낀 것은 군청의 모든 직원은 감사원을 두려워한다는 이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공무원들이 다 같은 처지다. 직원들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일이 잘되느냐 못되느냐가 아니라 감사에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무서워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감사원이거나 여러 법의 저촉 여부인 것이다. 이 일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러나 진정한 군수라면 감사원이나 검찰이 아니라 군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군민, 주민의 삶을 향상시키려면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물어야 한다. 김세웅 무주군수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지금의 시스템, 지금의 건축 발주방식으로는 좋은 건축을 할 수 없다는 아주 확고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 P39

필자는 수의계약을 통해 무주 프로젝트를 10년간 진행할 수 있었다. 군수는 여러 가지 일로 검찰에 두 차례나 소환당했다. 심지어는 필자도 검찰에 불려갈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차라리 필자는 검찰이 정말로 필자를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의계약이라는 것은 규모가 큰 설계 일도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 진행해야 하는 터라 일을 할수록 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검찰이 부르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게 근거자료를 만들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 P40

건축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식물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지, 건축가가 처음부터 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으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식물은 무엇으로 건축을 완성시키는 것인가? 바로, 흐르는 시간이다. (중략) 특히 불특정 다수의 삶과 관계있는 공공건축은 다중의 삶을 미리 확정하는 일이기도 해서 보편적이면서도 시간에 따르는 변화 또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가장 큰 어려움은 지금까지 축적된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오늘 결정해야 하는 데 있다. 그래서 건축가가 이런 어려움에 대응하는 방법은 건축이 지닌 근원적 모순을 직시하고 그 한계를 미리 예측하며, 불확정적인 것까지 오늘 확정할 수 있는 지혜와 상상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P43

도시는 자연을 먹고사는 짐승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도시라 하더라도 안성면처럼 자연에 세우는 도시는 자연이 파괴되는 것보다 1000배, 1만 배 이상의 이익을,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연에 또 그 땅을 지킨 주민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런 한도 내에서만 기업도시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가치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 P87

건물에서의 창은 풍경을 오려내고 안으로 불러들인다. 불려온 풍경은 거리를 소멸시키고 안에 있는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 P95

부남면을 논하면서 어떻게 하늘의 별들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필자는 부남면이 별을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부남면에 별 보는 집을 지은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 주민들에게 필자가 선사하고 싶었던 부남면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결되었다. 건축가는 건물만 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의미 있게 조직해 주는 사람인데, 부남면 같은 오지의 면사무소를 리노베이션 한다는 것이 바로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 P100

공공건축이란 ‘공공이 발주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람, 주민, 시민)가 원하는 동시에 땅이 원하는 건축이며, 시대가 원하는 건축이고 그리고 끝으로 지구가 원하는 건축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대단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이런 것이 진정한 공공건축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실 아무리 작은 공공건축이라 해도 건축을 제안한다는 것은 한 사회를 상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P113

관공서 건물은 두 가지 점에서 선도적이어야 한다. 하나는 도시 환경 속에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도시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줄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건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어서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시민들과 호흡하는 편안한 장소, 그런 공적 영역의 특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관공서 건물은 지금이라도 개선의 여지를 두고 노력해야 한다. - P139

어떻게 보면, 어른들은 ‘형식’을 아이들은 실재하는 ‘현실’을 더 잘 포착해 낸다. 건축의 내외부 공간을 미끄러지듯 즐겁고 유쾌하게 넘나드는 아이들의 몸짓 속에 진정한 건축이 있다. 아이들이 자기 삶을 공간 속에서 조직해 내는 능력은 신비할 정도다. (중략) 어른 건축가들은 유쾌하게 놀 줄 모른다. 유쾌한 어린이집. 그것은 아이들만이 설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른 건축가들은 그것을 찾는 방식을 개발해야 할 것 같다. - P186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전쟁 무렵 북한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도 "조선왕조실록"이 소실되지 않았을 만큼 깊고 특별한 산인 적상산은 가을에 단풍이 들면 여인이 붉은색 치마를 두른 것 같다 하여 적상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정상에 올라가 보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P202

섬세하고 작은 것들의 축적을 고마워하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때, 사회는 진정으로 한 발자국씩 진보할 것이다. 진보란 소위 좌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마음과 손길 속에 있는 것이다. 필자 생각에 무주군 보건의료원은 큰 건물이 아니라 보건의료원을 작동시키는 작은 마음들의 결집 속에 큰 위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P262

지난 10여 년간 필자가 무주에서 한 작업들은 그래서 필자에게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것은 사람과 식물들에 의해 헤어려지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이것이 바로 건축을 오브제처럼 단독적이고도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으로 확장된 전일적 접근holistic approach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297

건축이 탈산업사회에서 농촌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능과 공간으로 포섭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사람들을 유혹할 일이 아니라 근접성의 법칙과 체험에 각인되는 삶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체험은 정신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갈등까지를 포함하는 ‘가까운 것들’. 사랑, 평화, 애정이 깃든 모든 것은 근접한 데서 시작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 사이에서 어떤 관계가 생길 수 있겠는가! - P298

필자가 공설운동장만이 아니라 무주에서 한 수많은 일은 건축가의 새로운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조절자social coordinator’로서의 역할을 한 것과 같다. 그래서 현대 건축가는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판단력 있게 조절하고 건축의 행위로 이행시키는 사람이다. - P306

감응. 감응이라고 하는 키워드. 무주의 모든 일은 감응인 것 같다. 이를 영어로 말하면 correspondence. 쌍방적인 것. 무엇을 느끼고 응하고...... (중략) 무주 공설운동장도 그렇고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도 그렇고 또 부남면 주민자치센터 등도 그렇고, 내가 보통 때 건축하던 방식과 전혀 다르게, 감응은 쌍방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는 사실 자연과 풍경과 말씨와 음식 등의 친근함에서 오는 프록시proxy의 미, 내가 무주에 살지 않지만 무주에 사는 사람의 풍경에 감응되어서 거기에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 P330

무주 프로젝트를 돌아보면서, 이런 공공건물이 들어서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시설이라고 판단한 지방자치단체장과, 쓰임새와 구조, 생김새 등을 협의해 결정지은 건축가가 있었기 때문이고, 양쪽의 관계가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기용 선생은 이를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다.
"우선은 김세웅 전 무주군수가 일방적으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종의 ‘전횡’이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가 또한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가지고 있는 ‘폭력’이란 게 있다. 건축가들은 이처럼 자기가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상황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한다. 사실 건축가들이야말로 그런 상황을 빠져나가는 데 무시무시하게 빠른 사람들이다. 무주를 냉정하게 바라보면, 지방자치단체장이 결정할 수 있는 권력과 건축가들의 숙명적인 직업적인 권력, 그 두 권력이 우연히도 충돌하지 않고 결합된 것이다. 그 두 권력이 결합돼서 마치 새로운 사건처럼 탄생한 것이다. (계속) - P365

(위에서 계속) 하지만 권력이 모였을 때 공공건축물을 가능하게 한 걸 보면서, 과연 공공건축이란 게 꼭 그렇게 나와야 하느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 P365

당시 무주군 조례는, 용역비 3,000만 원 이상이면 공개입찰, 그리고 3,000만 원 미만이면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정해 놓고 있었다. 제대로 된 공공건축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정기용 선생은, 무주군과 수의계약을 맺기 위해 설계비, 감리비 한도를 모두 3,000만원 이하로 낮춰야 했다. 때로는 실비도 안 나올 때도 있었다. 이는 고스란히 사무실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당시 기용 건축이 입은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컸느냐고 물어보니, 한 실장은 "무주 프로젝트 때문에 밀린 월급 700만원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퇴사한 직원들도 아직 ‘무주 월급’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회사가 얼마나 골병이 들었을까 짐작이 간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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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50주년 기념판)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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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 출간된 책이고, 내가 읽은 번역판은 1999년에 나온 것이라, 옛 시대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문체는 예스러워도 내용은 2020년의 현재에도 전혀 문제없이 잘 들어맞는다.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극성스러운 이 원숭이 집단이 나무에서 내려와 무리지어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일 년 내내 지속되는 발정기로 결속력을 강화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다른 동물들을 길들이며 폭발적인 속도로 개체수를 늘려온 과정이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이 원숭이들이 이야기를 꾸며내고 과학과 문명을 건설해가는 속편 격의 책이 하라리의 <사피엔스>라고 생각한다.

인구가 오늘날처럼 무서운 속도로 계속 늘어나면 통제할 수 없는 공격행위가 극적으로 늘어나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실험으로 분명히 입증되었다. 인구가 지나치게 과밀한 상태는 사회적 긴장과 정신적 압박을 추래함으로써, 우리를 굶어죽게 하기 전에 우리의 공동체 조직부터 먼저 무너뜨릴 것이다. 과밀상태는 지적 통제력이 강화되는 것을 직접 방해하고, 감정이 폭발할 가능성을 크게 높여준다.
- P191

요컨대,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피임이나 낙태를 널리 보급하는 방법이다. 낙태는 너무 과격한 수단이어서 감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일단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을 형성하면 그것은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을 이룬 셈이므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사실상 우리가 억제하려고 애쓰는 행위와 똑같은 유형을 가진 공격행위이다. 따라서 피임이 더 바람직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피임에 반대하는 종교적 또는 도덕적 파벌은 자신들이 전쟁을 조장하는 위험한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 P192

종교는 결코 다루기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는 동물학자이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과학적인 의미에서, 종교 활동은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지배적인 존재를 달래기 위해 오랫동안 복종의 몸짓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중략) 이런 존재에 대한 복종적인 반응으로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애원하는 몸짓으로 두 손을 깍지끼거나, 무릎을 꿇거나, 땅에 입을 맞추거나, 완전히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경우도 있고, 울부짖거나 노래하는 발성행위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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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속삭임 - 합본개정판
기시 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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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는 책을 참 재미있게 쓴다.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게 쓰지?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달인이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읽었다.
즐거움을 주려는 책이고 교훈이 목적은 아니지만, 가끔 오래 기억나는 얘기들도 있는데,
주인공의 선배가 했던 인간관계의 스프링 네트 얘기는 잊기 전에 적어두고 싶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네트워크를 만들며 산다고 생각해? (중략) 정보 따위는 어차피 9할이 쓰레기고 나머지도 독이 든 거야.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라는 것은 말이야, 정보망 같은 게 아니라 트램펄린 네트야.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무너질 테니까. 그럴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충격을 분담시켜서 네트 전체가 흡수하게 만들면 되는 거야. 알겠어?"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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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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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판의 페이지이다.

이 책 속에 담긴 일련의 상징들은 삶의 에피소드, 무대 장치, 오락 따위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남은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 P25

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게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앞으로 다가가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 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空의 매혹 L‘Attrait du Vide>
- P34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지워 준다. <고양이 물루 Le Chat Mouloud>
- P40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과 이기주의자들은 고양이를 좋아한다. 행동인은 고양이를 좋아할 시간이 없다. <고양이 물루 Le Chat Mouloud>
- P51

그토록 대단한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아 동네에 원수를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한 이 짐승을 그냥 버리고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략) 그 집 남자는 고양이라면 원수같이 여긴다고 했다. 그는 개들을 흥분시켜 가지고 고양이를 못살게 만들면서 잔인한 쾌감을 맛보는 것이었다. 안될 일이었다. 물루를 남에게 맡기고 간다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동네 안에 그를 미워하는 적이 있다면 결국 그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그를 희생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저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고작인 형편이었다. 수의사인 쎄르벨 씨가 한 마리에 12프랑씩을 받고 개나 고양이를 죽여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출발 전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마음을 정했다. <고양이 물루 Le Chat Mouloud>
- P58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멈춰 버릴 것만 같다. 터무니 없는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는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 러시아 사람들이 笞刑과 시베리아 수용소에 의하여 얻어낸 안이한 효과를 구하지 않고 비밀과 가난 속에 은신할 때 우리는 모멸에 의하여 靈感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어떤 여행자가 쓴 케르겔렌 群島의 묘사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이 묘사는 내가 다가가고 있는 명상의 방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케르겔렌 군도는 선박이 다니는 일체의 항로 밖에 위치하고 있어서...... 약 삼백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잇고 그 해안에는 흔히 안개가 끼어 있으며 그 주위에는 위험한 암초들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그곳에 접근하는 선박들은 극도로 경계한다....... 그 고장의 내부는 완전히 황폐하고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케르겔렌 群島 Les Iles Kerguelen>
- P75

나는 획득했다고 그날 나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1924년 성탄절이었다.) 나는 획득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잃고, 또 헛되이 다시 만회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시간에, 내가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획득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단숨에 획득했다. (중략)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海草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다. 티없는 거울아, 빛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행운의 섬들 Les Iles Fortunees>
- P85

"당신도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남들과 교제하고 싶고 재미있게 놀고 싶어해요. 다만 당신은 신경이 예민한 분이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 웅크리기만 하는 거예요. 나도 당신 같았어요. 그 때문에 나는 죽게 된 거예요. 나는 나만을 위해 사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남들을 위해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復活의 섬 L‘ile de Paques>
- P93

나는 파크 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대목을 열었다. 그 섬은 해골과 뼈들이 널려 있는 거대한 棺과 다를 바 없다. 그 섬이 기막힌 것은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백 개나 되는 거대한 彫像들 때문이다. 그 어느 사멸한 종족이 무엇을 위하여 그것들을 만들어 세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엄청난 우상들이 섬 가장자리에 가물가물한 높이로 세워져서 여행자들을 그토록이나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백정은 돌연 정신나간 듯 외치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눈에 보여요, 그것들이 눈에 보여요." 하고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겁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가 어떤 우물의 번들거리는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그 우물 위로는 오직 그 야만의 우상들만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復活의 섬 L‘ile de Paques>
- P100

어떤 문명에 의해 형성된 어떤 정신의 소유자는 우리들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그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아 주는 일뿐이다. <상상의 印度 L‘Inde Imaginaire>
- P107

마죄르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 밖에! 그럼 무엇을?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고 가냘프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호해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씨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 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보로메의 섬들 Les Iles Borromees>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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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 SNS부터 에세이까지 재미있고 공감 가는 글쓰기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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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도 별로고, 뒤표지에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정말 쓰고 싶은데.....” 하는 소개 문구에도 공감이 가지 않았다. 무슨 당연한 얘기야? 쓰고 싶으면 쓰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로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내용은 의외로 좋았다. 도움이 될 것 같은 말들이 많았다. 퇴고할 때는 첫 단락을 없애보고 마지막 몇 문장을 지워보라는 얘기는 글을 많이 써 본 경험에서 나온 귀한 충고였다.

  


  읽는 사람은 없는데 쓰고 싶은 사람만 많은 현실에 대한 저자의 불안 섞인 의문에 공감했다. TMI 수필이 잘 팔리는 것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는 친구 사귀는 걸 귀찮아 하는 세태를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진짜 친구를 사귀려면 돈도 들고 시간도 들고 감정도 소모되니까, 친구인 척 하는 책을 읽으면서 만족하는 거겠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편하게만 살다가 안 그래도 낮은 관계 능력이 더 떨어지면 어쩌지? 이거 좀 위험하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기’,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에 대해 쓰기’, ‘내가 싫어하는 것에 대해 쓰기’는 어떨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이유, 불편한 이유, 싫어하는 이유다. 나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에서는 특히 이 세 가지가 중요한데, 남에게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길게 쓸수록 좋다. 그 표면적인 ‘이유’가 거짓말일 때가 많아서다.
- P27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면, 그 리뷰는 반드시 읽힌다고 해도 좋다. 폭넓은 소비층이 아니어도 소수의 확실한 팬덤이 있다면, 열성적인 검색을 통해 당신의 글은 독자를 확보하게 된다. 어쩌면 당신 자신이 그런 소수의 충실한 팬덤에 속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2차 창작, 팬아트는 특정 작품을 완전히 숙지한 사람들이 즐기는 고도의 리뷰 행위이기도 하다. 당신의 글에 앞으로 꾸준히 관심을 가질 독자를 얻기에 좋은 소재 선정일 수 있다.
- P72

조지 손더스는 시러큐스 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졸업 연설에서,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에 대해 말했다. 가장 후회되는 순간. 가난? 남에게 보일 만하지 못한 일을 해야 했던 것? 망신당한 일? 노년에 이른 작가가 후회하는 일은, 친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 P132

내가 읽고 싶은 글이 세상에 없어서 내가 쓴다. 남이 읽어주는 것은 그 다음의 행복이다. 일단 쓰는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 존재한다.
- P133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해 배우던 때의 일이다. (나는 일반상대성이론을 배웠다고만 했기 이해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유념해달라.) 너무 어려워서 ‘말하자면 이런 건가요?’ 하고 자꾸 이상한 비유를 가져다 대는 학생에게 물리학과 교수가 말했다. "세상에는 한 번 정도 어렵게 어렵게 고민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있다. 모든 걸 다쉽게 설명할 순 없다. 복잡해서 복잡한데 어떻게 쉽게 풀어주느냐." 필자가 이해를 못해서 어렵게 보이게 쓰는 일도 있지만, 어려운 이야기를 쓰느라 어려워진 글도 있다. 복잡한 현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가지를 다 쳐내고 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철학이 대표적인 경우고, 역사 또한 그렇다. 철학자가 쓴 책을 이해할 수 없어서 해설서(심지어 비전공자의)만 읽고 철학자의 사상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 P170

데즈카 오사무는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창작법>에서 만화를 그릴 때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기본적인 인권만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며, 다음의 세 가지를 주의하라고 썼다.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것, 특정 직업을 깔보는 것, 민족이나 국민, 그리고 대중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꽤 명쾌하지 않은가. 이 정도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의 글을 굳이 읽어야 할지 의문이다.
- P196

퇴고하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중략) (5)고유명사는 맞게 들어갔나 인용은 정확한가 (6)도입부가 길지 않은가. 한 단락을 지워본다. (7)마지막 단락이 지지부진하지 않은가. 몇 문장을 지워본다. (9)반복되는 표현, 습관적으로 쓴 단어(특히 부사와 접속부사)는 없는지. (후략)
- P197

소설의 인기는 전 같지 않고, 자기계발서도 전만큼 읽히지 않는다. 인기 에세이의 주인공 중에는 ‘보노보노’ ‘곰돌이 푸’가 있다. 귀염성 없는 인간과 싸워도 승산이 없는데 보노보노와 싸워 이길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 P212

이런 책들의 내용을 TMI에 비유한 것은, 우울증에 대한 책이라고 우울증 얘기만 있는 게 아니고, 떡볶이 얘기도 등장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게 특정된 사연은 특정된 독자를 불러 모은다. 공감, 혹은 창작자가 읽는 나를 ‘알아(봐)준다’는 느낌이 중요해졌다. 책을 한 권 읽으면 같은 고민을 가진 한 사람의 친구를 얻는 것과 같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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