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4월. 레포트를 쓰느라 읽는 책은 아무래도 필요한 부분만 읽게 되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책이 드물다. 김만중, 박지원, 이광수, 최서해와 관련해서 이것저것 발췌해 읽었지만 제대로 다 읽은 책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책을 생각해 보니 공부보다는 취미를 위해 읽는 책이 많은 것 같다.
우한용의 <채만식 소설 담론의 시학>을 대출 기한이 임박해서 허겁지겁 다 읽었다. 덕분에 <탁류>도 읽고, <과도기>, <냉동어>, <소년은 자란다>도 읽었다. 내가 보기에 채만식은 균형 감각이 뛰어난 작가이다. 인간에 대해 덮어놓고 신뢰하지 않는, 냉소와 의혹의 눈초리가 좋다. 그의 냉소와 의혹은 자본가와 지식인과 기층민중 모두를 향하며, 군국주의 일본뿐만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도 놓치지 않는다. 전쟁 전에 험한 꼴 안 보고 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더 오래 살아서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글들을 조금 더 써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주의의 고전이다. 서양사학과의 민족주의 수업을 청강하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막연했던 민족주의가 머릿속에서 어렴풋하게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레포트를 하나 써 보면 또 한 발 나갈 수 있겠지.
어느 우울한 오후에 공부를 걷어치우고 도서관에서 미사키 아키의 <이웃 마을 전쟁>을 빌려 잠적했다. 이 작가의 단편 <버스 탈취 사건>을 퍽 재미있게 봤는데, 장편은 아직 멀었다는 느낌. 아이디어는 상쾌하나 이야기를 구성해가는 역량이 조금 부족하다.
좋아하는 선생님과 같이 주경철의 <문명과 바다>를 대상으로 한 독서토론회 포스터 옆을 지나다가 "저 책 읽어."라는 말씀을 들었다. 도서관에 있는 두 권은 모두 대출중이어서 서점에서 네 시간 만에 독파했는데, 서점에서 독파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책이다. 지도와 그림이 아름답고 글이 쉽다. 선원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한 것과 노예 무역에 대한 것이 특히 좋더라.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려 드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 무역의 바탕에 서양인의 탐욕 뿐 아니라 아프리카 인들 자신의 생활양식도 존재한다는 것은 조금 충격적인 발견. 저자가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 토론회에서는 이 쪽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문학사를 따라 현대 소설을 설렁설렁 살펴보는 중이다. 경향을 지나 모더니즘에 도달했는데, 말만 많이 들었지 그게 뭔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상희의 <한국 모더니즘 소설론>은 비교적 쉽고 명쾌하게 중요한 점들을 짚어 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품을 다 읽으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겠지만 도서관에서 찾기가 쉽지 않은 것들도 많군.
그래서 레포트 주제는 박태원으로 결정했다. 크게 도움은 안 되겠지만 사진도 많고 지도도 있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조이담의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를 읽었다. 박태원은 부잣집 아들이었구만. 아버지는 약사, 삼촌은 의사, 고모는 고등학교 교사인 초인텔리 집안. 구보 하나 정도 소설 쓰고 있어도 아무 문제 없는 경제 환경이었다. 쬐끔 재수 없어졌다. 그치만, 그런 도련님이 월북했다니, 만년은 엄청 고달펐겠구나 싶어서 동정하는 마음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