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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평점 :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은 학생들이 묻는 '공부는 왜 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공부로부터의 도피'가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로 이어짐을 이야기하면서 일본 사회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와도 많이 겹친다.
아이들은 묻는다. "선생님, 이걸 배우면 뭐가 좋아요?" " 이걸 배우면 뭐에 도움이 되나요?"
아이들은 '교육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왜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거꾸로 묻고 있다.
이에 대해 경제성과 합리성으로 동기부여해서 아이들에게 '공부하면 이런저런 좋은 점이 있다' 고 실용적으로 아이들을 유도한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돈을 많이 벌고, 예쁜 여자, 돈 잘 버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일부 제대로 된 부모는 아이들의 질문을 받고 어처구니 없어 말문이 막힌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들의 '이걸 배우면 뭐가 좋아요?'나 '이걸 배우면 뭐에 도움이 되나요?'는 딱히 요즘의 경향도 아니고, 이상한 질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용적인, 아니, 탐욕에 가득차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나쁘다. 글자를 왜 배우나요? 라는 질문에 글자를 왜 배우는지, 글자를 배우면 뭐가 좋은지 이야기해주는 것이 어렵나? 실용적이고, 경제적 합리를 찾는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면서, 그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대답 못하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아이들이 소비의 주체가 되면서 소비자 마인드로 모든 것을 등가교환 하려 하고, 계산적이 된다고 비판하고 싶은 것 같다. 아이들이 "나는 이만큼 지불하는데 선생님은 무엇을 줄 건가요?" 라고 묻고 있다고 아이들의 마음을 어른의 눈으로 짐작하며,
"그런 질문이 아이들한테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 교육 제도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라고 전제부터 틀려있다.
"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 라고 묻는 초등학생은 '자신이 배움의 기회를 구조적으로 박탈당한 사람이 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만이 의외의 질문을 할 수 있다. "
라고도 말하는데, 요즘 아프간- 탈레반 사태에 이어 '나는 말랄라다'를 읽고 있어서 처음 읽을 때는 여기에 좀 혹했다. 말랄라는 학교에 간다는 이유만으로 총을 맞았다고. 공부하지 못하게 하려고 학교를 폭파시켰다고. 하면서. 근데, 다시 읽으며 생각해보니, 그것은 답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말라라 같은 사람도 있는데, 니들은? 응? 말이야. 이런 마음의 답변이여서는 곤란하다.
"이런 질문에 대해 지금의 어른들은 그런 질문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물리치지 못한다. 말문이 막혀서 허둥대거나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실용적인 이유를 들어서라도 아이들을 공부시키려고 한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한 질문이 어른들을 아연실색케 하거나 또는 유아적인 지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무의미한 답변을 끌어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일찍부터 배우게 된다. 이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과정이 아이들에게 일종의 성취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등가교환 하는 아이들'이 탄생한다. 이 것이 이 책의 화두이자 주제이다.
아니야, 누가 봐도 어른들이 잘못했잖아. 아이들이 "소비자 마인드"라는 프레임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이들의 질문에 실용적인 이유를 대는 어른들이 잘못했고. 사실, 이걸 아이들이 묻기도 전에 어른들이 하는거 아닌가. '너 공부 열심히 해야 예쁜 여자 만난다' '공부 잘해야 좋은 남자 만난다' '공부 잘해야 돈 많이 번다' 라고, 어쩔수 없이 실용적인 답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이들이 겪어보지 못해 알지 못하는 '미래들'로 협박하잖아.
아이들은 아무 질문이나 해도 된다. '등가교환 하는 아이들'이 탄생했다면, 그건 질문에 답한 어른들의 거울일 뿐이다.
왜 공부해야 하나요? 는 평생 공부 하는 인간의 평생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추구해야 할 질문이고, 그것이 아이때 시작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비판으로 시작했지만, 이 책에서 좋은 부분 많았다.
저자는 요즘 아이들과 삼십 년 전 아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처음 사회관계에 들어설 때 노동을 통해 들어나는가, 소비를 통해 들어가는가의 차이라고 한다. 어릴 때 가사노동에 참여하면서 밥 먹고 그릇 치우거나, 화초에 물 주거나 하는 소소한 가사노동으로 부모의 칭찬을 받으며 처음으로 가족 구성원으로 인지되며 인정을 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가며 사회화 과정을 밟아갔다고 한다.
"아이들은 좀더 자라면 가사노동에 머물지 않고 바깥 사회활동에도 참가하는데, 타인에게 뭔가 도움되는 일을 하면서 그에 대한 감사와 사회적 승인이라는 대가를 받는 교환 행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의 기초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는 가사노동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노동의 작은 분담자로서 사회관계 속에 자기를 등록하면서 아이들은 먼저 노동 주체로 자기를 세운다."
이런 기조의 이야기들에 공감한다. 뒤에 나오는 '노동으로부터의 도피' 에도 연결되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고, 아이때부터 필요한 사회화를 배워나가야 한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라는 '공부' 와 '내가 이 돈 받고 일하느니 일 안 하고, 돈 안 쓰고 만다' 라는 니트족의 합리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회 관계 속의 나를 설정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본주의의 쳇바퀴가 감당할 수 없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피로도가 극도로 높아져서 벗어나는 사람들, 튕겨나가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불쾌함' , 즉 "기분"이라는 화폐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불쾌함은 화폐로 유통되는데, 아이들은 이 등가교환을 어릴 때부터 부모를 보며 배운다.
"아이들은 '타인이 초래하는 불쾌함을 견디는 것'이 가정 내에서 화폐로 기능한다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습득한다. 현대 일본의 가정에서 화폐 대신에 유통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생애 처음으로 '화폐'로 인지하는 것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불쾌감을 견디는 것이다."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밤늦게 돌아와 온몸으로 표현하는 '피로감' 으로, 자신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혹한 노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아버지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언짢은 얼굴을 함으로써 자신이 기울이고 있는 노력을 호소하는 어머니를 보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학교와 학원을 가고, 공부를 하면서 '온몸으로 피로와 불쾌함을 표현'해서 자신도 집안에 보탬이 되고 있음을 과시한다.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를 '누가 가장 기분이 나쁜가'로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기본 규칙이다. '불쾌함'이라는 카드를 가정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 자원 배분과 결정의 순간에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가장 힘들고 불쾌해. 피해자 경쟁을 하게 되는 것. 좀 웃긴 얘기였지만,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불쾌함' , '기분' 이라는 화폐가 지금 이 사회에서 어떻게 통용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이 어떻게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흐리는지를 생각해보면 각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해야할지 답을 찾을 수 있을것이다.
배움에 대한 이야기들도 좋았다.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오히려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 몰라서, 그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배움이 일어나는 동기가 된다. (..) 배움이란, 배우기 전에는 몰랐던 잣대로,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나 의의를 측정할 수 있는 역동적인과정이다."
'공부로부터의 도피'와 '노동으로부터의 도피' 사이에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이 있다.
이 챕터가 이 책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준다. '학력은 더 이상 취직의 보증수표'가 아니고, '노력과 성과가 일치하지 않는 사회' 라서 '공부와 노동으로부터의 도피' 가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부유층 가정의 아이들이 빈곤층 가정의 아이들보다 학력이 높게 나온다. 그 이유에 대해 보통 부유한 가정이 자녀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보다 더 내밀한 이유가 있다. 바로 부유층 자녀들은 높은 학력을 딸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은 이익을 회수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빈곤층 자녀들은 학력의 효용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가 있다.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의 차이' 이다. '학력의 차이'는 간단하며 계량이 가능하지만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는 통계적으로 취급하기 곤란하다. '목표하는 바를 위해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 는 것을 온 가족이 믿고 있고, 실제로 그 노력의 성과를 향유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공부해도 소용없다'고 공언하고 지금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원인이 자신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을 비교하면 '노력에 대한 동기 부여'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덧붙이면, 노력에 보상을 받지 못해도 괜찮다. 다시 하면 된다는 경험을 가진 것과 이 노력이 만약 실패하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망하는 것이라는 것을 체득한 것의 차이도 있겟다.
후자가 저자가 말하는 '리스크 사회' 이고, 현대 사회는 '리스크 있는 삶을 선택한 개인'의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 문제임을 지적한다. 리스크 사회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상부상조 집단' '친밀권' 등을 제안한다.
재미있는 것이 옛날 책이고, 일본 사회의 기득권 남자가 꼰대말 하는 것 같다는 평이 있는 것도 이해되는데, 이런 지점들에서 공감하게 되는 바로 지금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 저자의 위치에서 페미니즘 어쩌고, 요즘의 페미니스트들이 어쩌고 하는 건 좀 콧방귀 끼게 되지만, '고립'과 '자립'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고, 지금, 그리고 앞으로 할 중요한 이야기이다. 저자의 통찰력이든, 시대가 돌고도는 것이든, 둘 다이든 말이다.
'고립된 인간'을 '자립한 인간'으로 내세우는 것이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에서 합의를 넓혀갔다고 한다.
고립된 사람에게 타인은 그의 자유와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자이고 타인의 존재 자체가 주체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이 된다. 고립된 주체는 타인의 공간을 자신이 이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간주할 수 없다. 고립된 주체에게는 그 외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적이라면, 자신의 주체를 방해하는 사람이고, 친구라면 지원과 연대의 의무가 발생하고, 노예라도 부양과 관리 따위의 번잡한 일을 동반한다. 반면 자립한 사람은 다르다. "나는 자립했어" 라고 얘기하는 것은 소용없다. "그 사람의 판단과 언행이 적절하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확증되어 주변 사람들이 계속해서 조언과 지원과 연대를 부탁해올 경우 비로소 그 사람을 자립한 사람이라고 불러줄 수 있" 다. 자립하는 것이 자신의 선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해서 주변을 침범하고, 침벙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변과 사회가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침범'이라는 말이 좀 싫을 수도 있겠지만, 타인과 내 쪽에서 먼저,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연결을 주고 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전제는 절대적이고, '자립'을 바라는 사람은 '고립'과 '자립'을 구별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친밀권' 중 자신이 구상하는 '도장 공동체'도 친밀권을 만드는 시도라고 했다. 자신의 신체와 돈을 써서 친밀권 모델을 만들겠다고. 대학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충 다 했으니, 여생은 지역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도장에서 보내며 무예를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는 무예를 가르치고, 집에서 지내기 어려운 아이들이 있으면 청소와 가사일을 시키고 도장에서 숙식 해결하며 자립할 수 있게 돕고, 학문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으면 원서강독을 하고, 철학과 문학도 가르치며, 주말이 되면 친구들과 모여 파티를 열고 마작을 하는 열린 학교 같은 서당이나 도장 같은 커뮤니티의 거점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동안 사회에서 배우고 가르치고, 얻은 것을 사회로 돌려서 연결시키는 멋진 미래라고 생각한다.
우치다 타츠루의 책 더 찾아봐야겠다. 재미있었다. 이 책 읽으면서 '노동' 에 대해 생각하고, 요즘 뜨는 '파이어족'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린다 그래튼의 '100세 인생'을 읽고 있는데,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장수 사회가 오고 있어서 '노동' 에 대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이 책 읽으니, 미하엘 엔데의 '엔데의 유언' 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
교육의 효과는 졸업 시점에서 취득하는 단위 수와 성적, 자격, 전문지식, 기능 따위만 잇는 것이 아니다. 고등교육에서 배운 좀더 중요한 기법이라고 할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은 종합적으로 수치화하기가 불가능하다. 식견, 판단력, 감수성, 취미 같은 것들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자신의 몸에 배게 됐는지 본인도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학교에서 익힌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는 능력‘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인 메타능력이다. - P160
우리가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는 데 열중하는 이유는 교환이 안정적으로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교환의 장을 밑에서 받쳐주는 여러 제도들과 인간적 자질을 개발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환 자체보다 오히려 교환의 장을 두텁게 하는 것. 바로 여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교환의 목적은 등가의 물품을 교환하거나 싼값으로 고가의 물품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계기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인간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 P167
경제 관계의 배후에는 교환을 성사시키고 유지하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노력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 노력들이 경제활동의 본래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경제적 합리성은 경제 활동에 부가적으로 따르는 많은 인간적 가치를 배제합니다. 따라서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합니다. 하지만 시야에서 배제된 탓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것이 많습니다. 교육도 타격을 입었고 노동, 육아도 그렇습니다. - P169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과정, 이것이야말로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은 일단 보류하고, 아직은 이해가 안 되지만 주의 깊게 듣고 있으면 언젠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경의와 인내심을 갖고 메시지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로 귀 기울이지 않으면 소음은 결코 신호로 바뀌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소음은 소음이고 신호는 신호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살마에게는 소음이 신호로 변하는 순간이 결코 찾아오지 않습니다. - P172
오늘 리스크 헤지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친밀권은 리스크 헤지를 위한 공동체 이야기였습니다. 오늘날 미혼과 비혼이 늘고 있다고 하지만, 고학력에 고수입인 사람들의 결혼율은 더 높습니다. (..) 사회적인 약자들일수록 조력자가 없는 시스템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가족을 만들 수 없는 사람은 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입게 되거나 노인이 되었을 때 곁에서 지원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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