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입니다, 고객님 - 콜센터의 인류학
김관욱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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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에서 담배를 많이 핀다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저자는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가정의학과 전문의이다. 콜센터 상담사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해 한국 사회에서 '콜센터'라는 블랙홀이 담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책을 읽는다고 다 내 이야기처럼 와닿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정말 내 이야기로, 내 주변의 이야기로 와닿았다. 많이 속상하고, 좀 울기도 했고, 답이 없지만, 저자가 반복해서 말하듯이,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아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은 몸과 말이다. 그리고나서야 마음이 움직여 진정으로 변하게 된다. 

달걀을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을 계속 하는데, 그 바위가 모습만 계속 바뀌고 있다면 어찌해야 할까. 페미니즘과 비슷하다. 몸이 알고 있는 것을 거꾸로 알게 되었을 때, 관성은 힘을 잃고, 바뀐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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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상담사들은 담배를 많이 피울까?' 에 대한 답을 찾고자 석사 시절이던 2012년 처음 콜센터에 방문했다. 여성 흡연자층이 확산하는 하나의 이유를 찾고자 했던 셈이다. 그런데 연구가 끝날 무렵 나는 콜센터가 낮은 임금으로 여성 상담사의 노동력을 사용하면서 이들의 건강을 조금씩 빼앗아가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고정관념마저 재생산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친절하고 공감에 능통하며 순종적인 딸과 아내, 어머니의 모습 말이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불친절하거나 짜증과 화를 내도, 상황이 불쾌하거나 어색해도,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해도, 그리고 임금이 많지 않아도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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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역사 이야기 읽고 있다.  영국 산업혁명과 미국과 유럽의 노예제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정말 야만의 시대였구나. 그 시대가 그리 먼 과거가 아니구나 싶었는데, 아니다. 그 야만의 시대가 지금도 바로 여기에도 펼쳐지고 있다. 다른 나라의 과거까지 갈 것도 없이 이야기는 1970, 80년대 소위 '공순이'로 불리던 여공의 삶에서 시작한다. 


당시 여공들의 장시간 노동은 한국 노동집약적 산업의 핵심 경쟁력이었고, 잔업은 물론이고, 철야 작업까지 자주 이어졌다. 각성제인 타이밍을 비타민인 양 먹으면서 일했고, 타이밍마저 없을 때는 쓴 커피 가루를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일했다고 한다. 


구로공단 50주년 기념행사에 '수출의 여인상 복원 기념' 행사 또한 있었다. "그때 우리를 산업역군이라고 불렀는데 정말 '개지랄'이다. (...) 당시 우리 여공의 목숨은 파리만도 못했다. 인권이고 뭐고 없었다. 성폭행 같은 것은 정말 비일비재했다. " 


과거 여공들에게 타이밍을 먹이며 매일 야근과 철야를 시켰듯이, 여성 상담사의 경우 담배를 워킹 드러그로 허용했다. 가까운 곳에 흡연실을 만들어주고, 바깥에서는 여성의 흡연에 대한 나쁜 시선이 유지되지만, 안에서는 흡연을 일의 연장으로 권한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압박 받을 정도로 매 초, 매 분 모니터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인류학자 윌리엄 잔코비악에 따르면, 드러그 푸드, 특히 술과 담배가 노동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기술이 더욱 복잡해지면서 그것은 담배와 커피로 대체된다. 상담사들이 술보다 담배를 더욱 선호하는 것은 술을 마시면 다음 날 머리도 아프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주지만 담배는 큰 부작용 없이 곧바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워킹 드러그로 담배, 커피, 약국에서 각성제 먹는 사람들 이미 주변에 많다. 


콜센터 상담사들의 감정노동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상은 감정 이상의 노동 현장이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이 일이 완전히 여성형 막노동이라고 느끼게 되었다며, 이를 "여공들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했다. 정적이고 지엽적이고 반복적인 일의 특성을 '여성적'이라고 보는 고정관념도 심했으며, 먼지 대신 전자파에 노출되고, 일의 개념이 1970년대에 머물러 있다고 표현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말이다. 동료 시민을 하인이나 부하나 백성으로 격하시킨다는 말이야? 조선시대로 가시던가요. 진상들은 늘 있어왔고, 나 또한 그런 진상짓 했었을텐데, 참 못났다. 구조적 문제라고 하면 보통 모호한데, 이건 분명히 알겠다. 진상에게 그래도 된다는 시그널을 주는 주체가 바로 구조적 문제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컴플레인을 세게 해도 되는 무대, 즉 진상의 세계를 만든 제작자' 말이다. 


"이것은 시민들에게 감정노동자를 배려해달라고 감정에 호소할 문제가 아니라 안전한 노동 환경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정말 그렇다. 


나는 병원에 거의 안 가지만, 병원에 가는 것도 눈치 봐야 하는 것이 일의 가장 비인간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콜센터에서는 CCTV 다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시간과 모든 일이 다 실시간으로 모니터되고, 평가 되고, 피드백을 주게 된다. 상담사들은 기계가 아닌 인간 부품 취급 당한다. 화장실 가는 시간 조차 통제당한다. 200명이 넘는 상담사가 한 공간에서 일하던 센터가 있었다. 사무실 양쪽 벽 끝에 부채가 각각 세개씩 걸려 있고, 근무 시간 중에는 이 부채를 든 사람만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모두들 일하면서 부채가 걸리기만 기다렸다가 기회가 생기면 그 즉시 달려가 부채를 잡았다고 한다. 모욕적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물리적 외형 및 그 안에서 일어나는 노동 양상을 가리켜 "양계장과 같은 대량 사육 농장" battery farms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끔찍하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이 단순 비유가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듣는다. 모 센터에서는 봄이 오면 에어컨을 켠다고 한다. 봄이라 나른해서 졸지 말라고 에어컨을 켜서 상담사들이 실내에서 목도리 두르고 카디건 걸치고 일한다. 창문은 다 블라인드 내린다. 창밖 보지 못하게. 


"상담사는 체온과 시각마저 높은 생산량 (콜 수)을 위해 통제받는다. 이것은 마치 실제 양계장에서 닭이 달걀을 최대한 많이 생산하도록 축사의 온도를 엄격히 조절하는 것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료에 항생제를 섞어 인위적으로 병균에 내성이 생기게 만들듯 콜센터 밖과는 달리 편리한 흡연실을 구비해 악성 고객의 공격에 내성이 생기도록 상담사들이 자유로이 흡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 


이 책에서 가장 섬찟하게 기억에 남았던 것은 '미소 띤 음성' 이다. 

서비스만 친절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는 목소리에마저 친절함이 배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상담사가 받은 통화 품질 평가표를 보면 


"평이한 상담이 진행되었습니다. 다소 정중한 어미 표현 및 미소 표현 부족하여 건조한 상담이 진행되어 아쉽습니다. ㅇㅇ콜의 특성상 미소 띤 음성과 생동감 있는 어미 구사, 정중한 언어 표현이 필요함을 당부드립니다." 


상담사의 목소리는 ARS의 기계음과 달라야 한다. 인간이지만 기계처럼 일하기를 강요당하고, 기계와 다른 인간미를 강요받는다. 미소 띤 음성을 읽는 순간, 그게 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이걸 내가, 개인이 그렇게까지 친절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공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버렸다. 


여성들이 모인 곳, 여초 직장이 저임금, 강도 높은 노동에 감정노동까지 더 하여 여유들이 없기 때문에 간호사들의 태움 같은 것들이 나오는 것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본 적 있다. 콜센터에서 미소 노동을 하면서 본인들의 감정은 죽이고, 실적으로 매 순간 평가 받고, 그를 위해 팀장에게 빵셔틀, 커피셔틀, 과일셔틀을 하고, 동료가 아닌 경쟁자와 왕따가 있는 내외부 모두 극한의 공간이다. 


그리고,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의 세계가 펼쳐진다. 가장 약한 그곳에서부터 팬데믹이 악습들을 들춰낸다. 

상담사들은 필수노동자가 되지만,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이례적인 과로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한다. 제대로 된 교육도 없이 상담에 투입된다. 여기까지도 답답한데, 상상 이상이다. 업무량 뿐만 아니라 폭언과 책임 전가 또한 폭발적으로 늘었고, 상담사는 온몸으로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코로나 19사태로 전체적으로 콜 수가 증가하자 최소 기준 콜 수를 100콜에서 120콜로 상향 조정한다. 죽어라 달리고 있는데, 결승선을 뒤로 밀어 버린다. 이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함에도 보상은 없다. 추가 보상도 없고, 휴식 시간이나 인력 확충도 없다. 기준선을 더 올려 버리고, 더 열심히 하라고 지시한다. 


코로나 19로 인한 분산 근무 방역지침은 원청회사에게 콜센터를 풀 아웃소싱으로 전환해 완벽하고 지속적인 간접고용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줬다. 


상담사들은 '벽'이다. 정규직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민원인을 끝까지 막는 벽! 


6장에서는 상담사들의 노동운동 도전기가 나온다. 나는 6장에서 조금 울었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까지 읽고나니 씁쓸하지만, 그렇게 계란으로 바위를 쳤지만, 상담사의 힘은 유한하고, 그들의 저항을 억누르는 무게는 무한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함께 만들어갔던 실천의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몸자보 걸기, 돌발파업, 로비 점거 시위, 적정 콜 받기, 동시이석, 그리고 이로써 얻어낸 크고 작은 성과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7장에서는 몸펴기 운동에 대해 나온다. 서문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상담사들이 맨날 앉아 있으니깐, 하기 쉬운 운동 나오나보다.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 이상이다. 이 책에서 '몸'은 아주 중요하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 '마음'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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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학문과 연구의 최종 목표가 있다면 바로 이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첫째,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된다. 둘째, 내 몸을 내 스스로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이 생긴다. 셋째, 돈을 들이지 않고 일상에서 건강을 쉽게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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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또한 감명 깊게 읽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사례로 나온 어느 상담사가 나쁜 음식들을 먹고, 잠을 못 자고, 흡연을 하고, 술을 마시고. 그것을 '가난한 루저들의 싸게 노는 법' 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돌 볼 여유 한 톨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몸펴기 운동'이 결국 마음을 펴는 이야기가 좋았다. 


몸펴기 운동을 소개하는 김사범은 영리만 추구하는 기업 때문에 노동자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건강을 잃고, 그렇게 잃게 된 건강이 또다시 의료 자본의 영리 추구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저자 또한 몸펴기 운동에 감명 받아 사범 자격증을 딴다) 


8장에서는 타국의 콜센터들과 비교하여 한국의 콜센터들의 특징을 보여준다. 저임금의 낮은 지위를 유지하며 전통적 여성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첫 직장으로 몸에 밴 사회생활 목소리와 톤이 있다. 어떤 화난 고객도 달랠 수 있고, 가족도 못 알아듣고, 친구와 지인도 놀라는 그런 목소리. 나는  웃기기도 하고, 그렇게 내가 가진 가면에 은근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읽다가 깨닫고 화가 났다. 나는 누구에게 배워서 그런 사회생활 목소리를 냈고, 그것이 필요 없는 지금까지도 그 목소리와 톤을 종종 내고 있는 것일까. 그걸 누구에게 또 전달하고 있었던 것일까. 


리뷰에 다 쓰지 못한 좋은 이야기들이 많다. 

저자는 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나 또한 그렇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개인이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알았고, 알리고, 그 다음은 몸. 


바위는 바람과 비에 닳아 바스라져 모래가 된다. 달걀에 깨지지 않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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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peace 2022-04-10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디님의 독후감을 읽으며 많은 상념이 일었습니다. 창 밖을 내다보게 되는 글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란 얼마나 소중한지 자각하게 하는 좋은 내용입니다.

하이드 2022-04-10 20: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좋은 연구서였어요. 자유에 대한 기준이 얼마나 낮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EAT, PLAY, READ, WALK, REST, MAKE - EOMJU POSTCARD BOOK
엄주 지음 / 아침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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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 작가님의 먹고, 놀고, 읽고!, 걷고, 쉬고, 만드는 다양한 여성들 그림 너무 좋다. 엽서북의 퀄리티도 짱짱하게 나왔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자주 바뀌지만, 소파에서 책 읽고 있는 여자와 검은 고양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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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쓴 괴물들 - 호러와 사변소설을 개척한 여성들
리사 크뢰거.멜라니 R. 앤더슨 지음, 안현주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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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불을 켜두고 자는, 

그럼에도 어쨌든 무서운 이야기들을 읽는 

모든 소녀들에게 


소녀들 대상의 책인가요? 정말 놀랍고, 그럴듯하다. 나는 호러를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좋아하지 않는데, 어쩐지 여기에 소개되는 이야기들이 정말 낯익다. 원서와 계보를 찾아서 읽지는 않았지만, 소개된 책들 중 읽은 책들이 많다. 사실은 호러를 좋아하는 걸까?? 그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닿아 있는 삶의 접점이 있는 걸까? 여자들이 쓴 호러 이야기들과? 


"어째서 여자들은 호러 소설을 쓰는 데 능할까? 어쩌면 호러가 관습을 거스르는 장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호러 소설은 독자를 평소 걸음하지 않는 불편한 장소들로 밀어붙이고, 본능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것을 대면하게 강요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늘 관습을 거스른다고 비난을 받는다 - 혹은, 적어도 사회가 그들에게 설정한 세심하게 드리워진 경계들 너머로 발을 내딛는데 익숙하다." (9)


두 저자인 리사 크뢰거와 멜라니 R. 앤더슨이 쓴 <여자가 쓴 괴물들>은 저자들의 이력을 보면 아주 믿음직하다. 사실, 이력은 지금 봤다. 리사 크뢰거는 고딕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픽션, 논픽션, 팟캐스트, 각본 등 전방위적인 호러 글쓰기에 몰두. 호러작가협회와 여성 제작자 모임인 NYX 호러 콜렉티브의 회원으로 활동. 멜라니 R. 앤더슨은 미국 고딕 문학 및 초자연 문학을 주로 연구한다. 글을 쓰거나 가르치지 않을 때는 공포 팟캐스트와 '여자가 쓴 괴물들' 팟캐스트를 공동진행 하고 있다. 


저자들의 이력은 지금 봤지만, 이력을 읽지 않아도, 책의 앞 몇 장만 읽어도 촉이 온다. 이 둘은 엄청난 호러 소설 마니아들이다. 최대한 많이 재미있게 일반인들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전달하려는 마음과 그들의 방대한 지식이 술술 흘러들어온다. 나는 호러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앞으로 여성 작가들이 쓴 호러 등등을 읽게 된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리리딩 해 볼 생각이다. 일단, 나는 이 책을 '프랑켄슈타인' 읽기 전의 연계 독서로 시작했는데, 대만족이다. 


호러 등등등이라고 했는데, 호러의 시작, 유령, 오컬트, 펄프 소설, 유령 나오는 집, 페이퍼백 호러, 뉴 고스, 호러와 사변 소설의 미래까지. 세부적으로 나눠났다. 저자들의 내공이 느껴진다. 이 책의 디폴트는 '여성 작가들'이다. 그래서 더 읽기 편하기도 하다. 페미니즘적이라던가, 페미니스트였고, 집안의 가장으로 글쓰기로 돈 벌고, 하는 이야기들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이야기되고 있어 정말 좋았다. 


요즘 한국 여성 작가들의 한국 고딕 장르라고 하는 소설들 나오고 있어 '고딕'의 정의가 새삼 궁금했는데, 여기에 잘 나온다. 


"고딕 소설은 1765년 출판된 호레이스 월폴의 <오토란트 성>에서 출발했다. (..) 월폴의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이런 책들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건축물 양식의 이름을 따 고딕이라 불리는 장르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후 수세대에 걸쳐 이 새로운 장르의 인기는 지붕을 뚫고 치솟게 되며, 이는 주로 여성 작가들의 활약 덕이었다." 이 앞에 월폴의 '오트란토 성' 줄거리 나오는데, 진짜 너무 흥미진진. 아침드라마 저리가라다. 저자의 표현으로는 '왕자의 게임'의 '붉은 결혼식'이 별것 아는 듯이 보이게 하는.. 


내가 지금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작가는 '메리 셸리' 이다. 저자들은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단 몇 줄로 으스스한 분위기를 끌어내어 보여준다. 다 재미있어서 발췌하기 힘들지만, 


"운명이 완벽한 창작 환경을 조성하려고 음모를 꾸민 듯했다. 이 해는 소위 여름 없는 해였다. 인도네시아의 화산 폭발이 다량의 이산화황을 배출한 탓에 세계적으로 온도가 떨어졌다. 그 결과 춥고 음울한 기후가 나타났고, 끝없이 내리는 비가 모두를 별장 내부에 가두었다. 그리고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포효하자, 바이런 경은 작은 대회를 제안했다. (그 바이런 맞음) 누가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바로 이 성적인 긴장감으로 충만한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했다.." 


관심을 가지게 되니 더 잘 보이긴 해서 요즘 읽는 책마다 (골라 읽고 있기도 하지만) 메리 셸리와 피비 셸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까지 그 배경들이 흥미진진하다. 십대에 이토록 오래 살아남는 고전을 괴물을 쓴 여자. 메리 셸리. 


나는 호러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성작가의 책들을 찾아 읽고, 즐겨 읽는다면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메리 셸리도 그렇고, 여기에 소개되는 작가들 중에 이디스 워튼이 있다. 그러고보니, 이디스 워튼의 환상이야기를 사두었지.. 워튼은 친구였던 헨리 제임스처럼, 미국의 특혜받은 상류층에 초점을 맞추었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결점을 꼬집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 나오는 단편 '눈' 은 주인공이 자신의 만찬 손님들에게 어린 시절 자신을 따라다녔던 한 쌍의 유령 같은 눈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화자가 그 눈이 자신의 눈이라는 사실 - 나이든 자신이 그의 젊은 시절 모험들을 (다소) 실망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등골 오싹 아이러니 반전을 취한다. 얼른 읽고 싶다. 내 책장, 왜 지금 내 눈 앞에 없는지. L.T. 미드는 처음 듣는 작가인데, 280편이 넘는 작품들을 출간했고, 소녀 제목이 들어간 책이 많아 '소녀 소설'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19세기의 그녀의 작품들은 아동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전 연령대의 독자들에게도 인기를 끌기도 해서 해리 포터를 쓴 롤링과 견주기도 한다. 


많은 여성 작가들이 잊혀졌다. 던전 앤 드래곤을 안다면, 당신은 세인트 클레어의 작품을 아는 것이다. 한 솔로 타입이 등장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한다면, 무어는 스타워즈 전에 이미 그런 내용을 쓰고 있었다. 다크 판타지의 팬인가? 거트루드 버로우스 베넷은 이 장르의 창시자로 공인되고 있다. 


"어쩌면 가장 기이한 이야기는 우리가 어쩌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을 창조한 여성들을 잊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164)


성과 더불어 내게 가장 호러나 고딕과 닿아 있는 것이 유령 들린 집이다. 


"집 안 공간들은 오랫동안 호러 소설의 배경으로 선호되어 왔다. 특히 어둡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에, 외딴 장소에 고립된 낡은 집보다 더 섬뜩한 것은 없다. 유령이 나오는 집은 기이한 것의 전형이다 - 친숙하고 안전한 것이 낯설고 위험한 것이 된다. " (206)


듀 모리에의 이야기에서는 레베카가 나온다. 당연히. 그녀의 단편 '인형' 의 줄거리가 나오는데, 훌리오라는 이름의 기계 장치 인형과 부유하고 독립적인 삶을 즐기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구혼자 중 한 명이 서술하는데, 그는 그녀와 훌리오의 관계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광기에 휩싸인다. "자신을 거부하는 애정 상대와 대면하자 죽일 듯한 분노를 일으키는 이 이름 없는 화자가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이다. 여성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 그녀가 재정적인 안정이나 성적인 쾌락을 위해 어떤 남자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 그를 당혹케 한다. " 


내가 아무리 호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과 이야기와 나와 내가 사는 사회가 '호러' 와 너무도 닮아 있어서 좋아하지 않지만, 싫어하지 못하고,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옵니다. V.C. 앤드류스. 다락방 시리즈는 아주 오래전에, 그리고 새로 다시 나왔을 때 읽었고, 이 책에 나오는 오드리나도 읽었다. 앤드류스의 건강이 안 좋았고, 작가로서 수익성이 좋았다는 이야기는 이번에 알았다. 


엑소시스트에 대한 해석도 그러고보니 싶었다. 

악마에 사로잡힌 소녀 이야기가 나오는 <친숙한 영혼>에서 터틀은 악마에 대항하기엔 무력하고 약한 소녀 앞에 사제가 나타나 주인공을 결박하고 그 몸을 제어하려는 영혼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거부한다. "남성 사제(혹은 아버지)가 (주로 남성적인) 악마와 한 여성의 몸을 누가 통제할지를 두고 싸움을 벌이는 것은 가장 나쁘게는 가부장제에 해당되며 페미니스트인 터틀은 그런 요소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대신 호적수 주인공을 창조한다. 빈틈없고 똑똑한 세라. 그녀는 악마를 타파할 계략을 짜낸다. 페미니스트 적인 견해를 제쳐두고라도 완벽하게 훌륭한 호러 이야기라고 한다. 근데 이 리사 터틀이 '페미니즘 사전'의 그 리사 터틀 맞나? 읽고 싶다! 세라 이야기! 관련 작품으로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나오미 앨더만 <파워> 나온다. 다 읽었잖아. 그러니깐, 내가 호러 소설을.. 


우리가 이야기해온 고딕 소설이 "강한 문학적 전통과 어둡고 허물어져 가는 성을 침울하게 헤매고 다니는 이상의 핵심적인 특성들로 고립, 나약함, 가족간의 분쟁, 숨겨진 비밀의 분출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소설" 이었는데, 신고딕이라고 부르는 현대의 이야기들은 18세기 고딕 소설의 엄격한 규칙들을 뒤로하고 대신 초자연적인 것을 아우르는 세계의 현실을 이해하려 애쓰는 주인공들에 초점을 둔다고 한다. 전통적인 고딕 이야기에서 여주인공의 순결이 위험에 처했다면, 현대 고딕 이야기에서는 그녀의 정신이 위험에 처한다. 초자연적인 힘과 현실에 대한 통제를 잃을 위기에 맞선다. 


테메레르의 나오미 노빅이 N.L. 제미신의 <다섯 번째 계절 >리뷰에 정말 멋진 말을 썼다. 


"세계가 끔찍하다면, 그 세계의 종말은 승리가 되기도 한다. 그안에 갇힌 이들에게는 그 이후의 삶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멋진 책을 선사해 준 저자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책 속 작가들을 작성하면서 호러와 위어드 소설을 초월적인, 현재의 상황을 밀어붙이는 도구로 사용한 여성들에 대해 서술하고 토론하고 감탄했다. 소설의 이런 장르들을 도구로 삼아 여성 작가들은 사회를 흔들고 독자를 불편한 방향으로 이끌면서 우리의 불안과 공포가 자유롭게 풀려나는 낯선 공간으로 재촉한다. 


하지만 이런 공간들은 또한 힘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여성은 매일의 삶 속에서 호러를 경험한다. 그 으스스함과 공포가 이 작가들에겐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된다. 


해체된 가족 관계, 가정 폭력, 신체 이미지에 대한 문제들, 정신 건강에 대한 우려들, 극심한 편견, 강박. 


여성이 쓰는 소설이 목소리와 가시성에 초점을 두는 것도 놀랍지 않다. 여성은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인다. 눈에 띄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쫓길지 모르지만 쫓는 자 역시 될 수 있다. 


호러 소설은 때로 우리를 파괴하는 것들이 진실로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호러와 여타 다크 픽션의 미래는 밝다. 그리고 여성이 이런 이야기들을 꾸준히 추구하고 혁신해 가는 한, 그 미래는 여성적일 것이 분명하다." 


정말 멋지고 재밌고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호러를 좋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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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2-2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은 매일 호러를 경험한다. 설득력 있습니다 .

하이드 2022-03-01 06:01   좋아요 1 | URL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르 소개서였습니다!

그레이스 2022-03-08 18:58   좋아요 0 | URL
축하드려요~~

mini74 2022-03-0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심 가는 책이에요. 하이드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이하라 2022-03-08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감정은 무얼 할까? 비룡소의 그림동화 296
티나 오지에비츠 지음, 알렉산드라 자욘츠 그림, 이지원 옮김 / 비룡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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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 사랑스러운 책이다. 



호기심은 뭐 하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즐거움은 트램플린에서 뛰고 있어. 


31가지 감정이 무얼 하는지 글과 말로 보여주는데, 각각의 감정을 읽고, 보며 딱딱한 마음이 그 감정대로 꿈틀거리는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이 읽어도 너무 신나고 좋을 것 같고, 어른이 읽으면 다양한 감정 운동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라도 선물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부정적 감정들도 있고, 긍정적 감정들도 있다. 부정적이라거나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도 있다. 그런 감정들을 찬찬히 헤아려볼 수 있는 책이다. 


아이들은, 그리고, 어른들도, 한 가지 말에 모든 감정을 담아 뭉뚱그려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짜증나' 같은 것, '죽겠네' 라던가. '미치겠네' , '답답하네' '이상해' 등등 

그 말 안에 있는 다양한 감정을 파악하는 것이 안팎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에도, 내 말을 듣는 외부에도. 

그런 걸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크게 도움될 것 같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나의 다양한 감정들은 다 '짜증나' 로 수렴되어 '짜증나'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력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여행을 떠나. 

너무 좋아. 상상력, 나랑 친구해. 



희망은 여행길에 도시락을 준비해. 

도시락 만들자! 


 

만족은 찻잔을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아 있지. 

고양아, 물 끓여라. 


여기 나온 그림들 다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그림은 이거다. 




기쁨은 새로 발견한 책을 들고 친구에게 달려가.


알라딘에 많잖아.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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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1-26 13: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거야말로 알라디너를 위한 책이 아닌가요?!! 😍

하이드 2022-01-26 16:00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새로 산/빌린 책을 들고 알라딘으로 달려와 페이퍼를 올리는 알라디너들, 기쁨!
 
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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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관을 삽입하는 겁니까?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머니를 괴롭히는 거죠?" 

그는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는 물을 밀치면서 들어가 버렸다. (36) 


시몬 보부아르의 사르트르에 대한 애도의 책 <작별의 의식>에 이어 엄마와의 이별을 쓴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게 되었다. 사르트르도 엄마도 (엄마가 먼저지만)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죽음을 숨기고, 그에 죄책감을 가지는 부분이 나온다. 이 책을 읽고나니, 이 때 한 번 겪었으면서 왜 또?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에 대한 변명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불행해질 것이고, 죽음의 공포를 겪게 될 것이라는 거였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땠을지는 영원히 알 수 없지만, 정작 본인이 죽음을 알리기를 무서워했음을 읽을 수 있다. 


보부아르의 엄마는 딸들을 통제하고자 했고, 딸들과 불화했다. 죽음을 한 달 앞두고, 희망 없는 수술로 얻게 된 한 달의 유예기간 동안 딸들의 간병을 받게 된다. 보부아르는 엄마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회고하며,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고 말한다. 그 때 수술하지 않고 바로 돌아가셨다면 심리적 타격이 더 컸을 것이고, 죽음 앞에서 그의 부재가 세계만큼 거대한 존재가 되고, 극단적인 경우 삶 전부에 해당하는 존재로까지 여겨지게 되는 대신 그 역시 다른 이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엄마를 피했던 과거에 엄마 곁에서 헌신했던 그 한 달의 시간들 덕분에 엄마가 느낀 마음의 평화, 엄마와의 불화로 인해 엄마를 등한시하고 피했던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른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을 생각해볼 때 

" 사실 엄마는 비교적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 라고 결론 짓는다. 


" 전문가들이 내린 진단과 예측, 그리고 결정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악순환에 갇힌 셈이었다. 환자는 의사들의 소유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니 그들의 손아귀에서 환자를 빼내 와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수요일에는 수술과 안락사 중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굳어 가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게 되면 엄마가 장폐색증을 견디면서 지옥을 맛봐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게 뻔했다. 의사들이 안락사를 거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용기를 내서 N 박사에게  "그대로 돌아가시도록 어머니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머니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N 박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자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나를 냉대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어머니에게서 몇 년 더 사실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셈입니다"라고. 내가 엄마를 죽게 내버려 두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핑계를 대 보아도 내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이 책에서 가장 이입하면서 봤던 것은 안락사 vs. 연명, 죽음 vs. 고통의 이야기였다. 보부아르도 거기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엄마가 죽고 싶다고, 얘기햇으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보부아르의 선택은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엄마는 삶을 너무나 사랑한 사람이었고, 보부아르를 비롯한 가족과 친구들, 병원의 모두는 환자의 암을 복막염으로 속이고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만한다. 삶을 사랑하는 죽어가는 사람은 그 희망에 매달린다. 


오늘 하루를 살지 못했구나.

며칠을 버리게 된 셈이잖니.

엄마에게 매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죽어 가고 있지 않은가. 엄마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를 대신해서 나는 체념하지 않고 있었다. (119)


몸이 썩어가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의학 기술에 연명하는 삶. 


동생이 문을 열다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향해 돌아서서는 흐느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엄마의 배를 봤어!" 

나는 그 야에게 줄 진정제를 가지러 갔다. P박사가 병실에 들어왔을 때 동생이 말했다. 

"엄마의 배를 봤어요! 끔찍했어요!" 

그는 조금 당황해하면서 "천만에요, 정상적인 겁니다"라고 답했다. 

푸페트는 내게 "엄마가 산 채로 썩어 가고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애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엄마의 머리맡에 가 앉았다. 하얀색 실내복 위에 얹힌 검은 색깔의 가느다란 끈이 숨을 쉴 대마다 아주 조금씩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할 뻔했다. 6시경에 엄마는 눈을 떴다. (118)


내가 죽어가는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할까. 내가 죽어가는 사람의 보호자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닥쳐야, 경험해야 알게 되는 일이 있고, 죽음이 그럴 것이다. 각각의 삶과 죽음은 또 달라서 영원히 면역되고, 알게 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죽음의 앞에서 화해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죽음을 앞에 두고, 연민의 여지를 넓혔다고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엄마의 이름을 세상에 책으로 불러낸다. 


프랑수아즈 보부아르는 책읽기를 좋아했고, 한가롭게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영어 실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다양한 강연을 들으러 다니고, 쉰 넷의 나이에 출퇴근을 위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시험과 실습을 거쳐 자격증을 땄고, 사서로 일했다. 책을 다루고 덮개로 씌우고 분류하고 색인 카드를 적고 독자들에게 조언해주는 일들을 좋아했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살았지만, 그것을 참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몸과 마음을 억압당했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 받았다. 내면에는 불같은 정열을 지녔으나 뒤틀리고 훼손되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는 놀랄 만큼 용기 있는 모습으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남편의 죽음에 무척 슬퍼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 속에 매몰된 채 있으려 하지 않았다. 다시 자유로워진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재정비했다. 아빠는 땡전 한 푼 남기지 않은 채 돌아가셨고 그때 엄마의 나이는 쉰넷이었다. 엄마는 몇 차례의 시험과 실습을 치르고 나서 자격증을 하나 땄고, 그 덕분에 적십자에서 보조 사서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출퇴근용으로 자전거 타는 법을 다시 배우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집에서 삯바느질을 해 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가로운 생활은 엄마에게 맞지 않았다. 기어이 자신의 방식대로 살길 원한 엄마는 수많은 활동을 찾아냈다. 파리 근교에 있는 결핵 예방 의료원의 도서관에서 무보수로 일하기도 했고, 그 다음에는 동네에 있는 한 가톨릭 단체의 도서관에서도 일했다. 엄마는 책을 다루고, 덮개로 씌우고 분류하고, 색인 카드를 적고, 독자들에게 조언을 해 주는 일을 좋아했다.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영어 실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수예실에서 수를 놓기도 하고 자선 판매 행사에도 참여했으며, 여러 가지 강연을 들으러 다니기도 했다.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아버지의 우울증 때문에 멀어졌던 옛 친구 및 친척들 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도 했다. 가장 간절히 바라던 일 중 하나를 이루기도 했는데 바로 여행하기였다. 엄마는 다리를 뻣뻣하게 만드는 관절 경직증에 결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24)


" 엄마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게 된 것은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희로애락 속에서 인생의 가장 거친 풍파를 겪어야 했던 시절의 엄마에게는 자기 삶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견도, 생각도, 언어도 없는 상태였다. 기겁하면서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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