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독서의 해 - 내 인생을 구한 걸작 50권 (그리고 그저 그런 2권)
앤디 밀러 지음, 신소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위험한 독서의 해' 는 저자가 한동안 책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한 1년을 말한다. 


저자가 3년동안 읽은 책이라곤 댄 브라운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어휴, 아저씨, 3년동안 책 한 권 안 읽고, 한번 읽어보겠다고 리스트 만들었군.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해할법도 한 것이 책 안 읽고, 무슨 책으로 인생을 개선하겠다는둥 하니깐 말이다. 인생 개선 프로젝트로 독파할 책 리스트를 만든다. 는건 좀 뜬금없는 계획인 것 같고, 미리 말하건데, 다 읽고난 다음에도 책 읽는 것이 어떻게 인생을 개선시켰다는건지 잘 모르겠다. 저자가 말하는 인생 개선은 얼마전 읽은 '읽는 인간'의 오에 겐자부로가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말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책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일 터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책을 사는 행위 자체와 책의 내용 습득을 혼동한다." 


저자는 집에 있는 책들을 보며 생각한다. 


이 책들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요구의 초점이 되었다. 요컨대 낭비해버린 돈, 흘러보낸 시간, 미뤄온 중요한 일들에 대한 비난 그 자체였다 목록을 만들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껏 읽지 않았다는 게 정말 창피하게 느껴지는 책들을 쭉 적을 것이다. 난해한 작품, 고전, 거짓된 나의 장서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밟히는 책들 위주로. 그런 다음엔 모두 읽어나갈 것이다. 


저자가 인생을 개선하기 위해 책 리스트를 만들고 읽어나가기로 결심한 것과 별개로 위의 글들은 상당히 찔린다. 확실히 지금 내 옆에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책들이 쌓여 있으니 말이다. 낭비해버린 돈....흘러보낸 시간... 음.. 


저자는 읽은척 하는 것, 혹은 정말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안 읽은 그런 책들을 자신있게 읽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 이부분이 '인생 개선'이라는건데, 사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긴하다. 다만, 저자가 책을 멀리하다가 1년간 책을 읽고 자신의 삶의 방향타를 틀 결심을 했다는건 삶이 '개선'된건 맞다. 그 과정과 수단과 수양의 옆에 '책'이 있었던 것고 맞다. 그러니, 삶이 개선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저자의 리스트에서 읽기 고전하는 책들이 두 권쯤 나온다. 하나는 두번째로 읽은 <미들마치>이고 나머지는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미들마치>를 읽는 초반에는 그래도 맘을 잘 다스린다.  


우리는 의견이 화폐가치를 갖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좋아요' '싫어요'라고 말하라는, 단숨에 결정을 내리고 신용카드로 죽그으라는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단번에 이해할 수없는 뭔가를 접했을때, 결코 단숨에 판단하거나 휙훑고 갈 수 없는 것과 마주쳤을 때는? '싫어요'라고 한다면 부적절한 반응일것이다.<미들마치>가 싫다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은 우리보다 먼저 나왔고, 우리가 사라진 다음에도 한참을 더 존재할 테니까. 그보다도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리라.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노력해봐야겠어요. 


나는 <미들마치>를 사랑하는 방법을 깨쳤다. 인내의 가치에 대해서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모옴의 <인간의 굴레>를 읽을때는 .. 


일주일 동안 <인간의 굴레>를 읽은 후, 나는 이책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아내에게 과감하게 이렇게 말할 정도로. "이 책은 쓰레기야." 

"그래, 당신이 좋아할 책은 아니었어." 티나가 대꾸했다."하지만 <면도날>은 괜찮아." 


책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인생 개선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뒤에 뭐라고 블라블라 하는데, 여튼 악담을 퍼부으며 독서를 포기한다. 난 모옴의 <인생의 베일>을 참 좋아하는데, 요 근래 접하는 모옴에 대한 악평은 흥미롭다. 

며칠전 트위터에서 비슷한 평을 본 적 있는데 '내가 보기에 몸은 스스로를 인간 성격에 대한 빈틈없는 심판관쯤으로 자부하는 듯했다.' 라는 저자의 평과 비슷한 평이었다. 몸의 책을 읽은지 오래되서 정말 그런가, 그것이 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인가 싶어 몸을 다시 꺼내 읽어보고 싶어졌다. 


읽기 싫은 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종류의 책은 꾸역꾸역 읽지만, 어떤 종류의 책은 별 죄책감도 망설임도 없이 덮는다. 가장 최근에 미련 없이 덮었던 책은 잔인하고 지루하고 지루했기 때문에 덮었다. 저자의 답도 같다. 포기할 책은 망설임없이 포기한다. 그건 저자의 직업때문이기도 한데, 전 서점 직원이자 편집자로서 들어오는 텍스트를 다 읽기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싫어하는 책 읽으면서 얼마든지 시간 낭비할 용의는 있지만, 고문당하는것 같은 느낌이다 싶으면 덮는 것 같다. 


그렇다. 저자는 3년간 책을 안 읽었지만, 전 서점 직원이자 편집자이고, 영문학 전공자이며 책벌레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육아와 일로 책에서 3년간이나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는 것도 놀랍고, '책'을 읽는 것이 '인생개선 프로젝트'가 된다는 것도 좀 신기하다. 


그들은 돈을 획득하기 위한 미친 투쟁을 수행하려고 인생을 즐겁고 아름답게 만드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결코 그 돈을 적절하게 향유할 만큼 문명화되지 못하리라. (...) 그들은 자신의 탐욕이 낳은 결과에는 귀먹고 눈멀었으며 무감각하였다. 일체의 고상한 생각과 열망을 상실한 그들은 시궁창을 기어다니면서 벌레를 잡아 모으려고 꽃들을 꺾어버렸다. 


<누더기 바지 박애주의자들> 


저자의 리스트를 조금 훑어보면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찰스 부코스키<우체국>,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로버트 트레슬 <누더기 바지 박애주의자들>, 아이리스 머독 <바다여, 바다여>, 존 케네디 툴 <바보들의 결탁>, 사무엘 베케트 <이름 지을 수없는 것>, 패트릭 해밀턴 <하늘 아래 2만 개의 거리들> 등이다. 마음가는대로 적은 리스트라고는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저자가 되고 싶은 인간상을 정의해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부분은 흥미롭다. 


이 책을 읽으며 누구라도 그렇듯이, 나 역시 나도 리스틑 만들어볼까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한 리스트 역시 새로 사는 리스트 아니고 ||||| 새로 사는 리스트 아니고 ||||||| 정말 오랫동안 안 읽고, 아니 책등만 읽어온 책들 중에서 읽어볼 책들을 골라볼까 했던 거다. 1년 말고 남은 2015년동안. 읽고 싶은 책 리스트를 마음가는대로 골라 만들었을때 그 리스트가 '내가 되고 싶은 인간상' 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재미있겠다.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내가 리스트를 결국 만들지는 잘 모르겠다. 저자가 몇년이나 워밍업? 하며 리스트 만들겠다고 큰소리치고 다녔으니 나도 큰소리만 쳐둘까. 


저자가 추천하는 리스트의 책들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저자 맘대로 고른 리스트다. 인생을 개선하고 싶다면 개선하고 싶은 본인 맞춤의 고유'인생'의 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책과는 거리가 먼 저자가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좋은 것이! 하는건줄 알았는데, 저자는 내공이 차고 넘치는 내가 좋아하는 '편집자' 저자다. 그러니 읽을거리도 많고, 다시 '읽는 인간'의 오에 겐자부로와 비교하게 되는데 (전혀 다른 책이지만!) 삶과 책을 밀접하게 연관시킨다는 점은 '읽는 인간'에 이어 다시 한 번 책과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더글라스 애덤스를 엄청 좋아하고, 실제로 네 번이나(?) 만난 에피소드를 저자의 아이때부터 현재까지의 각각의 시기를 돌이켜보며 적고 있다. 애덤스가 죽기 전 참여했던 마지막 작업한 BBC 라디오 방송에서의 말도 인상적이다. 애덤스는 전자책과 전자출판이 가져올 결과를 기대하면서 한 말이었지만, 이번 생에는 전자책에 별 관심없는 내게는 또 다르게 들린 좋은 말. 맨 앞에 인용했던 쇼펜하우어와 좀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이 자기가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얘기하는걸 들으면,사실은 책읽기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접시와 음식을 혼동하는 것 같달까요. 


나는 '책'도 사랑하지만 '책읽기'를 사랑하고, '책 사기'를 사랑.. 이게 아니라. 여튼 '책'과 관련된 다양한 행위. 평소에는 의식 못하는 것들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책읽기.를 재미를 위해서건 배우기 위해서건, 일단은 그 뒤에 '내 인생을 위해서'라는 골을 가지고 있다면,책읽는 마음이 좀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인생을 위해 책을 읽으세요. 

책읽기가 인생을 개선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책을 읽듯이 재미를 위해 읽지는 마십시오. 야심가들처럼 배우기 위해 읽지도 마십시오. 

부탁하건대, 당신의 인생을 위해 읽으십시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샹트피의 르루아예 양에게 보낸 편지, 185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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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5-09-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너무 즐겁게 읽었어요. 저는 요새 조금 반대로 가고 있어요. 예전에는 무조건 내가 사거나 소장한 모든 책을 읽으려 했는데 이제는 초반 좀 버티다 아니다 싶으면 멈추고 처분해요. 그냥 이제 시간이 한정 없이 남아서 정말 나랑 안 맞는 책도 다 읽을 나이는 지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요.

하이드 2015-09-14 22:41   좋아요 0 | URL
저는 워낙 읽는대로 다 정리하고, 다시 읽고 싶은거 두 번, 세 번 사는지라 집에 있는건 거진 안 읽은 책... 이 몇 천권이나. 일단 산 책들은 제 취향이라고 생각하고 산 책들이라 읽긴 읽는 편인데, 아주 가끔 안 맞는거 있으면 (주로 동물 죽이고 그런거 모르고 샀을때;) 안 읽어요.

리뷰에 빠트렸는데, 인생의 책으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나옵니다. 50권 리스트의 마지막이죠.
그런 인생의 책들을 찾아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어요.
 
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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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 대법원 등의 합의체 재판부에서 판결을 도출하는 다수 법관의 의견에 반하는 법관의 의견.


원작이 있고, 영화가 있는 경우, 나는 글자를 먼저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소수의견'의 경우에는 원작이 있는지도 몰랐고, 영화를 먼저 보게 되었던 경우다. 원작을 영화로 만들때 꽤 높은 확률로 실망스럽고, 아주 좋아야 본전인 경우가 대부분인데,(이건 내가 책읽기를 영화보기에 비해 월등히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의견'의 경우는 영화를 먼저 본 것도 괜찮지 않았나 싶다. 영화 자체로도  굉장히 좋았고, 윤계상이란 배우가 처음으로 정말 멋진 배우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계상과 윤변호사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없었고, 너무 매력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던 대석의 역을 유해진이 맡은 것도 괜찮았다고 본다. 김옥빈이 맡은 기자 역도 괜찮았는데, 여기에 법학과 교수 이민주가 빠진 것은 너무 아쉽다! 책에서도 영화에서처럼 몇 번인가의 카타르시스가 있는데, 그 중에 야당 의원이 얼렁뚱땅 하고 지나간것이 알고보니 이주민이 나오는 꽤나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이 외에도 이주민은 등장하는 윤계상,유해진,야당의원,이준형기자,염교수 등등에 녹아 있다. 박재호역은 이경영이 맡아서 더 인상적으로 나왔던 것 같다. 책에 나온 부분이 거의 빠지지 않고 다 나왔다. 


영화 '소수의견'이 정말 좋았던건 내게 변호사가 주인공인 사회파 미스터리로 읽혔기 때문인데, 책으로 읽으면 법정물에 더 가깝다. 영화의 마지막 법정씬이 좀 오버스러웠던 점이 유일하게 거슬린 점이었는데, 책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다 좋았어서 영화는 이 점이 좋았고, 책은 이 점이 좋았다. 는 정도의 비교만 계속 된다. 


내용을 다 알고 읽는데도 정말 재미있게 밤을 꼴딱 새며 읽었다. 영화는 원작에 굉장히 충실해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다 담았고, 책에서는 윤변의 과거와 배경에 대해,그리고 변호사로서의 고민에 대해 더 디테일하게 나와 있어 좋았다. 


'소수의견'이라는 것이 단순히 소수의 의견이 아니라 전문용어인건가 하고 찾아보지 못했는데, 법정용어로 맨앞에 썼듯이 '다수 법관에 반하는 법관의 의견' 이다. 그러고보니 간간히 뉴스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철거현장에서 아이가 죽었고, 아이의 아빠가 경찰을 죽였다. 아이 아빠, 박재호의 국선변호를 맡게 된 윤변호사는 박재호의 아들 박신우를 죽인 것이 철거용역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학벌도 인맥도 없고 집도 가난하고 의욕도 없는 평범한(?) 국선변호사에게 떨어진 사건 중에 하나였던 그는 사건을 맡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알게 되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에서 '정당방위'로, 그리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을 함께 진행하게 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보통 국선변호인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 나는 왜 국선변호인을 그만두지 못하는가. 국가가 나에게 월급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내가 국선변호인인 한 국가는 나에게 돈을 준다. 그건 의지와 생계 사이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그런 기로에 봉착하면 양자택일을 하는 대신, 그냥 현재를 택한다. 나머지 문제는 미래라는 관성에 내맡긴 채 삶을 굴려 내보내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곧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사람들은 그런 때를 맞는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평범한 직업은 아니지만, 그들 세계에서 윤변호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우연히 맡게 된 사건, 그리고 그 주위의 사람들로 인해 그는 인생 사건이 될 박재호 사건을 맡아 이름을 알리게 된다. 평범한 누군가도 언제든지 이렇게 시험에 들 수 있다. 그럴 때의 선택이 항상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울 수 없지만, 계속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자만하더라도 반성할 줄 알고, 인생에 큰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계속 밟히는건 거부하는 그런 '작은 인간' 으로 나온다. 영화에서 윤계상이 윤변 그 자체인듯 너무나 잘 표현해주었고, 책에서 그 디테일을 채울 수 있었다. 


"만약, 만약에 내가 국선전담변호사를 그만둔다면." 

대석은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 넌 국가소송이 끝나기 전에 굶어죽어. 이기지도 못할 재판과 정의에 대한 알량한 환상 때문에. 넌 평범한 민사소송을 해본 전력도 없잖아." 


나도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봤다. 계속 고민하고 있다. 삶의 국면마다 비슷한 질문들이 있었다. 법대를 졸업하는 날부터,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국선변호인이 된 지금까지. 기척 없이뿌려진 무수히 많은 질문들. 기억은 시간 속으로 제각기 흩어졌지만 질문들의 몸통은 결국 하나였다.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의 문제. 




"올리버 홈즈 전 미국 연방대법관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 사람은 재직기간 동안 연방대법원 자료실에 파격적인 소수의견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놨습니다. 한때는 그가 정신병자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자 그가 내놓은 소수의견들의 대부분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주류적 입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형사 법정에서도 모자라 이제 민사 법정에서까지 검사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누군가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투견처럼 용맹한 검사 군단으로 우리의 목을 물어 뜯어버리겠다는 의지를. 그들은 두려워하길 바랐겠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사실 쾌감에 가까웠다. 이 나라 모든 검사의 적이 된다 한들,우리는 여전히 단 한 사람의 변호사일 뿐이다. 낭만적이었다.

서랍 안에는 별게 없다. 통장은 하나다. 거래내역도 잔고도 짧다. 숫자는 일곱 자리다. 642만 7847, 당연히 달라는 아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죽도록 세상을 달린 결과가 그거였다. 세상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종종 커다란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나는 세상을 향해 투덜걸지 않는다. 다행히 변호사가 됐기 때문이다.

청구금액이 11억 원이라면 소송인세 비용만 해도 상당했을 것이다. 원고들은 재개발이 필요한 낙후지역의 부동산 소유자들이었으니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터다. 나는 적어도 이들이 가진 피해의식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단지 한 세기 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지지정당이 자신들의 이권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판단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 자기 아들이, 또 자기 손자가 희생되지 않는 한 현존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회의해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사람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피해자였다.

세상의 주어진 하루마다 많은 생물들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상들이, 많은 문화들이 도태된다. 그것은 멸종이고 멸종은 적자생존의 법이다. 연민은 자연의 법을 거스르는 허위인가. 나는 진화론자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연민은 왜 진화했는가. 그렇다면 연민은 왜 도태되지 않았는가.

나는 걸어나갔다. 4번 배심원이 남긴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 저 개새끼. 법정을 나설 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으스대는 얼굴. 이 법정에서 자신만이 정의롭고, 자신만이 솔직하고, 자신만이 실천주의자라고 공표하는 확신에 찬 얼굴. 정의의 진짜 적은 불의가 아니라 무지와 무능이다. 역사를 통틀어 그래 왔다.

우리는 개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역사를 사는 것이다.

노무현 (前 대한민국 대통령,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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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5-08-11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계상의 연기에 대해 말들이 오고 가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윤계상 연기 좋아요. 80%만 힘 준 연기.
슈트 뒤로 슬쩍 내비치는 쓸쓸함..또는 처연함 같은 아우라도 좋고 90년대 일본 드라마 주인공 같은
길게 기른 뒷머리 스타일도 좋고...ㅎ 기대없이 본 영화인데 아주 좋았습니다. 묻히기 아까운 영화.
(연기의 밀도로 치면 권해효 아저씨..톤 좋더군요)

하이드 2015-08-11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완전 너무 좋아요. 제가 최고 좋아하는 탐정들 다 가져다 붙이고 싶을만큼요. 뭔가 연기안하는듯, 드라이하고, 무표정하고, 드럽게 피곤해보이는거. 진짜 잘하더라구요.

푸른희망 2015-08-1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속 윤계상이 딱이다 싶었어요 그가 아니면 누가 할까~~ 후줄근한 수트도 피곤과 갈등에 쩐 어정쩡ㅎᆢㄴ 표정도 좋았네요 약간의 사심도 함께^^;;
요즘 책을 빌려읽는 .중인데 이 책도 끌리네요 확 사버릴까요?
 
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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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 께이의 13.67 작가 이름도, 홍콩에서 활동하는 타이완 작가라는 작가소개도 제목도 낯설다.. 입소문 탈만큼 탄 작품이기에 기대는 엄청 하고 있었는데, 기대 이상이다. 추리소설을 어느 누구보다 많이 읽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까지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은 .. 뭐, 가끔 있지만, 잘 없다. 


6개의 단편 연작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단편이 좋았다 꼽기 어려울 정도로 고르게 다 좋았다. 굳이 말하자면, 첫번째 단편을 읽고, 두번째 단편을 읽으면서 첫단편으로 인한 임팩트가 있어 더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인 관전둬와 뤄샤오밍, 이 두 사람은 최고의 주인공이고, 악역도, 조연도 모두 생생한 캐릭터로 살아 있다. 추리물이고, 경찰물이지만, 격변하는 홍콩 역사 속에서의 홍콩경찰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 거의 87분서의 아이솔라급으로 '홍콩'이라는 도시가 살아서 제2의 주인공처럼 다가온다. 일본경찰이나 미국 경찰, 영국 경찰 등은 익숙하지만, 홍콩 경찰이라니 적응하는데 좀 시간 걸리지 않을까 싶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어린시절의 주윤발과 장국영, 유덕화를 소환해서 그런 이유로 우리는 홍콩 느와르에 익숙하다.고 하지만, 읽다보면, 그것과도 또 다른 찬호께이만의 분위기와 작품세계가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는 느낌이다. 

후기에 어느 해설가가 찬호께이를 가리켜 '무한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했다는데, 제발 좀 확인하게 다른 작품들 좀 번역해주세요. 


관전둬는 홍콩경찰계의 입지전적인 전설같은 인물이다. 뛰어난 추리로 은퇴할 나이가 되어서도 '고문'으로 사건 현장을 두문불출하며 사건을 해결한다. 그런 관전둬가 제자로 키운 인물이 뤄샤오밍이다. 둘중 누구의 비중이 높냐고 묻는다면 관전둬이겠지만, 오늘날 경찰소설의 주인공 타입은 역시 뤄샤오밍이다. 


'흑과 백사이의 진실' ,'죄수의 도의', '가장 긴 하루', '테미스의 천칭', '빌려온 공간', '빌려온 시간' 


각 단편의 제목을 적으며 이야기를 곱씹어본다. 단편이라기엔 단편 하나로 책 한 권은 나올법한 분량이니 중장편이라고 해야 하나. 간단한 줄거리를 적어볼까도 싶지만, 직접 읽고 재미를 느끼는 편이 나으리라. 올 여름 휴가, 한 권의 미스터리를 챙겨간다면, 바로 이 책이다. 655페이지의 묵직한 분량이고, 마지막 장을 읽고 다시 처음부터 읽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데칼코마니 같은 이야기이고, 13.67 제목의 1967년부터 2013년까지의 홍콩의 역사와 상황 역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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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07-26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그래요? 저는 왠지 과대평가된 작가 아닐까 생각하고있었거든요. 하이드님의 호평이면 읽어봐야겠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