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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ㅣ 출구 1
허새로미 지음 / 봄알람 / 2021년 2월
평점 :
어제 오후에 받아서 일하는 틈틈이 단숨에 읽었다. 몰입도가 강한 이야기. 읽으면서 내 생각을 많이 했고, 심란한 꿈을 꾸고 일어났다. 제목은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둔게 아니라, 죽으려고 살기. 를 그만둔 것으로, 읽기 전에는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읽고 나서는 안 기발하더라도 평범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희망적인 이야기에 왜 힘이 나지 않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봄알람에서 '출구 총서'란 이름으로 내는 시리즈의 1번 출구. 가족으로부터 탈출한 딸의 이야기. 2번 출구의 가제는 '결혼 탈출'이다. 어떤 시리즈가 될지 짐작 가고, 응원한다.
책에 나온 이야기는 많이 듣던 이야기이지만, 많이 듣던 이야기라도 늘 가시에 찔린듯 아픈 이야기이다. 나는 아빠가 소리지르는 것을 경상도 남자가 그렇지로 퉁쳤고, 후에는 분노조절 장애라고 이름 붙였고, 가족들 모두에게, 엄마, 나, 남동생 순서로 그 폭력을 휘둘렀다고 생각한다. 그럴거라고 했지만, 더 이상 돈으로 가족들을 휘두룰 수 없는 지금, 가장 심한 언어 폭력을 당했고, 당하는 엄마만 옆에 남아 있다. 가족을 돌보고, 희생한다는 그 마음을 모르는건 아니라서 연민이 없는건 아니지만, 폭력을 참아 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가족의 이야기는 그 가족 수만큼이나 있을텐데, 부모가 자식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늘 이해할 수 없는 나쁜 일이었고, 일이고. 그걸 참아주고 희생하는 자식도 늘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삼십대의 어느 추석날 추리닝 바람으로 카드와 전화기만 챙겨 집을 나와 공유 사무실 바닥에서 목도리를 깔고 잠을 잔다. 부모에게서 탈출하는 순간이다. 2부에서는 주어진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철저히 혼자가 되고, 다른 딸들, 자매들을 찾는. 이들 역시 가족을 버린 딸들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에서 독립하여 자립한 성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면,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지고, 그 이후로는 성인과 성인이다. 부모의 희생도, 자식의 희생도 바라지 않는다. 현실을 답습한 건지, 견인하는 건지, 둘 다 인지 알 수 없는 K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딸들의 장면들은 이 책에서도 반복되고, 다른 것은, 여기 이 딸은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 앞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심란한건지도 모르겠다. 뒤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깐, 제목도 그렇다니깐. 어쩔 수 없는건지도 모르겠다. 삼십여년간 가족의 사랑과 괴롭힘을 받아왔는데, 이제 3년동안 이렇게 자립하고, 새로운 가족들을 (같이 살아야만 가족인건 아니지) 만들어 나간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아니깐. 집을 나와 문을 닫고, 이제 막 새로운 문들을 열기 시작했으니, 한동안 이전 집의 아우라가 남아 있는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알 만한 사람의 소개도 아니고 TV에 나오는 명강사도 아닌 내가 한둘씩 고객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만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모든 끈이 떨어져 홀로된 여자에게 고객이자 친구가 되어주는 여자들이 생긴다는 것은 내 개인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세상이 넓다지만 내가 진짜로 넓혀볼 만한 세상에 그때에야 초대된 셈이었다.
이 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구렁텅이가 정말 깊어 보였지만, 기어 나와 '개인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
그러기 위해 혼자가 되었던 것. 타협한 것도 있었겠지만, 타협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던 것.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삶의 고삐를 잡기 위해 애썼던 것.
정신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공격당하는 것은 일상이다. 혼자인 여자의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혼자인 여자는 다른 혼자인 여자가 필요하다. 다른 혼자인 여자 아닌 체계는 거의 전부 가부장제의 변형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혼자인 여자가 여럿 모인 조합은 그 존재만으로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힘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좋고, 동시에 별로였다.
여자가 망하지 않고 그냥 사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남자와 서사를 섞지 않아도, 그리고 또 눈부시게 성공하지 않더라도 여자가 안 망하고 삼시 세끼 잘 먹고 편안하게 따뜻하게 잘 자고 쫓기지 않고 친구와 잘 지내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여자 안 망하는 이야기를 앞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야 한다.
어제 오전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었고, 저녁에는 허새로미의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를 읽었다.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고 두 책에서 다 이야기하고 있다.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은데, 죄다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라고, 여자가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여자들은 바로 주변의 여자들이다. 미디어에서 보는 여자들은 죽거나, 맞거나, 고통받는 여자들로 점철되어 있다. 픽션도 마찬가지. 여자의 행복은 남자와 가족에 엮여 있다. 평범한 여자들이 잘 사는 이야기들이 많이 필요하다. 주변의 여자로 재미있게 잘 사는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그 주변이 점점 넓어지다보면, 가능하겠지.
이 책의 마지막이 대단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챕터였어서 읽으며 닭살이 쫙 돋았다.
돌이켜보니, 역시, 이 책은 탈출, 새 가족, 희망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어. 그러니, 으쌰으쌰의 기분이 들기보다 심란함이 앞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비관론, 현실론에 낙관론을 담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여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