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매 달 그달의 테마를 정했던 나는 7월말 어느날, 8월은 책 안 사는 달로 해볼까. 문득 생각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보고, 뭐, 해보자고 해보자. 해보자고 해보는건 할 수 있지. 

적립금하고 포인트는 어떻게 하지 (7월말에 3만원 정도 있었다. ) 8월에 생일인데, 무슨 책 사줄까 물어보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다, 그래, 뭘 끊으려면 아예 끊어야 한다고 했어. 적립금이고 포인트고 선물이고 다 지우고 '책 안사기' 를 시작했다. 

나름, 책 안사기 위한 전략들도 세워보며 7월을 보내고, 8월이 되어 8월은 책안 사는 달이다. 땅땅. 여기저기 소문냈다. 


책을 안 사겠다는 (그것도 꼴랑 한 달) 결심은 일반적으로 많이 보이는 간헐적 단식을 하겠어. 금주를 하겠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겠어. 밤에 일찍 자겠어. 물을 많이 마시겠어. 등등의 무수한 결심들 사이에서 초라하다. 뭐랄까. 담배를 안 피는 내가 매년 초에 '담배를 끊겠어' 금연 선언을 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책을 매 달 산단말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거고, (저기, 제가 매달 아니고, 매일.. 하루에 몇 번씩도..) 책이 의식주와 관련된 것도 아닌데, 그게 뭐가 어렵나.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깐, 그게 일반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의 이성은 내게도 있다는 말이다. 


책 많이 읽고, 사는 알라딘에서는 반대로, 개가 똥을 끊지. 수준으로 들릴 것 같다. 


그런.. 다른 결심들과는 달리 어디에서도 지지받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나의 이 초라하고 갈대같은 결심은 8월의 반절이 지난 지금 순항중이다. 스물 셋, 첫 월급을 받은 이후로 책을 사지 않겠다는 결심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오래 책을 사지 않은 것도 처음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느낀바가 많다. 


우선 나는 출판계의 오랜 빛과 소금으로서 ( * 출판계의 빛과 소금 : 책을 읽지 않고 사는 자들) 앞으로 책을 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한 권 읽으면 두 세권 사는 정도로 줄이는 것이 내 목표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에 속할 것이다. 한 권 읽을 때 두 세권 사는 것은 괜찮다. 한 권 읽을 때 열 권, 열한 권 사는 것이 문제이지. 


책 좀 그만 사야겠다고 알아서 생각한게 아니라, 책 한 달 안 사볼까. 시작한건데, 시작하고 나니 약 끊은거마냥 정신이 든다. 책소비는 내 핵심소비였던 것이다. 8월 16일 현재 무지출데이 14일이다. 목표는 25일. 책을 사지 않으니, 왜인지 다른데 돈 쓸 일이 없어졌다. 평소 같으면 사고 싶다는 생각과 결제 사이의 시간이 거의 동시간이었는데, 장바구니 담아둬도 살 마음이 안 들고, 뭔가를 봐도 사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뭐 살꺼 없나 생각해봐도 생각 안 나고, 아.. 뭐 사고 싶다의 마음이 아.. 돈 안 쓰고 싶다..의 마음이 되었다. 


내일이 없는듯 버는만큼, 버는 것보다 더 쓰고 살다가 정신 차리고, 모아 봐야지. 아껴 봐야지. 하길 3년. 계획하고, 실패하고, 또 계획하고, 이런저런 방법들을 시도하는 것을 거듭했다. 나는 돈을 많이 안 쓰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교통비, 경조사비 이런 기본적인 것은 물론이고, 미용실도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옷도 안 사고, 화장품도 안 사고, 바디용품이나 샴푸도 다 선물 받은 것과 사놓은 것으로 쓴다. 산 지 1년도 더 된듯. 외식도 안 하고, 배달음식도 시켜먹지 않는다. 이제 종종 마시던 만원대 와인도 안 마시지. 병원도 안 가서 병원비도 약값도 안 들었다. 세 고양이 밥이랑 모래 사는 돈 드는 것 외에 정말 돈 안 쓴다. 라고 스스로 믿고 있지만, 그렇다면 내가 왜 돈이 없겠어. 


비싼 할머니 감자칩을 박스로 산다. 이불이나 패드 침구류 비싼걸 사는건 아니지만, 계절 바뀌면 사고 싶고, 1년데 두 세 번 샀다. 옷은 안 샀지만, 예쁜 양말들을 샀다. 신발도 안 사서 제작년 겨울에 산 어그 슬리퍼가 한여름에도 출퇴근 신발이고, 여름 신발로는 올여름에는 어그 신느라 안 신었지만, 몇 년전에 엄마가 세일해서 사 준 크록스 꽃신만 주구장창 신었다. 좀 멀리 나갈 때는 스케쳐스 고워크. 하지만, 하이킹하겠다고 호카를 샀지. 그리고, 만년필을 샀지. (.. 먼 산) 종이와 노트. 노트 천 얼마 짜리라도 한 번 사면 수십권을 한 번에 산다. 볼펜도 마찬가지. 타스로 샀고. 그리고, 이건 나의 길티플레져였는데, 스티커와 마테를 샀다. 그리고 책이 있었지.


이렇게 써놓고보니 참.. 


필수적인 것에 가까운 것들을 안 사고, 아낀다고 생각하며 개쓸데없는 것들 많이 도 샀다. 

아, 근데, 나 사주에 '목' 이 없어서(목이 0임)  나무 관련된거 있으면 좋대. 노트랑 책 같은거?! (아님. 아니야!) 

수도 부족해서 만년ㅍ... 그것도 아니야. 


'핵심소비'는 찰스 두히그의 핵심습관 (keystone habit) 에서 떠올린 것이다. 핵심 습관은 모든 습관들을 좌지우지하는 습관들의 주인을 말한다. 핵심습관을 바꾸면 나머지는 따라오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운동이나 금연이 핵심습관인 경우가 많은데, 찾기 힘든 경우도 많다.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꾼 핵심습관이 '안녕하세요' 인사하기였다거나. 하는식. 핵심습관처럼 모든 소비습관을 좌지우지하는 핵심소비가 있다. 사람마다 다르고, 나에게 그건 '책소비' 였던 것.  


핵심소비를 잡아야 다른 소비들도 잡을 수 있는거였고, 나의 핵심소비는 옆돌기 하면서 봐도 책소비였는데, 핵심소비 중에는 그걸 몰랐네. 내가. 멈춰보니 이제야 알겠다. 


어떤 계기 없이 문득 떠올랐다고 했지만, 그간의 나의 피나는 노력.. 까지는 아니라도 그간의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서 여기까지 온거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책 읽다가 벼락맞듯이 내 앞으로의 생을 결정할 문장을 만나서 내가 그릴 수 있는 미래가 선명해졌고, 엉망진창 망가졌던 소비관념이 그래도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기워져있기도 했고, 마지막 지푸라기는 최근에 읽은 '숲속의 자본주의자' 라는 책이었다. 


슬슬 장바구니에 사고 싶은 책들이 쌓이기도 했고, 중고책 등록 알람도 계속 오지만, 이전처럼 조급하지도, 읽고 싶다=결제도 안하게 되었고, 이사 와서 처음으로, 내려와서 처음으로 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왔다.


15일 책 안 산걸로, 자신을 이렇게 자랑스럽고 대견해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싶지만, 내가 지금 그렇고, 매일 칭찬하고 있다. 오늘도 안 샀어. 우쭈쭈. 


아, 책은 전혀 안 산건 아니었다. 책 안사기 첫번째 위기는 일 때문에 읽고 싶은 책이었다. 여러권 있었는데, 냉철한 이성으로 타협하여 한 권만 샀다. 아, 멋져. 전자책 캐시 남은거랑 적립금 매일 이백원씩 모으고, 독보적 스탬프 적립금으로 바꾸고, 간간히 들어오는 적립금에 룰렛까지. 일 때문에 산 책 이후, 사고 싶어서 산 책도 있지만, 전자책으로 적립금과 포인트로 (사고 싶었던 책을 사는데 적립금이 계속 모잘라 한 달도 더 전에 장 본거 포토리뷰 쓰면서 150원씩 쫌쫌따리 모았다는) 이제 정말 모든 적립금과 포인트가 0에 가까워서 책 살 돈은 안 될 것 같지만, 말일 정도에 모이는 몰별적립금으로 한 권 정도는 더 살 수도 있겠지. (몰별 적립금 매일 이백원 = 6천원, 독보적 스탬프 = 월 1500원) 


책 안 산다고 셀프 우쭈쭈 하다가 마지막에 적립금 닥닥 긁는 걸로 마무리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8월에 책 안 사는건 성공이다. 아직 반이나 남았지만, 전혀 살 마음이 들지 않아. 이 마음이면 앞으로도 적당히. ( 내 기준에 적당히 말고, 누가 봐도 적당히)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9월에는 커피를 끊어보려고. 이것 역시 '숲속의 자본주의자' 보고 얻은 아이디어. 




* 저 만년필 정리할거에요. 앞으로 계속 쓸 거 빼고 정리하려고 합니다. 비싼건 저렴하게, 저렴한건 더 저렴하게. 

서비스로 받은 블랙 잉크 많아서 같이 보내드릴 수도 있으니, 만년필 써보고 싶으신 분들 츄라이츄라이 

요즘 즐거운 순간들 모으고 있는데, 만년필로 글씨쓰는 순간 즐거워요. 돈 드는 취미 아니에요. 만년필 하나로 6백만자까지 쓸 수 있다고 해요. 원래는 친환경 절약 취미랍니다. 

이 동네 택배 보내기가 좀 번거롭고 비싸고, 만년필 박스 찾기 귀찮고, 알라딘보다는 트위터에서 정리하지 싶지만, 여튼, 이것도 동네방네 소문 내야지. 움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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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16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알라딘에서는 다들 책 안 사야지 결심은 많이 해도 실천은 어려운데. 대단하세요! 사주이야기 넘 재밌습니다 ㅋㅋ 이미 종이와 만년필 많이 갖고 계시니 충분할 듯요. 남은 보름도 응원합니다^^

난티나무 2021-08-16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만년필 정리하신단 말씀에 확!!! 구미가 당기네요.

그레이스 2021-08-16 08:57   좋아요 0 | URL
저두용

몽당연필 2021-08-1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막 만년필 생활 시작했는데 정리하신다구요?

하이드 2021-08-1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페 주문 했으니 도착하면 사진 올릴게요. ^^ 만년필 생활은 계속됩니다. 손 많이 가는 것 정해져 있어서 그것들 빼고 정리하는건데, 다 제가 애정으로 샀던 만년필들이에요. 잘 써주실 분들이 잘 써주시는게 좋죠.

2021-08-20 2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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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2 1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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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3 14: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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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4 1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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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4 18: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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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4 1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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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5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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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5 1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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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5 13: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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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5 15: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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