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말미에 걸터앉아 일기를 쓴다. 날짜를 적고, 기분이나 날씨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혼자서 말하고 나면 나아지는 이야기가 있다. 말하지 않아서 통증처럼 남겨지는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말하게 된다. 나무말미의 시간 속에서, 어쩌면 영원하고 다시는 떠올리지않을 이 흔들림에 젖은 머리를 말린다. 일기는 잠깐 들어찬 겨를 동안 내게로 온 것들, 머물다 떠나간 것을 배웅하거나 마중하는 일이다. 내가 가진 짐작 중 가장 확실한 것이다.
- P22

책을 거들떠보지도 못한 채 하루를 끝마치는 날이면,
꼭 책 한두 권을 골라 침대로 가져갔다. 잠들기 전 침대맡에 스탠드를 켜두고 책을 읽었다. 그때 가장 먼저 눈 감고 잠드는 것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의 조급함이었을 테다. 아니면 독서를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맡에는 다시 읽다 만 책들로 쌓이기 시작했고, 책으로 지은 벙커 속에서 나는 부스럭대며 자기 바빴다. 그때 책이 내게 가져다준 것은 안심이었을까.
- P35

갑자기 냉장고 청소를 하거나 욕실 타일을 닦고, 손이많이 가는 가사 노동을 애써 하는 자리마다 우울한 내가 주저앉아 있었다. 요리도 마찬가지였다.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김밥을 골라 열심히 말았다. 김밥을 잔뜩 말아서 점심에도 먹고, 저녁에도 먹고, 그다음 날 아침에도 먹었다. 김밥이 물릴 때까지. 무언가를 집요하게 해내고 나면 우울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내게 덤빌 수 없다는 듯이 회미하게 일렁이다가 이내 사라지고야 말았다. 이런 게 가정식 우울일까.
- P44

새로운 물건이 새로운 기분을 선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로 생각하면서부터는, 빈티지 옷을 사는 일이 줄어들었다. - P50

소설보다 더소설 같고, 시보다 더 시 같은 삶은 문학적인 반동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 삶에 시적 허용을 적용하며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자기합리화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는 못마땅했다.
한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면서도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나는 시를 쓴다‘라는 자의식으로 나를 용서하던 시기가 내게도있었다. 전업 시인이 되겠다고 꿈꾸었던 열망이 생계 전선 앞에서 얼마나 무지했던 소리인지를 뒤늦게야 알게 된것. 그제야 불성실하고 때론 충동적이며, 자신의 삶을 중력의 상태에서 내버려두는 것을 시를 쓰는 사람의 태도라고 허용하며 살았던 시간을 철회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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