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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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이어령 교수의 딸, 이민아 목사의 소천으로 기독교계가 술렁였다. 많은 사람이 빈소를 찾아 이어령 교수의 표정을 살폈고, 이민아 목사가 남긴 유고는 두 권의 책으로 묶여 독자를 만났다.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고 비교문화와 문학 분야의 석학이라고는 하지만 이어령에게 과도한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회의가 들기도 했다. 돌아보니 이어령의 회심도 크게 회자되었다. 고령의 무신론자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나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인지 그마저도 유별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도 양 한 마리에 돌아오면 기뻐 잔치를 연다고 하시니, 하나님의 마음이야 이해해볼 수 있다. 그래도 기독교계가 떠들썩할 것까지 있을까?

그랬다. 역시 사람이든 무엇이든 만나야만, 알아봐야만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뒤늦게 이어령의 책을 읽고 나서야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뻐하고 또 집중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귀한 사람을 하나님은 오래도록 인내하시며 기다리셨고 끝내 손을 잡아주셨던 것이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데 70년 이상의 세월은 기다린 주님의 끈기, 그 인애하심이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또 한 명의 영혼을 만나시고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났다. 삶에 지쳐 퍽퍽해진 내 마음에 단비 같은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하나님의 자취가 보인다

역사에 관하여 들은 말이 하나 있다.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누구는 승자의 이야기라고도 말하는 역사는 사실이 그렇다. 이긴 사람이 지난 일을 정리하다 보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건이 혁명도 쿠데타도 될 수 있는 것은 후대의 사람이 어떻게 그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무신론자로 살아온 긴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전혀 다르게 보인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시간이었는데, 돌아보니 그 시간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교토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와이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글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렇더라는 결론이다. 교토에서 지낸 그 시간에는 아마도 극한 외로움과의 싸움에 집중했을 것이고, 그 기간에 쓴 시를 무신론자의 기도란 제목으로 엮어낸 이유는 책을 낼 때만 해도 무신론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상황이 달라졌다.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말은 반어적인 말이 되었고, 기도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신은 없다고 하며 살아온 시간이 오늘, 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된다. 아마도 나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을까. 현재의 내 삶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둑어둑하지만 뒤돌아보면 삶의 순간마다 주님이 함께 하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뒤돌아보며 그 어디쯤 서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에 나온 그림 속 군중 사이에서 후광조차 없이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에 남아 말을 건다. 이렇게 네 옆에 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란다. 하나님이 내게서 사라진 것만 같을 때, 달음질치지 않으면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할 때에도 하나님은 곁에 계신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진리가 남의 말을 통해 내 귀에 머문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경험이 줄을 이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겨간다는 주위 사람의 말에 겸손하게 아직 영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지성에 대해서도 잘은 모르나 자신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건너가는 문지방에 서 있다는 이어령의 고백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을까, 지성의 극한으로 달려본 적도 없고 영성의 깊은 가운데 있어 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서 먼저 나의 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명확해질수록 영성을 향한 걸음의 방향도 조금은 더 명확해질 거란 믿음으로.

 

지금, 포도원의 품삯을 흥정할 때가 아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달려온 백부장이 있었다.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는데, 예수께서 고쳐주려고 하시니까, 이런다. 주님, 저도 제가 부리는 사람이 있어 압니다. 제가 이리 하라 하면 이리 하고 저리 하라 하면 저리 합니다. 예수님도 왕이시니, 직접 행차하지 마시고 명령만 해주세요. 그러면 딸이 낫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크게 칭찬하셨다. 책을 읽으며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이 나와는 분명히 달랐다.

이어령은 줄곧 무신론자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던 젊은 시절을 돌아보는 한편, 뒤늦게 하나님을 만난 자신에게도 같은 은혜와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그때마다 언급하는 것이 바로 포도원 품삯 비유이다. 포도원의 주인이 아침에 나가 정한 품삯을 알리고 일꾼을 데려온다. 저녁에도 포도원 주인은 밖에 나가 같은 품삯을 알리고 일꾼을 데려온다. 하루의 일을 마감하고 품삯을 주는 시간, 늦게 일에 합류한 일꾼에게 품삯을 주는 것을 보며 아침부터 일한 일꾼은 품삯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품삯은 같았다. 왜일까, 주인이 처음 약속한 품삯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나에게도 하나님은 같은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나는 먼저 믿었으니 조금이라도 더 달라는 떼를 쓸 수 없다. 이어령의 감사는 내게 무거운 짐으로 돌아온다. 하나님을 먼저 알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으로 위안을 삼고 감사를 돌리는 이어령의 글이 가시가 되어 눈에 박혔다. 품삯을 더 받겠다는 흥정은커녕,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쫓겨나면 어쩌나 두려웠다. 매주 교회에 가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나는 왜 조금이라도 더 깊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애쓰지 못했을까. 삶 속에서 만나는 순간순간의 기적을 난 왜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했을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성경을 풀어내는 이어령의 예민한 감수성과 깊은 문학적 지식에 감탄만 흘러나왔다. 짙은 외로움 때문에 기숙사의 방을 환히 밝히고 먼 데서 돌아오는 길과 무거운 짐을 지고 별처럼 보이는 등불을 바라보며 걷는 걸음이 푯대를 향하여 걸어가는 순례자의 여정과 겹칠 때, 비슷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늘 가까이 있어서 그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라고 변명을 둘러대고 괜찮은 것일까?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 깃발에 다다랐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거북이가 도착하든지 말든지 제 흥에 겨워 한숨이 늘어지게 자는 토끼를 떠올렸다. 아마도 나는 먼저 달려나간 토끼일 것이다. 내가 끝내 도착해야 할 곳이 분명하게 있는데도, 경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이 하나님으로 향하는 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하였다. 그러다 결국, 결승선을 넘지도 못하고 저 멀리 기쁨을 면류관을 상으로 받는 거북이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아차!


더 사랑할 때 더욱 드러나는 기적

토끼가 거북이를 보며 흠칫 놀란 데에는, 무엇보다 기적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우리가 흔히 초심자의 믿음을 말할 때에는 십자가의 고난이나 성화의 과정과는 달리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새로 돋은 순처럼 여려서 거센 바람에 쉽게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할 때가 잦다. 그러다 보니 복만 바라게 되는 단편적인 신앙을 가지게 될 때도 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과 손자의 병이 낫는 기적 같은 소식을 접했을 때 이어령이 보여준 모습은 놀라웠다.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여 폴짝폴짝 뛰며 자랑해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잠잠히 있으며 예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예수를 더욱 따르려고 힘썼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며 기뻐하셨을까? 진리를 말할 때에는 눈멀고 귀먹었던 자들이 먹을 것을 해결해주니 마음을 열었다면 그 자체로 절망과 슬픔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을 주로 이야기하며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예수님이 받고 싶은 사랑은 좀 더 깊은 것이었을 텐데도 우리는 그런 사랑을 드릴 수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보며 그저 눈물지으셨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에만 온 정신이 팔려있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 당장 내 먹을 것, 내 쓸 것을 해결해주시지 않는 예수님의 의중만 궁금한 사람이었다. 기복신앙이 나쁘다고 하니까 티를 내지 않은 거지, 속마음은 별다를 게 없었다.

이어령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적의 본래 모습을 본다. 딸을 사랑하기에 딸에게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 여길 수 있었다며,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랑이 적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조금 더 깊고 넓은 사랑으로 사람을 대했다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일상의 기적을 발견했을 거라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매일같이 바라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결국 이런 자리였다. 주 안에 서라는 바울의 말이 무색하게, 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닿은 줄을 낚시하듯 잡아당기며 내가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있는 철없는 아이였다. 놀라운 것은 이런 나마저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70년도 기다리시는 분인데 아무렴! 얕은 내 경험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풍부하신 분이다.

집에서 기르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를 떠올린다. 집에 들어와도 반기지 않고, 머리 한 번 쓰다듬기도 쉽지 않은 고양이. 털은 무수히 날려 방바닥을 뒹굴고, 발톱은 날카로워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입을 때가 잦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 고양이 존재 자체로 고양이는 사랑스럽다. 하나님은 어떠실까? 당신이 직접 빚으시고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인 인간은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울 테다. 그래, 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없이 작아져 외로울 때에도 하나님은 군중 틈에서 사랑의 눈빛으로 나를 지켜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더욱 감사하게 된 것은, 어리기만 한 내 나이다. 일흔의 나이에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는데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내가 못할 것이 뭐가 있을까. 물론, 이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내 나이 일흔이 되어 이어령과 같은 깊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 지도 지금은 또렷하게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없다. 그래도 품삯도 제대로 못 받고 걷어차이는 일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늘어지게 자고 있던 낮잠에서 깨어나야겠다. 늦었더라도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푯대를 향해 뛰어가는 토끼, 설령 알고 보니 내 모습이 거북이도 못 되는 달팽이라 할지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차근히 걸어가고 싶다. 하나님은 저기서 나를 보며 응원하고 계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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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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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고쳐 읽고, 쓰고, 또 읽자.

 

자칭 오독의 여왕이라 말하고 다닙니다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여왕이란 칭호는 꽤 거슬리네요. 오독의... 무엇이라고 해야할까요? 어쩌거나 저는 책을 제 멋대로 읽는 데 선수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자주 책을 오해하고, 책과는 상관없이 토라지거나 책이 말하고자 하는 큰 줄기와는 상관없이 지엽적인 어느 부분에서 혼자 크게 감동받고 가슴 벅차할 때도 많습니다.

난독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다른 데 있었군요.

 

책을 읽는 것이 주는 무게가 상당하고, 책(텍스트)을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 무의식의 검열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물론, 이 것도 서문에서 다룬 것이니 책의 전체적인 주제와는 조금 다를 수 있겠습니다. 네, 저 같은 사람도 하나 정도 있어줘야, 책을 완벽히 이해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텍스트가 주는 혁명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데, 읽어서는 혁명이 일어나는 군요. 그동안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던 제 속의 놀라운 의식의 변화를 더듬어 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어른들이 싫어하는 곳엔 가지 않고, 싫어하는 일은 찾아서 하지 않던, 재미라고는 TV보고 영화보고 책 읽는 게 다 였던 학생시절의 저와 지금의 저는 정말이지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거짓은 아닐 정도로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하니, 네, 그래요. 책이 있었습니다.

 

들입다 외우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던 때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을 쓴 사람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애쓰던 때가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먼저 책을 읽어온 선배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더 깊이 책을 읽고 책과 씨름하는 법을 배운 게 아닌가 해요.

 

혁명사라고 해야겠지요. 사사키 아타루가 자분자분하게 설명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문장을 따라 사사키 아타루의 세계로 들어가보니, 유혈이 낭자한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변혁적인 혁명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새롭다는 생각을 하며 그저 따라갔을 뿐인데, 이제는 저더러 저만의 혁명을 생각하라고 등 떠밉니다.

 

큰 학문을 가르친다는 대학조차 직업준비학교로 변신하여 학생들에게 외우고 써먹으라 가르치는 요즘. 하루에도 몇 권씩 쏟아져나오는 모든 책을 읽어버리겠다는 불가능한 다짐은 접어두고 한 권의 책을 진득하게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펼쳐보길 바랍니다. 뭔소리지 모르겠다, 졸리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도 오히려 좋은 적수를 만났다 생각하며 한 문장 한 문장 눈으로 밟아보는 거예요. 거칠다 싶으면 자리에 앉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좋겠지요. 조금씩 자라가는 우리 안의 혁명의 씨앗이 언젠가는 우리를 변화시킬 겁니다.

글은 힘이 있습니다.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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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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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역사학자이신 어느 교수님께 어느 학생이 물었다. 언제 그 일을 하기로 마음 다짐하셨느냐고. 학부에서 영미문학을 공부하셨다고 알고 있는 우리에겐 영미문학과 미국종교학의 거리감이 상당했으니까, 여쭤볼 만도 했겠다. 그때 아마도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는데, 그 후로는 돌아보지 말고 주욱 걸어나가는 거라고. 잘은 모르지만, 고개가 끄덕여진 건, 교수님의 삶의 궤적을 어렴풋하게나마 주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만해도 반 등수로 전공을 정하던 그 시대에 공부를 잘 한다는 이유로 영문학과에 원서를 넣으면서 아주 오랜 후에 종교사를 공부하고 또 가르칠 거라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 럴 리 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지, 한 해 전만해도 지금 이 사무실에 앉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다. 지금 여기에서 뒤를 돌아보면 어딘가를 향해 내가 걷고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는 것이다. 어머나, 뭔소리야? ‘어쩌다 사회학자가 된’ 피터 버거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명확/알쏭달쏭 해질 지도 모르지.

 

이렇게 피터 버거를 알게 되다

피터 버거. 사회학에 대해 이름은 들어봤지만, 무엇을 하는 전공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알게된 건 무지하게 많다. 사회학이 어떤 건지 구경도 했고, 종교사회학이란 분야가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기독’이라고 쓰고 개독이라 읽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교회와 삶은 (신앙의 문제로 파고 들면 삼천포로 빠지게 되니 각설하고) 잘 나눠 놓는 게 마음이 가벼운 법인데, 종교사회학이란 걸 전공해버리고 나면, 일도 삶도 뭣도 다 종교라는 틀 안에서 애매모호한 채로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걸 구경했다고나 할까? 그런 일을 하다보면 개인의 종교적 색채가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피터 버거도 그랬으니까.

내 머릿속에서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책의 다양한 부분에서 조금씩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뭔가 부끄럽게, 혹은 민망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 건 없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자신이 공부해 온 흔적을 살피는 것도, 그때그때 했던 고민들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아주 사소할 수 있는 진리를 알았달까?

 

그러니까,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조언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는 것 자체가 뭐 그리 중요한가에 대해 고민했다. 행동을 하기 위한 동인으로 아는 것이 존재해야지 단순히 알고만 있으면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게 아니냐고 따져묻고 싶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래,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지침은 각자가 알아서 자신에 맞게 움직이면 되는 거다.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알게 된 것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남에게 어떤 걸 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는 걸 계속해서 깨닫는다. 피터 버거가 시종일관 꺼내는 말은, ‘알았다,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 나니 궁금해졌고, 사람을 모아 이야기를 나눴고, 흥미로운 주제를 찾았고, 또 알기 위해 연구했다. 연구하다보니 새롭게 알았고, 알게 된 것을 써서 나누었더니, 무엇인가가 변했다.

워낙에 사회학에 대해 아는 게 없다보니,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관심은 생겼다. 베버의 저작과 방법론도 궁금해졌지만, 뭣보다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피터 버거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이렇게 아는 것이 책을 타고 전해질 수만 있다면, 아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게 되겠지?

 

정해지고 나면 정리가 되는, 구슬이 꿰어지는 놀라운 인생사.

앞서 언급한, 역사학자이신 선생님의 말씀 중에, 현재가 과거를 결정한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와 같은 문장이 있었는데, 정확한 건 후자인 것 같다. 어쩌거나 그렇다. 피터 버거가 마지막에 기차장난감 얘기를 꺼낸 걸 봐도.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면 재미없어지니까, 어쩌다로 시작했지만 알고보니 난 떡잎부터 그랬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효과를 노렸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나도 (어쩌면 그대에게도) 마찬가지다. 배우가 되겠다고 대학로를 배회하던 그 시절에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 행사로 짤막한 연극을 올리겠다고 밤마다 남아서 연습을 하던 어린 내 모습을 자주 떠올렸지만, 지금은 뜬금없이 내 눈을 바라보며 “너같은 눈을 가진 애들은 문학을 해야 해.”라고 말하던 학원 국어 강사의 말이 더 자주 생각나니까. 하긴 뭐, 쿠데타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개인적인 얘기 더 해서 뭐하나. 연말이 되면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겠지. 현재가 과거를 어떻게 정리해버릴 지를!

제목이 주는 무게감이 상당해서 책을 덮는 내내 ‘어쩌다’를 생각했지만, 정작 피터 버거는 어쩌다라는 말을 다양한 곳에 쓰지 않는다. 단 하나,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사회를 알아야겠어서 선택한 것이 사회학이라는 그 사실 하나에만 쓴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에 군 징집과 이어지는 생계유지수단때문에 사회학자의 길에 더욱 깊이 들어가긴 하지만, 확실한 건 원치 않았는데 자꾸 빨려들어간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즐겼고, 자발적으로 걸어갔다. 그 점이 너무나 좋았다.

 

“난 다른 걸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연기를 한다.”고 말했던 선배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린 마음에 나는 이것저것 모든 걸 할 수 있지만, 내가 좋아서 연기를 한다고 말하는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것이 얼마나 자부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는지를. 피터 버거가 선택한 ‘어쩌다’라는 말을 자꾸 되뇌이게 되는 것은 그 단어가 가진 1차적인 의미 때문은 아니다. 심드렁하게 꺼냈지만, 전혀 심드렁하지 않은 그의 진심이 잘 포개져있기 떄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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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2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저도 어쩌다가 삶의 중요한 키워드라고 봐요. 어쩌면 제목의 번역을 무지 잘한것 같이도 하구요. 철수 아저씨나 피터버거 같은 대단한 사람도 그렇겠지만 저도 그렇고 참 어쩌다 신간 평가단도 하게되어 다양한 분들 생각도 공유하게 되고 감사하죠.

미쓰지 2012-08-07 11: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글을 확인했습니다. 입에서 쉽게 도는 제목은 아니지만, 한번 보면 자꾸 생각나는 제목이라 정말 잘 지었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신간평가단을 통해 편식하던 습관이 조금 바뀌게 되고,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어 저도 좋더라구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끝내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랄까요?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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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고를 보고 여러분이 해서는 안 되는 말씀은, 저도 김ㅇㅇ 비타민 주세요, 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산다. 누구 머리, 누구 옷, 누구 가방. 멘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김누구를 존경하는 내 조카는 김누구가 되는 게 꿈이다. 어쩌면 김누구의 직업을 꿈꾸는 지도 모른다. 김누구의 인기를 원하는 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나 이 책은 김수영을 읽고 김수영이 되어야 겠다, 라거나 이 책을 읽고 나도 강신주같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강조한다. ‘김수영처럼’, ‘강신주처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에 똑하고 떨어진 나, 바로 나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책을 만났다.

 

지극히 편파적인

문학적 감수성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 이 책은 철학자의 언어로 가득하다. 철학이란 과연 이런 것인가. 사람의 중심을 더듬거리며 찾아내고는 기어코 중심을 잡고 흔들어 댄다. 철학과 문학의 접점이 이런 것이라면 나도 해내고 싶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룬 글을 써내고 싶다. 김수영이 시인이고 강신주는 철학자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장르라면 장르가 주는 한계란 처음부터 없는 건지도 모른다. 글이 아니어도 괜찮다. 다만 조금도 꾸미지 않은 내 모습 그대로, 나답게 살아내는 게 중요하다.

김수영의 삶, 김수영의 글. 모든 곳에서 강신주의 팬심이 느껴진다. 이 때문에 우리는 김수영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다. 팬미팅을 마치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표현을 궁리한 느낌이 강한 이 글은, 읽는 나마저도 김수영의 깊은 데를 보는 기분이다. 자유를 향한 열망, 역사 속에서 개인이 더욱 개인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든 사건들, 시인의 감성이 철학자의 언어로 변하여 나에게 닿는다. 아, 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읽는 이에게 복잡한 질문 하나 던지고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깊게 파고들어 갈 수 있게 안내하는 것, 저자의 깊은 속내이기에 문장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색채가 분명할수록 단독성을 지닌다. 그런 문장을 따라 멈추지도 못하고 따라 들어가면 어느새 저자와 함께 막장에 서 있는 기분을 주어 함께 고민하게 한다. 진한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곡괭이질을 하고 나면 어느새 새로운 깨달음이 하나 남는 것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김수영의 시는 강신주의 글을 이끌어냈다. 이것이 나에게는 나만의 글을 쓰는 문제로 이어졌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만의 음악, 회화, 삶에 대한 욕망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자유에 대한 열망은, 단독자로 서 있고 싶은 욕망은 생득적인 것이나 살아가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억압되는 것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지칠 때마다 채찍을 맞는 팽이 말고 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너도 너만의 춤을 추어라.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그 누구도 닮지 않는 그런 자기만의 춤.

또한 내가 싸워야하는, 그림자 없는 적을 떠올리게 되었다. 뿌연 유리창같은 적이다. 우리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는 적이다.

대입, 취업, 결혼, 육아에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사람들과 자신을 혹사하지 않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죄책감에 빠뜨리고야 마는 세상 때문인지, 지쳐서인지 나는 한참동안 흐릿하게 사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쿨하고 시크한 게 자랑이라도 되는 듯, 치열하지 않은 것이 좀 더 어른다운 것인냥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치열해야 한다, 치열하되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할 지 알아야만 한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 돌기 위해 치열해야 한다. 목적 없는 치열은 위험하다, 방심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요구하는 무엇에 나의 치열함을 쏟게 되어버린다. 지금 이 사회는 우리의 목적을 하찮은 것으로 폄하하고 표피적인 것에 맹목적으로 달려들라고 강요한다. 여기에서 벗어나야겠다. 곧은 소리가 곧은 소리를 부르듯, 강신주의 책이 엇길로 걸어가는 나의 뒷채를 잡고 흔든다. 그래, 나를 건너 곧은 소리가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으랴, 그러니 나도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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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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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어요. 자신이 얼마나 상사를 사랑하는지, 나의 충성도가 얼마나 높은지에 대해 성토하고 있었죠. 상사의 대답이요? 아마 이랬던 것 같아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네 마음, 숫자로 보여 봐.”


헐!


너무 시크하고 멋있어서 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어디에든 대사를 적어놓고 싶었어요. 말 한 마디에 인물의 성격이며 뭐며가 조금 더 확실하게 보였다고 해야겠지요. 네, 위의 대사를 쓸 수 있는 작가와 단박에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는 시청자. 그것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손에 쥘 수 있든 없든 상관없어요. 숫자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가치라는 것을 그렇게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 책에 대한 국내의 기대치는 마이클 샌델이 한국에 찾아온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대학 노천 극장에서 있었던 강연은 북적북적했다지요. 언론도 달려가서 샌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이제는 모른다고 말하면 왠지 부끄러운 <정의란 무엇인가?>도 읽지 않은 저한테는 그렇게 매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시큰둥했지요. 책을 읽지도 않고 판단하는 건 무리수지만, 간간히 들리는 이야기를 종합해봤을 때, 그리 좋은 책 같지는 않았어요. 뭐랄까, 우리를 극단적인 상황에 몰아넣고 선택하게 만들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고는 왜 그걸 선택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또 묻죠. 정의란 무엇인가?

전 그게 좀 싫었어요. 왜?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정의를 물어보는 거야? 정의라는 게 그렇게 특수한 상황에서만 발휘되어야 하는 건가? 우리의 일상에서도 정의는 살아있어야 하고 생명력있게 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네, 책을 안 읽었으니 무식한 소리한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죠. 그래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읽었어요. 


선입견이 이 정도니 곱지 않은 시선으로 시작한 건 사실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려고 할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생각해보라는 거겠지? 아이고, 삐딱선이고 뭐고 초반부터 충격에 빠졌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 있는 걸까요? 대신 줄 서달라고 돈을 내지 않나, 그걸 또 중개하는 회사가 있는데 심지어 굉장히 자랑스럽게 대놓고 장사를 합니다. 뭐라도 되는 양.  뒤로 갈수록 더 하죠. 해외토픽에서 봤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줄기차게 등장합니다. 설마했던 자리까지 돈이 차지하게 된 거죠. 광고는 버스 뒷자석에 머물지 않고 사람의 이마까지 진출했어요. 말해 뭐합니까, 사고 파는 데는 한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숨이 붙어있기만 한다면 뭐든 팔아도 상관없게 된 거에요.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는 다른 미국의 현실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도 머지 않았겠지, 어쩌면 나도 저 말도 안 되는 시장에 구매자로는 불가능할 것 같고 판매자?로 등장할 수는 있겠구나 싶었지요.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말하듯, 노랗게 보여서 노랗다고 하겠어요.

그런데요, 책을 읽는 내내 어딘가 불편했어요. 왜 그럴까, 그러던 중 매일같이 폭력과 살인, 사기, 갈등 등 자극적인 소재로 안방 시청률을 잡아두는 주부프로그램이 번뜩 떠올랐습니다. 출근 준비를 하며 보게 됐는데요. 하루는 누가 길을 가다 돌에 맞아 죽고, 또 하루는 강도를 만나서 죽고, 또 하루는 홧김에 죽이고 도막을 내어 버리고, 또 하루는 동네 친한 아줌마가 곗돈을 들고 도망을 갑니다. 매일매일 끝을 모르는 사건사고를 접하면서 내 하루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밤길은 당연히 무서워졌고, 일상에서도 번뜩번뜩 겁이 나더란 말입니다. 나라고 안전하지는 않다,는 생각. 결국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우리는 황색지를 경계합니다. 가십거리만 무성하게 만들어 놓고 우리가 정작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죠. 세상은 그런 사건사고들로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사건사고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환경, 분위기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사건사고 이후에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또 서로 감싸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우리의 시각을 편협하게 만드는 것들을 없애려고 노력하며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샌델은 굉장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마음만 먹으면 뭐든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이 오고 있고 어느 면에서는 이미 왔다고 단정지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경제에 도덕관념이 빠진 것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죠. 계속 이렇게 살 겁니까? 의분에 넘치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요.

하지만 팔면 안 될 것 같은 것을 팔아야만 하는 사람이 왜 있는지, 왜 생각지도 못한 것에 돈을 쓰고, 쓰려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회가 돈독이 올랐다는 건데, 돈독 오른 사회는 멈출 줄 모르고 이렇게 진행한다는 건데, 그걸 도덕적인 개념을 집어넣어 다시 생각해보자, 이게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이냐, 묻는 거 말고 돈독을 제거하는 근본적인 고민은 하지 않고 있다는 거지요.


남들보다 늦은 출발을 부끄러워 하라는 건 아닙니다. 

이미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서 이 돈독 오른 사회를 바꿔보려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살면서 애써 그 사람들을 무시해왔어요.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내 머리가 복잡해지니까요. 내가 잘 살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수많은 사회활동가, 헌신자들에게 샌델의 질문은 어떤 무게가 있을까요? 야, 이제라도 고민해줘서 고맙구나. 이렇게라도 생각해주어야 하나요?

오지랖이 넓어 미국 사회를 걱정하게 됩니다. 엘리트 집단이라는 학교의 강의 한 학기가 이런 기본적인 질문으로 끝나버린다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디서 잘난 척이냐고 하시면 깨갱하겠습니다. 저도 책 한 권이나 되는 분량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어요. 

정의란 무엇인가. 수많은 대학의 교양 수업에서,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신문, 잡지 어디 할 것 없이 모두가 정의를 물었습니다. 쉽게 답 내릴 문제는 당연히 아니지요. 하지만 그 질문을 받고 고민했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습니다. 글쎄요, 굳이 찾아보자면, 스스로 교양 좀 생겼다고 자위하는 정도?  우리가 마이클 샌델의 책에 이렇게 환호한 이유는 아마도 <정의란 무엇인가>를 잇는 자극이 필요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노파심이겠으나, 샌델의 이 책을 읽고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고 해서 우리의 지적 자장이 넓어졌다고 생각한 채로 일상으로 돌아갈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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