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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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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있어서나 장래에 있어서나, 고민하고 있을 때면 듣게 되는 말이 있었습니다. 미련보다는 후회. 그렇습니다. 주저하다가 때를 놓치고 ‘그때 했으면 잘 됐을 텐데’ 따위의 미련을 가지느니, 질러놓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지요.

선택을 한 적도, 끝내 하지 못한 적도 있다보니 제 20대는 온통 미련과 후회로 가득합니다. 미련과 후회, 왠지 반반 정도의 확률 게임인 것 같지만 백이면 백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의심을 해보기도 했어요. 어느 날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죠. 그래도 그때의 결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라고 믿게 되는 선택들이요.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 마르크스를 가슴에 품은 코뮤니스트들에게 코뮤니즘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전쟁과 이념싸움이 어느 정도 끝난 뒤에 태어난 저는 소비에트 연합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편하게 TV로 볼 수 있었죠. 왠지 공산주의는 이제 끈 떨어진 가방처럼 쓸모없어졌다 생각하고 말아버렸을 시대가 있었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저는 다시 공산주의를 생각하는 요즘, 책을 열심히 읽으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요.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 이전부터 새록새록 피어난 공산주의에 대한 갈망은 마르크스를 만나 정점을 찍게 되지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주의 이론 정립에 박차를 가하면서 그들의 저작은 공산주의계의 바이블이 됩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처럼, 마르크스의 저작도 시간이 흐른만큼의 주석서들로 넘쳐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 해요. 성경이든 마르크스든.

 

이 책의 저자인 로버트 서비스는 1917년 이전부터 현재까지의 코뮤니즘을 정리했는데, 얼추 따져보면 약 백 년 정도의 역사를 훑은 것이 되지요. 한 나라의 백년사를 다루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유럽에서 시작하여 아시아를 거쳐 전지구적으로 번져나간 코뮤니즘의 불길을 정리하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일입니다. 번역본으로 700여 페이지 분량의 책이라니 정리한 것도 놀랍지만 그 양도 엄청납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백 년 여의 역사를 700여 페이지로 정리하는 작업도 대단합니다. 요점 정리를 한다해도 이렇게 줄이기 쉽지 않을 거에요.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인지 문장이 굉장히 단단합니다. 수사를 줄이고 되도록이면 간결하게 역사를 정리해나가고 싶은 사가의 마음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자수처럼 알알이 박혀 있달까요.

 

그래서 이 책은 쉽게 읽기도 어렵고, 양도 만만치 않아 단숨에 읽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책은 그 무게를 달리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코뮤니즘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이야기를 듣듯이 읽고 싶으시다면야 슬렁슬렁 진행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 되겠어요. 생각보다 다이나믹하거든요. 코뮤니즘은 혁명을 일으키고 또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미련의 문제일 겁니다. 조금만 달리하면, 조금만 희생하면, 조금만 완력을 쓰면 모두가 행복한 그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울 수 있을 거라는 그 희망을 지피기에 부족함이 없거든요. 그러니, 미련스럽게 굴지 말고 하자, 해보자, 외칠 수 있는 것이죠.

 

하워드 진이 쓴, 맑스인소호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맑스는 영국의 소호에 살았었거든요. 그런데 어쩌다-아마도 관리의 실수로- 미국 소호로 오게 됩니다.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허락받아서요. 백 년 정도의 시간 동안 세계를 지켜본 맑스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다시금 설파하고 떠납니다.

 

그 작품을 읽고, 꼭 한 번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감사하게도 무대에 올릴 수 있었지요. 배우는 아니었지만 대사를 읽고 또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마르크스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아닐까 했죠. 마르크스는 인간을 너무 믿었어요. 아직도 헷갈리는 역사의 단계, 공산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건지 아님 그 역인지, 어쩌거나 일당독재가 있고나서 사회 체제가 완전히 바뀐 후엔 독재를 끝내고 시스템에 맞춰 행복하게 살게 될 거란 기대는 정말 기대가 아닐까 싶은 거지요. 어느 누가 권력을 쥔 후에 그걸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반지인 걸요.

 

많은 시도들이 독재까지는 어떻게 끌고갈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넘어가지 못했고, 또 아직도 그러고 있지요. 그 사이에 노선을 달리한 사람도 있고, 포기한 사람도 있죠. 미련과 후회, 두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혁명을 꿈꿉니다.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이 책은 아마도 미련과 후회, 두 사이로 당신을 밀어넣을 수도 있고 책장을 덮는 순간 미련이고 후회고 다 필요없다는 생각을 하며 코뮤니즘을 지워버리게 해줄 수도 있을 만큼, 코뮤니즘을 잘, 또 세세히 정리해줍니다. 아차, 글쎄요. 어쩌면 이 책을 덮은 후엔, 입맛에 맞게 코뮤니즘을 읽어 줄 또 다른 책을 찾게 만들어줄 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마르크스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거든요. 위정자들은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쁘고,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독기를 품은 채 범죄에 집중하거나 그도 아니면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해버리는 일이 빈번해지는 요즘에도 내일을 꿈꾸며 잠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잖아요. 우리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은 채로 살고 있다는 걸요.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이 어떻게 출근을 하고 밥을 먹겠어요.

 

그런데 이거 미련이면 어쩌죠. 이게 미련이라도 우리는 살아갈 겁니다. 그런데 이 미련, 영원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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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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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얘기를 듣는 건 굉장히 재미있다. 메이킹 필름을 만들어 두는 것도 작업일지를 공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약간의 관음증을 충족시켜 준다면 금상첨화겠다. 노골적이거나 일상에서 쉽게 꺼내기 힘든 사건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일상적이어서 지나가기 쉬운 일일수록 시각을 달리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개콘에서 오래 살아남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란 코너가 그렇다. 친구들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과 대화지만, 컨텍스트를 조금만 바꿔도 모순이 생겨난다. 집에서 흔히 나누는 엄마와의 대화도 눈물을 뿌리며 보게 되는 드라마도 한 발짝만 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가족기담>은 이런 시도로 가득하다. 어릴적 전래동화집이나 애니메이션, 유치원 발표회나 엄마나 할머니가 자기 전에 들려주셨거나 친구들에게 전해들었거나 아니거나 신기하게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래서 별 부담이 없는 옛이야기를 끌어와 비틀어본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저자가 예로 든 이야기 중에는 특정한 작가가 작심하고 쓴 소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구전이다. 구전은 화자의 ‘말빨’도 중요하지만 청자의 반응이 절대적이다. 청자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화자는 더욱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나가게 된다. 이야기가 시대를 담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공감의 폭이 넓어야만 더 많은 반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정의, 원리, 원칙, 논리보다는 감성, 모순, 욕설, 음담패설에 가까워진다. 단번에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과장을 잘하는 화자를 만나기도 하고 캐릭터 구성에 능한 화자를 만나기도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메꿔나간다. 물론 이야기가 수사에 빠져 길을 잃기도 할 수 있다. 너무 많이 갔을 땐, 나름 논리적인 화자가 나타나 드라마트루그를 하기도 했을 테다. 구전이란 그런 것이다. 공동집필의 미학.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면서 이야기가 품고 있는 시대의 한계와 인간의 모순을 밝혀내고자 했다. 흥미롭기도 했고 절망하기도 했다. 저자가 날카롭게 혹은 집요하게 찾아낸 의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때 특히 그랬다. 그렇지만 저자의 폭로(!)가 점점 불편해졌다. 정말 그랬을까? 잘 알려진 이야기는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회자될 만큼의 가치를 지녔다는 듯이기도 한데 그 이야기에 웃고 울었던 사람 모두가 저자가 집어낸 모순과 비인간적인 면에 암묵적인 동의, (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무지를 가졌다고 결론내야 하는 것일까 싶었다.

그래 웃자고 한 말을 다큐로 받고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더욱 불편했던 건, 옛이야기 속에 담긴 여성비하나 폭력 등등의 문제점이 현실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흐르고 있다는 저자의 시선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그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몇 백년을 흘러내려온 인간의 속성을 인정해버려 더 이상 희망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만 같아서 끝까지 아닐 거라고,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가족 기담이 정말 기이한 이야기로 그치기를 바라는 건 현실 부정일까? 제발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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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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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일입니다. 여의도에서 있었던 칼부림 사건의 피의자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잘못했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그 사건 덕분에 저는 또다시 밤길을 더욱 무서워하게 되었고, 이제는 낮에도 조심히 다녀야겠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저도, 조금 달랐습니다. 동정표가 있었어요. 칼을 든 그 상황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언론의 역할도 한몫했습니다. 의정부에서 있었던 사건과 엮어서 지나친 양극화가 일으킨 범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끝에 몰린 사람의 분노표출이라는 거지요. 삶의 끝, 그래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르포르타주,라는 장르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르포라고 줄여 말했던 TV방송프로그램도 찾아보기 어려워졌잖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르뽀라고 발음하던 게 신기해서 그런 장르도 있구나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문이겠지요. 어느 작가의 신간이 르포르타주라고 나온 것 자체가 이슈가 된 걸 보면.

 

솔직히, 전 그 신간을 읽지 않았어요. 해고노동자가 직접 썼다면, 공활로 들어갔던 사람이 쓴 글이었다면 찾아 읽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글쎄요,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그것이 르포르타주일까, 그것도 르포르타주라고 말해도 될까, 왜 그 책을 굳이 르포르타주라고 설명해야만 할까? 의문이 먼저 들었거든요.

 

<노동의 배신>을 읽으며 저는 이것이 르포르타주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솔직한 글이 더욱 빛을 발하는 장르라고 느꼈지요.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미국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미국드라마에서 종종 나타나는 작가라는 직업은 안 팔리면 무지하게 배고프지만 잘 팔리면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살 수 있다는 걸 알죠. 어느 작가는 단어 당 돈을 받기도 했던 걸로 기억하니까요. 에런라이크의 글을 우리나라에까지 번역되어 소개할 만큼의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 같은 데 신경쓰지 않아도 먹고살기 문제가 없는 사람이겠지요. 이 사람이 잡지 편집장과 그런 얘기를 했다지 뭡니까. 우리나라 상황으로 치면 그런 거에요. “정말 최저임금만 가지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누가 그랬다죠. 평금 임금과 평균 월세, 생활비 등이 통계로 나와있으니까 셈 해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요. 에런라이크는 아주 시-크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책상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논문으로 나오겠지. 하지만 나는 궁금해, 언뜻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을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할 수 있다면, 뭔가 있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돈 아끼며 사는 법 같은 거.

 

그래서 출동한 겁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간 거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일을 하며 미래에 대한 꿈을 꿀수도 없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게, 슬프지만 불편한 진실입니다. 웬 스포냐구요? 책 읽을 맛 떨어지게 만들었다고요? 왜 이러십니까, 아마추어같이. 이 책이 말하는 건 결론이 아닙니다. 뻔하잖아요. 최저임금으로 여러분은 얼마나 잘 살 수 있으실 것 같으세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까요. 월급을 탔는데, 지난 달 카드값이 너무 많이 나와서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카드도 못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라고요. 네, 솔직히 저도 어렵다어렵다 입에 달고 살지만, 빚도 있지만, 이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도 있고요, 책도 사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런라이크가 들어간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어요.

 

미국드라마를 봐서일까요. 그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의사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백인인데 트레일러에서 살았다구요.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해서 벗어났다고 아직도 엄마는 거기 산다고 말하더군요. 그걸 ‘트레일러트레시’라고 말하는 건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에런라이크가 그래요. 시급 7달러만으로는 트레일러트레시도 될 수 없다고. 그 말이 저에겐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막장인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데, 최저시급으로는 막장흉내도 낼 수 없다니요. 

 

읽으면 읽을 수록 처참해졌습니다. 에런라이크가 말하는 현실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 그랬고, 나도 결국은 알게모르게 그 사회의 병폐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더욱 화가났습니다. 에런라이크가 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을 알리는 것뿐이었어요. 우리는 이래저래 무능하고 무력합니다.

 

책 날개에 준비중인 책 소개가 보이더군요. <희망의 배신>이었습니다. 에런라이크가 이번에는 화이트칼라노동자들의 삶으로 들어갔더군요. 그 책이 더욱 기다려지는 건, <노동의 배신>이 준 충격때문일 거에요. 당장 아무 것도 할 순 없지만, 그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도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배신감은 한 사람을 파멸시키지요. 어떤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칼을 선택합니다. 이 배신감을 나눠가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집단이, 한 사회가 배신감을 공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에런라이크는 글로 현실을 폭로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에런라이크가 심은 조금의 씨앗이 각자의 자리에서 피어나길 기대해봅니다. 미국 사람들이 월가에 모였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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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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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라고 말하면 정말 귀신의 일족인 것 같으니까, 뱀파이어로 말하는 게 왠지 더 나은 기분이 드는 그런 종족(!)이 있죠. 나라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역사와 성향, 성격을 가졌지만, 어쩌거나 마력과 같은 매력이 넘치고, 별 일 없으면 영원히 살고, 늙거나 병들지도 않아서 어찌보면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게 아닌가 싶은 무리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뱀파이어입니다. 완벽해보이는 사람일수록 완벽하지 않을 때 폭발적인 매력이 상승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런 이유로 뱀파이어는 치명적인 단점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어떤 지역의 뱀파이어는 별로 영향을 안 받긴 하지만, 햇빛에 타죽는 경우도 있고, 흡혈을 하지 않으면 시들시들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영생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경우도 있어요.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시간에 따라 죽는데, 뱀파이어는 그러지 않으니까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 거거든요. 아이고, 써보니 이렇게 낭만적인 이별이 또 어디있겠나 싶습니다. 이별은 이별인데 사랑은 영원한 거잖아요.

 

문학작품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캐릭터를 가만 두고 볼 수 없겠죠. 같은 인간이라도 극적, 예술적 성과를 위해 극단으로 몰아부치는 판에 인간과 닿아있는 뱀파이어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나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살펴봅니다. 뱀파이어 캐릭터는 어떻게 문학작품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시대를 지나면서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고, 또 시대에 따라 어떻게 옵션을 바꿔가며 살아남았는지 등등.

 

저자는 작품을 중심으로 뱀파이어를 설명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뱀파이어를 다루는 작품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고,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캐릭터와 전개를 보이고 있어서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에겐 약간 지루한 작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건 줄글에서 강조점없이 뱀파이어의 성격이나 변화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분명 작품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뱀파이어에게 흡혈을 당하면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이 처음 시작했다’ 정도의 설명이 나오는 거죠. 생각없이 읽다가는 그대로 흘려버리겠다 싶은 부분들이어서 정독의 욕심이 없다면, 일렬로 서 있는 뱀파이어 작품 목록 해제를 읽은 기분만 들고 끝날 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재미있었던 건, 뱀파이어라는 캐릭터가 어느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서 갑자기 톡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거였죠. 유럽을 관통했던 수많은 전염병 때문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여럿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갖게 된 두려움.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것이란 공포와 식육과 식육을 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그 형체를 갖게 된 것이죠. 파묻은 시체를 파내어 뜯어먹는 구울이란 캐릭터도 사람의 피를 마셔 생기를 띄는 뱀파이어도 그렇게 조금씩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해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거에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유럽인들의 상상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뱀파이어를 통해 유럽인이 가진 두려움과 잔인함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는 거죠. 뭐랄까요. 처녀귀신이나 박수무당처럼 우리가 전설의 고향 류의 드라마를 통해 만나는 한국형 귀신과 괴물(?)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한번 태어난 캐릭터는 소멸하지 않고 세련미를 갖추어갈 뿐 아니라 특화됩니다. 드라큘라 백작이 마늘과 십자가에 무력해진 것과는 달리 최근에 등장한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 종족은 완벽에 가깝지요. 렛미인에 등장하는 북유럽형 뱀파이어는 또 어땠나요. 초대받지 않으면 남의 집에 들어갈 수 없지만, 초대를 받은 후에는 모든 게 가능해지죠. 피는 필요하지만 자신이 피를 보는 수고는 덜합니다. 빛을 피해 잠을 청하지만,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여럿을 죽여버릴 정도의 괴력을 행사할 수 있죠.

이런 뱀파이어 캐릭터는 이제 그 뱀파이어 역사가 전무한 한국까지 진출합니다. 박찬욱의 <박쥐>가 그렇죠. 성직자와 뱀파이어의 조합이 주는 긴장이 송강호와 겹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뱀파이어가 등장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더욱 앞으로 나타날 뱀파이어를 상상하게 됩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지도 모를 어떤 뱀파이어,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인간이란 이름으로 해낼 지도 모를 또 어떤 뱀파이어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죠. 뱀파이어의 영생만큼이나 뱀파이어의 이야기 또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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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이 꼭 알아야 할 노동법 - 입사부터 퇴사까지
권정임 지음 / 생각비행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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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도 “법대로 하자”는 말 때문인지, 법 얘기를 들먹이면, 으레 어디 한 번 제대로 싸워보자는 말처럼 들린다. 어쩌면 ‘노동법’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직장에서는 제대로 싸우기 위한 전초전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

노동법 자체가 불리할 수 있는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도록 최저의 기준을 세워놓은 것이라서 노동법을 제대로 알아놓고 회사에 조금이나마 어깨에 힘 주고 다닐 수 있도록, 쫄지 않도록 화력을 불어넣어줄 책은 아닌가, 기대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떻게 하면 회사에 맞서 잘 싸울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입사에서부터 퇴사까지, 어찌보면 사소할 수도 있고 중차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한 근로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대해 법조항과 판례까지 알려주며 되도록이면 이해하기 쉽고 적용하기 편하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다. ‘을’일 수밖에 없는 근로자에게 법을 잘 이용하여 백전백승하길 바란다기 보다는, 문제가 더 커지지 않도록 잘 해결해서 되도록이면 노무사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까. 노무사가 자기 일감 떨어지는 글을 왜 쓰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면, 굳이 싸우려 들지 않아도 노무사가 필요한 상황은 지금 이시간에도 엄청나게 일어나기 때문은 아닐까? 

 

근로자도 근로자지만, 노동을 사용하는 사용자(그러니까 회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라 모르고 지나간 일이 알고보면 불법이라는 걸 알게 되어 이래저래 민망한 경우가 많을 것 같아서 그렇다. 사용자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불법도 무지도 아니었다고 해야하니까 더욱 힘써 법을 알려들테고, 그럴수록 근로자는 모르고 당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니까.  

 

책을 한 번 읽은 걸 가지고, 노동법을 정복했다고 말할 순 없고. 책을 다시 펼치지 않더라도 꼭 기억하고 있어야겠다 마음 먹은 것, 새로 배운 것이 있다.

하나, 그게 무엇이든 문서로 남길 것. 대부분이 큰 사고 없이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이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들이밀 수 있는 건 문서밖에 없다.

둘, 어떻게든 원만하게 합의를 보기 위해 노력할 것. 싸우자고 달려들어봤자, 손해는 언제나 '을'이 더 본다. '을'을 벗어나고 싶은가? 다시 태어나라. ㅠㅠ

셋, 관대한 사용자를 기대하지 말 것. 기대했단 발등 찍혀도 아무도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 항상 원만한(사이 좋은) 긴장상태를 유지할 것. 특히나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만 같은 상사라고 해서 무장해제 상태로 대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 '사용자'로 변신할 지 모른다. 또한, 회사가 내 사정을 봐줄 거라는 기대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퇴직이든 이직이든 그게 뭐가 되었든, 회사가 먼저 신경쓰는 건 내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자.

넷, 결국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나’밖에 없으므로, 근로자의 권익을 위해 ‘나’들이 뭉쳐야만 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잘 꾸려져야 하고, 잘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법대로 하자’인 걸 생각하면, ‘(노동)법’을 들먹이는 순간, 분위기가 냉랭해질 걸 떠올리면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모르는 게 약'과 '아는 게 힘' 사이에서 지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안다'는 건 그런 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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