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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아, 어쩌지. 감성이란 게 사라진 게 아닌가 싶어 당장이라도 미술관에 달려가야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는 주간입니다. 글쎄, 동료 직원 분이 '이거 너무 예쁘지 않아요?'하고 조각상 사진을 보여주시는데, 저는 그걸 보고, (다시 생각해도 너무한데) '아, 이게 구축주의라고 할 수 있는 거구나, 구축주의는 저렇게 발현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거 아니겠어요? 

아, 밀려드는 쓸쓸함. 그래도 나에게는 예쁜 것을 보면 예쁘다고 말하고, 감상에 젖어도 보던 그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나에게 그런 감성이 전혀 없을 수는 없을 거라고 부정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미술관을 좇아다니며 예쁘다 좋다 남발하던 그 시기는 이미 10년전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어요. 아 놔 몰라!!!!!!!! 

이제는 그저 예쁘다, 라고 말할 수 없는 현대미술에 대해 우리의 시크한 SNS대변인 이신 '진중권'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궁금했지요. 그래서 이 책을 기쁘게 받아읽은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술의 흐름도 어떤 사람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진중권은 특히 시크하다! 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미술을 아방가르드로 보고 출발했다는 것과 사조의 흐름을 따라가는 시선이 철학적인 사고에 있다는 것 때문일텐데요. 이 것을 아주 간략하게 부제에서 말하고 있죠. 부제는 뭐냐하면 바로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입니다. 이것이 오늘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말일 것입니다.  아방가르드란 뭘까요, 미학자에게는 아방가르드란 말 자체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저처럼 무지몽매한 부류에게는 이런 단어조차 생소하고 어렵단 말이지요. 

그래서 찾아보면, avant-garde는 프랑스어인데, 처음엔 군사용어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부대를 뜻했다고 하죠. 제가 프랑스어를 아는 건 아니지만 avant이라는 단어 자체가 앞으로 향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보통 아방가르드나 전위예술이라고도 부릅니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은 왜 예술가들이 전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느냐에 대한 역사적인 답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 뒤샹이 소변기를 들고 미술관이 들어와 제목을 붙여 전시했을 때의 그 충격을 생각해보면 아방가르드라는 게 뭔지 조금 감이 잡히기도 하지요. '그냥 심심해서, 재미있으려고'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뒤샹에게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이죠.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거나 설명하는 사람은 우리 중에 드문 비율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그들의 작품세계를 '소 뒷걸음치다가 파리를 잡은 격'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시작한 사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시작한 것일지라도 예술가가 그것을 반복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되었다면 웃고 넘길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게되지요. 그들에게는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긴 것이니까요. 

제3 인터내셔널이 정치적인 움직임을 했으나, 그 사상을 표현하고 설득하기 위해 예술작품을 선택한 것은 분명히 예술에게 갖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개가 된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신념을 연설이나 정책 뿐만이 아닌 예술작품으로 말하려는 시도부터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수한 예술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 스마트폰 등도 디자인을 생각하지 않고는, UI와 (꼭 보이는 것만을 예술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은데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아.... 어떻게 써야할 지 감이 안 오네요) 각 어플들까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말들과 문장 때문에 전체를 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워낙에 방대한 양이다보니 그럴 수 밖에요) 서양미술의 흐름을 짚어내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 읽었던 현대미술사에서는 소개되지 않았던 사조들이 있는가 하면 있을 것 같던 사조가 소개되지 않은 경우도 있거든요. 예를 들면, 구축주의랄까요?   때문에 저는 지금까지 제가 서양미술사를 보는 시각이 편중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무엇이든 단 하나의 길만 있는 건 아니구나,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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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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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야 분야가 다양해져서 악기만 배운다고 해도, 바이올린, 첼로부터 클라리넷, 오카리나 등등 무수한 학원이 있어서 그 선택의 폭이 넓다. 그러나 얼마전까지 남들 다 하니까 내 자식도 다녀야 속이 풀리는 곳은 피아노 학원이 유일했다. 악기 자체는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데 반해서 배우기는 쉬웠던 모양인지, 아니면 열손가락을 다 써서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거나 나도 엄마 손에 이끌려 피아노 학원에 갔었다.   

학원만 다니면 뭐하나, 아쉽게도 '도레도레도'의 바이엘부터 시작하여 체르니와 하농, 바하, 모차르트, 베토벤 등등을 배우며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소나타랄지, 인벤션이랄지의 장르에 대한 구분은 전혀 하지 못 했었고, 그건 아직도 유효하다. 피아노 협주곡이라니까 그런 줄 알고 교향곡이라고 하니까 교향곡이구나 생각하지 그냥 들어서는 뭔가뭔지 도통 분간 하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음악, 특히 클래식에 있어서는 이런 무지랭이가 따로 없을 정도라고 해야할까? 

차이콥스키도 피아노 소품을 썼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호두까기 인형이란 발레곡 조차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차이콥스키라는 이름 자체도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 사람의 삶과 또 음악에 대해 빼곡히 써 놓은 책을 읽게 되다니, 이거 참, 도전적인 마음이 들면서도 한구석에선 미안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책을 보면서 어느 정도 미안한 마음이 줄었는데, 차이콥스키는 내가 미안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생전에 많은 인기를 누렸었고, 그 자신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만족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주위 친인척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데다가 재정적으로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여유있게 생활할 수 있었다. 아 물론, 그 인기 그 자체로 지금까지 명성이 이어진 것은 아닌데, 사후에 그 이름이 오래 남을 수 없을 만큼 평론가들의 혹평에 시달려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콥스키란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서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게 하는 걸 보면, 그의 음악이 가진 생명력은 잡초만큼 강인하고 푸른 것이구나 싶기도 하다.  

음악은 강인하고 푸르지만, 음악가 스스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읽으면 읽으수록, 차이콥스키의 예민한 감수성과 극과 극으로 달리는 감정이 실제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예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로 느껴졌는데, 어린시절에 바닥까지 내려갔던 가정형편과 기숙학교에서의 생활, 동성애 성향의 발견(혹은 커밍아웃)과 어머니의 죽음을 연달아 경험했다는 것을 들으면서 그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해결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아마도 괜찮은 것으로 남에게 보이려고 했거나, 혹은 자기 자신마저 괜찮다고 넘기기 위해서 외려 더욱 차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거나, 동성애적 기질을 숨기지 않았다거나, 감정의 폭이 컸다는 것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그 사람을 남과 다른 - 정신병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거나, 천재성을 찾아봐야한다는 등의 - 평가를 내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란 본래 각자가 남과 같은 것이 없을 정도로 특이하고 유별나다고 생각해서 일 테다. 그래서 인지, 차이콥스키는 요즘 말하는 '여린' 남자가 아니었을까,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 혹은 집요함이 그를 작곡가로 성공하게 만들어주었을 거라고도 생각하게 되었고, 그가 보여준 음악 스타일들은 그 자신 스스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었나 결론 짓게도 되었다.  

그의 음악 보다도 먼저 그의 인생을 만나게 되어 왠지 서먹한 기분이 들지만, 이제는 좀 더 집중해서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든다. 이 책은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의 일곱번째 책으로 음악가의 삶과 음악을 정리하고 알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아무래도 음악가이다 보니 그의 삶과 음악을 그저 글로만 전하는 것이 아쉬운지 출판사는 큰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그 음악가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다. CD 2장에 담긴 곡들은 글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곡들로 음악가의 대표곡이라 볼 수 있다. 중간중간 안내되는 곡을 찾아 듣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끌어낼 순 없었지만, 입체적인 글읽기를 한다는 기분도 들고 이 기회가 아니면 듣지 못했을 것을 듣게 된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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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음, 이기웅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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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근 10년이 되어간다. 건축읽기에 붐이 일었던 2001년 즈음, 건축관련 책을 읽으면서 '물리'만 좀 잘했으면 건축에 도전할 수 있었을텐데 하고 쩝쩝거린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무지이거나 게으름이었다. 유명한 건축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물리에 대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아도, '열정'만 있다면 가능할 수 있었다. 며칠만 지체되면 굶는 것은 물론이요 한 데서 자야만 할 여비만을 가지고도 훌쩍 보고 싶은 것을 향해 떠날 수 있는 '열정'. 상식에서 벗어나더라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든 그려내어 결국은 자신의 색채를 갖게 되는 바로 그 '열정'이다. 이 '열정'은 안도 다다오가 가르쳐 주었다. 물론, 이 책으로.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은 안도 다다오의 자전적 건축 순례기'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전 세계의 유명한 건축물을 찾아다닌 이야기인데, 각 장 마다 작가는 각 건축물에 대해 알게된 배경과 건축물을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 또 그 건물을 보고 받은 느낌과 깨달은 것들을 담담히 적어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과 연결짓는다. 베트남, 미국, 프랑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자신의 찾아낸 작품을 보고는 그 건물이 태어난 배경을 떠올린다. 그리고 단 하나의 키워드를 찾아내고 일본과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거기에서 안도 다다오만의 독특한 건축이 시작했다. '빛의 교회' '물의 교회', 그리고 많은 주택들이.  

학자들이 줄 지어놓은 리스트 말고 각 개인이 자신의 취향에 맞춰 각자의 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만드는 자신에게나 접하는 우리에게나 새롭고 독특한 느낌을 주는 가보다. 안도 다다오만의 도시방황 건축물리스트도 독특한데, 자신의 여행여정을 간결히 정리해 나간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언급한 많은 건물들을 찾아보고 놓칠 뻔 했던 것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더욱 좋았던 건, 단순히 보기에 좋거나 예쁘거나 건축사적인 의의를 갖춘 것 말고도 처음엔 왜 대단한가 싶은 의문이 들어도 작품 안에 담긴 철학이나 집념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건축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리스트에 놓인 건물들을 한 데 모아보면 안도 다다오의 취향을 더욱 깊이 알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먼저 편집디자인에 관련해서다. 검정과 은색, 흰색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여백이나 글씨색에 변화를 주기위해 노력했는데, 은색을 사용했을 경우에는 책을 드는 각도에 따라서 눈이 부시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때문에 나는 편히 앉아서 책을 읽다가 아무 내용이 없는 페이지인 줄 알고 그냥 책장을 넘길 뻔한 경험이 생겼다.   

그리고는 사진자료에 대한 아쉬움인데, 안도 다다오가 언급한 건물들에 대한 사진 자료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자료가 적어서 각 장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물인가 싶어 검색을 해야만 했다. 물론, 건축을 공부하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이 올려놓은 포스팅 덕분에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각 장마다 관련 사진 자료를 첨부해주었다면, 책 읽기가 더욱 풍부해졌을 것 같다. 안도 다다오의 작품은 책의 중간과 마지막에 모아 보여주었는데, 그마저도 많은 양이 아니어서 그것 또한 검색을 통해 보충해야했고, 있는 사진들도 모노톤이라 조금 아쉬웠다. 책값이 좀 올라가겠지만, 사진 자료를 첨부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일본과 스위스 바젤에 가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도 다다오가 빛과 물 등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한 교회, 주택 등의 건축물들은 사진만으로는 만족하기가 어려울 만큼 매력적이었고, 각각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서 있고, 건물이나 건물이 담고 있는 것들이나 모두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들로 채워진 스위스 바젤이라는 도시는 읽는 내내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열정을 글을 통해 전해줄 수 있는 이 안도 다다오란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깊고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인지! 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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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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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제자가, 돈 안 되는 일, 공부하겠다고 나섰을 때, 선생님은 고미술을 공부해보라 하셨다. 제자는 알아보겠다 말은 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아 그냥 두었다. 고미술이란 말은 그런 기분이 들게 했다. '나는 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 옛그림이란 말을 듣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 진다. 할머니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라 생각하니, 지금 내가 보고 즐기는(어렵지만) 그림과 그리 멀지 않겠다 느껴진다. 그 생각에 힘을 얻어 책을 펼치니 딱 거기까지가 힘들 뿐이었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 가다 멈춘 적이 여러번이다. 작가의 손말이 어찌나 구성지고 부드러운지 그 말 뜻 모를 것 같은 단어들에 덜컹 거리지도 않고 휘적휘적 나아간다. 어찌 그러십니까. 이 귀한 그림들을 이리 쉬 넘겨도 되겠습니까, 여쭈고 싶어도 한 쪽 한 쪽 그림과 글이 번갈아 불러대어 정신 놓기 일쑤다. 하이고, 이제야 마지막 그림 이야기를 듣고 숨 한 번 들이 쉬었다. 아매도 책 겉 면에 '하루 한 점만 보아도, 하루 한 편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라 써놓은 것은 이 깊은 뜻 지닌 그림들이 아무리 재촉을 해대도 하나씩 음미하며 즐기라는 뜻인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선 그런 말이 나올 연유가 없지.  

중학생 시절, 동양화 전공하신 미술선생님 덕으로 사군자를 열심히 그려댄 적은 있지만 지금까지 옛 그림에 대해 집중하여 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술 수업을 들어도, 미술사에 관한 글을 살펴도 거의 전부가 서양미술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 어른들의 옛 그림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교양 좀 있어보겠다고 호암, 리움 미술관 등등 좇아다닐 적에 만난 그림들에 압도되기도 감동 받기도 했지만, 어떤 연유로 내 감정을 쥐고 흔드는 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순 점이 넘는 그림들을 이야기와 함께 주욱 보고 듣고 있으려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다시보아도 우리 선조들의 그림은 그동안 서양미술사에 치중되어 배운 미술의 표현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자화상을 그려도 집중하여 그리는 것이 다르니 같은 얼굴이 나올 수 없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다르니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물을 보는 눈은 또 얼마나 다른지 그리는 대상부터 다르고 각 대상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 다르니 그림이 전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처음 둘의 차이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캔버스와 한지(혹은 비단), 유화물감과 먹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만큼 표현재료에 차이가 있어서 그림에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보는 눈, 하는 생각부터가 달라 표현재료를 구하는 것이 달라진 게 아닌가 싶다. 왜 우리 어른들은 어쩜 이리도 생각하시는 게 그들과 영딴판이셨을까? 이 책 속에는 구도와 실물같다는 말 들은 있지만, 비율이나 절대미와 같은 단어는 들어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원근법을 도입한 그림도 생겨나지만 그 전부터 '원근법'이란 말만 안 썼을 뿐 깊이를 표현하는 화가들만의 방법들이 있었기도 했고, 깊이를 표현하여 그림 자체가 갖는 일루전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한 것이 더 많기도 한 것을 보면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다.  

이에 더해 그림에 써놓은 글들에게서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을 받았다. 그림에 담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풀어내고 싶은 화가들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졌다. 그리고 붓으로 써낸 글자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놓인 것처럼 썩 잘 어울려 그림 같기도 해보였다. 한 폭의 그림 안에 여러 겹의 이야기를 담고, 뜻을 심기 위해 꿰어맞추는 그 마음은 한편 감사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친구 사이에 전한 그림은 선물과 함께 재기가 되니 그 지혜를 배우기 위해 힘쓸 필요까지 느껴진다.

도판으로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점점 쓰려온다. 지금이라도 채비를 갖춰 미술관으로 떠나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 그림의 세계에 조금은 친한 척 발 들일 수 있을 거란 믿음에서다. 이 믿음은 개화기에 흐트러진 우리만의 방식과 그 마음이 좋다하여 지금까지 쌓은 것을 다 버리고 다시 쌓자는 것은 아니나, 돌아볼 것 돌아보면서 우리 속에서 피어나는 우리만의 소리들을 캐내고 다듬는 것은 꼭 가져야할 태도가 아니겠나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이 책 참, 여러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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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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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신간평가단 문화/예술 분야의 첫 책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이다. 말 그대로 그로테스크한 그림과 함께 크고 굵게 쓰인 '그로테스크'란 글자는 나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기 딱 좋았다. 이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책을 만든 분이 이런 표지를 만들어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다. 이거야 말로 책과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라고 봐야할.. 까? 나도 덩달아 그로테스크한 글쓰기를 해야하는 건 아닌지, 약간의 부담이 있지만 일단 시작하고 봐야겠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말은 시크하다, 엣지있다, 아방가르드 하다는 단어와 같이 어떤 것의 상태를 설명하는 단어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받는 느낌에 따라서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는 그런 단어 말이다. 어쩌면 이렇게 소비되고 말 수도 있었던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를 저자는 놓치지 않고 끄집어 냈다. 그리고 하나의 장르 혹은 사조로 만들어냈다. 이야, 이것이 바로 미학이 하는 일일까? 그렇다면 정말이지 더욱 더, 공부하고 싶어지는 학문이다.  

그로테스크, 이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단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저자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처음은 그 뜻과 쓰임을 밝히는 것인데, 이는 단어분해부터 시작한다. 이때, 뭣보담도 -esque'라는 어미가 만들어내는 깊이감이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를 단순히 이상하고 괴기스러운 것을 표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게 만들어준다는 게 참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깊이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은 더욱더 흥미로웠고 말이다.   

그 후부터는 보통의 미학 책들이 그렇듯, 시대와 문학장르별로 단어를 파악해 나간다. 특히 제목에 명시한 대로 미술과 문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문학 장르 안에는 연극이 포함되어 있어서 반가웠는데, 아무래도 내가 주로 배운 게 연극이라 그렇지 '미술과 문학'만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낯선 진행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쩌랴, 반가운 것은 반가운 것이고, 키치적인 감상이라 해도 조금이라도 아는 이야기를 들어야 이해도 빠른 것을.

미술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를 설명할 때 이용되는 보스나 브리헐 등의 작품은 실제로는 보지 못했지만, 도판을 통해서 접했고, 또 미술사를 훑어보기만 해도 한 번은 만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접근하는 데 낯선 것이 많지 않았지만, 문학은 전혀 다르다. 번역자도 '이 책은 미학책이지만 저자가 독일어문학 전공이 아니면 읽기 힘든 작품들을 거론하는 바람에 이번 기회에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할 만큼 문학분야에서 다루는 소설은 낯설기가 한량 없다. 저자는 해당 작품마다 줄거리와 인물 등에 관한 설명을 덧붙여가며 설명하고 있지만,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작품에 대해 친근하게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괴테, 카프카 정도는 알고 있고 몇 작품은 내용을 알고 있어서 그로테스크를 설명할 때에 잘 찾아갈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나머지 작품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데다가, 그로테스크를 전면에 들고 나온 작품이다보니 쉽게 이해되지도 않는 것들이어서 읽기 어려운 적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문학에서 연극을 다룬 것은, 이해하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는데, 내가 실제로 읽거나 깊이있는 분석을 하지 못한 작품이라 할 지라도, 어디서 들어봤다는 이유만으로 더 꼼꼼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셰익스피어', '몰리에르','뷔히너' 등의 작가 이름 뿐만 아니라 '꼬메디아 델아르떼'라는 프랑스의 즉흥극 중 하나의 장르를 설명할 때에는 친근감마저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문학이란 장르에서도 특히 소설과 연극을 주로 이용한 이유는 '극(劇)'이라는 구조 속에서 그로테스크를 더 쉽게 설정, 표현할 수 있고, 또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고해서 미술 분야에서 거론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저자는 미술의 범주도 상당히 넓혀놓았는데, 캐리커쳐와 풍자화, 신문이나 책 등에 들어가는 삽화까지 다양한 그림들을 소개하며 그로테스크를 설명해낸다. 저자가 현대 미술의 초현실주의로까지 범주를 확대해 그로테스크를 설명하는 지점에 이르면, 저자의 설명을 넘어서서 우리 주위에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그로테스크를 우리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된다. (이것마저 저자의 의도라면... 흠좀무?) 

 미학자의 흥미에서 시작된 이 연구는 미학이라는 틀 안에서 전개된 까닭인지 술술 읽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주제와 폭넓은 예시는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게 해준다. 지리한 장마가 그치고 찜통같은 폭염이 시작된다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공포물을 접하기 딱 알맞은 시기다. 피가 튀고 눈알이 돌아가는 공포영화, 소설과 함께 약간의 지적허영심을 채워주고, 또, 후에 '그로테스크'란 단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이 책을 중간중간 읽어주는 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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