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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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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어요. 자신이 얼마나 상사를 사랑하는지, 나의 충성도가 얼마나 높은지에 대해 성토하고 있었죠. 상사의 대답이요? 아마 이랬던 것 같아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네 마음, 숫자로 보여 봐.”


헐!


너무 시크하고 멋있어서 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어디에든 대사를 적어놓고 싶었어요. 말 한 마디에 인물의 성격이며 뭐며가 조금 더 확실하게 보였다고 해야겠지요. 네, 위의 대사를 쓸 수 있는 작가와 단박에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는 시청자. 그것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손에 쥘 수 있든 없든 상관없어요. 숫자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가치라는 것을 그렇게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 책에 대한 국내의 기대치는 마이클 샌델이 한국에 찾아온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대학 노천 극장에서 있었던 강연은 북적북적했다지요. 언론도 달려가서 샌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이제는 모른다고 말하면 왠지 부끄러운 <정의란 무엇인가?>도 읽지 않은 저한테는 그렇게 매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시큰둥했지요. 책을 읽지도 않고 판단하는 건 무리수지만, 간간히 들리는 이야기를 종합해봤을 때, 그리 좋은 책 같지는 않았어요. 뭐랄까, 우리를 극단적인 상황에 몰아넣고 선택하게 만들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고는 왜 그걸 선택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또 묻죠. 정의란 무엇인가?

전 그게 좀 싫었어요. 왜?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정의를 물어보는 거야? 정의라는 게 그렇게 특수한 상황에서만 발휘되어야 하는 건가? 우리의 일상에서도 정의는 살아있어야 하고 생명력있게 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네, 책을 안 읽었으니 무식한 소리한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죠. 그래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읽었어요. 


선입견이 이 정도니 곱지 않은 시선으로 시작한 건 사실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려고 할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생각해보라는 거겠지? 아이고, 삐딱선이고 뭐고 초반부터 충격에 빠졌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 있는 걸까요? 대신 줄 서달라고 돈을 내지 않나, 그걸 또 중개하는 회사가 있는데 심지어 굉장히 자랑스럽게 대놓고 장사를 합니다. 뭐라도 되는 양.  뒤로 갈수록 더 하죠. 해외토픽에서 봤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줄기차게 등장합니다. 설마했던 자리까지 돈이 차지하게 된 거죠. 광고는 버스 뒷자석에 머물지 않고 사람의 이마까지 진출했어요. 말해 뭐합니까, 사고 파는 데는 한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숨이 붙어있기만 한다면 뭐든 팔아도 상관없게 된 거에요.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는 다른 미국의 현실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도 머지 않았겠지, 어쩌면 나도 저 말도 안 되는 시장에 구매자로는 불가능할 것 같고 판매자?로 등장할 수는 있겠구나 싶었지요.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말하듯, 노랗게 보여서 노랗다고 하겠어요.

그런데요, 책을 읽는 내내 어딘가 불편했어요. 왜 그럴까, 그러던 중 매일같이 폭력과 살인, 사기, 갈등 등 자극적인 소재로 안방 시청률을 잡아두는 주부프로그램이 번뜩 떠올랐습니다. 출근 준비를 하며 보게 됐는데요. 하루는 누가 길을 가다 돌에 맞아 죽고, 또 하루는 강도를 만나서 죽고, 또 하루는 홧김에 죽이고 도막을 내어 버리고, 또 하루는 동네 친한 아줌마가 곗돈을 들고 도망을 갑니다. 매일매일 끝을 모르는 사건사고를 접하면서 내 하루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밤길은 당연히 무서워졌고, 일상에서도 번뜩번뜩 겁이 나더란 말입니다. 나라고 안전하지는 않다,는 생각. 결국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우리는 황색지를 경계합니다. 가십거리만 무성하게 만들어 놓고 우리가 정작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죠. 세상은 그런 사건사고들로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사건사고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환경, 분위기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사건사고 이후에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또 서로 감싸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우리의 시각을 편협하게 만드는 것들을 없애려고 노력하며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샌델은 굉장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마음만 먹으면 뭐든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이 오고 있고 어느 면에서는 이미 왔다고 단정지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경제에 도덕관념이 빠진 것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죠. 계속 이렇게 살 겁니까? 의분에 넘치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요.

하지만 팔면 안 될 것 같은 것을 팔아야만 하는 사람이 왜 있는지, 왜 생각지도 못한 것에 돈을 쓰고, 쓰려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회가 돈독이 올랐다는 건데, 돈독 오른 사회는 멈출 줄 모르고 이렇게 진행한다는 건데, 그걸 도덕적인 개념을 집어넣어 다시 생각해보자, 이게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이냐, 묻는 거 말고 돈독을 제거하는 근본적인 고민은 하지 않고 있다는 거지요.


남들보다 늦은 출발을 부끄러워 하라는 건 아닙니다. 

이미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서 이 돈독 오른 사회를 바꿔보려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살면서 애써 그 사람들을 무시해왔어요.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내 머리가 복잡해지니까요. 내가 잘 살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수많은 사회활동가, 헌신자들에게 샌델의 질문은 어떤 무게가 있을까요? 야, 이제라도 고민해줘서 고맙구나. 이렇게라도 생각해주어야 하나요?

오지랖이 넓어 미국 사회를 걱정하게 됩니다. 엘리트 집단이라는 학교의 강의 한 학기가 이런 기본적인 질문으로 끝나버린다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어디서 잘난 척이냐고 하시면 깨갱하겠습니다. 저도 책 한 권이나 되는 분량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어요. 

정의란 무엇인가. 수많은 대학의 교양 수업에서,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신문, 잡지 어디 할 것 없이 모두가 정의를 물었습니다. 쉽게 답 내릴 문제는 당연히 아니지요. 하지만 그 질문을 받고 고민했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습니다. 글쎄요, 굳이 찾아보자면, 스스로 교양 좀 생겼다고 자위하는 정도?  우리가 마이클 샌델의 책에 이렇게 환호한 이유는 아마도 <정의란 무엇인가>를 잇는 자극이 필요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노파심이겠으나, 샌델의 이 책을 읽고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고 해서 우리의 지적 자장이 넓어졌다고 생각한 채로 일상으로 돌아갈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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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우는 옛그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를 세우는 옛 그림 - 조선의 옛 그림에서 내 마음의 경영을 배우다
손태호 지음 / 아트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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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을 연장해가면서까지 이 책을 꼼꼼히 다 읽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책을 그리해온 것은 아니었어요. 시간이 없을 때는 급하게 읽어내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도판이 많아 상대적으로 글이 적었는데도 이 책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읽는 것은, 그림 속에 자리한 이야기를 만난다는 것은 급히 먹을 수록 체기만 늘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그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아온 것은 아닙니다. 어느날엔가는 전시회에서 이상범의 그림을 보고 한참을 서 있기도 했어요. 그림이 주는 매력이 서양화의 그것과는 또 달라서 낯설지만 친숙한 그 그림이 자꾸만 보고 싶었거든요. 깊이가 얕으니 - 아는 게 없으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림을 제대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림이란 것이 무지상태의 사람에게도 친절한 매력을 뿜을 줄 아는 것이라 그런지 그렇게 한참 서 있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고 보니, 그 그림의 품성은 곧 그림을 그린 사람에게서 옮는 것이더군요. 세상을 보는 눈의 깊이와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성정이 붓끝에 힘을 더해 그림을 완성시키더라구요. 이러니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림을 그린 사람과 알아볼 줄 아는 사람 사이에 연대가 피어날 수도 있는 거예요. 지금은 곁을 떠나고 없어서 깊은 속내를 알 수 없겠다 포기할 듯 해도, 이렇게 스윽하고 나타나 그림을 풀어주는 거죠. 신윤복과 윤두서, 김정호 등등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전해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련해지는데 말해주는 사람이 느꼈을 마음은 얼마나 진득했을까요. 먹의 농담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질 저자를 생각하니, 저도 조금 더 열심을 내어 그 그림을 찾아 다니고 싶었어요. 실제로 보고싶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휴가를 얻으면 저 아래 지방으로 내려가 책에서 소개한 그림을 만나러 가고 싶어졌습니다. 가까운 간송미술관은 5월이 끝나기 전에 꼭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고요.

이런 책을 읽으면 하게 되는 착각이 하나 있지요. 이제 다른 그림을 만나면, 먹의 농담을 보고 붓이 스친 흔적을 보며 나도 저자처럼 그림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 희망? 희망이 무참히 스러지더라도 보고 싶어요. 아는 거 하나 없지만, 나도 그 그림을 보며 내 발이 왜 떨어지질 않는지 생각해보고 싶거든요.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그림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추운 봄날의 따스한 햇살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맨들맨들한 책장을 넘기고는 있지만, 오래되어 누렇게 바란 화선지를 넘기는 것만 같았지요. 옛그림을 보는 기준 중에 으뜸이 ‘기운생동’이라 했던가요? 저는 표정없이 줄 맞춰 서 있는 글자 사이에서도 그 생동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옛그림에 관한 책을 읽는 걸 보며 회사 어르신은 오주석의 책을 꼭 읽어보라 말씀해주셨는데요, 나중에 저는 이 책을 추천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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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악의 탄생 - 왜 인간은 음악을 필요로 하게 되었나
크리스티안 레만 지음, 김희상 옮김 / 마고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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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탄생, 음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하는 질문을 가지고 호기롭게 책을 펼칩니다. 선사시대의 유물에서 악기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고학? 재미있겠다 싶은데, ‘~말이다’로 끝나는 문장이 자꾸만 걸립니다. 번역문인데도 부가어미가 등장하는 문장을 연달아 보는 건 생각보다 성가진 일이었습니다. 음악은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탄생을 짚어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선사시대의 악기 하나를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입니다. 이게 뭐지?


음악의 탄생,을 생각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악기를 다루기 전에 노래가 먼저 시작했을 것이다. 와 같은 추측이 조금씩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 우린 어느 순간 상상도 못할 선사시대 어디쯤에 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왜 노래를 할까요? 음이란 또 무엇일까요?

그리스 철학이 융성했던 그 시절, 수학을 연구하던 철학자들이 음악또한 철학처럼 대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음악의 음계도 수학적을 굉장한 비율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요. 우주의 음악이라는 이야기도 여기에서 나올 수 있고요. “아, 네 그렇군요.”하고 따라가기에는 저자의 필력이 날개를 달았는지 숨이 찹니다. 순간순간 이야기는 점프하고 어렵습니다.

뭘까, 
아, 
학부시절 역사학개론에 준하는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는 역사를 배워왔지요. 우리의 역사 뿐만 아니라, 유럽, 인도, 중국 등의 전 세계의 역사를 훑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역사’ 자체를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말이라지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아니, 역사책은 봤어도 역사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없었으니 그 말이 생경하고 신기했죠. 그 이후에야 서로다른 역사관, 역사가의 중요성에 대해 차근차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네, 우리는 이 책을 펼치면서 ‘음악학’으로 한 걸음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음악을 들어왔습니다.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바이엘과 체르니의 음악을 들었고, 학교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숱한 클래식을 접했습니다. 팝 계열의 음악은 더욱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TV를 틀기만 해도 쏟아져나오거든요. 핸드폰이니 mp3니 할 것없이 우리는 많은 음악을 보유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음악이 접하기 쉽다고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음악을 그저 듣는 데서 조금 나아가 각 장르 별로 역사를 살피고, 장르를 구분하고, 창작자를 알아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약간 모자랍니다. 조금 더 나아가 ‘음악’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과연 음악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음악은 어떤 관계인가
음악으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이것을 알기 위해, 철학 고고학 생물학 통계학 등등 다양한 학문의 연구방법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정리해보는 것이죠. 내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알아보니 내가 고민하는 문제의 답은 이러저러하다. 낯설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졌지만, 책의 중반을 지나서 음악학을 떠올리고 나서는 후반부에서는 조금 더 깊이 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고민거리가 생기기도 했어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공교육의 음악교육의 중요성과 더 이상 음악을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인간, 다시 말해, 노래를 연주하거나 부르지 않고 듣기만 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지요. 
음악을 예술로 여기는 것은 음악의 위대함을 알기 때문일텐데, 음악은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깊은 곳에서 그 위대함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음악학이라니,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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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세기말의보헤미안]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새롭게 만나는 아르누보의 정수
장우진 지음 / 미술문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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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무하, 무하에 대한 책도 몇 권이 나와 있고, 무하를 검색하면 그의 그림을 모아놓은 포스트도 여러개가 있을만큼 무하는 그렇게 감춰진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저는 무하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뭐, 제가 다른 작가라고 해서 다 알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림은 알면서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을 모르고 있기란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말장난같지만, 무하의 그림은 충분히 낯익고 친숙합니다. 아르누보라는 말이 어색하게 다가올지 몰라도 무하의 그림을 보면 어느 정도 아르누보가 무엇인지 정리해볼 수 있을만큼 무하는 아르누보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잘 모르고 있었을까요?


서두에서 저자가 한 때는 무하의 그림이 파리를 가득 메웠지만 지금은 잊혀졌다,고 말해줄 때 살짝 의심을 하기도 했지요. 반짝하고 사라진 많은 스타들처럼 생명력이 짧은 아티스트인가, 하고 말이에요. 흔히들 비교를 할 때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살아있는 동안에는 빛을 못 봤지만, 사후에 인정을 받아 오래도록 그 가치를 인정받는 명작이 있는 반면, 생애동안에는 유명했을지 모르나 죽음과 함께 잊혀진 작품이 있다고 말이죠. 후자가 아니려나, 어설프게 생각했단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역시나,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중간쯤 갈 수 있어요. 무하에 대해 전혀 모르고서는 무하를 폄하할 뻔 했지 뭡니까.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부분에 무하의 자녀들이 무하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관을 세우고 그림을 찾아온 일화를 읽으면서는 감동을 했지 뭐에요.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대의 유명한 아티스트가 자녀에게 인정받았던 예는 그리 흔하지 않단 말이지요. 자칫하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견딘 주인공이 천재적인 감각을 앞세워 세상을 풍미하고 돈과 명예를 즐기다가 말년에는 자녀들의 유산 다툼과 지인들의 배신으로 잊혀져버린 시대의 예술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무하는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서 끝내 정상에 올라 정직한 땀을 흘린, 예술가였단 말이지요. 


그것때문인지 책 가득 실린 무하의 그림이 더욱 진중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무하 그림 속 여인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지만, 천박하지 않고 단정할 수 있다. 세기 말, 혼란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조금씩 더 타락하기 위해 힘썼던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은, 그 힘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참, 저는 댄디라는 말의 시작이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난 지금부터는 ‘댄디’란 말을 잘 쓰지 않으려고 해요. 그다지 좋은 어감이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요. 세기 말-종말-을 기다리는 불안을 시크함으로 덮으려했던 수많은 남자를 떠올리게 되는 군요. 


두서없지만, 이것하나는 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무하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러스트 작가가 되어있을까요? 이미지 프로그램이 다 뭡니까, 그저 손 하나로 세련되고 화려한 도상과 글씨체를 그려냈으니 말이에요. 게다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인문학을 바탕으로 서 있을 때 어떤 깊이가 생길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본이기도 하지요. 체코를 향한 애국심과 철학을 바탕으로 흘러나오는 그림의 아우라는 도판을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지요. 음, 네. 까라바죠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이탈리아에 가서 실제로 저 그림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두번째로 무하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체코 어딘가에서 묵묵히 서 있을 <슬라스 서사시>를 보고 싶습니다. 


아, 당대를 주름잡은 아티스트로 덕망있는 선배 화가로, 좋은 남편, 아버지로, 애국자로 살았던 무하는 정말이지, 멋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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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디자인 산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런던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2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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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수업시간이었어요. 어떤 산업디자인학부 학생이 ‘서울’하면 떠오르는 색, 글씨체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요. 있으면 좋겠다 생각만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울 남산체와 한강체가 나왔고, 몇 개의 색을 지정하여 이름을 붙이기도 했지요. 놀라운 발전이라고 생각했어요. 인사동길을 리디자인을 할 때 품었던 서울 디자인에 대한 기대가 청계천으로 무너지고, 남대문 재건을 위해 차벽을 둘러 이미지를 덧씌웠을 때 뭔가 있으려나 하고 품었던 기대가 목장과 목재에 대해 삐걱대는 소식을 듣고 실망했던 적도 있었거든요. 아,네, 남대문 재건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에게 뭐라고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저 그 분들이 흘린 땀에 대한 댓가마저 무시하려는 윗사람들에게 화가 났지요. 

겉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게 그게 공공디자인이냐? 하고 따지고 싶었단 말이지요.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만들기 쉽고 그저 예쁘게 슥슥 철거하고 뽑아내고 시멘트로 발라버리고 예쁘게 다듬는 그런 거 말고, 서로 오래도록 건강하게 아름다울 수 있게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니냐, 생각했거든요. 


이 고민을 어느 정도 증폭 및 해결해준 책을 만났습니다. 디자인을 공부하고 디자인을 하고 디자인에 관한 글을 쓰던 김지원의 런던 디자인 이야기를 묶어낸 책이 바로 이 <런던 디자인 산책>입니다. 영국을 무대로 하는 소소한 디자인 소품부터 블링블링한 시각디자인 요소들은 물론이고, 디자인을 대하는 런던의 분위기와 런던 디자이너의 삶, 런더너의 디자인에 관한 인식에 대해 슬슬 써나간 책이에요. 


뭐랄까요, 잡지를 만들다보니, 이미지와 텍스트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대해 고민하게 되어서 일까요? 편집 디자인이 아쉬울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줄간격을 아쉽게 생각한 적도 있었고, 텍스트 배치가 안타까운 적도 있었죠. 본문과 사진 설명의 구분이 불분명한 적도 있어서 주욱 읽어나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늘 정답을 가지고 사는 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요.


그렇지만, 이 책이 가진 진심, 그 진정성은 여전히 빛이 납니다. 런던디자인에 대한 깊은 애정이 뚝뚝 느껴졌으니 말이에요. 제가 편집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편집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저자의 디자인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우리가 놓칠 수 있는 런던의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세밀하게 잡아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책을 관통하는 디자인의 맥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저자만의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겠지요.


무엇보다도 책을 내기 위해 단시간에 주루룩 찍어낸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정말 기록하고 싶어서 찍어낸 사진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우표에 적은 글씨만으로 셰익스피어와 각 작품의 특색을 고스란히 담아넣은 캘리그라피, 짜투리 천으로 만든 새 모형이 기억에 남아요. 기회가 되면 구입하고 싶을 정도였지요. 

또, 오픈 스튜디오와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런던 올림픽을 맞아 런던으로 떠나고 싶으신 분들 계신가요? 저야 여권도 없는 1인분인생이라 꿈도 못 꾸지만, 런던에 가시거든 꼭 둘러보세요. 런던디자인페스티벌은 여기저기 작은곳에서도 전시를 한다고 하니 꼭꼭 챙겨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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