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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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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일입니다. 여의도에서 있었던 칼부림 사건의 피의자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잘못했죠.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그 사건 덕분에 저는 또다시 밤길을 더욱 무서워하게 되었고, 이제는 낮에도 조심히 다녀야겠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저도, 조금 달랐습니다. 동정표가 있었어요. 칼을 든 그 상황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언론의 역할도 한몫했습니다. 의정부에서 있었던 사건과 엮어서 지나친 양극화가 일으킨 범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끝에 몰린 사람의 분노표출이라는 거지요. 삶의 끝, 그래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르포르타주,라는 장르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르포라고 줄여 말했던 TV방송프로그램도 찾아보기 어려워졌잖아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르뽀라고 발음하던 게 신기해서 그런 장르도 있구나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문이겠지요. 어느 작가의 신간이 르포르타주라고 나온 것 자체가 이슈가 된 걸 보면.

 

솔직히, 전 그 신간을 읽지 않았어요. 해고노동자가 직접 썼다면, 공활로 들어갔던 사람이 쓴 글이었다면 찾아 읽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글쎄요,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그것이 르포르타주일까, 그것도 르포르타주라고 말해도 될까, 왜 그 책을 굳이 르포르타주라고 설명해야만 할까? 의문이 먼저 들었거든요.

 

<노동의 배신>을 읽으며 저는 이것이 르포르타주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솔직한 글이 더욱 빛을 발하는 장르라고 느꼈지요.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미국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미국드라마에서 종종 나타나는 작가라는 직업은 안 팔리면 무지하게 배고프지만 잘 팔리면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살 수 있다는 걸 알죠. 어느 작가는 단어 당 돈을 받기도 했던 걸로 기억하니까요. 에런라이크의 글을 우리나라에까지 번역되어 소개할 만큼의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 같은 데 신경쓰지 않아도 먹고살기 문제가 없는 사람이겠지요. 이 사람이 잡지 편집장과 그런 얘기를 했다지 뭡니까. 우리나라 상황으로 치면 그런 거에요. “정말 최저임금만 가지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누가 그랬다죠. 평금 임금과 평균 월세, 생활비 등이 통계로 나와있으니까 셈 해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요. 에런라이크는 아주 시-크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책상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논문으로 나오겠지. 하지만 나는 궁금해, 언뜻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을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할 수 있다면, 뭔가 있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돈 아끼며 사는 법 같은 거.

 

그래서 출동한 겁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간 거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일을 하며 미래에 대한 꿈을 꿀수도 없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게, 슬프지만 불편한 진실입니다. 웬 스포냐구요? 책 읽을 맛 떨어지게 만들었다고요? 왜 이러십니까, 아마추어같이. 이 책이 말하는 건 결론이 아닙니다. 뻔하잖아요. 최저임금으로 여러분은 얼마나 잘 살 수 있으실 것 같으세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니까요. 월급을 탔는데, 지난 달 카드값이 너무 많이 나와서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카드도 못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라고요. 네, 솔직히 저도 어렵다어렵다 입에 달고 살지만, 빚도 있지만, 이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도 있고요, 책도 사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런라이크가 들어간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어요.

 

미국드라마를 봐서일까요. 그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느 의사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백인인데 트레일러에서 살았다구요. 그래서 악착같이 공부해서 벗어났다고 아직도 엄마는 거기 산다고 말하더군요. 그걸 ‘트레일러트레시’라고 말하는 건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에런라이크가 그래요. 시급 7달러만으로는 트레일러트레시도 될 수 없다고. 그 말이 저에겐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막장인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데, 최저시급으로는 막장흉내도 낼 수 없다니요. 

 

읽으면 읽을 수록 처참해졌습니다. 에런라이크가 말하는 현실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 그랬고, 나도 결국은 알게모르게 그 사회의 병폐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더욱 화가났습니다. 에런라이크가 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을 알리는 것뿐이었어요. 우리는 이래저래 무능하고 무력합니다.

 

책 날개에 준비중인 책 소개가 보이더군요. <희망의 배신>이었습니다. 에런라이크가 이번에는 화이트칼라노동자들의 삶으로 들어갔더군요. 그 책이 더욱 기다려지는 건, <노동의 배신>이 준 충격때문일 거에요. 당장 아무 것도 할 순 없지만, 그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도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배신감은 한 사람을 파멸시키지요. 어떤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칼을 선택합니다. 이 배신감을 나눠가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집단이, 한 사회가 배신감을 공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에런라이크는 글로 현실을 폭로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에런라이크가 심은 조금의 씨앗이 각자의 자리에서 피어나길 기대해봅니다. 미국 사람들이 월가에 모였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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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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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라고 말하면 정말 귀신의 일족인 것 같으니까, 뱀파이어로 말하는 게 왠지 더 나은 기분이 드는 그런 종족(!)이 있죠. 나라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역사와 성향, 성격을 가졌지만, 어쩌거나 마력과 같은 매력이 넘치고, 별 일 없으면 영원히 살고, 늙거나 병들지도 않아서 어찌보면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게 아닌가 싶은 무리가 있는데, 이들이 바로 뱀파이어입니다. 완벽해보이는 사람일수록 완벽하지 않을 때 폭발적인 매력이 상승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런 이유로 뱀파이어는 치명적인 단점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어떤 지역의 뱀파이어는 별로 영향을 안 받긴 하지만, 햇빛에 타죽는 경우도 있고, 흡혈을 하지 않으면 시들시들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영생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경우도 있어요.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시간에 따라 죽는데, 뱀파이어는 그러지 않으니까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 거거든요. 아이고, 써보니 이렇게 낭만적인 이별이 또 어디있겠나 싶습니다. 이별은 이별인데 사랑은 영원한 거잖아요.

 

문학작품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캐릭터를 가만 두고 볼 수 없겠죠. 같은 인간이라도 극적, 예술적 성과를 위해 극단으로 몰아부치는 판에 인간과 닿아있는 뱀파이어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나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살펴봅니다. 뱀파이어 캐릭터는 어떻게 문학작품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시대를 지나면서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고, 또 시대에 따라 어떻게 옵션을 바꿔가며 살아남았는지 등등.

 

저자는 작품을 중심으로 뱀파이어를 설명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뱀파이어를 다루는 작품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고,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캐릭터와 전개를 보이고 있어서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에겐 약간 지루한 작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건 줄글에서 강조점없이 뱀파이어의 성격이나 변화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분명 작품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뱀파이어에게 흡혈을 당하면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이 처음 시작했다’ 정도의 설명이 나오는 거죠. 생각없이 읽다가는 그대로 흘려버리겠다 싶은 부분들이어서 정독의 욕심이 없다면, 일렬로 서 있는 뱀파이어 작품 목록 해제를 읽은 기분만 들고 끝날 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재미있었던 건, 뱀파이어라는 캐릭터가 어느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서 갑자기 톡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거였죠. 유럽을 관통했던 수많은 전염병 때문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여럿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갖게 된 두려움.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것이란 공포와 식육과 식육을 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그 형체를 갖게 된 것이죠. 파묻은 시체를 파내어 뜯어먹는 구울이란 캐릭터도 사람의 피를 마셔 생기를 띄는 뱀파이어도 그렇게 조금씩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해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거에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유럽인들의 상상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뱀파이어를 통해 유럽인이 가진 두려움과 잔인함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는 거죠. 뭐랄까요. 처녀귀신이나 박수무당처럼 우리가 전설의 고향 류의 드라마를 통해 만나는 한국형 귀신과 괴물(?)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한번 태어난 캐릭터는 소멸하지 않고 세련미를 갖추어갈 뿐 아니라 특화됩니다. 드라큘라 백작이 마늘과 십자가에 무력해진 것과는 달리 최근에 등장한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 종족은 완벽에 가깝지요. 렛미인에 등장하는 북유럽형 뱀파이어는 또 어땠나요. 초대받지 않으면 남의 집에 들어갈 수 없지만, 초대를 받은 후에는 모든 게 가능해지죠. 피는 필요하지만 자신이 피를 보는 수고는 덜합니다. 빛을 피해 잠을 청하지만,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여럿을 죽여버릴 정도의 괴력을 행사할 수 있죠.

이런 뱀파이어 캐릭터는 이제 그 뱀파이어 역사가 전무한 한국까지 진출합니다. 박찬욱의 <박쥐>가 그렇죠. 성직자와 뱀파이어의 조합이 주는 긴장이 송강호와 겹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뱀파이어가 등장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더욱 앞으로 나타날 뱀파이어를 상상하게 됩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지도 모를 어떤 뱀파이어, 인간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인간이란 이름으로 해낼 지도 모를 또 어떤 뱀파이어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죠. 뱀파이어의 영생만큼이나 뱀파이어의 이야기 또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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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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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고쳐 읽고, 쓰고, 또 읽자.

 

자칭 오독의 여왕이라 말하고 다닙니다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여왕이란 칭호는 꽤 거슬리네요. 오독의... 무엇이라고 해야할까요? 어쩌거나 저는 책을 제 멋대로 읽는 데 선수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자주 책을 오해하고, 책과는 상관없이 토라지거나 책이 말하고자 하는 큰 줄기와는 상관없이 지엽적인 어느 부분에서 혼자 크게 감동받고 가슴 벅차할 때도 많습니다.

난독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다른 데 있었군요.

 

책을 읽는 것이 주는 무게가 상당하고, 책(텍스트)을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 무의식의 검열이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물론, 이 것도 서문에서 다룬 것이니 책의 전체적인 주제와는 조금 다를 수 있겠습니다. 네, 저 같은 사람도 하나 정도 있어줘야, 책을 완벽히 이해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텍스트가 주는 혁명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데, 읽어서는 혁명이 일어나는 군요. 그동안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던 제 속의 놀라운 의식의 변화를 더듬어 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어른들이 싫어하는 곳엔 가지 않고, 싫어하는 일은 찾아서 하지 않던, 재미라고는 TV보고 영화보고 책 읽는 게 다 였던 학생시절의 저와 지금의 저는 정말이지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거짓은 아닐 정도로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하니, 네, 그래요. 책이 있었습니다.

 

들입다 외우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던 때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을 쓴 사람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애쓰던 때가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먼저 책을 읽어온 선배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더 깊이 책을 읽고 책과 씨름하는 법을 배운 게 아닌가 해요.

 

혁명사라고 해야겠지요. 사사키 아타루가 자분자분하게 설명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문장을 따라 사사키 아타루의 세계로 들어가보니, 유혈이 낭자한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변혁적인 혁명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새롭다는 생각을 하며 그저 따라갔을 뿐인데, 이제는 저더러 저만의 혁명을 생각하라고 등 떠밉니다.

 

큰 학문을 가르친다는 대학조차 직업준비학교로 변신하여 학생들에게 외우고 써먹으라 가르치는 요즘. 하루에도 몇 권씩 쏟아져나오는 모든 책을 읽어버리겠다는 불가능한 다짐은 접어두고 한 권의 책을 진득하게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펼쳐보길 바랍니다. 뭔소리지 모르겠다, 졸리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도 오히려 좋은 적수를 만났다 생각하며 한 문장 한 문장 눈으로 밟아보는 거예요. 거칠다 싶으면 자리에 앉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좋겠지요. 조금씩 자라가는 우리 안의 혁명의 씨앗이 언젠가는 우리를 변화시킬 겁니다.

글은 힘이 있습니다.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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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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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역사학자이신 어느 교수님께 어느 학생이 물었다. 언제 그 일을 하기로 마음 다짐하셨느냐고. 학부에서 영미문학을 공부하셨다고 알고 있는 우리에겐 영미문학과 미국종교학의 거리감이 상당했으니까, 여쭤볼 만도 했겠다. 그때 아마도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는데, 그 후로는 돌아보지 말고 주욱 걸어나가는 거라고. 잘은 모르지만, 고개가 끄덕여진 건, 교수님의 삶의 궤적을 어렴풋하게나마 주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만해도 반 등수로 전공을 정하던 그 시대에 공부를 잘 한다는 이유로 영문학과에 원서를 넣으면서 아주 오랜 후에 종교사를 공부하고 또 가르칠 거라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 럴 리 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지, 한 해 전만해도 지금 이 사무실에 앉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다. 지금 여기에서 뒤를 돌아보면 어딘가를 향해 내가 걷고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는 것이다. 어머나, 뭔소리야? ‘어쩌다 사회학자가 된’ 피터 버거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명확/알쏭달쏭 해질 지도 모르지.

 

이렇게 피터 버거를 알게 되다

피터 버거. 사회학에 대해 이름은 들어봤지만, 무엇을 하는 전공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알게된 건 무지하게 많다. 사회학이 어떤 건지 구경도 했고, 종교사회학이란 분야가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기독’이라고 쓰고 개독이라 읽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교회와 삶은 (신앙의 문제로 파고 들면 삼천포로 빠지게 되니 각설하고) 잘 나눠 놓는 게 마음이 가벼운 법인데, 종교사회학이란 걸 전공해버리고 나면, 일도 삶도 뭣도 다 종교라는 틀 안에서 애매모호한 채로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걸 구경했다고나 할까? 그런 일을 하다보면 개인의 종교적 색채가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피터 버거도 그랬으니까.

내 머릿속에서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책의 다양한 부분에서 조금씩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뭔가 부끄럽게, 혹은 민망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 건 없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자신이 공부해 온 흔적을 살피는 것도, 그때그때 했던 고민들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아주 사소할 수 있는 진리를 알았달까?

 

그러니까,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조언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는 것 자체가 뭐 그리 중요한가에 대해 고민했다. 행동을 하기 위한 동인으로 아는 것이 존재해야지 단순히 알고만 있으면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게 아니냐고 따져묻고 싶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래,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지침은 각자가 알아서 자신에 맞게 움직이면 되는 거다.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알게 된 것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남에게 어떤 걸 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는 걸 계속해서 깨닫는다. 피터 버거가 시종일관 꺼내는 말은, ‘알았다,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 나니 궁금해졌고, 사람을 모아 이야기를 나눴고, 흥미로운 주제를 찾았고, 또 알기 위해 연구했다. 연구하다보니 새롭게 알았고, 알게 된 것을 써서 나누었더니, 무엇인가가 변했다.

워낙에 사회학에 대해 아는 게 없다보니,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관심은 생겼다. 베버의 저작과 방법론도 궁금해졌지만, 뭣보다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피터 버거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이렇게 아는 것이 책을 타고 전해질 수만 있다면, 아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게 되겠지?

 

정해지고 나면 정리가 되는, 구슬이 꿰어지는 놀라운 인생사.

앞서 언급한, 역사학자이신 선생님의 말씀 중에, 현재가 과거를 결정한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와 같은 문장이 있었는데, 정확한 건 후자인 것 같다. 어쩌거나 그렇다. 피터 버거가 마지막에 기차장난감 얘기를 꺼낸 걸 봐도.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면 재미없어지니까, 어쩌다로 시작했지만 알고보니 난 떡잎부터 그랬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효과를 노렸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나도 (어쩌면 그대에게도) 마찬가지다. 배우가 되겠다고 대학로를 배회하던 그 시절에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 행사로 짤막한 연극을 올리겠다고 밤마다 남아서 연습을 하던 어린 내 모습을 자주 떠올렸지만, 지금은 뜬금없이 내 눈을 바라보며 “너같은 눈을 가진 애들은 문학을 해야 해.”라고 말하던 학원 국어 강사의 말이 더 자주 생각나니까. 하긴 뭐, 쿠데타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개인적인 얘기 더 해서 뭐하나. 연말이 되면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겠지. 현재가 과거를 어떻게 정리해버릴 지를!

제목이 주는 무게감이 상당해서 책을 덮는 내내 ‘어쩌다’를 생각했지만, 정작 피터 버거는 어쩌다라는 말을 다양한 곳에 쓰지 않는다. 단 하나,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사회를 알아야겠어서 선택한 것이 사회학이라는 그 사실 하나에만 쓴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에 군 징집과 이어지는 생계유지수단때문에 사회학자의 길에 더욱 깊이 들어가긴 하지만, 확실한 건 원치 않았는데 자꾸 빨려들어간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즐겼고, 자발적으로 걸어갔다. 그 점이 너무나 좋았다.

 

“난 다른 걸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연기를 한다.”고 말했던 선배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린 마음에 나는 이것저것 모든 걸 할 수 있지만, 내가 좋아서 연기를 한다고 말하는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것이 얼마나 자부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는지를. 피터 버거가 선택한 ‘어쩌다’라는 말을 자꾸 되뇌이게 되는 것은 그 단어가 가진 1차적인 의미 때문은 아니다. 심드렁하게 꺼냈지만, 전혀 심드렁하지 않은 그의 진심이 잘 포개져있기 떄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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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2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저도 어쩌다가 삶의 중요한 키워드라고 봐요. 어쩌면 제목의 번역을 무지 잘한것 같이도 하구요. 철수 아저씨나 피터버거 같은 대단한 사람도 그렇겠지만 저도 그렇고 참 어쩌다 신간 평가단도 하게되어 다양한 분들 생각도 공유하게 되고 감사하죠.

미쓰지 2012-08-07 11: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글을 확인했습니다. 입에서 쉽게 도는 제목은 아니지만, 한번 보면 자꾸 생각나는 제목이라 정말 잘 지었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신간평가단을 통해 편식하던 습관이 조금 바뀌게 되고,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어 저도 좋더라구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끝내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랄까요?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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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고를 보고 여러분이 해서는 안 되는 말씀은, 저도 김ㅇㅇ 비타민 주세요, 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산다. 누구 머리, 누구 옷, 누구 가방. 멘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김누구를 존경하는 내 조카는 김누구가 되는 게 꿈이다. 어쩌면 김누구의 직업을 꿈꾸는 지도 모른다. 김누구의 인기를 원하는 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나 이 책은 김수영을 읽고 김수영이 되어야 겠다, 라거나 이 책을 읽고 나도 강신주같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강조한다. ‘김수영처럼’, ‘강신주처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에 똑하고 떨어진 나, 바로 나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책을 만났다.

 

지극히 편파적인

문학적 감수성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 이 책은 철학자의 언어로 가득하다. 철학이란 과연 이런 것인가. 사람의 중심을 더듬거리며 찾아내고는 기어코 중심을 잡고 흔들어 댄다. 철학과 문학의 접점이 이런 것이라면 나도 해내고 싶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룬 글을 써내고 싶다. 김수영이 시인이고 강신주는 철학자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장르라면 장르가 주는 한계란 처음부터 없는 건지도 모른다. 글이 아니어도 괜찮다. 다만 조금도 꾸미지 않은 내 모습 그대로, 나답게 살아내는 게 중요하다.

김수영의 삶, 김수영의 글. 모든 곳에서 강신주의 팬심이 느껴진다. 이 때문에 우리는 김수영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다. 팬미팅을 마치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표현을 궁리한 느낌이 강한 이 글은, 읽는 나마저도 김수영의 깊은 데를 보는 기분이다. 자유를 향한 열망, 역사 속에서 개인이 더욱 개인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든 사건들, 시인의 감성이 철학자의 언어로 변하여 나에게 닿는다. 아, 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읽는 이에게 복잡한 질문 하나 던지고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깊게 파고들어 갈 수 있게 안내하는 것, 저자의 깊은 속내이기에 문장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색채가 분명할수록 단독성을 지닌다. 그런 문장을 따라 멈추지도 못하고 따라 들어가면 어느새 저자와 함께 막장에 서 있는 기분을 주어 함께 고민하게 한다. 진한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곡괭이질을 하고 나면 어느새 새로운 깨달음이 하나 남는 것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김수영의 시는 강신주의 글을 이끌어냈다. 이것이 나에게는 나만의 글을 쓰는 문제로 이어졌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만의 음악, 회화, 삶에 대한 욕망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자유에 대한 열망은, 단독자로 서 있고 싶은 욕망은 생득적인 것이나 살아가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억압되는 것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지칠 때마다 채찍을 맞는 팽이 말고 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너도 너만의 춤을 추어라.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그 누구도 닮지 않는 그런 자기만의 춤.

또한 내가 싸워야하는, 그림자 없는 적을 떠올리게 되었다. 뿌연 유리창같은 적이다. 우리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는 적이다.

대입, 취업, 결혼, 육아에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사람들과 자신을 혹사하지 않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죄책감에 빠뜨리고야 마는 세상 때문인지, 지쳐서인지 나는 한참동안 흐릿하게 사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쿨하고 시크한 게 자랑이라도 되는 듯, 치열하지 않은 것이 좀 더 어른다운 것인냥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치열해야 한다, 치열하되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할 지 알아야만 한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 돌기 위해 치열해야 한다. 목적 없는 치열은 위험하다, 방심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요구하는 무엇에 나의 치열함을 쏟게 되어버린다. 지금 이 사회는 우리의 목적을 하찮은 것으로 폄하하고 표피적인 것에 맹목적으로 달려들라고 강요한다. 여기에서 벗어나야겠다. 곧은 소리가 곧은 소리를 부르듯, 강신주의 책이 엇길로 걸어가는 나의 뒷채를 잡고 흔든다. 그래, 나를 건너 곧은 소리가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으랴, 그러니 나도 김일성 만세. 김일성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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