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스로부터 보듬기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아가씨를 만났다. 이십대 여성 특유의 새치름함과 쑥스러움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엘리베이터 안 그 짧은 시간 동안 말동무가 될 정도로 털털하고 밝은 아가씨였다. 오늘도 문이 열리자마자 예의 환하고 씩씩한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데이트 하러 가나 봐요.’라고 화답을 했더니 그녀의 반응이 이랬다. “아니에요. 이 몸에, 이 얼굴에 누가 데이트 신청이나 하겠어요? 살 빼고 더 예뻐진 다음에 생각해 볼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녀 스스로를 비하하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충분히 예뻤으며, 더 이상 뺄 살 같은 건 없었다. 참 밝고 유쾌한 아가씨다, 라고는 느꼈어도, 한 번도 그녀가 못생겼다거나 뚱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충격을 먹은 것은 그 아가씨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타자의 생각은 나와 같지 않다. 특히 자신만이 생각하는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타자는 나와 생각이 같을 리 없다. 타자는 내가 집착하는 나의 약점 같은 데 관심이 없다. 내 약점은 내 필터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지 타자에게 건너가면 시쳇말로 ‘의미 없다’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타자는 나만큼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누군가의 비난 서린 한 마디가 평소 자신이 생각한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모든 타인이 나를 ‘못생겼다’고 생각하거나 ‘뚱뚱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십 퍼센트의 타자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타자도 그럴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오해이다. 타자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에 대해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그러니 부디 스스로부터 긍정하도록. 나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타자의 시선도 곡해하게 된다. 호의적인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마음껏 스스로를 옭아매고 불인정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스스로 버리는 사람부터 버린다.

 

 

 

 

 

2.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이 어제오늘 검색어 상위에 오르내린다. 모 연극배우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 관련으로 단식 투쟁 중인 유족 김영오씨에 대한 악담을 퍼부었다. “그냥 단식하다 죽어라. 그게 네가 딸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전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말을 자신의 SNS에 남겼다. 배려 없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이 충격적 발언의 조회 수 만큼 사람들은 일제히 ‘프로파간다’라는 뜻을 검색을 한 모양이다.

 

 

프로파간다는 원래 ‘선전, 홍보’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특정한 원칙이나 행위를 전파하기 위해 세우는 체계화된 계획이나 그 운동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동’이라는 부정의 뉘앙스가 남아있는 말이 되어버렸다. 선전이라는 중립의 의미가, 새빨간 거짓말인 선동의 의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때였다. 연합국이 영미 대중들을 향해 이 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후 본뜻은 사라지고 사악한 의미만 남았다.

 

 

선전은 막강하고 대중은 어리석다. 아무리 현명한 민중도 보이지 않는 정부나 거대 손이 움직이는 선전 전략을 앞서기는 어렵다. 대중을 위한 선전에 잠식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일수록 드러나지 않은 선전 기획팀에 휘둘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적 코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전문 선동가들 앞에서 우리는 내남없이 우중(愚衆)이 되기 쉽다. 전형적인 선동적 프로파간다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파간다의 원래 뜻만 되살릴 수 있다면 그것의 효용도 나쁘지는 않다. ‘선동’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걷어낸 자리에 정치, 경제,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불러와 다채롭고 창의적인 화법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전이나 홍보라는 말 자체가 어느 특정 집단, 특히 덜 가진 자보다는 더 가진 자,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의 논리와 맞물린다. “거짓도 천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고 했던 괴벨스의 말도 결국 힘이 전제되었을 때나 통용된다.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몰리는 약자에게는 선동의 입김을 느끼기 전에 연민의 입술이 먼저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

 

 

 

 

 

3. 경원하면서 사랑하기의 고통

 

작가 곁에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항상 많았지만 그들을 좋아한 적은 없다.” 이런 말로 대변되는 작가적 투망에 잡힐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머싯 몸의 저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근원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러 좋아하려고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다, 라고.

 

 

서머싯 몸은 인간 내장에 돋은, 까칠한 돌기까지도 잡아낼 정도로 통찰 깊은 작가이다. 인간 관찰에 대한 그의 문장들을 읽다 보면 나쁜 짓하다 들킨 아이처럼 뜨끔해지곤 한다.

 

 

그가 작가로서 우뚝한 순간은 음악으로 치자면 감성 발린 발라드를 부를 때가 아니라 격정적인 몸짓까지 노래하는 락 음악을 보여줄 때이다.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라버린『인간의 굴레에서』에서를 살핀다. 인간을 노래하는 그의 발성법은 뼛구멍에 난 터럭까지 감지하고 표현하는 것을 택한다.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심을 변론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 “타인에게 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당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다.”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내 욕망과 같은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라는 것, 그것이 곧 자비라는 것, 저마다 추구하는 삶은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의 쾌락’이라는 것. 맨 살에 바른 파스가 뼛속을 관통할 때의 시원한 쾌감 같은 이 기분. 다만 그 통찰이 시원함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마디마디 서늘한 후통증을 동반한다는 것. 매운 맛을 두려워하면서도 매운 떡볶이를 찾는 소비자처럼 그의 문장들에 중독된다.

 

 

인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서머싯 몸은 친구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에두르지 않고 직설 화법을 구사하는 그가 미덥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토록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전우주적 이해의 접선을 시도하는 그의 말 안에서 우리는 따끔거리고, 찢어지며, 화끈거린다. 경멸하고 경원시하면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의 고통, 그것에 대해 그보다 더 잘 말하는 작가도 없다.

 

 

 

 

 

 

 

 

 

 

 

 

 

 

 

 

 

 

4. 완벽주의는 완벽하지 않아

 

조상들이 말했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고. 흔히 완벽주의자들이라고 자청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뭐든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는다고. 정말 그럴까. 그런 사람들은 끝내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잘 돼 가냐고 물으면 그들 대답은 한결같이 꼿꼿하다. 여전히 ‘완벽하게 준비하는 중’이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는 일에 열을 내고 있을 뿐이다.

 

 

위의 예는 스스로를 두고 한 말이다. 절대 완벽주의자가 못 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위로한다. 실천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가 둘러대는 핑계가 바로 ‘완벽주의론’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곧장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혹시 불어난 몸피가 살이 아니라 붓기일 수도 있으니 병원부터 가야할 핑계가 남았고, 쓰다 만 단편을 완결 짓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 문체가 원하는 만큼 완성도가 높지 못하니 될 때까지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준비해야할 이유가 기다리고 있다. 진실로 진실이 아닌 핑계를 갖다 붙인다. 게을러서 실행 못하는 것을 마치 완벽주의자여서 그런 것처럼 포장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미흡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이 반이다’ 라는 속담이 서두의 두 속담보다 훨씬 실용적이다. 아는 길은 곧장 가면 되고, 얕은 내는 가벼이 건너도 무관하다. 아는 길에 괜히 허비할 시간은 행동으로 옮기는 데 쓰고, 얕은 내를 건너는데 소비한 과도한 에너지는 심오한 창의력에 할당하면 된다. 이 세상에 완벽함은 없다. 완벽을 추구한다고 해서 완벽해지지도 않는다. 미완이고 어설프지만 일단 시도하는 게 완벽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백만 배는 낫다.

 

 

모든 완성은 불완전에서 출발한다. 완벽하게 준비한 사람이 끝낸 일보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도한 사람이 끝낸 일이 더 많다. 완벽한 사람은 시작한 일 자체가 드무니 성공할 확률도 낮을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연함은 완벽에 이르는 가장 나쁜 포장술이다.

 

 

 

 

 

 

 

 

 

 

 

 

 

 

 

 

 

 

5. 취향일 뿐

 

체리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체리가 드문드문 시장에 나오던 초창기에는 그것이 맛나다는 것조차 즐길 겨를이 없었다. 비싼 수입 과일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맛있다는 진심의 욕망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흔히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라고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과일 가게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인 체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비싸기는 하지만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대중적 과일이 되어 있었다.

 

 

남유럽 여행에서 충격 먹은 것 중의 하나. 달리는 차창 밖으로 아름드리 체리나무 행렬이 이어졌다. 내게 로망이기만 했던 과일이 이토록 흔한 것이었다니! 제 철이라 그런지 값도 무척 쌌다. 체리 한 번 다시 실컷 먹어보기 위해 다시 여행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반면에 나는 토마토는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단맛에 길들여진데다 미감마저 약해 내 입맛에는 토마토가 영 밍밍하고 싱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찰토마토니 대추방울토마토니 등 온갖 세련된 맛의 품종이 쏟아져 나와도 내게 토마토는 다 같은 토마토일 뿐이다. 나를 뺀 나머지 식구들은 토마토를 좋아한다. 몸에 좋다니 자주 사서 갈아먹고 볶아먹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토마토에는 손길이 가질 않게 된다. 토마토나 식구들 입장에서는 토마토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할 수도 있겠다.

 

 

체리든 토마토든 과일 자체의 본질이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체리는 체리 그대로, 토마토는 토마토 그대로 존재한다. 체리를 선호하거나 토마토를 우선하는 것은 선택자의 마음일 뿐이다. 내가 특정 과일을 선호한다고 해서 다른 과일의 본질이나 가치가 뒤로 밀리는 건 아니다. 그건 취향의 문제이지 당위의 문제가 아니다. 체리는 체리대로 토마토는 토마토대로 존재 이유가 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품은 향기가 다를 뿐이지 그 향 자체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품은 향기와 맛은 다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본질과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다. 개성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4-08-2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 글은 빠르게 읽히는 장점이 있씁니다. 군더더기가 없으니 쏙쏙 머리에 들어오거든요. 빠르게 잘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김영오 씨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음식 사진 잔뜩 올리고 조롱한다고 하네요. 참... 이게 할 짓인가.. 그런 생각이드네요.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속으로만 욕하면 되지, 아니 굳이 43일 굶어서 걱정인 사람에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하여튼 답답한 시대입니다.

라로 2014-08-27 01:05   좋아요 0 | URL
곰발님~~~~한글 맞춤법 어떻게 공부했어요????응??

곰곰생각하는발 2014-08-27 12:57   좋아요 0 | URL
한글 맞춤법이라... 공부 안 한 것 같습니다. 제가 맞춤법이 좀 삐짜'로 배워서 잘 틀립니다..ㅎㅎㅎㅎㅎ. 그냥 책 많이 읽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배운 것 같기는 하네요....

다크아이즈 2014-09-03 10:18   좋아요 0 | URL
딴 건 모르겠고, 곰발님 맞춤법 틀린 것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하십시요' 시리즈 ㅋ '하십시오' 로 고쳐달란 말이예요~~~휘리릭

프레이야 2014-08-2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든 다 드러내지 못하는 속사정이 어찌 없을까요. 김영오씨 경우도 그럴 거라는
심증이 갑니다. 너무 쉽게 조롱하고 너무 쉽게 찬양하는 세태라니..
그 연극배우는 누구인가요? 궁금합니다.

저도 체리 좋아해요. 과일도 체질에 맞는 게 있다네요. 토마토가 건강식품 중 하나라지만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라고 해요. 입에서 당기는 게 몸에 다 맞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이제 정말 건강 생각해야 할 때인데 여의치 않아요. 습관이란 녀석이..


다크아이즈 2014-09-03 10:19   좋아요 0 | URL
체리는 이제 안 나와요. 내년 초여름을 기다려야 한다는
그러니 더 먹고 싶어요.

오늘은 제주 어디를 밟으실까나? 용감해서 부러운 우리 프레님~~

세실 2014-08-2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야언니 그는 뮤지컬 배우 이산이랍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원색적인 비난은 별로죠.
김영오씨의 사생활까지 들추어내는것도.....근데 김영오씨는 이혼하고 양육비도 못줬다던데....안준거랑 못준거랑은 큰 차이가 있겠지요? 서로를 정확히 알기까지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
저도 체리는 비싸서 안사먹었는데 요즘 저렴한 가격 덕분에 보림 챙겨주면서 먹고 있어요. 새콤, 달콤한 맛이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4-09-03 10:21   좋아요 0 | URL
전 만날 섣부른 판단으로 그르치곤 해요. 그것이 인생ㅋ
내년에 체리 먹는 수다 모임 열어야 겠어요.
또 비와요. 여긴. 거기는요?
보림이 수시 때문에 신경 많이 쓰이지요?
잘 될 거예요. 원하는 곳 간다, 보림이 파이팅~~

라로 2014-08-2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말 나의 약점은 내가 예민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네요.
그래서 그 부분을 남이 건들었다 싶으면 상처 받은 것처럼 느껴져서 아프고...

암튼 이상한 사람들 많아요,,,누구 말대로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도 많다,,,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상처가 될 듯.

체리 여기는 별로 안 비싼 편인데 하와이가 엄청 비싼가봐요.
지난 달 하와이에서 형님네 가족이 와서는 체리를 얼마나 사 먹던지!!
덕분에 저도 많이 먹긴 했는데,,,좀 놀랐다는;;;;
이게 다 희소성의 법칙이 아닐런지요????ㅎㅎㅎ거의 모든 코미디가 그렇게 만들어 지는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4-09-03 10:24   좋아요 0 | URL
학씨리, 그래요. 제가 예민해서 모든 게 일어나더라구요.
저도 예민하게 굴어서 만날 일을 그르쳐요.
방법은 예민함 자체는 버릴 수가 없고, 그것을 누르는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더라구요. 누구나 예민할 수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느냐 안 내느냐는 마음 공부의 차이 같기도 하더라구요. 이래 말해도 저도 잘 안 돼요.
오늘도 알라딘하는 오피스 걸인지 점검하러 갈게요. ㅋ

[그장소] 2015-01-2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1. 질투의 속성

 

‘거지는 거지를, 시인은 시인을 시기한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한 말이다. 투박하긴 하지만 내 식 표현은 이렇다. ‘질투라는 것은 옆집에 사는 또래 아줌마에게 느끼는 감정이지, 강남 고급 아파트에 사는 젊은 새댁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하고픈 말들의 알짜배기는 언제나 선현들 차지이다. 어디 말 뿐일까. 인생 전반에 걸쳐 후대들은 선대들이 이미 이룬 것들을 인정하고 적용하고 재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예술을 말할 때 지상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질투는 같은 레벨 선상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같은 목적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산을 오르거나 같은 배를 탄 사람끼리 생기는 게 질투지, 다른 목적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산을 오르거나 다른 배를 탄 사람끼리는 애초에 질투라는 감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내 모의고사 성적의 비교 대상은 경쟁 상대인 내 짝지이지, 먼 학교에 다니는 나와 비슷한 성적을 내는 아이이거나 처음부터 비교대상이 아니었던 전교 일등 친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똑똑한 한 남자가 질투하는 대상은 똑 같은 레벨에 있는 사람이지 자신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다른 분야 또는 계급의 사람이 아니다. 정치인이 동료 정치인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경우는 있어도, 노숙자에게 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까봐 경계하지는 않는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가없는 사랑과 관심을 자신보다 계급적 하위에 있거나 또는 범접할 수 없는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베풀 수 있지만, 그것을 같은 경쟁자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할당하지는 않는다. 그들 서로는 질투가 어울리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기초는 질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질투는 뒤지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 있다. 따라서 질투라는 말은 좋게 보면 자기발전의 다른 말로 보아도 무방하다. 질투할 깜냥조차 되지 않을 경우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질투의 대상 위에 있을 때 인정하거나 고개 숙여 버리는 것 또한 인간 보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2. 작은 차이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면에서는 누구나 비슷하지만, 그 감성이나 판단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딘 사람이 있고, 뛰어난 직관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바리함 속에 헤매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눈치가 빠르고 직관 또한 뛰어나다고 한다. 단순 말싸움에서 아내가 남편을 압도하며, 어떤 상황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이 빠르게 판단·결정한다는 점 등을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야 눈치나 직관의 문제는 남녀 차이가 아니라, 개별자의 성정이나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여러 경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남자의 직관보다 여자의 직관이 앞선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당신은 이미 읽혔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자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밥은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때마침 밥의 여성 친구가 옆을 지나가다 이렇게 속삭였다. 밥, 포기해. 저 여자는 너를 얼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밥은 깜짝 놀랐다. ‘저렇게 날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믿을 수 없어.’ 보통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밥은 입술을 꽉 다물고 치아를 드러내지 않은 채 짓는 여성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꽉 다문 입술을 옆으로 당겨 일자를 만들고, 치아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웃는 거짓 미소를 남자는 자신에 대한 호의로 착각한 것이다. 속마음을 감출 때 흔히 이런 미소를 짓는데, 여자들은 이것이 거절의 신호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지만 남자들은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한다.

 

 

눈치나 직관이 반응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그들만의 정서적 기제가 발동하는 것일까. 여성이 비교적 눈치가 빠르고 직관이 뛰어난 것은 어느 정도는 선천적인 것과 관련이 있고, 달리 보면 사회화 과정에서 터득한 훈련의 결과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일상적인 면에서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하게 반응하는 남성에 비해, 오묘하고 복잡하게 반응하는 여성의 심리 기제가 이런 사소한 차이점을 낳게 한 것은 아닌지.

 

 

 

 

 

3. 한 호흡, 반 박자

 

“핵심은 상대의 말에 말려들어가 두 번째, 세 번째 발언이 이어지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 정말로 무례하고 공격적인 말을 들었다면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왜냐고? 침묵은 금일 뿐 아니라 잘못 인용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에는 이처럼 매력적인 문구들이 많이 나온다. 여타 인간관계 관련 책보다 진솔하고 현실적이다. ‘웬만하면 참아라, 포용하면 언젠가 상대가 맘을 알아준다.’ 류의 원론적 자기 수양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이 책은 그런 소극적 방식을 넘어선 적극적 자기 표현법을 제시한다. 타자의 입장만을 우선하는 인간관계론은 반쪽짜리 가르침일 뿐이다. 자기 확신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

 

 

일상의 철학을 담백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 삶은 그런 것에서 멀어질 때가 있다. 매사가 피로하며, 어쩐지 귀찮고, 확실히 다혈질이며, 언제나 부서지기 쉽고, 자주 옹졸하다. 겉으로 단단하게 보이는 사람이라고 이 ‘저급하고도 진실한’ 인간 심성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예상치 못한 일탈로 일반 대중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가 하면, 잘나가는 정치인일수록 허술한 수신제가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지게도 된다.

 

 

자기모순을 줄이고 자기 확신에 이르는 길목에서 필요한 것이 ‘한 호흡, 반 박자’의 원칙이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위기가 닥치거나 흥분이 몰려오는 그 순간 한 호흡만 쉬고, 반 박자만 멈추면 된다. 침 한 번 삼키고 잠시 허공에 눈길 한 번 주면 될 것을, 찰나가 주는 침묵의 향연을 야무지게 새기면 될 것을. 그 리듬을 잃고 성급히 굴다가 자기모멸이란 자술서를 쓰게 된다. 회한과 후회와 번민의 모든 뒤안길에는 지키지 못한 한 호흡, 반 박자가 원죄처럼 남아 있다. 휘말리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을 가장 쉬운 전략은 한 호흡 가다듬고, 반 박자 멈추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실천이 어려운 것.

 

 

 

 

4. 잘 듣기

 

잘 말하기도 어렵지만 잘 듣기는 더 어렵다. ‘적당히 말하고 나머지는 잘 들어주기’ 이런 소통 자세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다양한 개별자만큼의 다양한 소통 방식이 세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그에 따른 소통 방식도 달라진다. 일방통행으로 말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묻어가는 자세로 듣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다. 자신의 관심사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노골적으로 재미없어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재미없어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조용히 묻어가거나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남의 얘기를 듣는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말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을 뿐, 결코 말하고 싶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남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는 것, 거기다 기왕이면 잘 들어주는 것 이런 소통법을 실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잘 말하는 것 못지않게 잘 들어주는 연습도 필요하다. 듣는다(listen)는 것은 영어에서 침묵하는(silent) 것과 같은 철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잘 듣기 위해 잠시 침묵하는 일, 그다지 어려울 것 없어 보이는데 범부로선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지.

 

 

잘 듣는 행위의 주체는 나이고, 대상은 너이다. 그 대상인 ‘너’는 당연히 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만 한다.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직면한 아픔과 의혹을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 비굴하고 비열하고 연약한 우리 영혼은 강자의 말을 듣는 것엔 잘 길들여져 있다. 반면에 약자에겐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학습 없이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방한 활동이야말로 ‘잘 듣기’의 최고봉이라 할 만한 행보였다.

 

 

 

 

 

 

5. 본다는 것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내 눈에 비치는 거울, 내가 지닌 프리즘, 내가 가진 가늠자를 통해서 본다는 것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어진 대상에 대해 특별하거나 누적된 경험은 그것에 대한 고유한 이미지를 남기고, 그 이미지는 특정 대상에 대한 하나의 범주를 가능케 한다. 관찰자의 눈은 축적된 여러 경험의 씨날줄들을 엮어 그 사람은 참 착해, 그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 이런 심상의 카테고리들로 대상을 범주화하게 된다. 그것이 비록 환상이나 오해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

 

 

예를 들어 유도화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그가 그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그 나무에 대해 축적해온 자신만의 이미지 때문이다. 좋아했던 여자애의 티셔츠에 그 꽃무늬가 등장했고, 한 때 근무했던 분위기 좋았던 사무실 복도에 그 화분이 있기도 했으며, 추억 속 방죽의 가로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가 그 꽃을 좋아하게 된 거지 그 꽃 자체와 호불호는 별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한데 그 유도화 가지에 독성분이 있고, 그것 때문에 인체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정보 -비록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일일지라도 -를 얻은 뒤로 그는 유도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게 된다. 긍정의 이미지가 강했던 대상이 어떤 상황에서 부정의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하게 될 때 관찰자가 받는 심리적 타격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크다. ‘믿음’이라는 환상이 깨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당하는 정서적 충격은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환상에 가까운 긍정의 편견을 그 대상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또 다른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틀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은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축구공처럼, 먼지떨이질에 살아나는 먼지처럼 느닷없고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8월에 읽고 보려고 산 것들

동어반복인 줄 뻔히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글쓰기 관련 책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 버금 가는 앨리스 먼로 것 두 권

언제나 사는 속도에 비해 읽는 속도가 느리다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책 사기

몰타의 매 DVD는 내 취향은 아니었어. 그놈의 샘 스페이드를 화면으로 보겠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역시 데밋 해실의 문장으로 읽는 게 옳았어.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4-08-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호흡, 반 박자! 오늘 제 화두로 삼겠습니다^^
고종석의 문장 요즘 읽고 있는데 참 좋아요.

음성엔 비가 오락가락 합니다. 이런날엔 조용히 책을 읽으렵니다.
맛난 점심 드세요^^

다크아이즈 2014-08-23 09:35   좋아요 0 | URL
한 호흡, 반 박자가 안 돼서 문제를 그르친 경우가 많거든요.
스스로를 위한 반성문입니다. 반성은 잘 하는데 실천이 안 되는 게 문제라는 것ㅋ
근데 알라딘 글자 포인트가 높아졌어요. 한결 읽기 편하네요.

라로 2014-08-22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호흡, 반 박자!!ㅎㅎㅎ
제가 언니에게 글감을 많이 드리는 것 같아~~~~~.ㅋㅎㅎㅎㅎㅎㅎ
암튼 언니 좋은 글 감사해요. 귀감이 되는 분이시면서 귀감이 되는 글까지 쓰시는 분!!!
[아무래도 성악설인 게야]를 읽었던 날 언니 글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저렇게 글을 잘 쓸까? 혼자 생각하다가 그건 사유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부럽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8-23 09:41   좋아요 0 | URL
잘쓰는 건 아니고, 늘 잘 쓰고 싶지요. 잘 쓰는 분들 보면 신기하고 부럽고...
근데 고수들이 포진해 있으니 더 위축되고 뭐, 늘 도돌이표로 진행되는 고민이지요.
아주 잘 쓰는 사람들은 태어나는 것 같고,
노력해서 기본이라도 극복하자, 이런 맘으로 써요.
사유도 지나치면 엉뚱한데서 예민해지거나 예리해져서 별로 도움이 안 되어요.
일상에 무디면서 사유의 끝자락을 부여잡는, 그 고충도 제가 바라는 바는 아니에요. 저는 아롬님 글과 생활 다를 부러워한다니깐요~~


페크pek0501 2014-08-2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라온 새 글, 반갑습니다.
역시 잘 쓰시는구나, 하면서 읽었네요. 글을 쓴 세월이 많다는 흔적을 느낍니다.
제가 이 글을 책으로 읽었다면 여기에 밑줄을 긋겠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틀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은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축구공처럼, 먼지떨이질에 살아나는 먼지처럼 느닷없고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크아이즈 2014-08-25 20:39   좋아요 0 | URL
넘 오랜 만이라 감을 잃었어요.
알라딘은 안 보면 보고 싶은 친구 같은 느낌.
가끔 들어와서 페크님 글 읽는 기쁨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제가 들어올 수 있을 때 언니 새글 많이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

[그장소] 2015-01-2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없는 사색과 명쾌한 글들..즐겁게 읽고 갑니다.
 

 

 

 

 

 

 

 

 

 

 

 

 

 

 

 

 

 

 

 

 

 1. 교황, 교종

 

  프란치스코 교황이 출국했다. 평화와 화해를 위한 명동 성당 미사를 끝으로 4박5일 간의 방한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시종일관 약자와 낮은 곳에 대한 관심과 배려, 어린이와 상처 받은 이에 대한 사랑과 시선을 우선한 행보를 보이셨다. 순수와 위안과 평화를 전하고자 한 당신의 발걸음에 감동을 받은 이들도 많았고, 직간접으로 그 순간을 체험한 이들은 마음가짐을 다잡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다.

 

 

  낮고 비루한 일상을 보듬는 그 마음결을 되새기자니 문득 ‘교황’이라는 말 자체가 당신의 행보와는 걸맞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권위적이고 정치적인 용어 같다. 일반인의 생각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교황이란 말이 오랫동안 쓰여 입에 붙어 간간이 쓰긴 하지만 일부러 황제의 이미지를 떼어버리는 자극을 주기 위해 교종이라는 단어를 고집스럽게 쓴다.” 교황방한 준비위원장인 강우일 주교도 이처럼 ‘교황’이라는 명칭 대신 ‘교종(敎宗)’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었다. 교황(敎皇)이라는 명칭에 담겨 있는 권위적이고 세속적인 의도를 경계하는 마음이 느껴져 공감이 간다.

 

 

  교황이라는 말에서 황제, 임금이라는 뉘앙스가 떠올려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낮고 평범한 것을 지향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 가르침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교황(pope)이라는 말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파스’(paps), ‘파파’(papa)에서 유래했다. 지역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부르던 말이 아시아에 번역되면서 교종, 교황으로 정착되었다. 일본에 교황으로 번역되어 온 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교과서에도 자연스레 교황이란 용어로 자리잡았다. 어색할 겨를도 없이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애초의 ‘pope’라는 말에는 ‘교황’이란 말이 풍기는 봉건적 군림의 의미가 있었을 리 없다. 교황이니 교종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사실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그 옛날 전제군주제 식의 무조건적 추앙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라는 진심이 아니다. 그건 낮은 행보를 하시는 당신의 뜻에도 반하는 행동일 것이다.

 

 

 

 

 

 

 

 

 

 

 

 

 

 

 

 

 

 

 

 

 2-1. 참으로 천행이다

 

  “죽은 적병의 시체들을 헤치고 함대는 북서진했다. 깃발을 내리고 돛을 접었다. 물살이 함대를 목포 앞 암태도까지 데려다 줄 것이었다. (···)허기진 사부들이 갑판에 주저앉아 마른 미역을 씹었다. 새떼들이 끝없이 배를 따라왔다. 다시 거꾸로 흐르는 북서 밀물 위에서 나는 몹시 피곤했다.”

 

 

 『칼의 노래』명량해전 마지막 부분 묘사 장면이다. 흥행가도를 달리는 동명의 영화 덕인지 요즘만큼 ‘명량’이란 말이 회자 된 적도 드물 것이다. 백의종군하게 된 이순신의 눈에 비친 순천·여수 앞바다 정경 묘사로부터 칼의 노래는 시작된다. 볼수록 전율이 돋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문장은 내가 만난 가장 강렬한 소설의 첫 구절이 되었다. 전반부에 비치된 명량해전에 대해 작가는 무려 4장에 걸쳐 그리고 있는데, 그 어디에도 소설적 과장이나 영화적 긴장감 같은 걸 빌려 담진 않았다. 오직 객관화된 인간 이순신의 내외적 발화가 있을 뿐이다. 담담하고 냉정한 그 방식 때문에 오히려 더 절절하다. 주관이 배제된 물리적 사실을 진술함으로써 실체에 가닿으려 한 방식은『난중일기』의 문체적 특성이기도 하다.

 

 

  “적선 30척을 쳐부수자 그들은 달아났다.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다. 그곳에 머물려고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 당사도로 진을 옮겨 밤을 지내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난중일기의 명량 전투 당일 자 마지막 문장이다. ‘외롭고 위태로워’라는 말이 참으로 걸린다. 이어진 날들의 일기를 보면 진도에서 싸움을 끝낸 뒤 무안을 거쳐 영광과 변산을 지나 닷새 뒤에는 군산 선유도까지 북서진해 물러났음을 알 수 있다. 군량미 확보와 배 정비의 필요성 등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장군인들 외롭고 위태롭지 않았을 것인가.

 

 

  ‘참으로 천행이다’라는 그날의 저 마지막 문장은 우뚝한 장수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심회에 자주 젖었던 인간 이순신으로서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 같아 백번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2-2. 명량해전 간단 공부

 

  개봉 영화 ‘명량’ 관람을 계기로 명량해전에 대한 간단 공부를 한다. 관련 다큐멘터리나 기록물이 다양하다. 밤새 영상물을 찾아보고 기록물을 검색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전쟁사가 이처럼 호기심과 흥미와 감동과 짠함 등을 동시다발로 줄 수 있다는 것이 묘하긴 하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에게 남은 건 실의에 빠진 수군과 열세 척의 군함뿐이었다. 그에 비해 진군하는 왜군함은 무려 삼백여 척에 달했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전쟁을 필사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죽으려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각오를 몸소 실천했다.

 

 

  명량해전이 승리할 수 있었던 실질적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는 배의 구조이다. 조선의 주함 판옥선은 왜의 주함 안택선에 비해 튼튼했다. 만드는 방법과 구조의 견고성이 안택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회전력도 우수해 울돌목의 빠른 유수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무기의 활용 면에서도 조선해군이 유리했다. 일본군의 주력 무기는 조총이었다. 살상 무기로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녔으나 해전에서는 조선의 함포가 나았다.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는 원거리 사격이 가능한데다 화력이 우수했다. 튼실한 배와 위협적인 무기는 이순신 해군 전투력의 바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의 전략전술과 리더십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명량 일대의 해류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좁은 물목에 왜함대를 몰아넣어 옴짝달싹못하게 만들었다. 수중 철쇄를 해협 양쪽에 걸어 몰려드는 왜함을 뒤집어지게 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런 기록들은 전쟁이 끝난 한참 뒤의 것들이라 믿음을 주진 못한다. 굳이 쇄사슬 전법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이순신의 지략은 여러 기록들이 충분히 검증해주고 있다. 이순신 없는 명량의 승리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해협의 언덕에서 장군과 수군들의 승리를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응원하고 환호했던 당시 백성들의 마음이 기록으로나마 그들을 기리는 후대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3-1. 차이는 차별 아닌 구별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차이가 없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 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앞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코스트 전범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취재기인 이 책은 얼핏 보기에 대중성과 흥미를 갖춘 것 같은데 쉽게 읽히지 않는다. 당시 유럽이 처한 정치적 환경과 아렌트가 추구하는 철학적 배경에 대한 독자로서의 지식 부족 탓도 있고, 내용 및 용어 등에서 매끄럽지 못한 번역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 그럼에도 밑줄 긋기 할 곳이 많은 건 전적으로 아렌트가 발하는 통찰 덕이다.

 

 

  크고 작은 갈등의 바닥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함’이라는 인간의 기본 성질이 깔려 있다. 욕심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차이의 불인정에 기인한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처럼 인간에게 ‘차이’라는 게 없으면 ‘소통’도 필요치 않다. 같은 생각 같은 모습, 즉 모든 인간이 내외적으로 획일화 되어 있다면 갈등도 소통도 애초에 없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등과 소통 이전에 모든 답이 똑같아 버리는 현실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따라서 갈등하는 인간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소통이 문제이다. 잘 소통하려면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차이를 인정하려면 ‘타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감각했던 아이히만의 가장 큰 문제는 ‘차이’에 대한 무지였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에 의하면 악한 게 아니라 그저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타자의 관점에 대한 학습에 노출될 기회가 없는 만큼 악의 평범함에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차이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을 의미한다. 너와 나를 차별해도 좋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다름을 구별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관점을 훈련하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악의 평범성에 감염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르침!

 

 

 

  3-2. 악은 멀리 있지 않다

 

  악은 저 멀리 있지 않다. 악은 특별하지 않다. 악은 평범하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전언이다. 아렌트 여사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쉽게 읽힐 거란 내 예상은 빗나갔다.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방청기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단순한 기고문이 아니었다. 철학자의 글답게 시종일관 심오한 문투다. 호기심이나 흥미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다 보니 대중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몰입이 잘 되는데도 금세 읽을 수 없는 것은 공감이 가는 장면마다 생각이 가지치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 상황, 그 환경에서 아이히만과 다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삼라만상 그 무엇을 내 잣대로 규정짓거나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내 안의 선이 그리 특별하지 않듯 내 안의 악 또한 그러하거늘 왜 우리는 타인의 악행에만 그토록 분개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이 책이 그토록 회자되는 건 단연 부제 때문이다. 대놓고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고 잘라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란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인간 보편성의 기저에는 악의 평범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다. 보통의 악, 평상의 악이라니 섬뜩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절대의 선, 객관의 선을 행사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재판을 방청한 그녀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직책과 명령에 충실한 평범한 직장인이었을 뿐, 어디에도 광적 학살에 집착하는 악의에 찬 기질을 숨기고 있는 자는 아니었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건 ‘무능성’ 때문이었다고 아렌트는 짚어낸다. 판단의 무능성은 사고와 성찰이 부족할 때 생겨난다. 악의 평범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지속을 경계할 수 있는 사고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게 문제인 것이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악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철학적 사유의 반성으로 확장되는 힘, 그것이 한나 아렌트의 성과라면 성과일 수 있겠다.

 

 

 

 

 

 

 

 

 

 

 

 

 

 

 

 

 

 

 

 

4. 인간의 광기

 

  포화 속 가자지구 사망자 수가 거의 이천 명에 이른단다. 전쟁을 멈추라는 세계 곳곳의 목소리가 간절할수록 양측의 전의는 맹렬하기만 하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서로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스라엘은 안보가 확보돼야 군사작전을 멈출 것이라 말하고, 하마스 측은 가자지구 봉쇄를 풀지 않는 한 휴전은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죄 없는 민간인 피해자만 늘어나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상황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얽힌 요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세 종교의 탄생지인 예루살렘은 인류의 광기 때문에 폭력과 전쟁의 주요 진원지가 되었다. 가톨릭 사제였던 제임스 캐럴의 신작『예루살렘 광기』는 이러한 종교의 허상과 인간의 광기에 대한 고백서이다.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하던 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환멸을 맛본다. 성지 안에 있는 복제화들과 ‘십자가의 길’로 상징되는 열네 곳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서사임을 알게 된다. 중세 후기 그리스정교회의 관광 독점을 막기 위한 프란체스코회의 조작임을 알고 회의를 느껴 사제직을 물러난다. 신앙을 들먹이며 예루살렘을 성지화한 것은 바로 인간들이며, 그곳만이 메시아의 재림과 계시가 보장된다고 병적으로 열광하고 집착한다는 것이 캐럴의 시각이다.

 

 

  종교적 열망은 배타적 적대감을 낳고,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그 신념은 무자비한 살육을 부추긴다. 그렇게 인간의 허상이 만들어낸 예루살렘이라는 환상은 역사 속에서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서운 광기가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종교가 폭력 앞에 무기력한 장면 앞에서 인간의 근본이 선하다는 주장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살육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그 희생제의가 곧 종교라는 캐럴의 일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신의 명분을 빌려 야만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광기와 이기심, 이것이 인류의 실체기이도 하다는 씁쓸한 진실!

 

 

 

  * 8월 한 달은 그나마 조용했다. 좀 읽고, 많이 쓰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상념은 부풀었으나 언어가 되지 못했고, 게으름은 나무늘보로 늘어지는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급류처럼 흘렀다. 아까운 8월, 벌써 반 이상 보내버렸다. 한 것도 남은 것도 없다.  익어가는 저 열매처럼 되고 싶었으나 마음만 익었지, 몸과 행동은 익지 못했다. 오호통재, 오호 애재라, 아흐 다롱디리여ㅠㅠ  

 

 그나저나 저 열매 이름이 뭘까요?

 어느 착한 분이 저 과일을 후식으로 내놓고 맞혀 보랬는데 아무도 못 맞혔다는...

 자연보다 책을 우선하는 알라디너 여러분도 잘 모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4-08-19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과 배려, 소통과 나눔을 몸소 실천하고 떠나신 프란치스코교황님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간결하게 살아야 겠습니다.
향기나는 사람도 좋겠죠?
비 오는 화요일....의외로 고요합니다^^

다크아이즈 2014-08-19 10:17   좋아요 0 | URL
어제 진종일 비 내리더니 여긴 이제 그쳤어요.
가을 장마 전선이 북상 중인가 봐여ㅠ
지금은 커피 타임? 비 오는 날 커피 갈아 한 잔 하면 음메, 미치지요.
저도 커피 돌리러 갑니다~~
재미난 하루 보내시어요.

세실 2014-08-1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두나 살구는 아닌가봅니다.

다크아이즈 2014-08-21 09:15   좋아요 0 | URL
매실이랍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매실이 익으면 저렇게 되고, 먹을 수도 있어요.
많이 시고, 약간 달달했어요. 살구보다 약간 강렬한 맛...

초록색 매실만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됐다는...'
여긴 또 비와요,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째 반가운 이웃의 글이 많이 올라왔네요. 팜므 님 반갑습니다. 확실히 이젠 가을이란 생각이 듭니다. 참 신기해요. 계절이 바뀌는 거 보면 참 신기합니다. 여름만 있다거나 겨울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계절이 바뀌니 늘 하던 패션이 지겨워지는 순간 다른 코디를 할 수도 있고 말이죠. 여전히 1.2.3.4 형 포스트는 여전하시군요.

아이히만... 요 책 대단합니다. 왜 정치가들은 프레임 설정을 잘해야 한다고 하잫아요. 아렌트는 짧은 문장 하나로 전체를 보여줬습니다. 악의 평벙성 말이죠. 기회만 된다면 기냥 한길그레이트북 컬렉션으로 뽑아다가 고것들만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천도복숭아 아닙니까 ? 저 과일.. 답이 쉬울리는 없으니 아닌 거 같디만...

다크아이즈 2014-08-21 09:20   좋아요 0 | URL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성찰 깊고 위대했으나
그녀의 문체나 구성은 지랄 같다. - 제 독서 후기입니다.
번역도 온통 비문투성이라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재판방청기를 고스란히 옮기면서 자신의 생각을 쉬운 문체로 정리하면 독자들이 파악하기 쉬웠을 것을, 너무 왔다갔다해서 정신이 혼미했어요.
철학자연한 그 문투는 또 뭐랍니까? 과연 저 번역서를 꼼꼼하게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날도 우중충한데 그런 생각으로 우울해지지 뭡니까.
악의 평범성이란 화두를 건진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문투는 정말이지 요령부득이었지요.


과일은 매실~~

라로 2014-08-2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협박이 힘이 세긴 센가봐요~~~.ㅋ
늘 이렇게 자신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저는 진정 구순기시절 결핌의 영향이 맞는 것 같아요.ㅎㅎㅎㅎ
암튼 많이 배우고 가요,,,언니의 글쓰기를 배워서 영문페이퍼에 그대로 적용하여 멋드러지게 페이퍼를 써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mirabelle 이라는 과일 아니에요????( ")

다크아이즈 2014-08-21 09:25   좋아요 0 | URL
무미건조한 제 문체를 이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ㅋ
상냥하고, 재간 있는 에피소드 성 강한 아롬님 글을 저는 더 좋아합니다.

미라벨이란 과일 검색해봤다는, 이미지도 안 떠요.
프랑스 쪽에서 많이 나는 자두과인 모양이에요.
미라벨 맛이 자두맛이려나?

설마 미라벨 같은 이쁜 과일 이름이 나오길 바란 것 아니었지요? ㅋ
매실 익은 거라기에 충격 먹었어요.

페크pek0501 2014-08-2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시는 동안(알라딘을...) 쉬시기만 한 게 아니라 요런 글을 쓰기 위해 사유의 시간을 가지셨나 봅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 자주 글을 올려 주시길... 많이 배우게요...

다크아이즈 2014-08-25 20:41   좋아요 0 | URL
사유하면 페크언냐죠~~
배움하면 또 페크 언냐고.
언니의 글 쓰는 방식을 무척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요.
이해하기 쉽게 잘 쓴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2015-01-26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5-01-26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장소님, 닉마저 매력적인 님을 알게 되어 감사 드립니다. 한 주 잘 시작하시고 많이 배울게요^^

[그장소] 2015-01-26 22:19   좋아요 0 | URL
으..감사해서 ^^ 어쩔 줄 모름.
저 역시. 다크아이즈 님께 많이
배울까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남은 오늘..잘 마무리 하시길...빌며.^^
 

 

 

 

 

 

1. 결속의 던적스러움

 

  ‘작은 패거리’에 속하려면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건 그룹이 은연중에 내세우는 수칙 가운데 하나로, 그 해에 베르뒤랭 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부인 말처럼 ‘그토록 바그너를 멋지게 연주할 수는 없다!’ 거나, 플랑테나 루빈슈타인 ‘저리 가라 싶게’ 연주한다는 평가에 따라야만 했고, 또 코타르 박사가 내린 진단이 포탱 박사를 능가한다는 점을 수긍해야만 했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스완의 사랑」도입부에 나오는 말이다.

 

 

  프루스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까지 귀족 문화가 건재했던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는 살롱 모임이 유행했다. 위에 나오는 베르뒤랭 같은 유한마담이 주로 파티의 주관자였는데, 장소도 제공하고, 물주도 되면서, 참석자까지 선별했다. 시쳇말로 ‘오야붕 마음대로’ 마담 역할을 수행했다. 교양 있는 모임도 많았지만 패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그룹에서는 은근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곤 했던 곳이 살롱의 마담 자리였다.

 

 

  놓인 숟가락만 차지하면 되는 손님 입장에서는 베르뒤랭이 주도하는 패거리 분위기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부인의 드넓은 드레스 폭 한 자락을 잡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맘 깊이 안도하게 된다. 사람이 모이면 으레 편을 만들게 되는데, 권력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가진 자 위주로 재편된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이 결속감을 가지려면 거기에 걸맞은 적이 있어야 한다. 합치고 뭉치는 이면에는 ‘우리가 남이가’란 정서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결속을 위해서라면 없는 적도 만들어 내야 한다. 적이 없으면 뭉칠 이유가 없다. ‘끼리끼리’ 정서가 유지되는 최고의 비결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되기 두려운 우리는 오늘도 베르뒤랭 부인이 주최한 테이블에 앉아 그저 그런 피아니스트를 향해 휘파람 곁들인 환호를 보내고, 별 하자 없는 포탱 박사의 진단서에 이러쿵저러쿵 의문을 단다. ‘건전한 남’보다 ‘음험한 우리’가 주는 결속의 쾌감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양심을 팔아 산 그 쾌락이 돌아서면 고대 환멸로 남을 것을 알면서도.

 

 

 

 

 

 

2. 흔들리지 않는 지침서

 

  주대환의 신간『좌파 논어』는 술술 읽힌다. 논어를 해체해 저자의 입맛에 맞게 재편했다. 498장 모두를 해석한 게 아니라 149장만을 골라서 해석했다. 저자의 그간 행보에 어울리게 전통적 해석과는 사뭇 다른 진보적 시각의 해석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기록에 남아있는 공자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난 시각을 견지하는 건 아니다. 조금은 알고 있는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과 학자로서의 자세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고 있어 금세 읽힌다.

 

 

저자가 안내하는 것처럼 공자는 당대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앙만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절대적 인품을 보유해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배신도 당하고 비난도 받았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험한 꼴을 자초하기도 하고 멸시도 당했다. 정치판에 기웃대다 비웃음을 사기도 했고 관계 맺기에 서툴러 헛발질도 일삼았다. 한마디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보를 한 이가 공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살이의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따라서 공자의 일상적 삶의 생각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공자가 위대한 것은 훌륭한 인품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가치관이 시대를 떠나 보편타당한 깊이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건 성현들이나 나나 같은데, 그들은 자기 성찰적 사유를 남기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시간만 축낸다. 우리가 성현들을 존경하는 건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제대로 내기 때문이다. 공자 또한 그런 좋은 예이다.

 

 

  가장 보수적인 ‘논어’를 가장 진보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작가의 독창적 시도가 신선하다. 논어가 일반 독자에게 학문적 깊이를 강요하는 수단이 될 이유는 없다. 작가의 말대로 논어는 연대의 언어이다. 공자는 주저함이 없이 당을 만들었다. 인과 예가 그 강령이고 진성당원으로 군자라는 캐릭터를 구축했다. 서로 의지하고 격려해야 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끼리 지켜야 할 인예(仁禮)의 지침서인 논어, 다양하게 해석될수록 독자로서는 덤을 얻는 기분이다.

 

 

 

 

 

 

 

 

 

 

 

 

 

 

 

 

 

 

 

 

  3. 말의 외연

 

  공자의 언행 및 주변 문객과의 대화를 수록한 책이 『공자가어』이다. 거기의 한 장면. 초나라 공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활을 잃어버렸다. 신하들이 급히 나서 활을 찾으려 했다. 왕은 도리어 느긋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둬라. 어차피 초나라 사람이 주울 것 아니냐. 훗날 이 일화를 들은 공자의 반응은 이랬다. 왕이 한 말에서 ‘초나라’를 뺐으면 좋았을 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사람이 주울 것이다, 라고 했다면 더 훌륭했을 걸.

 

 

  잃어버린 활을 대하는 초나라 공왕은 그 자세만으로도 칭송받을 만하다. 평소 공왕이 지녔던 백성에 대한 기본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좋은 임금은 언제나 자신을 넘어선다. 자신의 자리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 국가의 안위를 위해, 백성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래서도 안 되지만 - 자신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백성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줄 안다. 왕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없는 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화살에 대한 공왕의 가르침의 크기도 공자의 덧붙임 말에 비하면 약소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다스리는 초나라 사람들에게만 호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자의 생각 그릇은 초나라 사람을 넘어선 ‘사람’ 자체를 다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면 흥미 있는 기록 하나가 더 있다. 공자의 말에 이은 노자의 주석은 이러했다. 공자의 말에서 ‘사람’마저 빼는 게 더 낫겠다고. 그렇다. 잃으면 줍는다. 노자는 공왕과 공자를 뛰어 넘었다. 나라와 사람을 건너 천지우주를 보듬은 것이다.

 

 

  말은 곧 사람이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는 도구이다. 한 마디 말에도 그 사람이 드러난다. 실천적 행동으로 말을 말을 증명하는 사람들은 온전한 신뢰를 얻는다. 큰 사람은 넓게 말하고 크게 아우를 줄 안다. 아무리 정의를 외쳐도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면 잘 말한다고 할 수 없다. 내 것을 위해, 내 앞의 이익을 위해 큰 소리를 내는 것보다 전체를 위해, 모두의 화합을 위해 낮은 목소리로 조근거리는 것이 훨씬 나은 말의 사용법이다. 그걸 알면서도 말의 외연을 확장하지 못해 스스로에게 종주먹만 날리는 날들이다.

 

 

 

 

 

 

 

4. 천성으로 착한 이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는 자기 긍정 지수도 높다. 대개 천성이 밝고 명랑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앞뒤 재는 것이 없고, 이것저것 따지려하지도 않는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타자의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이고, 타인의 약점보다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해낸다. 언제나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한다. 비도적인 것이 아니고, 악행과 거리를 두기만 했다면 그 어떤 것과도 친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순정한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 곁에 있으면 인간사 갈등도 피할 수 있고, 괜히 흰소리나 낸 건 아닐까 하는 자기검열에서도 자유롭다. 긍정지수가 높은 이들은 타자와의 차이에 민감하지 않거나, 그 차이를 인정하는 선천적 센스가 장착된 사람들이다.

 

 

  새치름한 자만심도 분주한 이기심도 없는 그들 곁에 있으면 착하게 사는 게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건전한(?)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믿는다.) 살인자도 강도도 그런 생각에서 멀지 않다. 그렇기에 누군가 제 삶의 리듬에 끼어들거나, 섣부른 충고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잔소리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다. 치명적인 실수를 했거나 기본적인 도리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닌데도, 충고자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고 그것을 따르기를 바라면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라 해도 듣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언짢고 부담스럽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관이 같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치관은 평생을 통해 시나브로 내 안으로 스며든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그 어떤 방해꾼이 나타나더라도 자신이 가진 장점인 천성의 착함을 급격하게 버리지는 않는다. 악행을 일삼는 이가 하루아침에 제 기질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들은 타자보다는 자신에 솔직하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 진솔하리만큼 객관화한다. 실수는 하되 그것을 곧장 인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한다. 말하기 전에 먼저 듣기를 즐기고, 약속한 것은 핑계 없이 지키려한다. 학습이 아니라 천성으로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인다. 진심으로 사람 사이의 차이를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처럼 될 수 없다면 그들 반만이라도 따라잡자,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5. 시간의 상대성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간다. 벌써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려 한다. 이렇게 쓰는 내 마음이야말로 시간의 노예라는 증거다. 시간을 느긋하게 대하고 있었다면 ‘올해의 절반이 지나려면 멀었네. 이 정도면 괜찮아. 뭔가 해야 할 시간이 아직은 충분한데.’ 이런 맘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게 본심이다 보니 저런 긍정의 태도가 나올 리 없다. 대개의 사람들이 시간에 내몰리며 살아간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도 확고한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면서 시간에 휘둘려 허둥대는 것만은 분명한 이 아이러니.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제대로 부릴 줄 아는, 확신 서린 자기 관리법이 대견하게 보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시간을 부릴 줄 안다고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시간 관리를 철저하게 할수록 가장 확실한 시간의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한 시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강박이 시간을 시간 그대로 놔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그 아까운 시간에 뭔가를 프로그램화하고 스스로 만족도를 얻어야 한다는 압박을 자초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시간을 제대로 부린다 해도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될 뿐이다. 거기엔 즐기는 시간이 없고, 해결해야 할 시간만 남는다. 잘하는 자 즐기는 자만 못한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시간 없다고 말하는 건 진짜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기화해서 즐길 제대로 된 시간’을 찾지 못한 자기연민과 습관성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미녀에게 구애할 때는 한 시간이 일초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철판에 앉아 있을 때는 일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상대성이다.’ 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시간의 상대성은 시간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데서 출발한다. 시간 없다고 징징 대기에 앞서 시간을 자유롭게 풀었다 조였다 하는 마음 여유부터 찾아야겠다. 당장 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6. 운세의 심리학

 

  신문이나 잡지 한 귀퉁이를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것이 있다. 한 수 더 떠 요즘은 전화 한 통에 사주나 운세를 봐준다는 광고가 실릴 정도이다. 사주나 운세 등에 관한 기사나 광고 등이 예삿일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거기에 의존한다는 말도 된다. 우리 전통 문화의 토양이 사주나 운세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도 이런 현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운세나 혈액형으로 보는 성격 유형 등에 나오는 서술 내용은 사실 변별력이 거의 없다. 대개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바넘 효과 (Barnum effect)라 한다.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학생들에게 각각의 성격 테스트를 한 뒤, 결과와는 상관없이 똑 같은 내용의 결과지를 나누어준다. 그것을 모르는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테스트 결과가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대답한다. 사람에게 있는 보편적 특성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종 점술은 바넘 효과의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불안한 심리 상태의 내방자는 이미 상담자가 들려주는 얘기를 믿을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상태에서 막연하고 일반적인 특성이나 확률적으로 높은 사항을 묘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있다는 사실은 인식할 겨를이 없고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만다. 더구나 그런 보편적 얘기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좋은 것들이라면 그것을 정당화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운세 서비스나 점술 등에 의지하는 게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합리적 대안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한 현대인들은 자신을 맡기고 조력을 구할 만한 데가 없기 때문이다. 단, 유명 철학관이니 족집게 점집이니를 찾아다니는 우리들 불안의 행보도 바넘 효과의 진실을 인식하는 선이라면 과하지 않다는 뜻이다.

 

 

 

 

 

 

  

7. 인권 수난 시대

 

  문명은 발달하고 문화는 확장 되어간다. 지구촌 한마당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니 편 내 편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게 현대 사회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늘 변화가 요구된다. 거기에 맞춰 지적 ․ 물적 토대 역시 날로 풍성해진다.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꽃일 뿐이다.

 

 

  풍요의 노래가 넘쳐날수록 환희의 축포가 터질수록 그 이면에 인권유린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인권 유린은 자연 재해 앞에서 인재 앞에서 사고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일어난다. 불가항력의 산사태로 생겨난 주검들, 뒤집어져가는 여객선 안에서 고통으로 끝내 생을 마감한 영혼들, 납치와 폭력 앞에 고스란히 숨죽일 수밖에 없는 어린 여학생들. 어쩜 그리 인권이란 보호의 보자기는 약자와 여성들만을 잘도 알고 피해 가는지.

 

 

  실시간으로 중계해주는 지구촌 뉴스를 대하다 보면 우리 인류의 미래가 밝기만을 바라는 건 지나친 희망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수단에서는 개종 및 배교를 했다는 이유로 임신 중인 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삼일 간의 개종 시간을 부여했는데도 이슬람교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교수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기독교 남성과 결혼한 여동생이 배교했다며 오빠가 당국에 고발하고 처벌을 원했다.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따르면 아버지가 무슬림이면 자식인 딸도 같은 종교여야 한다. 나이지리아의 무장 단체 보코 하람의 여학생 단체 납치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우울한 얘기들만 들려오니 망연자실해질 뿐이다. 삼백여 명에 이르는 어린 여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열망과 힘이 없었다는 두 가지 이유만으로 죄 없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있다.

 

 

  인권 침해는 약자들이 그 표적의 대상이 된다. 가진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에게, 당당한 자들보다는 소심한 이들에게,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수난의 화살이 꽂힌다. 가진 것 없고 힘없다고 인권 또한 없는 건 아닌데 왜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지 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8. 기억이라는 고통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나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자의식과잉이란 파도에 휩쓸리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다. 던적스럽게 달라붙는 오염된 해초 같은 일상의 찌꺼기, 시도 때도 없이 증식하는 감염된 치어 같은 잡념들. 스스로를 괴롭히는 그 물결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쓸 수 있다. 자의식의 바다에서 눈물콧물 범벅인 채 가쁜 숨을 내쉬기만 하면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흔들리되 평정심을 유지할 것, 힘들어도 유머를 잃지 않을 것, 연민을 품되 객관적 시선을 확보할 것. - 프리모 레비의『이것이 인간인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이 세 가지로 정의해보았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레비는 운이 좋았다. 화학 전공자였기에 죽음의 가스실 대신 실험실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록했다. 악몽 같은 수용소의 기억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그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 문학으로 남겼다.

 

 

  홀로코스트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그는 무조건 분노하거나 적개심을 드러내는 않는다. 그저 갇힌 자들의 운명에 대해 동지적 연민으로 관찰하고 묘사했다. 인간 심연 깊숙한 본질에 대해 사색하고 통찰했다. 극한 상황에서 얼음 칼 같은 문장을 조각한 프리모 레비의 문장을 보면서 절망한다. 서늘한 칼날이 심장을 파고드는 순간 피톨이 뛰쳐나와 수만 송이 장미꽃으로 피어오르는 이 느낌. 차디찬 칼날로 벼린 기억의 고통을 수만 송이 장미꽃으로 피워내는 레비의 힘, 자의식을 제대로 제어한 그의 문장으로 내 오월의 허기를 채우는 중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4-05-23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정말 팜님 책상은 9첩 진수성찬이예요.
매일 편식만 일삼는 저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신랑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시리즈를 샀는데, 저는 쳐다도 안 봤거든요.
님 리뷰 읽고 나니 저도 시작해볼까, 그런 마음이 드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다크아이즈 2014-05-24 08:09   좋아요 0 | URL
단발님, 스완의 사랑 편, 섬세하게 읽으니 무지 재밌네요.
프루스트는 상남자가 아니라 결 고운 여자 스똬일이에요.
들은 이야기로, 기억에 의지해서 이토록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을 건져내다니요.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제대로 보이네요.
책에 관한한 저도 편식주의자입니다.ㅋ

페크pek0501 2014-05-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님의 재주는 여전하고!!!
공감 수가 많은 것도 여전하고!!!

아, 저는 오월의 허기를 어떤 책으로 채울까요?

다크아이즈 2014-05-24 08:09   좋아요 0 | URL
시간에 쫓길수록 공포에 가까운 허기 - 쉬 내려놓지 못하는 욕망의 들끓음. 누가 찬물을 끼얹든지, 그 들끓음 속으로 스스로 빠지든지. 이도 저도 아니니 쫓기면서 허기만 남는다는... 부디 페크님은 평안하소서 ^^*


성에 2014-08-17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삶의 철학이 담백한 이 >,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때때로 ' 나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게 편해'
라고 생각해요, 나쁜 짓을 하려면 온갖 머리를 굴리고 힘을 쓰고 하는게
귀찮고 마음이 불편할텐데 그게 나로선 안 되는거지요.
그래서 때로 내게도 ' 동기유발 '---이란게 생기면 평소 순하고 착한데서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럭비공이 되는거죠. 거기까지의 통제가 자신이 없어요.

팜므님 정말 책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모든 글이 내게 의미있게 다가오는데
그 중 하나만 썼어요. 공자님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사유의 기록,
인과 예의 강령으로 이루어진 군자당, 이런 새로운 시각도 인상 깊습니다.

오늘도 톡톡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크아이즈 2014-08-19 09:35   좋아요 0 | URL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삶의 철학이 담백하지 못합니다.
어쩐지 찌질하고, 확실히 다혈질이며, 언제나 쪼개지기 쉽고, 자주 옹졸하며...
그래도, 그래도 단단히 견딥니다.
성에님도 잘 지내시지요?

라로 2014-08-19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저저는,,,천성적으로 착한 사람 같아요;;;;;(이 글 써놓고 다른 댓글 달 염치가 없다는;;;;ㅎㅎㅎㅎㅎ후다닥3=3=3===3=33===3==3333333)

다크아이즈 2014-08-19 09:32   좋아요 0 | URL
4번 페이퍼가 아롬님을 맘에 두고 쓴 건 줄 어찌 아셨단 말입니까! ㅋㅋ
 

 

 

 

  

 

 

 

 

 

 

 

 

 

 

 

 

 

 

 

1. 너무 쉬운 효도법

 

  엄마가 아는 최고의 회는 붕장어회이다. 젊은 날 부산의 당신 언니네서 먹은 첫 회가 소위 ‘아나고’라 불리는 붕장어였다. 추억 또는 회한으로 버무린 그 맛을 잊지 못한 나머지 엄마는 그 회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 나는 걸로 아신다. 다른 회를 잘 먹어보지 않은 엄마만의 기준으로는 아나고야말로 으뜸 회가 되는 셈이다.

 

 

  뼈를 발라내 부드러워진 붕장어를 탈수기에 돌리면 꼬들꼬들해진다. 그것을 초고추장에 버무려 야채에 싸서 먹는데 엄마 입에는 그보다 더한 천하일미가 따로 없다. 회 종류도 잘 모르고, 회 각각의 고유 맛도 구분할 줄 모르는 나는 엄마의 그 서민적 미감을 ‘익숙한 것에 대한 찬양’의 입맛 정도로 치부하곤 한다. 다만 한 대상의 본질과 주관적 느낌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엄마의 아나고 회’를 통해서 깨칠 뿐이다. 한 주체가 애정을 느끼는 그 무엇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사자에겐 충분한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다.

 

 

  연휴를 맞아 엄마한테 들렀다. 효도하는데 창의성을 발휘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어쩜 해마다 그리 똑 같은 매뉴얼의 효도법만 떠오르는지. 출발 전, 바닷가 시장에 들렀을 때 엄마께 뭘 드시고 싶으냐고 물었다. 엄마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나고 회 한 접시’면 된다고 했다. ‘할마시 과부’가 된, 평소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이웃들과 함께 나눠 드실 거란다. 회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며 맛난 회가 얼마나 많은데 그것만 찾느냐고 핀잔을 해보지만 회에 대한 엄마의 취향은 요지부동이다.

 

 

  마루에서 예의 할마시들과 윷놀이를 하다말고 엄마는 우리 네 식구를 맞았다. 앉은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얼른 시댁에 가서 효도나 하라며 다그친다. 당신은 건강한데다 이웃과 이토록 재미시리 지내니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챙기는 게 도리란다. 나는 안다. 건강하다고 큰소리치지만,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엄마도 실은 성당에 갈 때 지팡이 없이는 안 되고, 그나마 도중에 서너 번은 쉬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이 나이에 큰 병 없고, 자식 우애 있고, 정 낼 이웃이 있으니 더 바랄 게 무어냐’고 진심으로 말씀하신다.

 

 

  사위가 건넨, 알량한 용돈을 그나마 절반 뚝 떼 한사코 마다하는 아이들 주머니에 다시 챙겨 넣는 호호백발의 엄마. 우리 네 식구 탄 차가 골목을 꺾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점 소실점으로 서있는 엄마.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참으며 나는 기어이 ‘아나고 회, 다 식겠다, 얼른 들어가셔!’ 라고 냅다 소리나 지른다. 깊은 손사래가 있는 흔들림 없는 모성 앞에서 이토록 흔하고 뻔해빠진 아나고 회 같은 효도법이라니!

 

 

 

     

 

   2. 빨간 셔츠와 갈색 바지

 

  망망대해, 외항선이 파도를 헤치며 나아간다. 해적선 한 척이 나타나 그 배를 포위한다. 선원들이 허둥댈 때 선장이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위엄을 잃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라고 말한다. 빨간 셔츠를 입은 선장은 선원들과 힘을 합쳐 배에 오르려는 해적들에 맞선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선원들이 생기긴 했지만 무사히 해적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며칠 뒤 망루에 있던 파수꾼이 이번엔 두 척의 해적선이 나타났다고 외친다. 공포에 질린 선원들은 몸을 웅크려 숨을 곳만 찾았다. 선장이 예의 위엄을 갖춘 채 소리쳤다. “내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 저번에 비해 사상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날 밤 갑판에 나온 선장과 선원들은 별을 바라보며 승리를 자축했다. 존경에 찬 낯빛으로 누군가 선장에게 물었다. “왜 빨간 셔츠를 입으시는 겁니까?” 선장만이 지을 수 있는 위엄한 표정으로 그가 답했다. “빨간색 셔츠를 입으면 부상으로 피를 흘려도 들키지 않는다. 그러면 너희도 두려움 없이 싸움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선원들은 선장에 대한 자신들의 신뢰가 헛되지 않은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다음날 새벽 이번엔 해적선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모두 열 척이었다. 선원들은 당황했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빨간 셔츠’의 용감한 선장이 있지 않은가. 침착하게 선장의 지시만 기다렸다. 드디어 선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갈색 바지를 가지고 오라!”

 

 

   비교적 평화 또는 약간의 위험 상태에서는 누구나 본심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다급할 때 그 본심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약하고 비겁하며 위선에 가득 찬 경우라면 저부터 살기 위해 갈색 바지를 찾을 것이고, 원래 강하고 정의로우며 참된 길을 도모하는 경우라면 끝까지 빨간 셔츠를 가져오라고 명할 것이다. 갈색 바지를 숨기고 있으면서 빨간 셔츠를 잘도 말하는 곳, 뼈아픈 참사 이면을 들여다보면 곳곳이 이런 현상들로 얽혀 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인 걸 어쩌란 말이냐.

 

 

 

 

 

 

 

3. 풍경의 우호성

 

  누구나 자신이 보는 대로 느끼고 자기가 경험한 대로 생각한다. 따라서 누군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기록한 것이 다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느낌의 진정성까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특히 모든 이국적 시선은 진실과는 별개로 신선한 시각이 될 수는 있다.

 

 

  펄 벅 여사는 우리나라를 무한 애정의 시각으로 바라본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작가의 장편『살아있는 갈대』는 그 좋은 예이다. 구한말에서 해방될 때까지 한국의 근대사를 살아간 4대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외국인의 시선에 비친 우리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0년대 초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 차 우리나라를 방문한 작가의 에피소드 한 자락이 자못 흥미롭다.

 

 

  여사는 지프를 타고 경주 안강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황혼녘 지게에 볏단을 가득 진 농부가 역시 볏가리를 잔뜩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묵묵히 들길을 가더란다. 미국인 시각으로 봤을 땐 농부가 무겁게 지게를 질 게 아니라 달구지에 짐을 다 싣고 편하게 소잔등에 올라타 채찍이나 휘둘러야 상식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농부는 소와 짐을 사이좋게 나눈 채 나란히 들길을 가고 있었으니 여사 눈에는 그것이 무척 신기하게 보였나 보다. 여사는 그 한 장면을 보고 급기야 ‘고상한 국민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격찬까지 하게 된다. 여사의 우리나라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우호적인 시선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 목가적 풍경이 ‘고상한 국민적 정서’와 그리 큰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드넓은 땅에다 도로 사정이 좋은 그들 입장에서는 마차에다 곡식과 사람이 동시에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말 달구지도 아니고 소달구지인데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 우리 입장에서는 볏짐을 하나라도 더 옮기기 위해서 농부도 지게를 질 수밖에 없다. 거창하게 자연이나 동물과 공생하겠다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구한말의 농부는 주어진 환경에 맞는 행동 패턴을 취했을 뿐이다. 그것이 작가의 눈에 신선하게 비춰졌을 뿐이다.

 

 

  ‘마차(carriage - 이 경우 이 단어가 맞는지 모르겠다)의 경험’을 가진 눈이 ‘소달구지(oxcart)의 풍경’을 보고 한없이 낭만적 우호성을 펼쳐 보이는 것. 문학이나 예술이 과장된 희망이나 과도한 서정을 조장해서는 안 되겠지만 가끔 이런 대책없고 무한정으로 따스한 눈길이 싫지는 않다. 모두 지쳐 있는 요즘 대한민국 상황이라면 더더욱.

 

 

 

 

 

4. 주는 만큼 받는 상처

 

  사람들을 만나면 의외로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만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쉽게 주고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사람 관계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건 여러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사람 사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다만 개인적인 좋고 나쁨이 있을 뿐이다. 그가 옳고 그른지는 사실 나와 무관하다. 호의적인 그가 좋게 느껴지면 그 사람은 내게 좋은 사람이다. 비호감인 그가 미우면 그 사람은 내게 나쁜 사람이 될 뿐이다. 만인에게 좋은 사람도 없고, 만인에게 나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찍이 심리학자들은 모든 이를 사랑하겠다거나, 모든 사람에게서 인정받겠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친구가 삼겹살집을 차렸다 치자. 내게 호의적인 그미를 위해 나는 신발 벗고 나설 수 있다. 그미 가게의 번창을 위한 것이라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다른 친구들과 일부러 시간을 내 삼겹살을 먹으러 가고, 반상회에 나가 적극적인 입소문도 내준다. 생고기인지 냉동고기인지, 맛은 좋은지 나쁜지, 국내산인지 수입산인지 등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미에게 필요한 것은 미주알고주알 맛 판별하는 맛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사업을 응원해줄 친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만약 삼겹살집을 차린 이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미의 가게에 발을 내딛기는커녕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되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 보다 깊은 아픔은 없다고 스스로를 결박한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타인에게 상처 준만큼 내가 그 상처를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받은 상처는 가슴팍에 착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지만, 준 상처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사람이다. 따라서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치유법은 내가 받은 상처로 아파하는 만큼 내가 준 상처로 누군가 아파하고 있겠구나, 하는 셈법을 잊지 않는 것.

 

 

 

 

 

 

  5. 후하다는 것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데는 서투른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호의를 얻을 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신선함을 느끼면서도 혼란스러움을 맛보게 해주는 말이다.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답게 몽테뉴가 대단한 통찰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신선하고,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그의 시선이 어딘지 삐딱하게 보인다는 면에선 혼란스럽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후자는 판단유보해도 되겠다. 내가 잠시 혼란을 느낀 것은 내 통찰력이 위대한 사상가에는 터무니없이 못 미쳤기 때문이란 걸 알겠다.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자유자재로 파악한, 불편한 진실을 꿰뚫은 그의 눈길 앞에서 다만 뜨끔해질 뿐이다.

 

 

  천성 깊숙이 선한 사람들은 태생적 유전자가 ‘주책없이 후하게’ 굴도록 설계된 자들이다. 호의나 베풂은 그들의 자연스런 친구이다. 진심에서 오는 그 호의가 서툰 것인지 영악한 것인지 그들은 생각조차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좋아서 나눔을 실천할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선이다. 호의를 베푸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잠시다. 간사한 게 사람인지라 그 다음의 호의가 이전만 못하거나, 기대하는 호의에 다음 것이 못 미치면 이내 실망하고 의심한다. 몽테뉴의 다음 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받아버린 것은 이미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앞으로 후대 받을 것밖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왕은 남에게 주다가 줄 것이 없어질수록 그만큼 심복을 잃는다.”

 

 

  받는 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그 유효 기간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지나친 베풂은 사람들로 하여금 후대를 기약하게 하고, 그럼에도 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선행을 하리라는 것. 한편으로는 호의를 기대하는 그 사람들을 잃을까, 주는 것조차 조절해야 하는 군주까지 있게 된다는 무섭고 서늘한 통찰. 몽테뉴의 저 한 마디는 순한 사람과 탐욕스런 사람이 함께 살아가도록 운명적으로 조직화된 게 인간사라는 것을 깊숙한 찌름으로 보여주고 있다.

 

 

 

 

 

 

  6. 이 봄날

 

  온 나라가 슬픔의 도가니다. 며칠 째 집단 우울에 감염된 사람들로 넘쳐난다. 직접 고통을 당한 분들에 비할까만 근래에 이토록 안타까움과 갑갑함에 절망해본 적도 없다. 세탁소 옷걸이에 걸려 있는 실종 학생들의 교복들. 며칠 째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처연한 그것을 방송사 카메라가 클로즈업한다. 말없이 비춰주는 그 장면만으로도 또 눈시울이 붉어진다. 슬픔을 덜어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일부러 과장된 명랑을 낯빛에 심는다. 독서모임이 있는 날이다. 자유 토론에 들어가면 오늘도 어김없이 눈물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웃음을 되찾을 묘안을 짜본다. 애송시 낭송 대회를 열기로 한다. 떨어지는 봄꽃에게도, 날아드는 꽃가루에게도, 또한 그 봄을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다. 속울음 삼키며 저마다 준비한 시를 읊는다. 가슴 가득 쌓인 절망의 켜들이 조금이나마 낮아지는 기분이다. 이 시간만큼은 슬픔의 그림자는 잠시 미뤄 놓기로 한다.

 

 

  ‘이 봄바람을 어찌할 거나? / 나름 수양했다는 수양버들도 / 저리 흔들리는데 / 대충 산 나야……. /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지.’ 중년의 나이에도 사랑의 불씨는 살아 있더라, 며 누군가 이 시를 읊었다. 성급한 박수와 환호가 이어질 만큼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기야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던가. 어쩐지 사랑 앞에 시시해진 나 같은 목석파도 시구가 외워질 정도로 이 시는 참말로 진솔하게 와 닿는다. 제목도 시인 이름도 출처도 모른다는 낭송자를 대신해 누군가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수동 화백의 그림 에세이『오늘, 수고했어요』에 나오는「이 춘풍」이란 시다.

 

 

  집단으로 우울해지는 것과 봄은 어울리지 않는다. 집단으로 꽃바람이 나, 이 춘풍 하면서 맘껏 까불대고 한껏 발랄해져도 좋을 이 봄날, 여전한 상실감이 우리 곁을 맴돈다. 수양 쌓았다는 수양버들조차 저리 흔들리고, 대충 산 필부필부들은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 할 이 봄이건만, 지독한 슬픔의 바리게이트는 절벽이 되어 바위가 되어 가슴에 부딪는다. 누가 이리 만들었나.

 

 

 

 

 

 

 

 

 

 

 

 

 

 

 

 

 

  7.어쩜 이다지도 영리한

 

  그림 형제 민담집 중에「영리한 엘제」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리한 딸 엘제를 결혼시키려 하는 남자에게 한스라는 청년이 나타난다. 엘제의 영리함을 전제로 한스가 청혼하자 남자의 아내까지 거든다. ‘저 애는 골목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볼 수 있고, 파리가 기침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저녁 식탁에 오를 맥주 심부름을 하러 지하실에 간 엘제는 머리 위 벽에 걸린 곡괭이를 보고 슬피 운다. 한스와 결혼 뒤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 역시 맥주 심부름을 왔다가 곡괭이가 떨어져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식구(엘제의 아빠, 엄마, 하녀, 머슴 등)와 청혼을 하러 온 한스까지 똑 같은 생각으로 ‘어쩜 이다지도 영리한 엘제일까!’하게 된다.

 

 

  드디어 한스와 결혼하게 되고 그 이후에도 엘제 식 영리함은 발휘된다. 죽이 식을까 염려 되어 일하는 것에 앞서 죽을 먼저 먹고, 배가 부르니 곡식 거두는 것보다는 잠을 먼저 자버린다. 결코 영리하지 않은 엘제에게 실망한 한스는 방울 달린 새잡이 그물을 잠자는 그녀 주변에 친다. 잠에서 깬 엘제는 어리둥절해진다. ‘난 나일까, 아닐까?’ 엘제는 고민하며 방울 소리를 울리며 집으로 달려간다.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스를 향해 집안에 엘제가 있냐고 물어본다. 한스는 태연히 그렇다고 답한다. ‘그럼 난 내가 아니구나.’ 놀란 엘제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방울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은 문을 닫아건다. 결국 엘제는 마을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 이후 엘제를 본 마을 사람은 없었다.

 

 

  이 이야기의 첫 문장은 ‘옛날 어떤 남자에게 영리한 엘제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다. 분명 엘제 이야기인데 ‘어떤 남자’인 아버지가 주체로 나온다. 남성적 시각으로 바라본 엘제를 그리는 셈이다. 엘제는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욕망(어쩌면 피해의식일지 모를)과 거기에 동조한 엄마, 또 다른 아버지 격인 한스의 눈으로 본 엘제가 있을 뿐이다.

 

 

  엘제는 영리했을까? 동화나 민담의 일반적 해피엔딩을 따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가면을 벗어 던지고, 외롭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고 믿고 싶다. 남성적 욕망의 덫에 걸려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8. 보너스

 

 

 

 

   **좋아하는 알라디너 분이 소장한 책을 내놓았다.  갖고 싶은 책들이 꽤 많았다. 조금의 망설임없이 그 중 몇 권을 주문했다. 대여섯 권 쯤 되었을까? 그런데 배달된 책은 무려 한 박스!  애초에 내가 주문한 책이 무엇인지 까먹을 정도로 다 맘에 드는 책 뿐이었다. 원서부터 시집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나긋나긋하고 여리여리한 목소리까지 덤으로 선사해주신 그미 전화를 수업 중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받지 못했다. 더구나 난 갱상도 토박이 아닌가. (사투리 컴플렉스 있어서, 주눅이 마구마구 들었다. ㅠㅠ)  박스를 뜯었을 때 감동했던 건 맘에 든 책들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미의 섬세한 마음결이 담긴 소품도 한몫했다.  저 독서용 미니플래시를 보라!!  - 내가  책을 받은 건 한 달도 훨씬 지난 것 같다. 이제나저제나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지 했는데, 이렇게저렇게 바쁜 날들에 엎어지다 보니 이제 겨우 알라딘에 접속했다.

 

어여쁜 알라디너님, 늦은 안부 여쭙니다. 여여하신지요?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4-05-11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집단으로 우울한건 봄에 어울리지 않는데 이번 봄은 봄도 아닌가봐요.
어머님, 좋아하시는 회 앞으로도 많이 많이 드시고 계속 행복하시기를 바래요~~~

페크pek0501 2014-05-13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리신 글, 잘 읽었어요.

"따라서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치유법은 내가 받은 상처로 아파하는 만큼 내가 준 상처로 누군가 아파하고 있겠구나, 하는 셈법을 잊지 않는 것." - 좋군요...

저는 이런 생각을 취한 적이 있어요. 내가 받은 상처라서 다행이지 이 상처를 내가 남에게 주었으면 어떡할 뻔했나, 하는 생각이요. 때린 사람은 다리 뻗고 못 자는 법... 입장을 바꾸어 보면 차라리 제가 상처 받는 쪽이 낫더라고요.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데는 서투른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호의를 얻을 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 중요한 것 배워 갑니다. 몽테뉴는 천재인 듯...

2014-05-18 0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