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갑질도 배운다

 

‘갑질’도 배운다.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약자에게만’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게 갑질의 특징이다. 저녁모임 자리가 있던 식당에서였다. 두 여종업원이 한 조가 되어 서빙을 했다. 한 명은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외국인 출신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선배격인 외국인 종업원은 아르바이트생을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며 매서운 눈초리와 어눌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다. 숯불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다며 ‘저리 비켜. 뒤로 나와!’ 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모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뭐라 마땅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갑질도 배우는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이국에서 온 그녀가 처음 일을 배울 때 혹 누군가로부터 저런 ‘갈굼’을 당하지 않았을까.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배운 며느리는 못된 시어머니가 될 공산이 크다. ‘반면교사’ 하기보다 ‘모방하기’ 어법을 따르는 건 얼마나 익히기 쉬운 학습법인가. 자신이 당한 설움을 고대로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 복수인가. ‘더 약자인 동료’를 괴롭혀 내 아픔을 위로받는 건 얼마나 적절한 보상인가.

 

 

‘어눌한 일솜씨’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저래도 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옆 친구가 거들었다. “괜찮아, 일주일만 지나면 저 관계도 역전될 거야.” 그때 얼음덩이 하나가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일주일 뒤 자신의 운명을 그 이방인은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통 기한 촉박한 권력의 맛을 가장 실감나게 소진하기 위해 그미는 저토록 발악에 가까운 갑질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 순진한 아르바이트생 천사도 언젠가는 초강력 여전사임을 마다하지 않는 현재 자신의 입장을 능가하게 되리라는 원초적 두려움 같은 것, 그것이 그녀를 거친 언행으로 내몬 것은 아닌지.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에 들어선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는 갑질을 배우는 것 밖에 없었으리라는 이 당혹감.

 

 

 

 

 

 

2. 입술 헤르페스

 

또 입술이 부푼다. 전날부터 입술 주변이 간질간질하고 머리가 무지근해지더니 어깨와 팔뚝으로 통증이 몰려왔다. 따뜻한 곳에 등을 대 지지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쓰러지듯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입술에 기포가 생기고 발갛게 흉이 나기 시작한다. 구순포진이 도진 것이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 자주 입 주변에 물집이 퍼지고 이내 헐곤 했다. 이 하찮고도 귀찮은 증상은 달갑지 않은 친구처럼 불쑥불쑥 찾아와 내 일상을 휘젓는다. 젊은 시절부터 쭉 그래왔다. 시험을 앞두고는 치통과 함께, 사랑을 앓으면서는 두통과 함께 슬며시 따라붙던 것이 이젠 만성증상이 되어 버렸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이라는 저 전제는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조금 수정해도 좋겠다. 내 경우 단순히 몸이 아픈 것만으로는 구순포진이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맘까지 아파야 입술이 부풀어 오르게 된다. 맘에 사무침이 있거나 괴로움이 스미면 육체적 피곤으로 연결되고 몸은 그것을 감지해 나쁜 신호를 작동한다.

 

 

“밀려오는 파도 말고 밀려나가는 파도가 힘이 세고 매듭 묶이는 일보다 매듭 풀리는 일이 더 유혹이라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때로 휘청거리곤 하는 것이다. 그만 저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러다 그대와 함께 무너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잠복되어 있는 헤르페스 균을 도발하는 저 마음의 괴로움을『몰락의 에티카』에서 뽑은 이 말과 연결해본다. 담아야 하는데 멀리 밀려가고, 묶어야 하는데 쉽게 풀려버리는 게 사람 사는 일의 과정이다. 놓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지도 못하는 그 틈새에 마음의 병이 서린다. 그게 ‘보통 사람의 보편적 정서’이다.

 

 

몸만 가벼이 아프면 한 사흘이면 족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아무리 가벼운 증상이라도 몇 주는 헤매야 한다. 몸 가벼이 아픈 것은 아프지 않은 것과 같지만 마음 아픈 것에는 가벼움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누군가 부푼 입술로 나타나거든 저이는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마음이 피로한 것이구나, 보아도 무방하다. 천형처럼 ‘나았다 도졌다’를 반복하는 입술 헤르페스.

 

 

 

 

 

3. 배려도 지나치면

 

딸내미랑 집 근처 단골 미용실에 들렀다. 젊은 부부가 오순도순 꾸려 나가는 곳인데, 아내의 일손을 돕기 위해 남편은 직장에서 야간일만 전담할 정도로 성실하다. 내가 염색을 하는 동안 딸내미는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렸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텔레비전에서 CNN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영어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염색약 냄새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참을만했다. 원체 신뢰감을 주는 부부인데다, 오죽하면 손님 앞에서 저 방송을 틀었을까 싶었다. 남편분 직장에서 승진 시험을 앞두고 영어 듣기 공부를 하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손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방송은 딸내미가 파마를 마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못내 모른척했다.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심정이 웬만하면 이해하자,는 감정보다 훨씬 절실할 것임을 알기에.

 

 

드디어 미용실을 나서는 시간, 열심히 사는 부부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승진 시험으로 영어를 치르나 봐요? 공부하려면 힘들겠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여사장님 눈이 동그래졌다. “따님이 그 방송 틀어놓은 거 아니에요?” 맙소사! 미용실에서 영어 방송을 들어야할 만큼 절박한 일이 딸내미에게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런 무례를 범할 만큼 대범한 아이도 못되었다. 부부가 동시에 말을 이었다. “우린 따님이 영어 공부하려고 틀어 놓은 줄 알았어요.” 한다.

 

 

다시 필름을 돌려 보자면 이렇다. 테이블에 놓인 신문 밑에 리모컨이 있었고 그것이 딸내미 팔꿈치에 눌려 저도 모르게 CNN 방송으로 채널이 바뀐 모양이었다. 딸내미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미용실 부부는 딸내미가 영어 공부하려고 그랬나 보다 했던 것. 나는 나대로 미용실 남편분이 영어 공부를 하나 보다 하고 넘겨짚은 것이었다. 까딱하면 서로 오해할 뻔했다. 오늘의 결론? 배려도 지나치면 오해를 낳는다. 그러니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는 거다. 단, 그 순간도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4.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 위안이 있다 / (···) /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이란 시의 부분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에 꽂힌 후 폴란드 시인에 대해 더 검색하던 중 알게 된 시인이다. 쉼보르스카에 비해 덜 서정적이지만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진실에 가닿으려는 시인의 노고가 강풍에 흔들림 없는 나무둥치 같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자신의 희곡「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석쇠도 필요 없을 만큼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일갈했다. 갇힌 공간에서 서로 욕망에 뒤엉키고 비애감에 젖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발설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촉수가 적나라하리만큼 발달한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가 그런 시선을 유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관심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어린 아기조차도 누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품는지, 누가 자신에게 적대적인지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안다. 달리 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를 어릴 때부터 무의식중에 학습하는 것과 같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삶의 욕망과 비애가 타자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는 그 절정의 순간에 타자를 지옥으로 인식하고 탄식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로 우리가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말은 자가예프스키의 단언처럼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라는 것. 타인을 만나 지옥일 때보다 타인을 만나 천국일 때가 일상에서는 훨씬 더 많다. 깨끗한 하루의 시작점, 누군가의 맑은 이마를 보며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부정의 언사보다 긍정의 언사이기 쉽다.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타인은 아름다움일 때가 훨씬 많다. 자가예프스키의 이런 긍정의 독백에 시선이 가는 아침이다.

 

 

 

 

 

5. 행복한 카뮈

 

사람과 사람 사이는 상호보완적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좋은 제자는 스승이 만들고, 훌륭한 스승은 제자가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는 좋은 제자였고, 그의 스승인 루이 제르맹과 장 그르니에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루이 제르맹은 알제리 빈민가의 한 소년을 노벨 문학상 작가로 거듭나게 한 첫 번째 스승이었다. 궁핍한 살림을 꾸렸던 카뮈의 어머니는 초등과정을 마친 카뮈를 상급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 알제리 하층민 소년들은 노동자가 되어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부 열망으로 가득 찬 카뮈를 제르맹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카뮈의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성심껏 지도해주었으며, 장학금을 받고 중학교에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소년 카뮈에게 글 쓰는 재능과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아봤던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탄 카뮈가 어머니 다음으로 제르맹 선생을 호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장 그르니에 또한 카뮈에겐 잊을 수 없는 스승이다. 카뮈는 선생을 신뢰했고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에게 기쁨이라고 편지를 썼다. 스승의 산문집『섬』에도 그 유명한 서문을 썼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이를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서문은 그의 명성 덕에 스승의 산문집 자체보다 더 유명한 것이 되어버렸다. 진작 카뮈는 그 서문이 적힌 책을 받아 보지도 못한 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사고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스승 장 그르니에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살다 보면 도처에 스승이 가득하다. 나를 이끌고 채찍질하는 모든 이는 루이 제르맹이요, 내게 충고하고 쓴 약을 주는 모든 이 또한 장 그르니에다. 내 곁에서 크고 작은 자극을 주는 모든 스승들을 하나하나 불러내고 싶은 밤이다. 카뮈의 행복에 견줘도 좋을 만큼, 제 곁 스승을 확신하는 당신이라면 이 깊은 밤 맘껏 행복해도 괜찮다.

 

 

 

 

 

6.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J·D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에는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앤톨리니 선생이 주인공 홀든 콜필드에게 성추행을 하는 장면,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콜필드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 센트럴 파크 연못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유머 깃든 순정이 깃든 장면 등이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학교 선생의 성추행 장면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묘사로 작동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하는 콜필드의 대사 장면은 그 장면 자체를 작가가 책 제목으로 뽑았을 만큼 순수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센트럴 파크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마음이다.

 

“센트럴 파크에 있는 연못을 지나가 본 적이 있으세요? 센트럴 파크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연못이요. 아주 작은 연못이 있어요. 오리들이 살고 있는 곳 말이에요. 오리들이 그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잖아요. 봄에 말이에요. 그럼 겨울이 되면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스쳐 지나는 인연에 지나지 않는 택시 기사 호이트 아저씨에게 콜필드가 한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 저런 엉뚱한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런 의문은 동심이 풍부한 어릴 때나 그것을 잃어버린 어른이 되었을 때나 별 차이 없이 생겨난다. 살다보면 아주 익숙한 풍경인데 그 풍경이 느닷없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섬’에 급기야 한 점 재기발랄한 의문이 생길 때가 온다.

 

 

아주 작은 연못에 오리들이 복작댄다. 봄의 기지개를 시작으로 조금씩 발길질하던 오리는 한여름의 풍성해진 자맥질을 지나 소요 없는 겨울을 맞이한다. 겨울을 맞이한 오리는 더 이상 연못에 머물 이유가 없다. 헤엄칠 물이 다 얼었기 때문이다. 그 많던 오리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제비처럼 따뜻한 남쪽나라로 간 것일까, 스님처럼 동안거에 든 걸까. 아주 작은 연못의 겨울 오리떼는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숨은 오리떼를 찾아 나목의 숲을 헤매는 담담한 풍경, 그것이 겨울이란 계절의 존재이유이다.

 

 

 

 

 

 

 

7. 겨울강  

 

박남철 시인이 떠났다. 시적 성과로 ‘쩡쩡’ 울렸던 만큼 크고 작은 악행으로 ‘쩡쩡’ 울기도 했을 시인이 끝내 세상과 등졌다. 투병으로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시인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연민한다. 이제 편해졌으면 한다. 저자에 오르내리는 시인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여성 입장에서 분노하고 피해자 입장에 동조하던 그 마음조차 내려놓기로 한다. 모든 걸 떠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온전히 너그러워진다는 건 살아남은 자로서 가장 하기 쉬운 애도법이다.

 

“겨울강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돌 하나를 던져 본다 /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 쩡, 쩡, 쩡, / 돌을 튕기며, 쩡, /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 쩡, 쩡, 쩡, 쩡, 쩡 / 강물은, 쩡, /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아, 쩡 / 봄이오면 녹아 흐를 것들아, 쩡, 쩡, /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 쩡, 쩡, 쩡, 쩡, 쩡 / 겨울 강가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 본다 /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서 제 / 바닥에 닿을 돌들을, / 쩡 쩡 쩡 쩡 쩡 쩡 쩡”

 

시인의 대표시「겨울강」을 필사한다. 누군가 말했다. ‘악행보다 더 나쁜 건 위선’이라고.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눈썹이 떨리고 옆구리가 결릴 만큼 뜨끔해진다. 숱한 위선의 행적 앞에서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지르기는 어려워도 위선을 행하기는 얼마나 쉽던가. 밥 먹듯 위선을 떨면서도 떳떳한 척할 수 있는 건 그 거짓이 간접적인데다 비겁함은 어느 정도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문 악행을 하고도 떳떳할 수 없는 건 그 공격성이 직접적인데다 치명적인 상처를 안기기 때문이다.

 

겨울강이 제 아무리 쩡쩡 얼음장 조이는 소리를 내도 강은 강이고 물은 물이다. 얼음 위, 던져진 돌들은 마법이 풀리듯 봄 오면 기어이 바닥에 가 닿는다. 겨울강을 내려다본다. 아직 얼지 않은 저 물빛, 악행보다 위선을 경계한 시인의 눈물인양 따끔거리듯 반짝이며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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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4-12-11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언니 글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특히 더 맘에 착착 감기네요!!!!!
몸과 마음이 다 힘드셨나봐요????ㅠㅠ 워낙 묵묵하게 버티는 분이라 더 안타까와요!!! 이제 좀 편안해지셨기를...... 언니~~~ 사랑해요!!!❤️❤️❤️❤️❤️

다크아이즈 2014-12-12 17:40   좋아요 0 | URL
이리 과도하게 하트를 주시면 몸둘 바를 모르잖아요. ㅋ
주신 사랑의 세제곱을 비비아롬모리께 되돌려드릴게요.
근데 닉이 언제 이걸로 바뀌었대요? ~~

기억의집 2014-12-1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어리숙한 학생이 계속 당하면 어쩌죠. 갑질도 성격이라... 못하는 사람은 못 하더라구요.
2. 전 심적으로 힘들어도 겉으로 아프진 않는데, 힘드시겠어요. 요즘 저의 남편이 대상포진인가 싶어 걱정인데, 다리 신경이 계속 아프다고 하더라구요. 대상포진의 초기 증상이 그렇다해서 걱정인데, 입술이라 밖에 다니실 때 신경쓰이시겠어요! 맘 편한 게 최곤데, 저도 지금 마음 한 켠에 짖눌리는 게 있어서.... 빨리 낫길 바랍니다.
3. 저 이 책 제목 읽고 완전 뿜었어요. 아니 어떻게 찾으셨어요. 이 책~
7. 박시인의 사생활이 갑자기 궁금해졌다는.. 검색해 봐야겠어요.

다크아이즈 2014-12-12 17:47   좋아요 0 | URL
1. 기억의 집님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맞아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그 여학생 너무 착실했거든요. 갑질 못할 거 같아요.

2. 아주 오랜 뒤에 알게 되었어요. 단순히 육체가 피곤한 게 아니라 마음까지 불편해야 입술헤르페스가 온다는 걸요. 대상포진도 일종의 헤르페스라니 건강관리 잘하셔야겠어요. 짓눌리는 마음 없는 일상이 하룬들 있겠어요, 넘 마음에 두지 마시길요.

3. 진짜 제목 그렇네요.ㅋ 배려로 검색한 것 중 젤 이쁜 걸로다가 걸었어요.ㅋ

7. 검색까지 하셨구나. 오래 전 이야기랍니다.

기억의집 2014-12-1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세상에나. 지금 검색해 봤는데, 이 양반이야말로 갑질멘탈이네요. 장례식장이 저의 집하고 가까운 곳에서 치룬 것으로 보아 저의 인근 동네에서 같이 살았던 양반인데, 참 그러네요. 쓰레기새끼인데, 시인이란 명칭도 달아주고..게다가 문지 실망스럽네요. 저런 소문 알았을텐데 버젓히 시집도 내 주고...

2014-12-13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4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4-12-2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려도 지나치면`의 글... 공감해요. 저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말을 하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많죠. 침묵이 오해의 불씨가 되는 거죠.

어떤 일을 추론해 보고 상상해 보고 예측해 보다가 내린 결론은 이것.
알 수 없 었 다...
사실 말을 주고받아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일 때가 있기 하지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 해 잘 마무리하시길...

2015-01-01 0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6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가님이 먼 길을 오셨다. 작가와의 만남에서 사회를 보았다. 대담 원고도 직접 마련했다. 사회 보는 것은 두 시간 남짓이지만, 대담 원고 준비는 며칠이 걸린다. 원고 마련하는 게 몇 배나 힘들다. 워낙 달변이시라 마련한 질문지의 삼분의 일은 날렸다. 단답형 작가는 질문 항목이 많이 필요하지만 선생님의 경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말이 말을 이어가는 형국이라 질문지가 없어도 진행이 가능할 정도였다. 참고로 작가와의 대화 질문지 원고를 올려본다.

 

 

 

<선생님을 곁에서 본 소감>

 

1. 잘 생기셨다. 고희가 코앞인데 오십 대 중반으로 보임.

 

2. 날렵한 몸매를 지니셨다. 할아버지 삘이 절대 아님. 말 그대로 청년작가 분위기

 

3. 담배 피는 모습마저 섹시하셨다. 잠깐 휴식 시간에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셨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몇몇이 황홀경에 빠졌다는. 재바르게 누군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내줬다. 그 어떤 절경보다 멋진 장면이지만 작가의 프라이버시 존중을 위해 공개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 

 

4. 남저음 목청의 중후한 목소리를 지녔다. 달변가가 저 목소리로 강의한다고 생각해보시라. 참 듣기 편안하다. 열정마저 넘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5. 이 모든 것의 갑은 무엇보다 작가 정신이 투철하시다는 것,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숨결로 느낀 순간이었다.

 

 

 

<대담 내용 간단 정리>

 

  아버지와 나의 세대는 광풍의 질주시기였다. 개별자의 꿈보다 공동체의 희망을 위해 야수적으로 일만 했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라는 사회적 명령에 저항할 틈조차 없었다. 아버지들이 바친 헌신으로 우리는 이만큼 누리고 산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의 눈물과 땀의 결과가 오늘날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부권은 내려앉고, 가족은 해체되기 직전이다. 물질에 오염된 환자만 양산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했지만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각자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행복하다. 세상이 주입해준 삶이 아니라 하루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든 행복해질 준비는 되어 있다. 다만 우리가 불행한 것은 더 가진 자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벽 넘고, 달 뒤엔 무엇이 있을까. 늘 삶의 이면에 대해 의심하며 탐구해야 한다. 표면 구도 너머의 욕망이 없으면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눈앞에 출렁이는 황금물결의 완벽함이 이 세계의 완벽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허기와 결핍의 문 앞에 서성여 본 사람은 그 이면의 눈썰미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내 안엔 짐승이 우글거린다. 이 짐승들은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들을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품을 쏟아낸다. 창조적 자아가 발현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자기 갱신, 자기 변혁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늙어도 젊다. 청춘은 내부의 명령이지 표피적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내 안의 창조적 짐승 한 마리를 끊임없이 키워라.

 

결국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사는 존재이다. 사랑의 불모지에서 헤매는 우리, 사랑의 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랑의 끝은 결국 사랑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대담원고>

 

*오프닝 - (성악 합창으로 오프닝) 먼 길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어서 무척 영광입니다. 올해의 우리 도시 한 권의 책이 선생님 작품『소금』입니다. 이 책을 중심으로, 작가님과 얘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도시에 와보신 적은 있는지요? 이곳에 대한 이미지나 여행담이 있다면 잠깐 들어봐도 될까요?

 

 

*등단 40년 만에 고향 논산(강경)으로 가셔서, 펴낸 40번째 소설이『소금』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소금에 나오는 강경읍이 실제 선생님 학창 시절 강경읍 모습하고 비슷한지, 아버지 캐릭터 선명우와 작가님과의 연관성도 궁금합니다.

 

 

*흔히 ‘자본 3부작’으로 『비즈니스』,『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소금』을 언급합니다. ‘자본주의 논리나 소비 중심 사회에 저항’ 하는 작가정신이 느껴지는데 이런 주제로 작품화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소금』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도 좋은데요,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꼭 둘로 나눠야 한다면, 하나는 스스로 가출을 꿈꾸는 아버지, 다른 하나는 처자식들이 가출하기를 꿈꾸는 아버지로 나눌 수 있었다.” (p.150∼151) 선명우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작품으로 토론을 해보면 얼마간의 독자들은 이 부분에서 정서적 충격을 받습니다. 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절규하는 독자들도 있거든요. ‘아버지의 가출’이라는 이 도발적인 발언에 대해 선생님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빨대론 부분도 여쭤 보고 싶습니다. 빨대 하나 들고 세상의 구조에 충실했던 이 땅의 아버지들. 핏줄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 염부1, 염부2로 살아온 우리 아버지들을 옭아매었는데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부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빨대론은 이 사회에 여전한 건지요?

 

 

*얼마 전 신문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만났습니다. “압축성장시기는 ‘불’의 시대였다. 그 결과 ‘물’이 부족한 사회가 됐다. 오직 불같이 살았던 애비들의 시대를 부정해야 한다. 죽여야 한다. 새로운 삶의 동력을 물에서 끌어내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선생님께 불과 물의 이미지는 어떤지 ‘소금’에서의 아버지와 연관 지어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께 따라 붙는 청년작가라는 별호가 무척 맘에 드는데, 선생님께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면 누구나 청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희를 바라보는 연세에도 청년 작가를 지켜온 구체적인 비결과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촐라체』를 아드님 박병수 연출가의 작품으로 연극 무대에 올린 적 있는데, “소설은 원작일 뿐이고 연극은 연출자의 작품이다. 원작자이자 아버지의 작품이 아니라 너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고 말씀하셨는데요, 원작자로서 저런 쿨한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이 선생님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더불어『은교』영화 때도 별 간섭하시지 않으셨는지요?

 

 

*잠깐 쉬어가겠습니다. 시 한 편으로 분위기를 돋우겠습니다. 전문 낭송가의 목소리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듣도록 하겠습니다.

 

 

*소설에서 첫사랑인 세희 누나 부분이 개인적으로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작가님 개인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에세이『스무살을 건너는 8가지 이야기』에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때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전반기라고 하셨습니다. 가난 때문에 가족들이 싸울 수밖에 없었고, 등록금이 없다고 아버지가 대학을 포기하라고 했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 하시는데요. 외로움을 구원받아 보려고 소설을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결핍이나 외로움이 문학하는 큰 이유가 되는 거지요?

 

 

*인터뷰나 강연 내용을 보면 따뜻한 카리스마가 전해져옵니다. 인상 깊었던 말씀은 “사랑의 손가락이 보름달을 보고 보름달이라고 하는 건 옳지만, 더 가진 자들이 이것이 보름달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유하신 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사회 현상이나 사람을 대하는 선생님만의 시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 국내외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도 관심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애정이 가거나 권할 만한 소설이나 인문서, 역사책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1993년 절필 선언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절필 전과 후로 선생님 문학관이 나뉜다고 스스로 말씀하셨는데요, 절필 선언 이유와 전후의 작가관의 변화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심각한 얘기만 하면 너무 무겁지요? 여기서 71.12.6일자 선생님의 연애편지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25세 무렵 그야말로 청년 박범신 시절의 감수성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연애편지 대상은 당연히 지금의 사모님입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당신이여! 콘사이스를 내다 파는 나의 이웃이나 / 막걸리로 창자가 뒤틀려도 어찌할 수 없었던 어느 날 / 나의 허물을 당신은 너무 나무라면 안 된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 생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었던 / 고귀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을 붙잡아 매달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개성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그 생을 모자이크 해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곰, 우리 좀 더 겸손해지자. 생이라는 놈은 그냥 오만하게 놔두고 우리는 그 오만의 표피에 우리 나름의 풀칠을 하자. 그래서 우리의 성실과 참다운 인내를 그려 붙이자. 그렇다. 우린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은 우리가 백 번 겸손해도 좋을 만큼 깊고 뜨겁고 목이 멘다. 목이 멘다.>

 

 

*“아직도 아내는 나를 보면 설렌다.”고 자랑하신 인터뷰가 기억나는데 소금에 나오는 김혜란 같은 캐릭터와는 정반대의 사모님과 살고 계시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가출을 감행한 채 끝내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상을 구상하셨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분명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셨을 선생님께 가족은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상명대 대학원에서 ‘소설창작학과’를 개설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설 문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무척 반가운 소식입니다. 전업 작가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의 양립에 대한 갈등도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의 구체적인 글쓰기 방식이 궁금합니다. 하루에 쓸 분량과 시간을 정해놓고 쓰시는지 아니면 자유롭게 쓰시는 타입인지.

 

 

*여전히 논산(강경)과 서울 생활을 번갈아 하시는지요? 두 곳의 일상을 비교해 들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구상하거나 출간될 작품이 있으시면 소개해주십시오.『소소한 풍경』이 가장 근작인 걸로 아는데 작품 소개말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말씀 듣고 더 많은 독자들이 선생님 책을 사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시간입니다. 독한 질문일수록 좋습니다.

 

 

*클로징 - (쳄버오케스트라 클로징) 박범신 작가와의 대화에 동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타 인터뷰 상황 맞춰 애드리브로 마무리)

 

 

 

 

<작가 사인회>

 

 

 

<미니 강연>

 

 

 

<사회용 질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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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11-23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 멋져요~ 진행사진도 올려주시징!! ^^
박범신 작가님은 TV에서만 보고 실제 뵌 적은 없어서 궁금하네요.
우리 어릴 때 박범신 작가님 소설에 열광했는데... 소금도 봐야겠어요.

다크아이즈 2014-11-24 06:43   좋아요 0 | URL
연세에 비해 훈남인데다 마력의 목소리까지.
그치 7, 80년대 때 김홍신 작가와 더불어 많이들 읽지 않았었나요.
아침이 너무 늦게 오는 게 참 좋네요. 일찍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껌껌하지 왠지 시간을 번듯한 느낌. 오기언냐, 오늘도 좋은 하루 시작하세요~

라로 2014-11-2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박작가님 답변도 간단히 올려주시면 좋겠는뎅~~~ㅎㅎ

페크pek0501 2014-12-0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게 지내시는군요. 서재에 뜸했던 이유를 헤아리게 되네요.
글 쓰는 취미를 가진 자는 작가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 법인데 질문지 작성 잘 하셨네요.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허기와 결핍의 문 앞에 서성여 본 사람은 그 이면의 눈썰미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위안 한 줄 얻어 갑니다.
 

 

 

 

1. 도서정가제 유감

 

  당분간 나의 책 사는 주기는 느려질 것이다.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사두면 좋겠다 싶은 것은 정가제 시행 전 대폭 세일하는 기간에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느려진, 책 사는 주기를 평소대로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귀차니즘’과 친구인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것보다 집안에 편히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책을 사는 쪽을 선호한다. 당분간 옛날만큼의 할인폭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책 사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책을 사는 게 여전히 ‘편리하고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가장 큰 명분은 ‘동네 책방 살리기’이다. 그간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높은 할인율과 무료 배송이라는 매력적인 마케팅으로 그나마 열악한 대한민국 독서 시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동네 서점들은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계란과 바위의 싸움에서 당국이 계란 편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계란이 타조알 된다고 바위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15퍼센트 이내로 도서 할인율을 제한한다지만, 편법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간접할인이라는,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패들을 동원할 것이다. 카드·통신사와의 제휴, 마일리지 지급율 인상 및 다양한 적립금 이벤트, 매혹적인 경품 잔치, 여전한 무료 배송 등을 내세워 기존의 고객을 유지·확보하게 될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간 만큼의 책값 이익은 영세 출판사나 동네 서점까지 가닿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네 책방 살리기라는 명분은 무색해지고 만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속 깊은 뜻’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책이라는 문화적 특수 공산품의 할인율을 당국이 설레발치며 규제한다는 게 어쩐지 맞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규제해서 약자나 소비자가 덕을 볼 수 있으면 좋은 시스템이지만, 규제해서 강자가 덕을 보거나 모두가 부담을 느끼는 시스템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직은 지켜볼 단계지만 도서정가제가 본래의 취지에 가닿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2. 엄마에 대하여

 

불안하면 확인하게 되고, 미덥지 못할수록 보채게 된다. 고구마를 구우면서 하마나 익었을까 젓가락으로 찔러대는 건 행여 그것이 탈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보러 가자는 약속을 몇 번이나 다짐 받는 건 상대에 대한 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관심 가면 불안해지고, 마음 주면 보채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스스로 보채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한없이 평온하고 미더운 상태, 그건 에로스적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거짓 감정이다. 에로스의 속성에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 과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구속함으로써 내 불안을 자초한다. 지루하면서도 다이내믹한 감정 소모가 이어진다. 한 마디로 진실로 사랑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의 특질이다. 그 사랑의 불꽃은 종국엔 재만 남긴다. 그 재는 안타까이 오래 가는 성질의 것도 못 된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허용된 감정 안의 유한성의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시공간에서 자유롭다. 오직 사랑이란 본질 자체에만 기댄다. 따라서 그 사랑은 무심하다. 모든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 그 꼭대기에 무심함에 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기에 불안도 집착도 없다. 범접 불가한 그 사랑의 대상 1호는 내게 ‘엄마’이다. 애증이란 검증을 거칠 필요조차 없는 사람, 집착과 연민에서 자유로운 완전무결한 대상. 그러기에 이토록 무심하고도 뻔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덜 사랑할수록 영원히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진짜 사랑하면 그 말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랑을 확인하고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하면 한없이 무심해질 수 있다. 그 사랑이 곧 내 마음인지 스스로도 잊을 만큼 항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도 않은, 늙은 엄마에 대한 이 직무 유기 사유서를 엄마는 이해할 것이다. 근데 무심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이런 반성문조차 필요 없는 거 아닌가.

 

 

 

 

3.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퍼즐 맞추기식 소설은 집중도를 요한다. 아귀 착착 맞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그 어떤 친절도 베풀지 않는다. 처음부터 집중해서 읽어라, 는 작가의 한마디 충고만 있어도 독자는 바짝 긴장해서 읽을 텐데. 실은 그러한 충고를 충실히 따른다 해도 그 게임의 승자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 칼자루를 쥔 자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짜놓은 작가의 그물망에 독자는 걸려들게 되어 있다. 독자는 작가의 펜 끝을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그 게임에 말려든 들었다고 독자로서 억울할 것인가.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작가가 의도한 바에 걸려들어야 제대로 읽은 게 되니까.

 

 

퍼즐 맞추기식 소설의 약점은 독자로 하여금 자칫 그것이 ‘의미없다’ 라는 평을 낳기 쉽다는 거다. 하지만 곱씹으며 꼼꼼하게 읽는다면 분명한 보상을 준다는 매력 또한 숨길 수 없다. 보상의 형태는 ‘충격’과 ‘여운’이다. 진부하고 평범한 두 낱말이지만 이보다 더한 작가에 대한 찬사가 어디 있겠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다시 읽는다. 볼 때마다 새롭게 눈길 가는 곳이 나온다. 오늘은 등장인물 사라 부분을 퍼즐 맞추기 해본다. 딸 베로니카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놀러온 토미에게 그녀는 추파를 던졌을까. 작가는 직접적인 답 대신 묘사와 대사로그 정황을 중계해준다.

 

 

베이컨 요리를 만들려고 허둥대는 가운데 노른자 하나를 터뜨리면서도 토니를 관찰하는 장면, 서랍장에 몸을 기대며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마라고 뜬금없이 하는 말,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 토니에게 다른 화제로 말머리를 돌리는 일, 바란 적 없는 토니에게 계란을 하나 더 얹어주는 행위, 달궈진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던져 넣고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오르자 파괴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것, 둘만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토니를 향해 미소 짓는 일, 손을 높이 들어 흔드는 게 아니라 허리께에서 수평이 되게 들어 작별 인사를 함으로써 토니로 하여금 좀 더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아쉬움을 유발하는 것. 급기야 “어머니 멋지시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베로니카에게 하게 되는 토니.

 

 

작가는 이 모든 디테일한 정황들을 소설적 장치로서 활용한다. 묘사와 대사로 이루어진 이런 것들은 주인공들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단서가 되고, 주제로 나아가는 밑돌이 된다. 처음 읽을 때는 그것들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음미하면서 눈과 마음이 동화되다 보면 작가의 의중까지 파악된다. 하지만 소설을 누가 두세 번 되뇌며 읽기를 즐긴단 말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만 그 의미가 제대로 맞물린다는 작가의 인터뷰에 호의적인 독자라면 이 퍼즐게임 같은 철학 소설에 한껏 빠지게 될 것이다.

 

 

 

 

4.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관계 망에서 언어만큼 자신의 위치를 잘 말해주는 것도 없다. 맘만 먹으면 우리는 십 분 이내에 관찰 대상자의 현재 계급 지도(地圖)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대상자들끼리 쓰는 언어 속에 모든 계급적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목표를 삼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현실적 시스템은 그것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문자 생활이 발전되고 세련될수록, 인류는 계급의식을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고착해나갔다. 인간 운명의 공통적 질서는 미개하고 야성적인 사고를 개조하는 일이었다. 문자가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는 믿음이 일차원적인 사유보다 더 높은 의식적인 사고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을 낳았고, 자연스레 계급의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착하다’라는 말을 예로 들자. 그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쓰는 말은 되지만, 아이가 어른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티나가 ‘우리 시어머니 참 착해요.’라고 목젖 꺾인 하이톤 콧소리로 말할 때 우리는 별 뜻 없이 크게 웃어젖힐 수 있다. 그 웃음은 착하다, 는 말의 사회적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아량을 담고 있다. 그것은 착하다, 는 말의 계급적 한계를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반면에 선하다는 말은 어른, 아이 구별하지 않고 쓸 수 있지만 대개 전자에 더 많이 쓰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낱말의 영어 뜻은 같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그 둘의 쓰임새는 사전적 풀이부터 묘하게 다르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를 때 착한 것이 되고, 거기에 도덕적 판단 기준이 더해지면 선한 것이 된다. 단순히 어른(권력)의 질서나 요구를 잘 따르면 착한 것이 되고, 거기다 도덕적 판단이란 막을 거르면 선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계급 언어의 산물인 착한 것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아도 좋다. 요구하면 따르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일방적 착함 대신, 부당하면 거부하고 곤란하면 거절하는 판단의 선함도 나쁘지 않다.

(* 이 페이퍼는 <곰곰생각하는 발님>의 최근 페이퍼를 읽다가 공감하는 바가 있어 작성한 거임.)

 

 

 

 

5. 본성을 거스르는 노력

 

좋은 소식은 실바람처럼 잔잔하게 오지만, 나쁜 소식은 강풍처럼 휘몰아쳐 온다. 몇 백 명이 동시에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낮지만 몇 백 명이 동시에 수장될 확률은 높다.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솟아나는 기적은 일어나기 힘들지만,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목도한다. 나쁜 소식 뒤에는 꼭 인재(人災)라는 말이 따라 붙고, 이는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인간은 어질고 의롭게 태어났을까. 성선설의 근간을 이루는 인의(仁義)가, 말하기 좋은 당위의 사유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 인간 깊숙한 곳에는 욕망이나 본능 같은 실체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인의는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이 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다. 그런 착실한 성정이 선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면 왜 인간은 욕망에 허덕이고 본능에 몸부림 칠 것인가. 배고프면 밥 찾고, 추우면 껴입고 싶고, 힘들면 눕고 싶고, 예쁘면 갖고 싶은 게 인간의 욕구이다. 자연스런 이런 현상은 인의라는 고상한 명분 앞에서 결코 주눅 들거나 꺾이지 않는다. 성악설이 성선설에 비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효도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선천적 범주가 아니라 인위 즉 교육이나 훈련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은 이성적 이상의 사유에 속하는 것이고, 순자의 성악설은 현상적 현실의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 큰 고민 없이 성선설보다는 성악설 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래야 어제오늘 벌어지는 여러 ‘나쁜 뉴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제게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쾌락을 주는 것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 본성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성악설의 요지이다. 그 인위의 힘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 세상은 나쁜 소식들로 넘쳐난다. 본성이 선하다는 허상의 믿음 대신 본성을 개조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훨씬 현명하다. 스스로를 연마하는 현실적 자세의 중요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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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1-2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정가제 시행전에 책을 사두긴 했지만, 조만간 구입할듯요.
동네 책방이 과연 살아날까 의문입니다. 어쨌든 인터넷 서점은 15%는 디씨해주니까요.
차라리 도서관에서 책 구입할때 지역업체에서 최대 15%만 할인하는 법을 만드는것이 현명하겠지요. 정가제 시행전에는 경쟁으로 인해 35%에 납품했거든요.

다크아이즈 2014-11-23 07:57   좋아요 0 | URL
그런 방법이 있네요.
정가제 시행전 지역 업체들 울며겨자먹기였겠어요. 할인폭이 넘 커서...
지역 업체도 살리고 동네 책방도 살릴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지 도서 정가제만 덜렁 시작한다고 해결이 될까요?

일요일, 뭐해요? 나들이 가시는 거죠?
보림이도 한가해졌으니...
 

 

 

1. 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간밤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못 잔 게 아니라 잠 잘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다. 희붐한 아침이 왔을 때야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몰입도는 최상이었다. 평생 불면의 밤과는 친구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잠과 친숙한 체질이지만, 더러 몰입의 밤과도 친구할 만큼 한 곳에 집중하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시쳇말로 나는 ‘그분이 오시면’ 무작정 쓰게 되고, ‘필이 꽂히면’ 빨려들듯 읽게 되는 부류이다. 몸을 위해선 결코 좋은 생활 패턴이 아니다.

 

세상엔 잘 쓰는 작가들과 좋은 책들이 널렸다. 평생 읽고 쓰는 데만 온전히 시간을 바쳐도 그(것)들을 내면화하는 데는 시간이 모자란다. 한데 좋은 사람들 만나 수다 떠는 걸 즐기는데다, 짜인 일들까지 갈무리하면서 읽고 쓰는 나 같은 이는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게을러서 생긴 강박관념은 몸의 피로를 몰고 오고, 그것은 자연히 마음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나름 열심히 하는 건 분명한데 늘 허망한 이 느낌.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핍진감의 원인은 고백하건대 단 하나다.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대로 하지 않는 진실이 그것이다. 충만감에 가닿지 못하는 모든 열정은 몸의 피로와 마음의 불안을 낳는다는 것을 알겠다.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넘어설 수 있고,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더욱 꼼꼼하게 채워간다. 미래란 현재의 동력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미래란 현재에서 이어지는 시간이지만, 반드시 현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안다.”

 

『메이드 인 공장』에서 작가 김중혁이 한 말이다. 현재를 꼼꼼하게 채워가는 것 같은 데도 스스로 충족에 이르지 못하는 심리 상태는 작가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비관 때문에 생긴 감정이 아닐는지.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소용에 닿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의 피로가 누적된다는 것. 그 피로를 이기는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2. 최소한의 양심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자가 오만하지 않기는 쉽다.’ 공자가 한 말이다. 신체 건강한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일까. 돈 없어 비굴하고 비참하고 불안하고 불편할 때일 것이다. 반면에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의 오만은 허영심에서 오는 자기 과시욕에 지나지 않으니 힘든 것과는 그리 상관이 없다. ‘허영’은 ‘비참’보다는 덜 심각한 감정이다. 따라서 부자가 오만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이 가졌으면서 더 오만하고, 덜 가졌는데도 전혀 원망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왜 세상엔 이토록 착한 사람들이 많은지. 왜 한 편에선 저토록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있는지. 가진 자들이 저들끼리 속이고 속으면 ‘그들만의 판’이려니 하면 그만이다. 한데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눈과 마음을 속이고 치졸하게 구는 걸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작게는 너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크게는 경제활동을 아우르는 기업의식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도 다양하다.

 

가진 자들이 제 것 귀한 줄 아는 것 백만 배 이상으로 덜 가진 자들의 제 것은 소중하다. 덜 가진 자들은 원래 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도 귀할 수밖에 없다. 덜 가진 자들이 순진하고 바보 같아서 가진 자들의 더티 플레이를 방관하는 건 아니다.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거다. 약자이기 때문에.

 

법이 허용하는 안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사업주가 있다 치자. 어인 일인지 그는 사회사업과 기부에 관심이 많다. 그런 그가 자신이 헌신하는 종교 단체의 사회사업에 기부금을 냈다 치자. 그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정말로 선한 사람이라면 사업주로서 먼저 자신의 직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쳐주었을 것이다. 저보다 훨씬 못한 이들을 짓밟아 얻은 돈으로 행한 선행은 칭송 받아 마땅한 걸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고 어른들이 말했다. 적어도 덜 가진 자들 앞에서 양심 찔리는 행동은 하지 말자. 종일토록 이런 화두에 매달렸다.

 

 

3. 마왕과 신해철

 

 

 

 

 

 

 

 

 

슈베르트 가곡 ‘마왕’을 여러 버전으로 보며 듣는다. 애니메이션이 따르는 몇몇 성악가 버전부터 흑백 화면으로 된 피터 디스카우를 지나, 바리톤 최현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을 접한다. 평소 좋아하던 가곡이긴 하지만 새삼 이 짧은 가곡 하나에 온몸과 마음을 빼앗긴다.

 

괴테의 시에 열여덟의 소년이었던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다. 셋잇단음표로 휘몰아치는 피아노 전주에 맞춰 노래가 이어지는데 성악가는 내레이터, 아버지, 아이, 마왕 등의 목소리를 차례로 연주한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밤 아픈 아들을 감싸 안고 집을 향해 말을 달리는 아버지. 꽃과 놀이와 소녀들이 있다며 아이에게 죽음의 세계로 유혹하는 마왕. 두려움에 떨며 마왕의 속삭임을 아버지에게 전하는 아들. 그것은 엷게 퍼진 안개 무리이며, 마른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림이며, 오래된 버드나무의 음울한 흔들림일 뿐이라며 아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 하지만 안마당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 품에서 아들은 죽어있었다.

 

‘마왕’을 들으며 신해철을 생각했다. 아니 그 때문에 다시 슈베르트의 마왕을 클릭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마왕’ 별호는 그와 무척 잘 어울린다. 강렬한 울림의 그 이미지는 노래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했고, 정당한 이유 없이 개별자를 구속하는 것들에 반기를 들었다. 부패한 정치권이 도덕에 파격적인 유행가 가수들보다 더한 유해매체라고 일갈했으며, 부와 명성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느냐는 멋진 말도 남겼다.

 

음악인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아티스트였지만, 논객일 때의 그도 더할 나위 없는 멋진 사나이였다.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음악적 열정과 사회적 패기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마왕. 그 영역 안으로 유혹할 어린 양들이 이리도 많은데 정작 그 자신이 먼저 먼 길을 떠나버렸다. 안개 무리이며,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며, 버드나무의 흔들림인 모든 것들의 진실을 노래하고 품었던 그를 애도하는 아침이다.

 

 

4. 식구 모두의 배려

 

어쩌다 엄마께 전화하면 엄마는 올케언니 칭찬부터 한다. 언니가 얼마나 집안 대소사를 살뜰히 챙기며, 얼마나 자주 안부 전화를 걸어오며, 얼마나 형제들 간에 우애를 다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 엄마는 좋으시겠어요, 요즘 그런 며느리가 어디 있어요, 라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언니의 노고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올케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좋은 며느리가 되려하지 말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은 억지로 하지 말라고. 그런 내 충언(?)이 먹힐 리 없다. 사십년을 그렇게 살아온 언니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올케언니의 삶은 누가 보상해주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 미안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엄마로서는 복 받은 노년을 보내는 거지만 그렇다고 올케언니의 정성에 박수만 칠 수도 없다. 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여성적 삶의 원칙들이 무조건 옳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의 개성은 권력이나 집단의 하위 개념일 때가 많았다. 더구나 이런 여성상은 여성 스스로 강화하는 면이 없지 않았는데, 그들은 스스로 도리와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왔다.

 

전통적 권위는 남성 또는 아버지 차지였고, 헌신은 여성 혹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연히 효 이데올로기의 최전방 행동대원은 여자들 차지였다. 젊디젊은 스타가‘결혼 상대는 우리 부모에게 잘 할 수 있는 여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근성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강요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여성을 한 집안의 효(孝) 대리인쯤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참아내지 않을 만큼 여성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남녀평등이 보편화되었다거나 여성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고 교묘하게 선전하는 집단들에는 여전히 동의할 마음이 없다. 가족 집단에 대한 희생이나 배려는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 식구 모두의 것이 되어야 온당하다.

 

 

5. 꿈과 현실의 펄럭임

 

우리가 지닌 이미지 속에서 꿈과 현실이 완전히 분리되면 좋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 둘 사이의 이미지 중첩에서 오는 혼란 때문에 당혹해지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국의 도시를 둘러 본 뒤 몇 년이 지나, 그곳 풍광에 대한 실제 이미지가 희미해지면 그곳을 가기 전 꿈꿨던 상상 속의 이미지와 실제가 뒤섞여 혼란스러움을 맛보게도 된다.

 

예를 들면 리스본의 구시가 언덕 골목길 바닥에 깔린 오랜 돌들에 대한 이미지가 상상 속의 것인지 실제의 것인지 헛갈리고, 그 한갓진 골목에서 흘러나오던 파두의 목소리 주인공이 크리스티나 마데이라였는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였는지 분명치 않게 된다.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을 기억한다면 그곳 노천카페에서 체질에도 맞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마셨는지, 아니면 즐비하게 이어진 옷가게에서 이국풍의 티셔츠를 샀는지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좀 더 대중적인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으로 기억을 돌리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 그 언덕길에 대한 이미지가 그곳에 가보기 전 몇 십 년 동안 꿈꿔왔던 내 안의 풍경인지, 실제 보고 난 뒤에 기억된 모습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혼란은 당혹감을 안겨주는 게 사실이지만 굳이 그런 느낌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꿈이란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고, 현실 자체도 꿈의 이미지로 조직화할 수 있다는 희망의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터이니.

 

“어느 날, 나이가 들면, 보르도에 실제로 도착하는 것보다 보르도를 꿈꾸는 것이 더 좋거니와, 더 진실하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저 문장을 발견했을 때 조금만 자책하기로 했다. 환상과 현실의 뒤죽박죽된 이미지가 혼재해 있지 않는 삶이라면 얼마나 도식적이고 기계적일 것인가. 그곳의 빛깔과 맛과 냄새가 현실 속의 실체였는지, 머릿속 허상이었는지 불분명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떠날 시기가 도래했다는 조짐으로 봐도 좋겠다. 상상으로 날갯짓하는 내 안의 펄럭임, 그것이 더 좋거나 진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사람들은 지금도 떠나고 앞으로도 기꺼이 떠날 것이기에.

 

 

6. 검은 다이아몬드 문체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나는 작중 인물들의 내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때도 나는 일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계속 유지할 뿐이다.”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소설을 쓸 때 결코 인물 내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옳다. 반면에 등장인물과 함께 슬픔에 빠지고 두려움에 떤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은 슬픔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떨게 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감정적 시선에서 떨어져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슬픔이나 두려움을 다스리고 잠재워야 할 것인가.

 

하지만 그녀의 대표작『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나면 첫머리에 인용한 저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문장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하다. 묘한 것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한 그 문장들이 독자에게 건너가면 바늘 끝 같고, 손톱 같은 ‘콕콕 찌름’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벌목장에서 베이는 나무처럼 무뚝뚝한 문장들이 툭툭 넘어졌을 뿐인데, 그것을 목도한 독자는 손댈 수 없을 만큼 아린 통증을 품어야 한다.

 

건조한 문투 덕분에 오히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매혹을 앓게 하는 그녀. 너무 아프면 아프다고 말 못하고, 너무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 잇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고나 할까. 과장이나 과잉 없는 서술로 사건 많은 쌍둥이의 일생을 전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감정선을 드러내는 그 어떤 묘사 없이, 짧고 단호한 직설로 뱉어내는 발화법. 그 속에서 처절한 절망의 노래를 느끼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비평가가 그녀의 문체를 ‘검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했다는 말이 어쩜 이리 와닿는지. 처절하고 냉엄하고 허위적인 삶의 조각들을 불러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녀의 방식에 뒤늦은 찬미가를 보탠다.

 

 

7. 욕망이라는 양철지붕

 

예술의 효용은 진실 탐구에 있다. 보편적 정서라는 잣대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고, 추한 것을 추하게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시각이라 굳이 예술의 범주에 넣지 않아도 된다. 현상의 그 모든 이면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과정 그것이 예술 행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들은 인간 욕망의 밑바닥까지를 들춰낸다.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군상, 몸서리치는 자책으로 탈출을 꿈꾸거나, 환상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초상 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가의 경험과도 무관치 않은 이런 설정은 우리 일상과도 겹쳐 있기에 정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누구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살아간다. 같은 제목의 윌리엄스 희곡은 제어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을 고양이에 비유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고양이는 없다. 하지만 삶이란 무대는 만만치 않다. 욕망하는 무엇을 탐색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판쯤은 견뎌내야 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폴리트 할아버지의 생일 즈음, 모인 식구들은 평안과는 먼 분위기에 휩싸인다. 평생 남편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한 부인, 지나치리만큼 냉혹하고 현실적인 큰 아들 부부, 그들은 동생에게 거대한 아버지의 재산이 상속될까봐 전전긍긍한다. 둘째아들은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개인적 고민으로 갈등한다. 동성애적 관심을 호소하던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 자신의 외면 때문이라는 자책에 시달리며 점점 비현실적 인물이 되어 간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사랑의 결핍에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시아버지의 재산에 집착하게 된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스스로의 운명에 발을 동동 구른다.

 

삶 자체가 달궈진 양철지붕이다. 억눌리면 억눌리는 대로, 냉혹하면 냉혹한 대로, 절실하면 절실한 대로 우리는 그 판 위에서 저마다의 발바닥을 단련시킨다. 뜨거운 지붕 위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발바닥의 동동거림만 더해질 뿐, 좀체 벗어나기 힘든.

 

** 가끔은 술을 마실 줄 알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지금이 딱 그런 심정이다. 소주라도 마시면 밤은 안 새도 될 것 같은데

    계속해서 김광석만 듣는다.  소주 안주인 김광석은 있는데 소주를 못하니 무슨 재민겨ㅠ  

    그래, 그냥 밤을 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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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1-17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자가 오만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맞습니다. 부자 자식이 착해지는 건 쉬워요.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교육을 받으니깐 말이죠.
하지만 가난한 자식이 착해지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안 좋은 것을 많이 보면서 자라니까요.
착하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하다는 윤리적 기준에 의한 것이고 착하다는 윤리적 기준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동네 바보가 착할수는 있지만 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하다는 윤리적 판단의 의거 저항할 수 있는힘이그든요... 선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11-22 11:28   좋아요 0 | URL
곰발님 착한 것과 선한 것 관련 페이퍼 읽고 넘 공감 돼서 저도 하나 건졌잖아요.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랄까요. 제 새 페이퍼 4번이 님의 글에 대해서 공감 버튼을 누른 거라 생각하심 되어요. 글로써 완벽한 님은 알라딘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자주 오소서.^^*

이진 2014-11-1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에 꽂혀서 밤을 샐 수 있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책을 읽다 글이 읽히지 않아 고개를 들어보았더니 밤이 되어 있었다는, 그런 경험이나 집중력이 제겐 없어요. 신체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데다 사십 분 정도 집중하고 나면 슬슬 정신이 흐트러져버리죠. 그래서 저는 팜님의 그 몰입이 부러워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

저는 유자왕의 마왕을 보면 입을 다물 수가 없어요.
슈베르트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마왕을 그중에서 세 번째 정도로 좋아하죠.

다크아이즈 2014-11-22 11:30   좋아요 0 | URL
이진님, 이진님
클래식과 문학을 두루두루 섭렵하는 멋진 사나이.
서울 올라가도 알라딘은 죽 계속한다, 맞지요?
아직 한강 작가를 독파 못 하고 있는데 이진님 덕에 한강을 파야겠어요 ㅋ

라로 2014-11-21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자주 올려주세요~~~~~~~.

다크아이즈 2014-11-22 11:31   좋아요 0 | URL
알잖아요, 지가 월매나 게실러 빠졌는지를
근데 좀 바지런해지기는 해야겠어요. 그래도 글 쓸 때가 젤로다 살아있는 느낌이거든요.

시험 잘 치고, 여행도 잘 다녀오세요~~
 

 

 

 

 

 

 

 

 

 

 

 

 

 

 

 

 

 

 

 

 

 

 

 

 

 

 

1. 혁신이라는 말

 

“보수는 혁신합니다.” 여당 회의실 배경 현수막에 적힌 글귀가 뉴스 화면에 잡힌다. 곱씹자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문학 용어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보여주자는 것일까. 말뜻만 살펴도 보수는 혁신의 대상은 될지언정 혁신의 주체는 될 수 없다. 즉, 보수를 혁신할 수는 있어도 보수가 혁신을 할 수는 없다.

 

 

보수의 사전적 풀이는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이고, 혁신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다. 한 마디로 전자는 지키려 하는 것이고, 후자는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가급적 지키려는’ 성질의 것이 어떻게 ‘완전히 바꾸려는’ 것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혁신(革新)은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의 껍질을 벗겨 무두질하여 쓸모 있는 가죽이 되게 새롭게 만드는 일이 혁신이다. 피부를 벗겨낸 상태인 피(皮)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완전히 다른 제품인 혁(革)이 되려면 거기에다 여러 까다롭고 힘든 공정을 보태야 한다. 단순한 물리적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위적 제품이 되려면 피와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지나, 가죽이 문드러지고 펴지기를 수십 차례 해야 한다. 극한의 고통 뒤에야 ‘혁신’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키려는 보수는 새로워지려는 혁신과 궁합이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다. 보수의 태생적 운명이 혁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혁신의 옷걸이에다 일말의 ‘개선’이라는 옷이라도 걸어보려는 시도, 혹 그것을 두고 ‘혁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나쁜 것을 고쳐서 좋아지는’ 개선과 혁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보수의 말뜻에는 미묘하나마 변화를 수용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니 개선이라는 말과는 얼추 짝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변화를 뜻하는 혁신은 보수라는 말과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날마다 ‘혁신’을 부르짖는 그들 앞에서 국민은 ‘개선’의 기미조차 느끼지 못한다. 정치계의 말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심각한 인플레 놀이 중이시다!

 

 

 

 

 

 

 

 

 

 

 

 

 

 

 

 

 

 

 2. 연민도 지나치면

 

정직하기는 쉬워도 편견을 버리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축적된 지식이나 충분한 경험을 쌓기 전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섣불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교육자 집안 출신이라니 믿을 만한 인품을 지녔을 거야, 동남아 노동자니 가난하고 지저분할 거야, 시각장애인이니 무조건 도와야 해.’ 이런 일상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잘못된 예측을 했지만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에 기초하여 잘못을 수정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편견이라고 보지 않아도 좋단다. 편견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 같아 맘이 한결 편해진다. 단순한 편견을 넘어 ‘골통’ 이 되는 경우도 있다. 뒷받침이 되는 근거나 정보 앞에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제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은 가치 기준점이 오직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상황이나 대상을 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모든 걸 제 기준에서만 실제보다 높이 평가하거나 낮게 평가한다. 편견이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편견이 무서운 건 여차하면 그것이 ‘집단의 결속’으로 이어진다는 거다. 귀속 본능이 있는 인간은 제 안정을 꾀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대립 구도를 만든다. 잘 알지 못하고 친근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완전한 감정은 집단적 편견으로 확대되고, 무죄한 대상들은 방패 없이 그 편견의 칼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다.

 

 

시각장애인 문예 교실 종강을 했다. 개인적인 보람은 조금이나마 가졌던 그들에 대한 내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점이다. 그들에 대한 내 무지는 ‘무조건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여나 상처 받을까 조심스레 접근했고, 그러다 보니 의도한 만큼 진솔한 시간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이 인다. 그들 말처럼 그들도 혼자 밥 떠먹을 수 있고, 지팡이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연민도 지나치면 자만이고, 배려도 앞서면 편견이 된다. 이런 생각들이 집단적 편견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 사실을 깨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3. 예술혼 끝에는

 

‘천국의 문’이 서울에 왔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이 걸작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청동 문짝 부조물이다.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인데 7미터 높이에 6톤 무게가 나간단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해 경복궁내 고궁박물관에서 다른 작품들과 전시되고 있다. 피렌체에 가면 이 ‘천국의 문’과 ‘두오모 쿠폴라’(대성당 돔)만은 꼭 봐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는 작품이다. 피렌체의 산 조반니 광장에는 세 개의 중요 건물이 있다. 대성당, 세례당, 종탑이 그것이다. 그 중 세례당을 장식하는 세 문 중의 하나가 천국의 문이며, 대성당 두오모의 돔 지붕 형식이 쿠폴라이다. 구약성서의 주요 내용이 각 10장의 판에 새겨진 ‘천국의 문’은 동시대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가 인정할 정도였다. ‘너무 아름다워 천국 입구에 그저 서있고 싶다.’ 라고 그가 말한 것을 계기로 ‘천국의 문’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문으로 만들 부조상을 현상공모했을 때 기베르티 외에 응모한 주요 인물은 금 세공사였던 필리포 브루넬레스코였다. 두 시작품은 지금도 전해져 관광객들은 비교해 볼 수 있다. 브루넬레스코의 것은 조각의 느낌이 강하고 혁신적인데 비해, 기베르티 것은 회화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이 난다. 공모전의 최종 승자는 기베르티였는데, 실력이 나아서라기보다 기법 상 좀 더 가벼워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기베르티는 천국의 문과 다른 한 쪽문을 완성하는데 거의 한 평생을 쏟아 부었다. 브루넬레스코도 패배자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공동제작을 권유한 관계자의 청을 마다하고 건축 공부를 했다. 고대 로마 유적 및 구조물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완성한 작품이 바로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이다.

 

 

진정한 예술가에게 승자니 패자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숭고한 예술혼 끝에는 완성된 작품과 무한한 감동이 있을 뿐이다. 두오모의 돔을 보러 당장 이탈리아까지는 갈 수 없고, 천국의 문 숨결이라도 느끼게 고궁박물관을 찾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 천상의 아름다움 전은 11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4. 이상적인 접근법

 

“인간에게는 크게 세 가지 접근법이 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늘 남을 자기보다 앞세우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신을 처음에 두고 남들 또한 고려하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행동치료 전문가 조셉 월피의 말이다.

 

 

늘 남을 자기보다 앞세우는 이들 곁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그런 현상은 인간 속성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대접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대접받기를 더 좋아한다. 누군가를 인정하기도 좋아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 상대를 알아봐주려 하는데 상대가 먼저 나를 알아봐주니 싫어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다. 바로 상처 받기 쉽다는 것. 베푼 만큼 상처 받기 쉬운 그들의 약점은 못된 타자들이 새긴 불 자국이다. 자신을 돌볼 틈조차 타자에게 기꺼이 할애한 그 맘을 염치 있는 상대라면 알아봐주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모색한다. 하지만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마음 결 고운 그런 사람들에 대한 겸허한 수용 없이 그들을 이용하고 제 악행의 희생양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소위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이 뒤통수에 당해본 ‘남을 우선하는 사람들’ 몇몇은 화병이 생기고 심하면 우울증까지 앓게 된다. 주고도 잃게 된, 자기모멸을 경험한 이런 사람들이 전문 상담가를 찾는다. 그 데이터를 분석한 조셉 월피 같은 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남을 생각하는 것도 나를 아프게 하는 선이라면 곤란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처음에 두고 남을 고려하라고.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그런데 나를 우선하고 잉여의 에너지로 타자를 고려하라는 전문가의 충고가 ‘이상적인 접근법’이긴 하지만 배려가 습관화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조차 어울리는 옷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전문가의 그런 충고를 거부하는 착한 심성이 그들에게는 본능적으로 꿈틀댄다는 것. 그들을 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배려 때문에 얻은 상처마저도 그들은 배려한다는 것. 그리하여 누가 뭐래도 자신보다 타자를 우선한다는 사실!

 

 

 

 

 

 

 

 

 

 

 

 

 

 

 

 

 

 

 

 

5. 청양고추

늦은 여름휴가를 간다. 안면도를 가는 중인데 경유 도시 중에 청양이 나온다. 유독 붉은 고추 홍보물이 여행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마침 청양고추 및 구기자 축제 기간이라 그 열기가 피부로 와닿는다. 청양도 영양이나 청송만큼 고추 특산지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모양이다.

 

 

‘청양고추’ 없는 우리식 밥상을 상상하면 싱겁기 그지없다. 흔히 ‘땡초’로 불리는 청양고추가 시중에 나온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 유래 논쟁이 자못 흥미롭다. 1980년대 초반 모 종묘업체가 개발한 고추 품종 이름이 ‘청양’이다. 품종개발자인 유일웅 박사의 공식 인터뷰에 의하면 청양고추 품종은 제주산과 태국산 고추를 잡종 교배하여 개발했다. ‘청송군과 영양군 일대에서 임상재배에 성공했는데, 현지 농가의 요청에 따라 청송의 청(靑), 영양의 양(陽)자를 따서 청양고추로 명명하고 품종 등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름에 걸맞게 청양군도 청양고추의 연고권을 주장한다. 1970년대 모 종묘업체가 청양농업기술센터에서 매운 고추 씨앗 여러 종을 받아갔다고 한다. 개발 과정에서 여러 품종이 섞였다 해도 매운 고추의 뿌리는 청양 지역이 틀림없다는 논리다. 청양군 유래설은 설득력이 다소 약하긴 하지만 지방자치 시대를 살아가는 나름의 현명한 대처법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청양고추는 브랜드 명이지 산지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소비자로서는 원조 논쟁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 고추가 그 세 지역에서만 나는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최대 청양고추 재배지는 밀양이란다. 선의의 경쟁이 좋은 품질을 낳는 것이지 원조라는 후광이 품질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손으로 개발한 그 품종은 IMF 사태이후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 경영난으로 대부분의 종묘 회사들이 다국적 회사에 흡수되었다.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청양고추를 먹고 있는 것이다. 청양고추의 빼놓을 수 없는 진실은 몹시 매운 맛을 지녔다는 것과 매운 값만큼의 톡톡한 로열티를 지불한다는 것.

 

 

 

 

<전주 PNB 풍년제과 수제 초코파이>

 

<군산 이성당 팥빵과 야채빵을 기다리는 사람들, 당근 우리 부부도 기다렸다!>

 

*늦휴가지는 군산과 전주였다. 빵집 두 군데 순례. 군산의 이성당은 예상대로 줄이 나래비로.

한 시간을 기다려 이름 세 타는 팥빵과 야채빵을 샀다. 인당 각 10개 5개씩 살 수 있다. 팥빵은 속이 꽉 찼다는 장점으로 승부하는 것 같고, 야채빵은 울 아저씨는 맛 나다는 데 미감 바닥인 나는 잘 모르겠다.

  전주의 PNB풍년제과는 수제  초코파이로 유명하다. 본점에 들러 열 개를 샀다. 단 것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이다. 수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엄청 복잡했지만 이성당처럼 사람 줄 서게 하는 수고는 끼치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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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09-0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셉 월피의 이야기가 눈에 띄네요.
저도 그런 그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너무 착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위주로 사는 사람들이 고생하는걸 많이 보게 되요.

줄 서는건 싫어하지만 팥빵, 야채빵은 먹고 싶군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4-09-0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당과 풍년제과 반갑군요. 전 전주와 군산에서 각각 1년 씩 있었지만 막상 먹어보지는 않았네요.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하지만 이성당은 정말 몇 번 사볼까 하고 갔다가 줄 서 있는 거 보고 식겁해서 지나치고는 했던 곳입니다.

라로 2014-09-04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각장애인들도 가르치셨어요!!!! 하여튼 대단대단!!!
청양고추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요~~~. 언니 최고!!^^
기베르티보다 브루넬레스코의 짧은 이야기(물론 길었을 인생이지만)가 더 감동적인 걸요!!! 저는 아무래도 브루넬레스코 타입~~~.ㅋ

저는 초코파이는 별로,,,야채빵에 10표요!!ㅎㅎㅎㅎ
대전 성심당에서 줄서서 튀김 고로케와 부추빵!!!!!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부추빵이 젤로 먹고 싶네요,,,!!성심당 부추빵에 100표. 튀김 고로케는 반 먹으면 벌써 질리지만 부추빵은~~~~~~.저 혼자 10개 먹을 수 있어요!!!ㅎㅎㅎㅎㅎㅎ
오늘 아침 직장 근처에 있다는 J.J Bakery라는 이름난 빵집을 어렵게 찾아가서
빵을 잔뜩 사가지고 왔어요.
홋가이도 쉬폰이라는 것도 샀는데 어찌나 부드럽던지;;;;
흐미,,,오늘 아침은 어째 빵 야그만~~~~~.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4-09-0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직하기는 쉬워도 편견을 버리기는 어렵다" - 이 말을 새겨 둬야 겠어요.
교단에 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그 편견으로 인해 조금 말썽 부린 학생들이 완전히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상처를 주기보다 보듬어 줘야 하는 건데 말이죠. 더 코너로 몰아 부치는 경우가 있으니... 옳지 않은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세상이라는 게 슬픈 일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9-05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3자들이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자세를 취해도 되지만 지자체끼리의 원조논쟁은 해당 지역 이해관계자들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죠.청양고추 논쟁도 그렇습니다.일반인들은 청양고추하면 청양을 떠올리지 청송과 영양의 머리글자를 따서 청양고추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죠.사실 보통 사람들은 타지역 지명에 대해 그리 신경을 안 쓰잖아요.게다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는 청양이 더 가까와서 놀러가기도 좋죠.칠갑산이 노래 덕분에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

아마 청송은 주왕산 국립공원 덕에 아는 사람이 있어도 영양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걸요.영양이 영남유림 전통이 강한 곳이지만 그런 전통하면 아무래도 인접해 있는 안동의 지명도에 밀리죠.영양 사람들에겐 자기 고장 지명도가 낮은 게 답답한 현실이겠지만...

다크아이즈 2014-11-2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단 님들,
지가 알라딘에서만 조울증이 있어서 바람처럼 왔다리 갔다리 합니다.ㅋ
알라딘 들른지 넘 오래 되어서 일일이 댓글 못 달아 드려요.
대신 윗 분들 서재 돌면서 이쁜 댓글을 달겠습니다.
지금 차례대로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