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을 선물받았다. 요즘 유행하는 매직 립스틱이다. 보기엔 오렌지색인데 칠하고 나면 입술이 선홍색으로 바뀐다. 어떤 것은 립스틱 색깔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명한 초록색인데, 의외로 입술에서 발색되는 것은 화사한 분홍색이라 신기하기만 하다. 다양한 세상에 살다보니 화장품 세계에도 일상처럼 요술이 침투하나 보다.
요술 립스틱 이야기로 시작하긴 했지만 기실 나는 화장품에 별 관심이 없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커다란 화장대는 거의 비어 있다. 기초화장품에다 꼭 필요한 색조화장품, 일 년에 몇 번 쓸까 말까한 향수 두어 종류가 고작이다. 그나마 기초화장품은 샘플이 넉넉하다. 그것을 다 쓸 때까지 새로 살 필요도 없다.
알뜰해서 화장품을 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른 주부들처럼 알콩달콩 살림살이에 관심 가지는 치도 못되기에 그런건 결코 아니다. 여성스럽게 치장을 하는 게 귀찮은 게 가장 큰 이유다. 그다음 다른 이유를 찾자면 어릴 때의 어떤 영향인 것 같다.
그 시대 기성세대 대개가 그랬듯이 부모님은 전형적인 알뜰살뜰파셨다. 허탄두루 돈을 낭비하거나 재물을 허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까운 친척 중에 소비를 미덕으로 아는 이가 있었다. 그 집에 가면 처마에 걸린 마늘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비 맞아 제대로 말리지 않아 부서진 연탄이 부지기수였다. 부모님은 말했다. '저렇게 살림 살면 큰일난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랐으므로 나는 살림을 못할까 걱정하는 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날 그집 안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엄마에게는 하나도 있을동말동한 '구찌베니'가 그집 화장대 위에는 무려 예닐곱개나 놓여 있었다. 색깔별로 놓인 그 '구찌베니'를 보는 순간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친척 여자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립스틱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그집이 못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중에 커서도 구찌베니 따위를 많이 사는 여자는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조금 큰 뒤에 알게 되었다. 알뜰한 것과 구찌베니 숫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여자에게 립스틱 예닐곱개는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엄마식 알뜰법이 내게 전이된 것 뿐이었다. 세상을 알게 된 나는 엄마만큼 알뜰한 여자가 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실천한 적도 없다. 다만 어릴 때의 알뜰해야 잘산다는 은연 중 가르침은 내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치장하는데 별 관심이 없고, 립스틱을 다 쓸 데까지 후벼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은 내가 원치 않았던 그 학습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엄마의 방식이 옳고, 옆집 친척의 방식이 글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치장하기 좋아하고, 적어도 화장대 위에 립스틱 열 개 정도는 비치해둘 줄 아는 여자들을 더 매력있다고 생각한다. 노력해도 못 마시는 술이 늘지 않듯이 립스틱을 자주 사고 싶어도 닳을 때까지 화장품 가게에 눈길이 가지 않는 것은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깊어가는 가을, 큰 맘먹고 갈색빛 도는 립스틱 하나 쯤 사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매혹적인 여자라면 적어도 색깔별로 열 개 정도의 립스틱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