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일이다. 서울에서 생활을 하고 강남에서 직장을 다닐 때,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요즘같이 봄날의 날씨였고 햇볕도 따뜻할 때 나는 내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앞에 있는 검은색 차량에서 누군가가 내리는 것이 보인다. 짙은 색 슈트를 입고 훤칠한 키를 자랑한다. 어디서 봤더라? 잠시 생각을 했을 때 그는 내 옆을 지나쳐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지? 누구지? 조각미남은 아니지만 뭐랄까 부티가 나고 유난히 슈트가 잘 어울렸던 남자. 크지 않은 눈에 약간 동그란 얼굴. 그리고 유난히 돋보이는 귀.
난 그와 마주치고 다섯 발자국 걸었을 때 그가 배우라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아주 잠깐의 마주침이었지만, 흔히 말하는 후광이나 주변에서 돋보이는 분위기 보단 귀하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인상을 느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얼마 전 마님이 유난히 즐겨 봤던 드라마에서 그를 다시 마주쳤다. TV 드라마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요즘의 나는 그냥 심드렁하게 내 할 일 하며 라디오 드라마처럼 귀로만 시청을 하고 있었다. 조인성은 여전히 멋졌고, 송혜교는 진심 예뻤다. 배종옥씨는 여전히 연기를 잘하시고, 더불어 나 같이 드라마에 대해 문외인임에도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감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찰나에 들리는 비릿하고 비열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수야~~~ 너 삼십일 남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그를 처음 마주쳤을 때 그 훤한 귀공자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비열하고 졸렬해 보이는 귀가 유난히 큰 남자가 실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실물을 본지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보며 조인성, 송혜교를 열광했을지라도 난 김태우란 배우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름 자기 이름 석 자를 방방곡곡에 날리는 사람들이 출연한다는 모 프로그램에서 또 마주친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좋게만 볼 순 없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의 면죄부를 발부해준다느니, 출연자의 장점만 지나치게 부각하여 이미지마케팅으로 차용된다느니 이런 저런 부정적 시각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다. 개인적으로 힐링, 멘토라는 단어의 남발이 제일 듣기 싫었었다.
평소 관심 있던 배우이기에 무슨 이야기를 하나 찬찬히 들어보기로 했다. 근데 이 프로그램의 특성상 터져 나와야 할 폭소는 나오지가 않는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으로 배우라는 직업에 임하는지, 그리고 가족들과의 이야기가 자니치리만큼 잔잔하게 나온다.
“제가 지내면서 느낀 저의 또 다른 재능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 해주는 것이에요. 연기는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할 때 그건 모든 다른 일도 마찬가지에요 그때 사람은 후져져요. 예를 들어 이번 드라마에서 ‘조무철’ 역할이 너무 좋았다는 평가. 저도 사람이니까 감사하고 기분 좋잖아요. 제가 준비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이 칭찬해 주는 것. 그런데 너무나 다행스런 것이 제가 신경을 쓰지 않아요. 몇 달 지나면 그 배역을 다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거기에 속지 않고 그 배역이 끝나는 순간. 잊어버리고 다음 배역에 좋은 것을 가져오고 부족한 걸 보완해서 또 다른 배역에 집중하는 거죠. 야구로 따지면 투수가 스트라이크 아웃 잡고 환호할 필요가 없는 거죠. 다음 타자에 집중하는 거고. 그 시즌에 우승하면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거지요. 연기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자기의 기량을 늘리는 거죠. 그렇게 계속 가는 것이 연기의 재미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열정과 재미가 떨어지면 제 자신이 후져지는 거겠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러진 않을 것 같아요. 제 자신이 부족한 게 너무 많아서요. 그렇게 계속 가고 싶어요.”
뭐랄까. 요즘 세상 지나치리만큼 남발되고 있는 멘토, 힐링이란 그 진절머리 나는 단어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날카로운 독설이 힐링이며 멘토라 지칭하며 그것을 추종하는 멘티의 모습은 마치 사이비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같은 어이없는 모습보다 어쩌면 난 김태우라는 배우에게서 뭔가 사람 사는 훈수를 들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난 ‘후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내 부족한 점을 다시 돌아보고 있다. 그런데 젠장 많아도 너무 많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