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워즈 - Summer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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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틈을 내서 주변사람들을 살펴보자. 내비게이션을 보고 길을 찾아 운전하는 사람이나 하루 중 자는 시간을 뺀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에 붙어 있는 사람, 핸드폰을 이용하여 현란한 엄지 손놀림을 보이는 여고생들, 게임 속의 아바타나 캐릭터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들. 결국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 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위대한 과학 발전의 현재 진행형의 모습을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세상이라 보고 싶다. 팡파르를 울려도 모자람이 없는 현대 인류 역사상 눈부신 업적이라 해도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이왕 짬을 낸 것 조금만 더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자.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왔던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관계인 ‘가족’의 범위에서 위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팡파르를 울리고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무언가 뻘쭘해진다.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 준 어쩌면 새로운 산업혁명인 인터넷은 인간사회 가장 기본이 되는 가족과의 관계를 대비시켜 보면 글쎄? 라며 약간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것들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대신 자신의 형제와 부모, 자식 간의 소통의 시간은 그만큼 줄어드는 건 우리들 대부분이 경험하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상다반사가 되어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에 까지 도달한 걸지도 모른다.   



전작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내 마음 속에 단발머리 여고생이 열심히 뜀박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올 여름 ‘썸머 워즈’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번 영화에서 감독이 주는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앞에 장황하게 늘어 논 저 뻔 한 이야기를 감독의 색깔과 시선으로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다분히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겐지는 짝사랑하는 얼짱 선배 나츠키의 황당한 아르바이트를 여름방학시기와 맞물려 부탁받게 된다. 바글바글 대가족의 일원인 나츠키의 가짜 애인 역할을 맡아 달라는 것. 상대적으로 단출한 핵가족의 일원인 겐지가 나츠키의 가족 속으로 흡수되며 러브러브 라인을 부각시켜준다면 맹맹한 스토리로 전락해버렸을지 모르겠지만 이 아날로그적인 인간과 가족의 테두리에 강력한 전 세계적인 넷망을 구축한 ‘오즈’라는 발전된 디지털적인 시스템의 폭주를 접목시키며 영화의 주제로 몰입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전개를 거치는 영화를 보며 주연이라 보여주는 청춘남녀의 모습보다 부각되는 인물 하나를 찾게 된다. 어쩌면 극단적 위기의 순간 나츠키네 가족의 수장격인 할머니 사카에의 행동과 모습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에 대해 많은 부분을 표현해주고 있다.

옛날 사람, 구식의 표본이라 해도 무방한 90살의 할머니는 살아온 세월만큼 현명한 안목과 더불어 넓은 포용심과 강력한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에서 잊었거나 마주치기 힘든 모습을 보여준다. 모두다 호들갑을 떨며 흥분할 때 결단력 있게 가족들을 규합하는 모습과 낡은 전화기를 이용해 본인 스스로 사태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은 만화영화 속 작위적 표현의 극치를 보여줄지언정 사람끼리의 소통방법의 정답에 가까운 장면을 연출한다.

영화는 이렇게 단순한 고교 남녀생의 로맨스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그들과 속한 인간관계를 조금씩 확대해가며 영화 속에서 많이도 써먹어 이제는 익숙해진 ‘가족애’라는 주제를 재미있고 부담 없이 담백한 맛을 보여주는 미덕을 발휘한다.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보자. 광통신을 들먹이며 초당 몇 백 메가의 전송량을 자랑하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의 선전이 넘실대고 있다. 어마어마한 기능과 더불어 고가의 핸드폰은 출시됨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보다 빨리, 보다 정확하게 저인망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혀진 전선 몇 가닥과 대기에 넘실대는 전파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는 분명 인류 최고의 자원이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축소시켜 내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잊고 있었던 그보다 더 위대하며 강력한 네트워크가 존재함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면면의 특징을 잘도 살린 영화가 내가 오늘 보고 온 영화 ‘섬머위즈’라 말하고 싶다. 

뱀꼬리:
혹자는 자위대 운운 일본의 우익적 발상의 극치, 감독의 전작인 디지몬과 별 반 다를 바 없는 스토리. 원작이 뛰어난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능가하진 못한다. 라는 악평으로 분명 호불호로 양분될 영화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 한 편을 봄에 있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지라도 지나친 분석과 심각한 잣대의 제시는 결국 재미를 위해 보는 영화 자체의 의미를 망각하는 경우로 전락해버리는 건 아닐까 우려된다.  

영화는 영화 자체를 가지고 즐기는 것.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전부라고 보고 싶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근본적 이유가 무언가 생각해 보자. 공부하려고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니고 일의 연장은 더더욱 아니다.(물론 업종 관계자는 예외) 영화를 보는 근본적인 이유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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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8-18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독의 다음 영화도, 코이!

Mephistopheles 2009-08-18 22:35   좋아요 0 | URL
이왕이면 모두 합창하며 코이코이코이!(쓰리고)

레와 2009-08-18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참에 고스톱을 한번 배워볼려구요. 큿~

Mephistopheles 2009-08-18 22:36   좋아요 0 | URL
극적인죠..우리가 흔히 심심풀이로 즐기는 인터넷 맞고가 인류를 구원할 줄이야..거기다가 레어템까지 넘겨주고 막판 스릴있는 코이코이코이!

paviana 2009-08-1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이 영화보라고 하시는 거지요? ㅋㅋ
이건 또 누구랑 보나 ? 흑흑

Mephistopheles 2009-08-18 22:36   좋아요 0 | URL
^^ 아마 파비님으 보셔도 절대 극장표값이 가깝진 않을 껍니다..^^

비로그인 2009-08-1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이글루스에선 참 시끄럽더군요. 가족이란 주제로 작성된 리뷰는 여기서 처음 보네요 ㅅㅅ

이글루스는 좀 소모적이라 그 논쟁들을 보다보면 질려버려서 영화에 흥미를 갖지 못하게 만들더라구요.

Mephistopheles 2009-08-18 22:41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영화를 보고 포탈에 걸린 리뷰들을 봤는데......
영화 한 편에 지나칠 정도로 심각하게 목숨거는 듯한 내용을 남긴 분들이 많으시더군요. 8000원이 적은 돈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큰 돈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제 기준으론 아깝진 않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법이지요. 그걸 기다, 아니다 잣대를 제시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은데..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넷엔 꽤 많더라고요..

카스피 2009-08-1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애니는 애니일뿐 오버하지 말자^^
 
옥토버 스카이 - October Sk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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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성공신화는 주변에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특정 인물의 성공을 책으로 혹은 영화나 다큐멘터리, 아니면 다분히 속내가 보이는 강연회를 통해 질리도록 접하고 있는 게 요즘 실정이다. 30살이 채 되기도 전에 소녀들의 추앙을 받는 아이돌 그룹이 자서전을 쓰고 불타나게 팔리는 세상인데 이런 조금은 지나친 자기 PR은 이제 거부감을 넘어서 그다지 예민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일반화 되어가고 있다.

옥토버 스카이는 앞에서 밝혔던 내용들과 큰 차이점을 가지진 않는다. 탄광촌이라는 지역성 특성상 별다른 선택이 없는 고등학생들이 보다 넓은 세상을 나가는 과정을 그려주는 다른 성장영화와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가족과의 갈등도 평범하고 배경적인 핸디캡 또한 특별하지 않다. 이미 여러 차례 접해 봐서 익히 알고 있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위기를 넘긴 후 꿈에 접근하는 모습 또한 전혀 새롭지 않다.

이런 상투적인 소년들의 성장을 보여주는 뻔한 영화일지라도 영화를 세세하게 다양한 시각으로 보면 다른 성장영화들과는 다른 관점과 감동을 선사해준다. 아마 이런 요소들 덕분에 이 옥토버 스카이라는 영화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겨질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주관적 관점에서 바라본 이 영화의 매력은 시대적인 배경을 꼽고 싶다. 냉정이 한창인 1957년의 배경과 소련과 미국의 경쟁적인 우주개발이 주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과 탄광촌이라는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 노조의 태동과 혼란기를 소년들의 아버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호머 히컴의 아버지 역시 노조를 거부하는 완고하며 보수적인 전형적인 광부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자식의 꿈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광부 일을 완고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권유하는 모습에서 어쩌면 우리들의 시선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아버지 세대와 대립적인 호머와 그의 친구들인 로켓보이들의 패턴은 급진이라는 모습 보단 사회의 테두리와 환경 속에 조심스런 행보를 거듭하는 모습을 선보인다.

이들의 정신적 맨탈인 불치병에 걸린  과학 선생님 라일라선생과 대립각을 세우는 완고한 보수인물 교장의 모습과 행동 또한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마을 주변 산불이 소년들의 로켓실험이 원인이라는 상황적인 증거에 그들을 제재하면서도 자신의 학교 학생들을 공권력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모습과 결국 결백한 학생들의 주장을 들어 줄 수 있는 소통의 모습, 더불어 그들이 진출한 과학 박람회에 아낌없는 지원을 보여주는 모습에서 어쩌면 나는 소통이 가능한 진정한 보수를 영화에서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특정인물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하지 않는 모습이다. 호모 히컴이라는 주인공 소년을 축으로 그를 도와 로켓을 쏘아 올리는 3명의 소년들의 상황 역시 조연의 모습으로 치부하기엔 짧지만 집중적으로 조명해 준다. 공부벌레 쿠엔틴의 숨기고 싶은 열악한 가정환경, 새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언젠가 나아지겠지를 읊조리는 로이의 환경을 짧게 보여주며 그 당시 사회적인 문제점 또한 간결하게 표현하는 센스를 보여준다.

이런 짤막한 재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집중된다. 그들의 성공과 더불어 이 영화의 실제 인물들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짧게 보여준다. 배경인 탄광촌은 지구상 다른 탄광촌과 마찬가지로 폐광의 길을 걸었고 호모의 아버지 역시 폐병으로 운명했다는 설명, 다른 로켓보이들의 성장한 모습,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호모 히컴은 여전히 NASA에서 자신의 소년시절 꿈을 진행시키는 모습(영화가 1999년 작이고 지금은 그 역시 은퇴해 작가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함)까지 보여주며 실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근거와 더불어 영화의 깊이를 더해준다. 



널리고 널린 성공적인 성장영화들의 어떤 장점이나 특징 없이 이 영화는 정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맑고 푸르른 10월의 하늘을 가르고 기상하는 로켓의 모습은 그들이 세계적으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들의 10월의 하늘과 내 자식들의 10월의 하늘이 그들처럼 맑고 높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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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7-29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하지요. 모르는 영화를 님 덕분에 많이 알게 됩니다

Mephistopheles 2009-07-30 10:52   좋아요 0 | URL
이 영화는 분명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져있지만 진짜 실제와는 약간은 차이점이 있다고 하네요. 영화 속 로켓보이가 5명인데 실제로는 7명이라는 사실. 주인공이 과학경진대회에서 폰 브라운 박사의 싸인이 들은 사진을 도난당했다는데 실제는 도난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과학교사 라이라 선생은 병원에서 로켓이 날아오르는 장면을 본 것이 아닌 그 현장에 직접 있었다는 사실. 이런 부분 설정의 차이가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영화 자체가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직하게 전달되는 꽤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이매지 2009-07-2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정말 너무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새삼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Mephistopheles 2009-07-30 10:52   좋아요 0 | URL
저번 일요일날 EBS에서 했답니다..^^

비로그인 2009-07-3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성노조원이면서 남자는 복싱을 해야한다는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아버지랑 비교 되네요.
역시 보수는 원칙이 있어야해요. 어느나라 보수 처럼 원칙도 신념도 없이 약자를 짓밟고 강자의 똥꼬뇽을 한 없이 사랑하는 것들은 그냥 수꼴이죠.

Mephistopheles 2009-07-30 10:56   좋아요 0 | URL
빌리의 아버지처럼 적극적인 아버지상을 보여주진 않지만, 주인공의 아버지 역시 훌륭한 사람으로 보여줍니다. 노조에 반대하는 보수색채가 짙긴 하지만 모든 광부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죠. 사고땐 자기 몸을 희생해 여러 동료들을 살려내는 모습과 아들의 친구를 폭행하는 새아버지를 응징하는 장면등은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줍니다.

리플리님이 말씀하신 보수는 보수가 아닙니다. 단지 이익만을 위해 이리저러 들러붙은 기회주의자에 잉여인간일 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간들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그 어느나라가 문제는 참 문제입니다.
 
스카이 크롤러 - The Sky Crawle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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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에서나 사용되었을 프로펠러 방식의 전투기 1대가 창공을 꿰뚫고 하늘을 가르며 나타난다. 이어지는 기총소사에 상대 전투기는 박살이 난다. 탈출하는 파일럿까지 무참하게 살해하며 고고도 회전을 한다. 먹잇감을 찾는 맹수마냥 또 다른 적기를 발견하고 달려든다. 그 전투기의 옆구리엔 검은 사자가 그려져 있다.

오시이 마모루의 신작 ‘스카이 크롤러’는 위의 설명과 같이 화려하며 정교한 도그 파이터(전투기끼리의 공중전)로 시작한다. 아마도 이번 그의 작품은 저렇게 박진감 넘치는 공중전이 주된 내용이 되지 않을까 살짝 기대하지만 조금 더 진행하다 보면 이 생각은 무참히 깨지고 만다. 감독의 기존 작품들을 보면 폭력적인 액션 하나하나는 임팩트가 강렬한 만큼 그 시간은 짧고 전체의 영화 속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액션 신이 주를 이루진 않는다. 이번 신작 역시 마찬가지, 초반의 화려한 장면 하나로 관객들을 정신없게 몰입하게 만들고선 영화는 다분히 고요하고 조용하게 진행된다.  

애니 자체는 꽤 깊고 진중하다. 누가 오시이 마모루 아니랄까봐 그의 전작 공각기동대에 버금 갈 수 있는 난해한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나간다. 유전자 조작에 의한 인형 같은 소모성 인간의 등장이나, 이런 과학력과는 동떨어진 프로펠러 추진 전투기들의 모습, 그리고 국가 간 무력대결이 군이라는 특수집단이 아닌 기업들이 대리전을 벌이는 모습까지 SF의 배경을 그리면서도 군데군데 이치에 맞지 않는 요소를 미묘하게 비틀어 끼워 넣는다. 인물들의 묘사 또한 지극히 단순하다. 흔히 봐왔던 캐릭터의 정교함은 사라지고 밋밋한 얼굴에 내뱉는 대사까지 단답형에 무미건조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과 설정들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감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일종의 포석일 수도 있어 보인다.

‘스카이 크롤러’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궤적이 큰 포물선을 그리고 돌아온 자리가 다시 출발점인 것처럼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전쟁이란 표면적 배경에 반환점을 돌아 다시 원위치로 회귀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거부할 수 없고 순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와 흡사한 구조로.



이런 부동,불변의 윤회 속에 영화 속 핵심과도 같은 ‘킬드렌’의 운명을 짊어진 두 남녀가 존재한다. (주:킬드렌이란 유전적인 조작으로 성장이 멈춘 인간을 말하며, 이들은 죽을 때까지 청소년기의 상태를 유지한다.) 새로 전출된 파일럿 칸나이 유이치와 베이스 사령관 쿠사나기 스이토의 만남은 무미건조하게 시작된다. 형식적인 군의 계급에 의한 구분으로 유이치는 스이토의 명령을 받고 미션을 수행하는 종속적인 행동을 초반에 보인다. 조금씩 접근하는 그들에겐 유이치가 모는 전투기의 전임자 ‘쿠리타 진로우’의 존재가 주목되기 시작한다.

비행단 에이스 이었던 진로우는 전선에서의 전사가 아닌 다른 이유를 유명을 달리했고 그 빈자리에 유이치가 배속되어 어쩌면 그와 똑같지만 조금씩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 나간다. 이런 설정 속에서 거부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태생적인 운명인 킬드렌으로 태어난 두 사람의 인생은 짧은 시간동안 변하기 시작한다. 과거 진로우와 스이토의 관계와 현재 유이치와 스이토의 관계가 비교되는 시점에서 이야기는 결말을 향한다.   

과거의 두 남녀는 그들의 태생적 한계를 결국 자의에 의한 죽음으로 종결되었다면 현재의 두 남녀는 유이치에 의해 그 한계를 한 단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결과로 유이치는 그들의 절대자일수도 있고  모든 금기를 내포하는 ‘티쳐(Teacher)’라는 적군 에이스에 도전하다 이카루스의 비극처럼 결국 격추되며 이들의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며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이렇게 유한성을 가진 두 인물에게 소극적이지만 처절하게 영원성을 부여하는 의미를 준다. 마치 인형 같은 삶인 스이토에게 어쩌면 두 번째 만남일 수 있는 유이치는 그녀의 몸에 피가 돌고 체온이 느껴지는 인간으로 진화하는 길을 열어준다. 이런 부분은 역대 자신의 작품에서 감독이 보여줬던 틀에 박히고 종속된 나약한 영혼들에게 무한한 연민과 동정을 보내는 것과 같은 느낌과 동질감을 유지한다. 더불어 어쩌면 현실 속 스이토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을 실존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는 몽상가스러운 메시지를 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항상 지나가는 길이라도 다른 부분을 밟는 경우가 있다. 항상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서 경치가 똑같은 건 아니다. 그것만으론 안 되는 건가? 그것뿐인 거니까. 안 되는 건가?”

마지막 유이치의 대사처럼 우리도 그들처럼 돌고 도는 운명의 틀 속에 벗어나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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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0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그파이트를 투견대회로 오역했다는 사람들이 꽤 많지요.이런 작품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산업 뿐이 아니라 정신문화 방면에 상당한 축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Mephistopheles 2009-04-04 10:30   좋아요 0 | URL
웃는 남자와 같이 전방위적인 인문지식이 축척되어 있다면 애니 보면서 재미있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도 하는군요..^^

L.SHIN 2009-04-04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킬드랜'이라...인간이라면 한 번쯤 원하는 그런 상태?
유이치의 대사는 공감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그러하니까-
하지만 데쟈뷰 현상도 무시할 수가 없죠. 그것을 의식하는 자가 몇이나 되겠냐만은..^^;

Mephistopheles 2009-04-04 10:34   좋아요 0 | URL
미쳐 말은 못했지만. 이 애니에서 킬드랜은 소모적인 인간생산품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기업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형이죠. 일예로 유이치는 사실 진로우와 동일인물입니다. 단지 과거의 기억은 죄다 말소시키고 오직 전투기 조종기술만큼은 살려놓은 복제품이죠. 스이토와 비행단 사람들이 알면서도 말 못하다 죽은 동료의 후임으로 온 파이럿이 죽은 동료와 비슷한 외모와 똑같은 버릇을 보고 유이치도 점차 자신의 과거 기억이 무언지 알아갑니다. 슬프죠. 태생적 속박에서 벗어날려고 유이치는 발버둥치지만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L.SHIN 2009-04-05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그렇군요.
제가 말한, 인간이라면 한 번쯤 원하는 킬드랜이란 '청소년 모습을 평생 유지하는'
외형적인 부분이었습니다.(웃음)
이 애니, 메피님의 설명을 들으니 나중에 보고 싶군요.^^

Mephistopheles 2009-04-08 14:35   좋아요 0 | URL
근데 평생 청소년의 모습...이것도 아마 실현되면 결국 후회하게 될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ㅋㅋ
 
스카이 크롤러 - The Sky Craw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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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이 마모루 공각기동대에 이어 또 다른 철학적 메시지가 가득 담긴 애니 내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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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2009-04-0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시이 마모루 팬의 입장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분의 흔적을 뒤적거리곤 합니다만, '가득~'이라는 표현에 허걱 해봅니다....^^;

Mephistopheles 2009-04-02 14:02   좋아요 0 | URL
굉장히 삭막한 풍경과 쾌적한 환경이 묘하게 언발란스하게 어울리며 메비우스의 띠 같은 애니입니다. 혹자는 진짜 졸리다. 별 볼일 없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 영화를 깊게 보시는 분들에겐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 No Blood No T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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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투박한 남자들의 세계에 묘한 이질감을 불러 일으키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표방하는 영화들의 전개는 비슷비슷하다. 모뙨 남자들의 초반 시달림을 견뎌낸 여자들이 결국 최종 승리자가 되는 모습. 이 영화가 가진 차이점은 이런 구태의연한 결말로 향하는 전개를 거부했기에 새롭게 다가온다.

마치 이탈리안 웨스턴의 등장안물들처럼 이 영화에 나오는 주연들은 하나같이 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투견판의 돈가방을 노리고 서로의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끊임없는 충돌과 반목이 계속해서 출몰한다. 이런 진흙탕 물고 물리는 개싸움에 여자들도 예외는 없어 보인다. 돈을 노리는 팜므파탈같은 수진도 손을 씻고 새출발하는 경선 역시 돈가방 앞에서는 승냥이와 다를바 없는 본능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아마도 힘없고 약한 여자를 착하고 선하게만 그렸다면 이 영화는 그저그런 액션느와르의 틀을 벗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런 차별성을 버리고 과감하게 성별구분없이 주연인물들을 모두 똑같은 봄주에 놓고 시작하였기에 영화가 주는 독특한 재미는 배로 느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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