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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
로버트 카파 지음, 우태정 옮김 / 필맥 / 2006년 5월
평점 :
전설적인 보도사진작가와의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마우신 분께 사기(?)를 쳐서 오노가 된 심정으로 접하게 되었다. 리얼리즘을 극한까지 몰고가는 종류의 책을 사기쳐서 받은 심정때문에 약간의 양심에 찔렸으나 열심히 읽고 리뷰는 쓰는 걸로 그 미안함을 대신해볼까 한다.
책의 첫장을 펼쳤을 때 앞표지 뒤에는 작가의 약력이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1913년 10월 22일 헝거리 유태인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시작한 "로버트 카파"의 약력은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하기까지 41년의 삶을 정리해주고 있다. 평범한 삶을 살다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비해 이 사람 로버트 카파는 길지도 않은 41년의 흔적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약냄새에 절어있는 삶을 살아온 듯 했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 1938년에는 중일전쟁, 1942년부터 1945년 2차세계대전 유럽전선 종군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중동전쟁 종군,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종군 중 사망
이책은 그의 화려(?)한 약력 중 1942년부터 1945년까지의 유럽종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내용은 활자와 영화처럼 움직이는 시각영상이 아닌 정지화상의 사진으로 가득채워져 있었고 그 어느 책들보다 강도가 높은 현실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극히 "디아스포러"적인 삶을 살아왔었을 그가 찍었던 책속의 사진들 한장 한장을 그보다는 몇갑절 많은 활자와 함께 버무려 보면서 오히려 활자보다는 사진을 감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읽어내려갔다. 사진 속에는 활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피사체들의 순간적인 삶부터 사연많은 삶까지 모든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었다. 물론 사진을 집중해서 들여다 본다고 그들의 인생을 파악한다는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방향이나 생각하는 각도에 따라서 시종일관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책의 내용은 지독한 현실을 희석시킬려고 작정을 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카파와 주변인들의 여유와 유머가 함께 맞물려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진흙탕의 산 정상을 시체들을 뒤로하고 올라가면서 카파는 넉살좋게 이런말을 한다.
"캘리포니아 태양 아래서 흰 구두를 신고 흰 바지를 입고 걸어가고 싶어"
종군기자의 전쟁 노이로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P 148)
지옥같은 노르망디 해변 상륙작전에서는 그 광기섞인 유머는 한마다의 촌철살인같은 의미를
보여주기까지 한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코 옆에 어젯밤 함께 포커를 쳤던 중위가 있었다. 그가 물었다.
"내가 방금 뭘 봤는지 알아?"
"내 머리가 자네 시야를 가리고 있어 아무것도 못 봤을 것 같은데."
그러자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가 현관문에서 내 보험증권을 들고 흔드는 걸 봤어" (P 194)
프랑스 수복 후에 목격한 독일군 고위 장교와의 만남은 이렇게 묘사한다.
한편, 에디 장군도 자신의 전리품을 챙겼다. 그것은 셀부르의 독일군 사령관인 칼 폰 슈리펜 장군으로,
그는 우리가 생포한 최초의 고위급 독일군 포로였다. 나는 그의 사진을 꼭 찍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포즈를 취해주지 않았다. 그가 부관에게 말했다.
"언론의 자유랍시고 떠들어대는 미국신문이라면 지긋지긋해"
나도 독일어로 한마디 응수했다.
"나도 이제 싸움에 패한 독일군 장군을 찍는 일에는 넌덜머리가 납니다."
내 말에 격분한 그가 나를 향해 홱 돌아섰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에 담았다.
아마도 그보다 더 좋은 사진은 나올 수 없으리라! (P 208)
극한의 공포와 환경에 처해지면 사람이 저리도 여유스럽고 유머스러워지는지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수없겠지만, 전쟁이라는 오만상이 찡그려지는 상황을 기록한 이야기 전개속에 입꼬리가 슬쩍슬쩍 올라가게 해주는 위선적인 양면성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전쟁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관한 비판을 던지기도 한다.
마지막 총을 쏘는 마지막 병사는 최초의 사격을 가하는 최초의 병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의 모습을 뉴욕 본사로 송고해봤자 그곳 사람들은 흔해빠진 병사 하나가 총을 쏘는
장면으로밖에 안 여길 것이다. (중략)
나는 마지막 전사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쟁의 마지막 날에도 몇몇 용감한 병사들은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산자들은 너무도 빨리 그 모든것을 잊을 것이다. (P 287)
총알이 아닌 필름을 장전하고 무간도 지옥 한귀퉁이 같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로버트
카파는 "러브엔피스"를 속으로 외치면서 방아쇠마냥 셔터를 당겼을지도 모르겠다.
구구절절 떠들어대는 장황한 말보다...
조목조목 한장의 종이를 가득 채우는 활자들 보다...
단 한컷으로 그 모든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사진은 거짓이 없다.
물론 포샵질 혹은 각도를 틀리게 하는 별별기교들이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서는 이 말이 통용이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로버트 카파 라는 파란만장하면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보도사진작가의 사진에는 거짓과 위선을 찾아보긴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