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잠깐 페이퍼에 등장했던 똑똑한 조카 놈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았나 보다. 수재소리 듣는 영특한 머리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단독 선두라는 그 아름답고 달콤한 열매를 누구에게도 빼앗겨 보지 않았던 녀석이 대학입시(우리말로 말하면 수시)에서 소위 빠꾸를 맞아 버렸다. 주변 상황의 불리함도 작용했었나 보다. 다민족 국가로 이루어진 조카의 국적에서 소위 황인종(동양인)의 명문대학 비율을 낮춘다는 기사를 얼핏 봤었는데, 아마도 그 피해자가 돼 버렸나 보다.
녀석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분하고 억울해서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고 한다. 자기보다 못한 같은 학교 멕시칸은 합격이 되었는데 자기는 떨어졌다는 서러움. 더불어 단 한 번도 달콤하고 영광스런 정상의 열매를 놓쳐보지 못했었던 그 경험에서 오는 공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누나와 장시간 통화를 하며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언젠가 맛 볼 실패의 쓴 맛을 더 나이 들기 전에 맛본 것은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라.” 우리가 내린 이 결론은 조카 녀석과 레벨은 다르지만 국내에서 승승장구하던 나보다 한 살 많은 친척의 경험에서 유추할 수 있다.
국내 최고의 대학과 대학원을 전액 장학금으로 나와 천조국으로 날아간 그는 부푼 꿈을 꾸며 그곳에 정착하길 원했었다. 결혼도 일찍 하고 애도 둘 있는 상황에서 어떠한 걸림돌도 없이 그 나라 유수 거대 그룹에 당연히 취직이 되어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정착할 꺼라 예상했었다.
결과는 출신학교(스탠포드, 예일 출신들)에 밀려 그가 설계했던 인생계획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무던히도 보아왔던 그 친척의 발전과정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실패라는 쓰고 떫은 열매를 한입 씹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그의 위치에 걸맞게 국내 대기업에 입사하여 차근차근 진급하며 다시 어디가 끝일지 모를 정상을 향해 나가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귀국했던 누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 병문안 차 그 친척을 만났는데 너무나 늙어버렸다고 한다. 나보단 한 살 많고 누나보단 한 살 적은 그의 나이에 걸맞지도 않을 정도로 노화가 심하게 진행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누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나 찌들어 버려서 혹시나 건강에 이상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역시 속칭 세파를 겪을 대로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창 일할 때 경쟁에서 뒤처지면 바로 정리의 수순을 밟게 되는 대기업의 생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진 경쟁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 땅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가정과 자녀의 교육과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와 만나 장시간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 역시 자신의 현재 위치와 끊임없는 경쟁, 그리고 실패의 두려움에 대해서였다. 적어도 나의 눈에 그는 그때 그 찬란했던 정상에 있었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실패는 두렵고 우울하다. 만성이 되면 자포자기로 갈 정도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내 조카나 친척이 느꼈을 그 실패야 내 입장에서 코웃음을 칠 경우일지라도 당사자가 느끼는 그 강도는 아마 똑같을 것이다. 단지 지금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조카가 삼킨 그 실패의 열매는 피가 되고 살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영원한 승승장구는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언제가 닥칠지 모를 그 쓴맛이 조카에게 가장 적당한 나이에 오지 않았나 싶다. 너무 늦게 와도 문제 너무 빨리 와도 문제일 수 있는 그 쓴맛을 천천히 음미하길 태평양 건너 가지가지 오만가지 실패를 경험해봤던 삼촌의 경험상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