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드라마 두 편

 

- 덕보 아저씨

1981년 2월 13일에 KBS 1TV에서 ‘인간극장’이란 이름 하에 ‘덕보 아저씨’란 부제로 방송되었다.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덕보 아저씨(신구 분)가 대포집 가게를 운영하였고, 대학생들은 외상으로 술을 먹을 수 있는, 그리고 가끔은 다락방에서 잠도 잘 수 있는 이 가게를 애용하였다. 주인공 대학생 태영(고 강태기 분)은 덕보 아저씨를 무척 좋아하여 대학교 졸업 후에도 잊지 못한다. 덕보 아저씨는 고위 공무원이었고, 강직하여 뇌물과 같은 것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저씨의 아내가 선물을 받았는데, 덕보 아저씨는 이 사실을 받아들지 못하고, 사직과 동시에 집에서 가출한다. 아저씨의 아내는 선물을 돌려보내고 남편에게 사죄했지만,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용서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용서를 받지 못한 아내가 사망한다. 대학생 시절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태영은 같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대학 선배(정동환 분)에게 덕보 아저씨와 정의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그것은 대학생의 추억일 뿐, 네가 할 일은 사회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것이라고 충고를 한다. 옛 기억을 잊지 못하는 태영은 덕보 아저씨를 찾으니 대포집은 망했고, 덕보 아저씨는 밀도살이라는 불법에 관여하고 있었다. 태영은 울면서 덕보 아저씨에게 이럴 것이면 뭐 하러 사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했냐 하소연을 한다. 덕보 아저씨는 자수를 하고 드라마는 끝을 맺는다.

 

- 드라마 제목 불명 (1980대 초반쯤)

두 번째 드라마는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신구 주연인 드라마다.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니, 배우이름으로 대신한다. - 신구, 임동진, 고 문오장(추정), 고 이성웅(=마영달)

 

신구는 이기적인 친일파다. 독립 운동가를 잡는 일에 일조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간부 사이에 대화를 엿듣게 된다.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는 것. 신구는 독립 운동가인 임동진을 탈출시키고, 잠깐의 고초를 겪는다. 독립은 되었고, 신구는 졸지에 독립투사가 되었다. 신구는 정치에 참여한다. 독립 운동가인 임동진도 선거에 참여하지만, 신구의 선거 운동으로 부패 정치가인 문오장을 당선시킨다. 신구는 독립 운동가와 정치인은 다르다고 연설을 한다. 정치에서 신구는 문오장을 배신하고 자신이 직접 일선으로 나선다. 배신을 당한 문오장은 신구의 심복인 이성웅을 꾀어 다시 신구를 배신하게 한다. 우여곡절을 겪은 신구는 정치에서 살아남게 되고, 다음 선거를 맞게 된다. 이때 임동진은 신구의 선거를 돕는다. 신구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임동진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하면서. 신구의 당선 후 임동진은 신구에게 당부한다. “이제까지는 자신을 위해 살아왔지만, 인생의 한번 정도는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신구는 임동진의 말에 찔끔하지만, ... - 나의 드라마 줄거리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마지막에 한 동안 시간이 흐른 후 신구는 할아버지가 되어 옛날을 회상하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위 옛날 두 드라마는 정의正義는 패배하고, 불의不義와 기회주의가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내 마음 속에 각인시켜주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불의와 기회주의가 이기는 매력이 나의 욕망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대신 옳음을 붙잡고 있을 때, 패배할 수 있다는 것과 패배의 상황에서 너무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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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5-21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두번째 드라마 제목 아시는 분 계신가요?

노이에자이트 2014-05-2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영달 문오장...악역 전문이죠.성격배우이기도 하고...제목은 모르겠네요.

해방정국 당시의 부패를 그린 소설이 꽤 많죠.그러니 그런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도 많았을 거에요.

덕보 아저씨의 내용은 참 슬픕니다.정의로운 사람이 밀도살을 하게된 사연이라니...

마립간 2014-05-24 08:10   좋아요 0 | URL
두번째 드라마의 제목에 대한 답을 주실 분이 있다면 그것은 '노이에자이트'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연 배우들의 이름이 정확히 생각나 드라마 제목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인터넷 검색에는 나오지 않네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는 것은 1990년부터로, 아마 이때부터 컴퓨터 데이터 베이스가 상용화되었나 봅니다. 이전 것들은 종이 서류로 있다가 폐기되었거나 보다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하겠죠.

노이에자이트 2014-05-25 23:55   좋아요 0 | URL
가끔 80년대 드라마가 인터넷에 소개되기도 하던데 한 번 더 찾아봐야겠어요.

staboo 2022-10-0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갑자기 덕보아저씨 떠올라서. 구글 검색하니.. 선생님이 적어신 글포함 2개만 표시되었습니다
당시 덕보아저씨 방송보고 슬펐고...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무언가의 두려움도 새겨졌습니다...
직장생활 할때... 종종 덕보아저씨 삶을 살게될까.... 굴복하게 될까 싶어.. 많이 두려웠습니다
2015년도부터 자영업을 하고있고...
덕보아저씨처럼 회귀될까 싶어... 실은 현실로 다가와 직전이라.. 겁이 납니다
그렇게 무너질수는 없다는 생각은 분명합니다
이래저랴.. 갑작스러운 넋두리 죄송합니다
좋은 휴일되십시오
 

 

* 사람과 쥐

 

내가 알라디너 ‘곰곰생각하는발’ 님의 ‘착한 사람에게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글에 댓글을 남겼는데, 좀 뜬금없었다. 여기에 조악한 동화를 지었다.

 

시골에 농사를 짓는 가난한 아주머니가 살고 계셨다. 수확이 많지 않은 농사도 속상하지만 쥐가 창고의 곡식을 축내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쥐를 아주 싫어한다.

아주머니의 큰 아들은 어머니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쥐만을 멸종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있다. 거의 완성 단계이다.

둘째 아들은 형의 하는 일에 반대다. 사람이나 쥐는 같은 생명체이다. 생명으로서 존중받아야 하는데, 멸종이라니. 쥐는 쥐로서 먹고 살려고 했을 뿐이다.

셋째 아들은 둘째 형과 같이 큰 형이 하는 일에 반대이지만, 반대하는 이유가 조금 다르다. 쥐라는 한 종이 멸종하면 생태계가 교란되기 때문이다. 그 교란은 인간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큰 형은 (둘째의 의견은 아예 무시하고,) 셋째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태계의 교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균형을 찾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인류의 피해는 미미하거나 감내할 만하다. (물론 약자가 우선적으로 피해를 받겠지만.)

 

둘째 아들의 입장은 양보다 질을, 현상보다 본질을 추구한다. 수학과도 통한다. 사과 1개 + 사과 1개 = 사과 2개. 사과에 꼭지가 있고 없고, 색깔이 조금 다른 것은 사과라는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의 공통점 외에는 무시하고 더하기가 가능하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에 관계없이 인간은 인간으로 존엄을 갖는다.’에 동의한다면, 이는 수학적 사고방식이다. 착하고 나쁜 사건/사람에 대한 맥락은 무시한다.

 

아주머니의 입장은 본질보다 현상(이를 실존이라고 해야 할까?)을 중요시 여긴다. 관심은 쥐가 (생명체인 것보다) 내가 농사지은 곡식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것이 현존하는 맥락이다. 아주머니가 농사를 짓지 않고, 글을 쓰는 작가였다면 쥐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이는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적이며 진화론적 사고방식이다.

 

셋째 아들은 어머니와 같이 역시 맥락을 중요시하나 근시안적인 맥락이 아니라, 총괄적인 (원시안적?) 맥락에서 파악한다. 이는 영혼적, 무아적, 종교적 사고방식이다.

 

첫째 아들은 어머니와 같은 입장이다. 쥐를 막기 위해 고양이를 키우거나, 쥐덫을 놓는 것으로는 쥐가 곡식을 빼앗아가는 것을 막는데 한계가 있고 (즉 효과가 미미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고 새로운 해결책을 시행할 능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점은 첫째 아들은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가 쥐를 미워하는 이유는 세 아들 양육에 책임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즉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이 네 사람의 세 가지 가치관에 옳고 그름이 있을까. 누구의 의견이 맞고 틀리는 것인가? 나는 이 세 부류의 가치관 모두 옳다고,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째든 쥐에 대해서 (방관을 하든, 쥐덫을 놓든, 바이러스를 퍼뜨리든) 어떤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고, 그 행동의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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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급조한 우화 정말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군요. 순간 어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마립간 님이 자주 언급하셔서 그런가 이 글 읽다 보니 저는 정말 수학적 인간인 것 같습니다.
이런 지적은 마립간 님이 처음이어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 왜냐하면 수학은 거의 양, 미'에서 왔다갔다 했ㄱ든요..) 이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모든 입장에는 그 입장이 가지고 있는 정당성이 있죠. 그래서 정치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조율을 하는 차원에서 말이죠. 그래서 전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지만 제 주장에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립간 2014-03-04 15:20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로 다수의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입장으로 행동을 하죠.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첫째는 대기업과 같은 이기적이면서도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둘째와 셋째 성향을 가진 사람을 합쳐도 그 수가 얼마 안 되는 소수이고, 그래서 외롭죠.

소수에 해당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가치관에 동조하는 사람도 적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소수를 인정하지도 않으니 세상살이가 버겁죠. - 그에 대한 평가로 대개 변화하지 못하는 가치관의 경직성을 비난합니다.

제가 바라기는 둘째나 셋째 아들도 자신의 가치관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 하는 것이죠. (굶어 죽지 않고.)

페크pek0501 2014-03-0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시각으로 읽었습니다.

니체가 한 말 - "모든 일은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다. 좋은 일, 나쁜 일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가 생각나네요. 동양에서도 노자? 인지 장자? 인지 이와 비슷한 말을 한 걸 읽은 것 같은데, 누구인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심지어 우리 애들이 다툴 때조차도 누가 더 옳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이런 면에서 보면 누가 옳고 저런 면에서 보면 누가 옳고 그렇죠.

마립간 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잘 풀어 놓으셨네요. 유익한 글이에요. ^^

마립간 2014-03-06 15:58   좋아요 0 | URL
저는 '모든 일이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다.'에 동의하지만, (제 글 말미에 쓴 것처럼) 선택은 있게 마련입니다. 즉 저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노자주의자로 변하지 않는 (최소한 우리 우주에 항상 통용되는) 옳고 그름(저는 이것을 수직적 가치관이라고 부릅니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위 이야기로 설명하면 둘째 가치관을 기본을 삼고, 세째 가치관으로 보충하는 형국이죠. ; 저의 이런 절대적 진리에 대한 집착은 (아마 아랫글에도 언급되어 있는) 일제 식민지와 관련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성도 없는 친일 집단이 잘 용서가 안 됩니다. (제가 용서 안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

니체와 같은 말을 했던 동양 철학자는 아마 장자일 것입니다. 노자는 절대주의, 장자는 상대주의자였으니까요.
 

 

* 연구의 결과 (증명된 것)

 

** 답

0. 답answer의 유무를 모른다. (결정불가능 상태)

 

1. 답이 없다. (부존재가 증명)

 

2. 답이 있다. (존재가 증명)

 2-1 답이 유한개로 있다.

 2-1-1 유한개의 답을 찾았다. (최소한 1가지 이상의 찾는 방법이 존재)

 

 2-2 답이 무한개로 존재한다.

 2-2-1 무한개의 답이 존재하는 패턴을 확인했다.

 

 2-3 유한개의 답이 밝혀졌으나 그 외의 답이 있는지가 결정 불가능 상태 (그 외의 답이 무한개일 수 있다.)

 

** 방법 (답answer이 존재할 때) - 방법을 답으로 생각하여 위 문단의 답에 재귀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1. 답을 찾는 방법이 (아직) 없다. (결정불가능 상태)

2. 방법이 없다. (부존재 증명)

3. 방법이 유한개로 존재한다.

* 3-1 현재 밝혀진 방법 이외의 방법이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것이 패턴을 갖지 않는 것은 규모가 작기 때문이며 규모를 충분히 키우면 반드시? 패턴을 갖게 된다는 것을 제가 읽었는데, 어디서 무엇을 읽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물리 관련인지, 수학 관련인지. (읽을 당시에) 무리수의 소수점 아래의 숫자는 패턴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틀린 말 아닌가 생각했는데, 혹시 아시는 분, 계시나요?

 

* 연구 및 증명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5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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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身邊雜記 131113

- 신변잡기 131106부터 신변잡기 131112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8237 의 후기

 

위 제 글 5편에 대해 몇 가지 지적 사항이 있어 해명을 하고자 합니다.

 

‘비과학적’ ;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특히 수학과 물리)을 좋아했고, 그와 대척점에 있는 비과학적이란 것, 예를 들면 점占, 굿, 유령, 이해 못할 종교 (사이비 종교) 등에 혐오감이 있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과학의 한계를 느꼈고, 그 이상을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과학적’이라는 것에 거부감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웃사이더>라는 책에서

p28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

p178 고흐의 마지막 말 “불행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는 말에 대해 이 긍정의 태도를 균형짓는 일, 이것이야말로 아웃사이더의 문제다. 이는 이미 철학 문제가 아니라, 종교 문제기 때문이다.

 위 글을 읽고 ‘비과학적’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이라고 해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논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소시지 재료를 소시지 만드는 기계에 넣었더니 소시지가 나왔습니다. 소시기 기계에 음식물 쓰레기를 넣었더니 그에 합당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경우를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소시기 기계에 넣었더니 햄이 나왔습니다.

 소시지 재료는 (통상적인) 과학 분야의 관찰, 소시지 기계는 과학적 방법, 소시기는 과학적 이론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미신이고, 어떤 것은 통상적으로 과학으로 분류되지 않는 분야의 관찰 (예를 들면 도덕)이며 햄은 그 결과물입니다. 햄에 해당하는 도덕의 결과물을 과학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다른 용어( 예를 들어 철학으)로 부르든 학문적/진리 가치는 있고 그 햄은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생명 창조의 지적 설계론 ; 저는 생명 창조에 있어 지적 설계론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 주장이 무가치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동설이 처음 주장되었을 때,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주장들을 들어봐도 꽤 과학적 반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는 그 반론을 설명할 만한 과학 지식이 없었죠.) 뿐만 이런 반론을 설명하는 과정은 지동설의 타당성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 창조의 지적 설계론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과학이라고 부르든, 다른 것으로 부르든.) 어떤 이의 생각에는 진화론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겠지요.

 

* 칸트 ; 지난 일주일간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의 이중 잣대를 발견했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칸트도 틀렸고, 뉴턴도 틀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칸트 생각을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뉴턴은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성이론으로 확장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칸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었습니다.

 

<수학의 확실성> p404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그릇된 주장을 했지만, 이것은 당시의 철학자들과 수학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믿음이었다. 이런 오류로 인해 후세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은 칸트의 철학을 신뢰하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칸트의 저작이 3권정도 있는데, 구입을 해 놓고 전혀 읽지를 않았더군요.

 

* 신변잡기 131106부터 신변잡기 131112을 쓰기 시작한 것은 가연의 서평에서 비롯되었지만, 인용한 글들이 정확히 칸트의 생각인지, 러셀의 생각인지, 아니면 가연님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용한 출처만 표기하였습니다. (가연님께 미리 양해를 구했고 동의하에 글을 썼지만, 제 글을 읽으신 분들은 오해 없으시길. 인용된 글의 대부분이 가연님의 주장이 아닐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올리게 된 핵심을 언급하자면

러셀의 주장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에 (가연님이 동의한다고 하셨지만) 나는 이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칸트의 언급 ;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위의 언급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가연님이 동의하는지는 역시 불명확하고) 가연님의 말씀대로 칸트의 저작을 읽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인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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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3-11-1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변잡기 131107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79724 의 글은 가연님의 리뷰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지만 확실성에 대한 것, 확실성의 기반이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된 것입니다.

기관차의 예화와 공작왕의 예화는 불확실성의 논거로 제시한 것인데, (물론 공작왕의 경우 줄거리 전체를 노출시키지 않아서 더욱 논쟁의 거리를 남겼을 수도 있지만) 제가 제시한 내용만으로 논거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구체적 설명을 하자면, 그야말로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될 것 같아, 그냥 지적하신 바, 부적절한 예였다고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가연 2013-11-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만.. 동의하에 글을 썼다는 말씀엔 동의못하겠는데요... ㅎㅎ '인용한 글들이 정확히 칸트의 생각인지, 러셀의 생각인지, 아니면 가연님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용한 출처만 표기하였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대로 처음 양해의 말씀을 하실때 제 글을 '어떻게' 인용하실지에 대해서는 말씀을 안하셨던 것 같네요. 제 글의 일부만 잘라서 인용하시면 저로서는 어쩔 수 없이 마립간님의 의견의 반대입장으로 몰리게 되죠... 마립간님께서는 오류를 집어달라고 하셨지만, 글들을 보면 오류를 집는게 아니라 반론을 원하시는 것 처럼 잘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등등등... 그래서 제가 악마의 변호인, 같은 역할을 졸지에 맡은 것 같다, 라고 말했던 겁니다. 지금에서야 인용한 글들의 대부분이 제 주장인지 아닌지 모른다, 라고 덧붙이셨지만, 사실 그런 작업은 처음부터 하셨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핵심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러셀이 왜 저런 말을 하고 있는가, 는 직접 '인기없는 에세이' 를 읽으시면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저 부분만 덩그러니 놓아두면 당연히 동의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사실 책을 직접 읽고 판단하시기를 바랬습니다. 제가 러셀도 아닌데 러셀을 대신해서 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마립간님을 설득해야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추가로, 러셀의 말에 대한 제 입장은 제 리뷰에도 적혀있지만.. 명징하게 말씀드리는게 나을 것 같아서 몇 자 적습니다. 저는 인도주의를 기억하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뒤의 문장,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은 인도주의로 향하는 길목에서 그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마립간 2013-11-13 13:40   좋아요 0 | URL
동의 관한 가연님의 지적은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한 개의 글로 작성할 계획이었다가 글이 나눠지면서 한번에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인기없는 에세이'를 직접 읽고 판단해야 했었다는 지적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첫 알라딘 게제 때, 그냥 지나쳤다가 당선작 발표 후에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글을 쓰는 내내 약점으로 인지하고 있었구요.) 아마 책을 읽지 않고, 가연님의 설명 듣고, 대충 때우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죠.
 

 

* 身邊雜記 131112

- 신변잡기 131111 http://blog.aladin.co.kr/maripkahn/6686116  에서 계속되는 글

 

나의 바람은 다음 글과 같다. ;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철학자는 저렇게 말해. 철학도 수학처럼 계산해서 어떤게 답이다, 라고 알려주면 좋을텐데, 라는 마음을 품고 있던 러셀

 

그러나 내가 얻은 답은 ; 그런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 불구하고 내가 선택한 답은 ; 수학의 세계는 결국엔 불완전한 세계였었고, 사실일지도 혹은 거짓일지도 모르는 추측을 바탕으로 위태롭게 세워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체계였었다. 바로 여기서 러셀은 그가 원하는 완전한 세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사리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한다. ; 나 역시 시대를 넘을 수 없다. 시대를 넘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밝혀진 지식조차 충분히 소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원한다. 지구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는, 시간적으로 Big bang부터 big crunch까지, 공간적으로 전 우주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을 포함한, 철학 및 과학) 지식을.

 

* 사람의 생각은 (근본적 심성이라던가, 신념, 사상은 바뀌지 않을지 모르나) 조금씩 깎여나간다. 어제는 신은 있다, 라고 외치던 사람이 오늘은 안 외치고, 그 다음날은 신이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어제는 신이 없다, 라고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신이 있을까? 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은 신은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지난 주말 내가 알라딘에 올린 (주로 2003년말부터 2004년초에 게제한) 글들을 살펴보았다. 10년 넘게 알라딘에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이렇다.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옳게 판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착한 전쟁은 없다.’라고 선언한다면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우주가 소멸되는 시점까지 옳게 판단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어제는 ‘신이 있다’, 오늘은 ‘신이 없다’. 내일은 ‘신이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진리는 (특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기대는) 환상인가?/ “지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지나친 영리함이다.” ; 나는 영리함에 얽매여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 어떤이는 나에게 이런 조언을 주었다. ; (요약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진화론조차 더 나은 이론을 대체되면서 틀린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또 다른 분도 ‘착한 전쟁의 유무’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는 나에게 진리/세상은 내가 원하는 방식, 이런 질문에 보편적이 답변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세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럼에 불구하고 위와 같이 상대적 진리를 생각하는 어떤 사람은 (개신교의) 신은 없다고 단언하거나, 수학에서 일반각의 3등분은 불가능하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에 미래의 바뀔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다.

 

(러셀 본인이 강조하듯이) 그 신념이 그릇된 근거를 바탕을 하고 있거나, 설령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광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이탤릭체 글 ; 가연님의 글 중에서 발췌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2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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