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감능력이 없다고,

제가 추정했던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 인간은 인간을 해석할 수 없다 http://blog.aladin.co.kr/749915104/7060834

* 두 남자를 위한 변명 http://blog.aladin.co.kr/749915104/7061812

 

위 글에서 서울역에서 만난 남자 분을 편의상 A라고 부르겠습니다.

 

A씨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돌이켜보니 적절하지 못한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곰곰생각하는발 님의 글에서 나타난 정보로 (그 당시에) A가 공감능력이 부족했었다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시오페스sociopath의 예와 비교한 것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A와 관련된 사건이 살인 사건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범죄와 관련된 소시오패스의 사건을 예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정보가 부족하면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고 위안해 봅니다.) 하지만 A와 관련 사건에서 A씨는 범법이나 명백하게 남에게 해를 끼치는 부도덕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범죄자에 대한 비유를 언급한 것은 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소시오패스가 공감능력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소시오패스는 아닙니다. 저의 댓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 역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나 소시오패는 아니니까요. 저의 개인적 경험과 개인적으로 얻은 지식에 의하면 남자는 공감능력이 떨어집니다. 국가 기관의 공식 통계와 같은 확실한 근거에 의한 것은 아니고, 부실한 저의 경험과 지식에 의하면 남자 범죄가 여자보다 흔하고 이것이 남자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지지만 이것을 근거로 모든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부도덕하지 않으면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부류의 하나는 수학자들입니다. <천재들의 수학 노트>에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인 수학자 에피소드들이 나옵니다. 수학 문제를 해결을 위해 상시적이고 깊이 생각하는 집중이 상대의 표정을 읽는 능력이나 인간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에 둔하게 된 것이죠.

 

(TV에서 봤는지, 책에서 읽었는지) 어디 봤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어느 수학자가 대중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여러분들이 수학자들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학은 깊은 사고를 하는 분야입니다. 수학자들은 평소에도 깊은 사고를 하며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깊은 사고를 하는 수학자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상식적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려 하거나 일부러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행동은 단지 깊은 사고에 의한 결과적 현상일 뿐입니다.”

 

최근 수학의 성과 중의 하나는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것인데, 이것을 증명한 수학자 페렐만은 클레이 재단의 상금을 포기한 것은 물론이고 사회활동 자체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조를 받고 있는 어머니에게 얹혀살고 있죠. 아마 추정하건데, 수학문제를 풀기 위한 고도의 정신노동 후에 더 이상 기초적인 사회생활을 할 정신 능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봅니다.

 

사소한 오해와 몰이해가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가 있는데, 제가 그런 행동을 한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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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7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4-07-08 0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글내용으로 대략 짐작을 합니다만,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걸 보니 공감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거 같은데요.
공감능력이라기 보다는 용기의 문제로 봐야 할까요?^^

마립간 2014-07-08 07:5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위로는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공개 댓글로 잘못 언급한 것이니, 공개 글로 사과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상황이 끝난 후 그 상황을 돌아보며 '아 그 때 그렇게 했어야 맞는 것이었구나'라고 판단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공감능력이라기 보다 추론에 의한 상황 판단이죠. (이런 것도 공감 능력으로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상황이 종결된 상태라 돌이킬 수가 없죠.

통상적으로, 추론없이 직관에 의해 즉각적으로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을 판단하는 것을 공감능력이라고 할 때, 저는 공감능력이 매우 부족합니다. 예전에는 이것이 매우 속상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했습니다.

위 글, 저의 실수는 집단에 관한 정형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댓글을 남길 당시, 저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했는데, ... 잘못을 줄이려는 노력을 계속해야죠.
 

 

* 푸른기침 님께서 주신 의견에 대한 저의 견해

 

* 독서일기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52817

 

1-1) 님도 당연히 아시겠지만 플라톤이 본질주의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본질주의자입니다. 둘의 차이는 단지(단지라고 하기에는 틈이 많지만요) 본질이 개체를 초월해 있는지, 개체 내에 존재하는 지입니다.

 

저도 일정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플라톤-노자주의는 원리(이데아 idea)에 의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세상을 통해 원리가 보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유해서 설명하면 플라톤-노자는 주리론主理論이고,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주기론主氣論에 해당합니다. 저의 이런 설명이 푸른기침 님께서 ‘본질이 개체를 초월해 있는지, 개체 내에 존재하는 지와 같은 의미입니다.’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왜 아리스토텔레스를 나는 본질주의자라고 하지 않는가?

제가 아리스토텔레스-장자를 본질주의자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생명의 진화론 때문입니다. 플라톤-노자주의자에게 토끼rabbit가 존재하는 것은 토끼 이데아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자에게 토끼가 생긴 이후 토끼의 개념 즉 본질을 부여했습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장자는 본질주의자이지만,) 저는 본질의 개념, 정의는 무엇인가를 되묻습니다. 본질은 변화할 수 있는가? 본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시겠지만 재귀적 질문을 선택이 곧 답입니다. 저는 변하지 않는 것(최소한 우리 우주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는 변하지 않는 것)을 본질로 선택했습니다. 토끼에 관해 플라톤-노자주의 개념 적용은 틀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개념 적용은 맞지만, 저의 본질의 정의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푸른기침 님이 사용하신 ‘본질주의’ 개념에 이성주의/합리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1-2) 어찌보면 서양 철학은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한 몇 개의 사조나 철학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본질주의입니다.

 

어느 과학철학자가 플라톤 이후 근세까지 서양 학문이란 플라톤이 벌려 놓은 일을 뒤처리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1-3) 물론, 님께서 플라톤을 본질주의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단기적 맥락으로 대응시킨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대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동치同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제 정형의 1) 플라톤-노자, 아리스토텔레스-장자, 디오게네스-양주2) 본질주의, 단기적 맥락, 장기적 맥락이 동치라면 한 개의 정형이 다른 정형의 틀에 흡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따로 쓰고 있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동치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일맥상통하는 면을 대응이라고 하였는데, 더 적절한 용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두 정형의 연결에 관해 불확실한 면 때문에 어색함을 느낍니다.

 

2-1) 노자의 '도'를 플라톤의 이데아에 억지로 쑤셔 넣는 학자들도 상당히 많은데, 이는 노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됩니다. 道라는 어감 때문에, 도덕경의 첫 구절 때문에 오해하기 쉬우나 道는 초월적이고 항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도道

저는 도가 이데아를 초월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기理氣론에서 주희는 주리론을 주장하면서 리理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황은 주리론을 주장하면서 리는 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리는 변하는 것일까요,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현재로서는 과학의 영역( 즉 반론이나 검증이 이뤄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선택이 존재하는 철학의 분야입니다. 주희가 주리론의 리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주장했다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순환논리의 모순이죠.

 

도가 변하는 것인가 아닌가? 저는 여기도 (과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선택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도를 뭐라고 했건 간에 저는 도를 변하지 않는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그와 같은 선택을 한 배경에는 도와 악덕惡德의 관계 때문입니다. 주리론이든 주기론이든 세상을 총괄하는 것이 도인데, 도에서 악덕이 발생하는 것을 용납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도가 변하여 악덕이 발생한다면, 악덕, 악인을 포용해야하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말하는 도는 더 포괄적으로 multiverse와 metaverse를 관통하여 변하지 않는 것으로 지칭합니다. 제가 이렇게 임의적인 정의 하에 사용하여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를 초월적이고 항구적인 것으로 정의했습니다만, 도가 항구적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악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남습니다. 저는 여기에 도의 운행, 변화로 설명하고, 변화하는 도를 포함하면 도는 변화하는 것이죠. 저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지지합니다. 이기가 갈라지기 전의 것을 도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도가 이기로 갈라졌다면 도는 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2-2) 노자는 본질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有와 無의 대립 관계로 세상을 파악하는 비본질주의자입니다.

 

어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장자를 연결시키는 것도 웃길지 모르겠습니다. 비본질주의/비이성주의의 부류의 명칭으로 저는 디오게네스-노장사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노장사상은 일부는 노자, 장자와 관련이 있고, 별개의 내용도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 역시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의 주장이 제 분류로는 다른 곳에 속하기도 합니다. (동양사상은 서양사상보다도 더 명확한 구분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와 혜시의 ‘범애만물 천지일체 汎愛萬物 天地一体 (만물을 다 같이 사랑하라. 천지는 한 몸이다)’라는 것은 장자와 관련된 것이지만 저의 정형에는 디오게네스-양주주의에 해당합니다.

 

 

저는 과거에 플라톤주의자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플라톤-노자주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플라톤주의라고 하면 제가 이야기하고픈 개념이 아니라 플라톤의 책에 나온 내용 그대로를 신봉하는 의미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제가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따라서 저의 플라톤-노자주의는 본래 플라톤, 노자가 주장했던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여기서 제가 만든 개념을 예화로 설명드리지요.

 

예화 ; 동전을 100번 던졌더니 앞면이 51번, 뒷면이 49번 나왔다.

 

이 예화에 대해 플라톤-노자주의는 확률 1/2에 맞춰 거의 반에 가까운 횟수로 앞면, 거의 반에 가까운 횟수로 뒷면이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자는 앞면과 뒷면이 거의 반반씩 나와 확률 1/2을 사건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디오게네스-양주주의자는 두 주장을 (반대하기보다) 무시한 체, 비록 앞뒷면이 각각 반반 나왔다고 하여도 위 사실로 5번째가 앞면이었는지, 101번째가 뒷면이 될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저의 정형의 핵심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명은 은유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푸른기침 님의 글을 통해 부적절한 은유였다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1) 플라톤-노자주의자 ; 세상에 앞서 원리가 먼저 존재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세상(multiverse)에서 우리와 다른 소수prime number가 존재할 수 있는가?)

2)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 ; 세상이 있고 나서 원리가 생겼다.

3) 디오게네스-양주주의 ; 세상에는 원리(이성)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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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

 

처음 순종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아이가 유치원에서 배울 7가지 덕목의 항목에 순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혜, 인내, 경청 등 다른 항목에 관해서 아이와 이야기할 것이 있었다. 그런데 순종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아이에게 뭐라고 하나. 아버지인 내가 명령을 하고 아이는 순종하는 훈련해야 하나? 어찌 보면 유치원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은 (또는 가르칠 수 없었던) 순종의 미덕을 아이에게 가르쳤으니.

 

두 번째 순종에게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는 친구와 ‘기독교’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였다. 나에게 가장 우선적인 기독교 가치관 덕목은 ‘사랑’이다. 광범위한 사랑의 의미를 특정하자면 ‘약자에 대한 배려’다. 반면 친구의 가장 우선적인 덕목이 ‘순종’이었다. 나에게 순종은 덕목 순위의 하위에 있어 번호 매김도 되지 않았다.

 

우선 용어의 설명부터 해야겠다. 원인과 이유 ; 이 두 개의 용어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르게 사용하기도 한다. 다르게 사용될 때 ‘원인’은 동인動因적 면에서 볼 때 사용되고 ‘이유’는 결과적 면에서 볼 때 사용된다. 가끔 F=ma 식에서 왜 F는 ma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 식은 물체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한 a=F/m에서 귀결된 것이다. 귀결된 결과에 대해서는 ‘왜’라는 원인에 대한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떻게’라는 이유의 질문이 가능하다.

 

순종은 굴종과 맹종과 다른가? 나는 이에 대해 원인으로 설명한다. 굴종의 원인은 폭압이다. 맹종의 원인은 자의식自意識의 상실이다. 반면 순종의 원인은 리더십이다. 리더의 리더십 없이 순종처럼 보이는 것은 굴종, 맹종으로 아이가 그냥 예절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순종은 순종하는 사람의 내적 동인, 자발을 유발한다.

 

순종을 시험 성적에 비유하면 공부에 해당하는 것은 리더의 리더십이다. 공부 없이도 성적은 올릴 수 있다. 시험부정행위를 통해서이다. 리더가 (체벌을 포함하여) 훈육을 통해 아이를 복종시킬 수 있지만, 이때는 순종이라는 용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복종이라는 용어는 순종, 굴종, 맹종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린 코끼리의 한 쪽 발을 밧줄에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면 커서 그 밧줄을 끊을 힘이 생겨도 도망가지 않는다.’ 나는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학습된 무기력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왜 순종이 생기는가? 리더십 때문이다. 리더십이 없는 리더에게 왜 순종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순종은 자녀나 학생에게 가르쳐야할 덕목이 아니다. 리더에게 리더십을 가르쳐야 하고 리더십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이 순종이다.

 

‘신데렐라 컴플렉스 : 주인은 심성이 착한 노예를 좋아한다.’ 주인은 심성이 착한 노예를 좋아한다. 그러나 주인은 자발적으로 주인에게 헌신하고 다른 노예들을 주인에게 더 희생하게 하는 노예(상머슴)를 더 좋아한다. 즉 탐욕이 넘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순종이 아닌 맹종이나 굴종을 하는 노예는 그 가치가 떨어진다.

 

물론 내가 선택한 주인은 정의와 도덕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전풍田豊은 좋은 주인을 택하라고 조언한다.

 

------

 

윗글 쓰고 한동안 알라딘 서재에 올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의 질문에 대해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답을 찾지 못했다.

 

의문 ; ‘리더십의 수단으로 폭압을 사용하고 굴종을 내면화하여 외삽된 조건 반사적 맹종을 일으킨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맹종의 자발성을 조건 반사적 맹종으로 문장을 다듬음.)

 

위 의문은 ‘독서일기 140612’에서 내가 제시한 첫 번째 의문인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친일, 친독재는 (왜) 나쁜 것인가?와 동치인 것 같다.

 

* 독서일기 140612

http://blog.aladin.co.kr/maripkahn/7037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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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6-1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ㅠ, 마립간님은 늘 저를 곰곰히 생각하게 만드시는군요!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저는 순종 안에는 자발적 선택이 포함되어 있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맹종의 자발성이라는 것은, 모순적 의미가 아닌가요? 맹종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선택적이지 않은데, 거기에 자발성을 붙인다면 진정한 자발성이 아닌 착각의 자발성이라고 생각되네요. 진짜 제 머리 깨지게 하는 능력을 지니신 마립간님, 그래서 저는 마립간님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마립간 2014-06-19 22:25   좋아요 0 | URL
폭압과 순종이 어울리지 않듯이, 맹종과 자발성은 어울리지 않네요. 굳이 자발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면 자발성으로 착각되는 것이 맞겠네요. 문장을 다듬어야겠습니다.

2014-06-19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디오게네스-양주

 

나는 어떤 것을 해석하는데, 정형의 틀을 사용한다. 많이 사용하는 정형에 1) 플라톤-노자, 2) 아리스토텔레스-장자, 3) 디오게네스-양주의 정형이 있다. 이 이야기를 ‘독서일기 121209’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의 독후감에 언급하였다.

 

* 독서일기 121209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http://blog.aladin.co.kr/maripkahn/6002708

 

언젠가 디오게네스-양주의 정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후흑학>을 읽고 있는데, ‘디오게네스-양주’의 정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후흑학>의 독후감을 쓸 때 편할 것 같아 정리를 한다.

 

내가 사용하는 정형의 ‘플라톤-노자’가 실제 플라톤, 노자의 사상과 맞는지 모르겠다. 우선 내가 읽은 책 범위에서 내가 해석한 것이다. 나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고, 검정을 위해 알라딘의 글로 나의 생각을 노출시키나 아직 반론/반박을 받지 못했다.

 

나의 동경에는 ‘안빈락도安貧樂道’가 있다. 부富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이 내용은 불교에 가깝겠지만, 나는 노장사상을 떠올렸다. 하지만 내가 독서를 한 바에 의하면, 노자도 장자도 노장사상과 크게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고 중국 민간 신앙을 기원으로 생각하는 더 가까울 것 같다. 그리고 노자, 장자 각각의 사상은 서양의 자연철학에 해당함을 알았다. 반면 서양의 철학 사상에서 동양적 사상을 찾아보니 ‘디오게네스’가 해당되었다. 디오게네스에 관한 책을 찾으려 했는데 없다. 나와 있는 책은 어린이용으로 디오게네스가 햇볕을 가리지 말라고 한 에피소드를 소개한 책이 전부였다. 2011년도 출판된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보고 기뻤다. 드디어 디오게네스에 관한 책을 읽는구나하고. 하지만 이 책에는 디오게네스에 대한 내용은 없고, 글쓴이의 주장만 가득하다. 나는 오랫동안 디오게네스-노장사상이라는 정형의 틀을 사용했는데, 중국 사상가 중에 양주의 사상을 보고 디오게네스와 비슷함을 느꼈고, 이후에는 ‘디오게네스-양주’라는 것으로 정형의 틀 이름을 바꿨다.

-----

디오게네스와 양주는 당사자가 그리고 그의 학파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책이 없은데, 그들의 책이 없다는 것이 그들은 연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그들이 그들의 철학에 충실했다는 것으로 보여준다.

 

내가 정의한 디오게네스-양주는 이성/합리론의 한계를 넘어선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서 나의 임의적 정의가 사용되는데, 디오게네스-양주가 합리론을 포함한 이상을 포함할 수도 있으나 나는 합리론의 제외된 것만을 사용함으로써 플라톤-노자, 아리스토텔레스-장자, 디오게네스-양주의 모델이 완성된다.)

 

이성과 합리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흔히 인용되는 사건이 1,2차 세계대전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이성을 혐오하고, 이성의 주체인 사람을 혐오하고 인간 사회/문명을 거부한다. 비이성적인 자연을 선호한다. 그리고 본능을 중시한다. (디오게네스와 관련에 에피소드에 공공장소에서의 자위행위가 있다.) 인간 사회의 거부는 무정부주의나 위아爲我와 같은 주장으로 나오기도 한다. 단기적으로 이성은 꽤 잘 작동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이성은 결과는 실망스럽다. 디오게네스-양주는 장기적 안목으로 실망스러운 결과를 예상한다.

 

플라톤-노자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수학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장자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진화론이고 디오게네스-양주를 잘 보여주는 것은 카오스이다.

 

* 사람과 쥐

http://blog.aladin.co.kr/maripkahn

 

디오게네스-양주가 추구하는 철학은 아우타르케이아로 설명할 수 있다.

아우타르케이아 (고대 그리스어: αὐτάρκεια, 스스로 만족하는 것) ; 아무런 부족함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신의 특징으로,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만큼 자연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위키백과)

 

요약하면 자연적인 반문명, 반이성주의, 반합리주의, 실용지능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부류에 디오게네스와 함께 양주에 분류하는 것이 합당하는지, 후흑에서 언급한 유방도 비합리주의에 포함되는지,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지 누군가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니체는 어느 강의에서 비합리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은 들었는데, 다른 강의에서는 합리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을 들었다. 과연 어디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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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견불여일행 百見不如一行

 

1980년대 말 대학 학생 시절, 실험실에 잠깐 있었다.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도 받을 겸, 실험 기법도 배울 겸. 어느 날 저녁, 식사 후에 잡담을 나누는데, 실험에 관한 이야기가 성관계에 비유되었다. 학생 신분인 내가 있는 고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선생님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하셨고, 나는 백견불여일습百見不如一習이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웃으셨다. 성관계가 언급된 상황이라서 더 웃겼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실용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한번 보거나, 실습한 것으로도 몸의 습득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실용지능에 대한 상황을 이해만하고 실감하지 못하였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야기는 ‘백문불여일견’이라면 ‘백견불여일습’이라고 조건문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이후는 나는 내가 만든 한문 문장에서 습習이 적절한지 험驗이 적절한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습’은 능동적이지만, ‘험’도 수동적으로, 둘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 행으로 습과 험을 통합했다. 게다가 습과 험도 검색되어 조금 놀랐다.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비슷한 듯.)

 

백견불여일행을 다시 찾아보게 된 것은 어느 알라디너의 댓글 대화 때문이다. 먼저 예전에 알라딘 (댓?)글에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하나.’라는 문장을 보았다. 나는 대댓글을 달지 않았지만, 이 말이 맞나 생각해보았다. 며칠 전 본 문장은 ‘세실리아는 이런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앎에 ‘학습지능’에 의한 것과 ‘실용지능’에 의한 것이 있다. 학습지능에 앎의 경우는 모름과 앎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하다. 반면 실용지능에 의한 앎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그리고 실용지능에 의한 앎을 대충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직접 경험이전에 아는 것이다. 본능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간접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한두 번의 직접 경험에 의해 아는 것이다. 백견불여일행은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도덕경에도 나오지만,) <아웃라이어>에서 언급한 (1만 시간으로 알려진) 일정 역치를 넘는 경험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살인만 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봐라’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라는 위치 때문에 절도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암시는 하셨다. 직접 경험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다른 알라디너 글에 나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저도 가끔 충고를 받습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지 말라고요.’ 나에게 이런 충고주신 분의 뜻을 새겨보면 직접 경험을 너무 경시하지 말라고, 학습지능과 실용지능은 균형을 가져야 된다는 충고로 해석했다. (역시 말은 쉬운데, 행동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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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5-2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런 뜻에서 저의 댓글에 그렇게 쓰신 거로군요.
거기에 역시 전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ㅎㅎ

마립간 2014-05-29 15:37   좋아요 0 | URL
제가 절대적 독서의 양으로 인해 부작용을 가질 만큼 독서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인 독서 부작용이죠.

충고의 해석도 저의 생각입니다. 충고를 주신 분의 뜻이 Stella.K님과 같은 생각으로 주셨을 수도 있지요.

페크(pek0501) 2014-05-30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너무 많이 읽지 말라" - 쇼펜하우어도 책의 부작용에 대해 언급한 바 있죠.
책만 많이 읽는 게 좋은 건 아니라는 거죠. 생각 없이 그저 남의 생각만 읽는 건 나쁘다는 것 같아요.
실제로 책을 많이 읽었으되 기본이 되지 않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책 읽기로만 사람이
완성되는 건 아닌 듯해요.
사색과 성찰이 따라야 하는 건지... 이 부분은 저도 어렵습니다. ^^

마립간 2014-05-31 08:31   좋아요 0 | URL
이 부분에 대해 pek0501님과 이야기를 나눴었죠. pek0501님과 저는 책을 읽지 않더라도 훌륭한 인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동의를 했구요.

책은 언어로 명시되었기 때문에 진리가 생략되거나 압축되었죠. 따라서 사색과 성찰이 없이 읽으면 행간의미를 놓쳐 오독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책은 사색과 성찰을 유발하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색을 동반하는 독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찰과 행동이 뒤따라주지를 않으니,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훈계만 하고 다니는 밉상(알라딘에서 제 캐릭터 아닌가요?)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제가 독서를 하게 된 이유가 사회 도피적인 면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약점을 가지고 시작했죠. 알라딘 활동 자체가 제게는 매우 예외적인 사교 활동입니다.

페크(pek0501) 2014-06-02 08:09   좋아요 0 | URL
아, 밉상이라고 누가 그러나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ㅋ
저는 지구 사람들의 반은 저를 좋아하고 반은 저를 싫어한다, 라고 생각해요.
다 좋아할 수도 없고 다 좋아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에요.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건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편하죠. ^^

마립간 2014-06-02 12:42   좋아요 0 | URL
pek0501님의 말씀은 저에 대한 위로와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밉상의 생각는 제 생각입니다. 누구나 훈계를 싫어하죠.

저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저를 좋아하기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사람도 있겠죠. pek0501님은 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그렇다고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지거나 저를 싫어하는 이유가 해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편하기 때문에 선택을 했다가 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