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님께

 가을산님이 답변을 너무 빨리 주셔서 조금은 부담스럽습니다. 혹시 논쟁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하고 계신 가을산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도 인간적 본성에 이기적 면과 이타적 모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을산님이 말씀하신 ‘이른바 이타적인 행위는 즉 좀더 큰 “우리”를 위한 행위의 필요성에 의해 우리 본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사회생물학에서 여러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될 문제가가 우리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다른 말로 ‘자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자아’가 개인마다 그리고 그 개인이 처한 사항마다 인식의 범위가 다릅니다. 어린 아이의 자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자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금 성장하게 되면 가족을 확장된 자아로 인식하고 가족의 유익(이기적 면)을 구합니다. 어떤 기업가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나라에 대해 해가 될 수 있는 비리를 저지릅니다. 좀 더 확장되면 국가가 자아가 되고, 그 후에는 인류, 그 다음에는 모든 생명을 포함한 자연이 되겠지요.


 가장 좋은 자아는 가장 확장된 자아, 즉 모든 생명체에 대한 경외감과 모든 인류에 대한 박애 정신을 모두가 갖게 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자아는 연속적으로 확장되지 않고 몇 가지에서 계단식으로 확장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개인, 가족, 국가가 그것에 해당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경향이 오히려 두드러진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살던 시절에 외국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흑인이나 동남아인 등을 포함한 외국인을 백안시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이기심도 저는 보통이 넘는다고 생각합니다. 가을산님께서 이전의 편지에서 80:20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오히려 이기적인 마음에서 사회 안정망 또는 시스템을 말씀하였지만 어떤 이들은 오직 우리 가족만이 우리이며 즉 자아이며 다른 사람을 딛고 현재의 우월한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사는 가족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테레사 수녀님같은 인류애는 아니더라도 이웃을 내 이웃으로 여기는 정도의 자아의 확장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또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이웃을 우리로 여기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장애아 시설 수용의 거부, 심지어 임대 주택까지 거부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반적인 개인의 행동이 이타적으로 피부로 느끼거나 잘못된 행동에 직접적으로 제제를 받는 단위는 집단의 크기가 18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에서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은 대량생산 소비의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경제적으로 보다 가난한, 저성장의 경제를 누리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희생적 사랑에 공명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어느 일정 부분 동감합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구 한 대륙1에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대륙2에 현재의 이기성과 이타성을 갖은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대륙3에 철저하게 이타적인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창조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대륙2에 살던 사람이 대륙1과 대륙3을 점령한 것이 아닌가하고. 인간의 생존(또는 번영)에 아마 이기적인 면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이든 Evolutionary Stable Strategy이든 간에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 자연과학적 사실이 작용했습니다. (마립간 페이퍼 2004년 1월 19일자 티민thymine과 우라실Uracil에 관하여 참조)


 미래의 유익을 위해 현재의 유익을 미루는 것은 지적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렇게 행동을 하지만 일반적 사람들은 어려움이 겪은 후에 미래의 유익을 위해 현재의 유익을 미룹니다. 제가 알기로는 미국이 철저하게 자본주의가 된 까닭에 공황이라는 어려움을 겪은 후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에서는 오폐수 배출을 스스로 철저하게 통제하는데 이는 상수원 보호를 위해 마을을 폐쇄하려는 정부의 조치가 정해지자 오폐수 배출을 줄이고 정화시절을 설치 가동했다고 합니다. 갈대님이 남겨 주신 댓글에 전적으로 동감하는데 자본주의의 성장 제일  주의가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오염, 부익부, 빈익빈 심화, 석유고갈 등에 제어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친결혼은 그 결과가 어떠했다는 것이 학습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욕망 혹은 이익을 보류하는 인간의 특성에서 나오는 독특한 행위입니다.’라로 하셨지만 저는 학습을 통한 습득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1984년> 나오는 Big brother이 있어 작은 교통위반도 처벌된다면 아마 현재보다 교통법규를 훨씬 잘 지킬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스템에 의한 의견은 합의를 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상적인 시스템이 없다고 해서 최선의 시스템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시스템에 의해 불이익을 받는 사람의 불평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는 내재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발전이라는 단어의 뜻이 ‘인간의 얼굴’을 찾아가는 것과 같이 하였으면 합니다. 여기에서는 제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인간적이다’라는 용어에 자연과학(물리학, 생물학)적인 정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인문학에서 정의를 찾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으니 나중에 자세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체제를 이루면서도 신자유주주의 물결에 삼켜지지 않을 대안이 아직까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대안을 찾지 못하면 목표는 있으나 실행 불가능한 것이 될 테니까요. 국제연합 WTO 초국적 대안운동은 세계화가 자본주의 팽창의 한 수단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세계화를 반대해야 할 기구(예를 들면NGO)의 세계화가 되는 내재적 모순이 있어 저는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저의 개신교는 저의 선택이며 그 보수성이 개신교를 선택했지만 개신교과 보수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쉽게 말하면 개신교를 선택했지만 개신교 종교인은 아직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연보라빛 우주님과 stella09님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저의 철저한 분석적 사고는 개신교에 여지없이 적용됩니다. 오강남씨가 쓴 여러 책과 <성경:고고학인가 전설인가> 등의 철저하게 비기독교적인 책도 읽고 있습니다. 저의 기독교관의 변천을 다른 페이퍼에 쓰겠습니다. 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색분자의 정치 성향과 녹색당을 지지하는 가을산님에서 공통점을 찾으니 참 좋습니다. 출발과 지향점이 같게 되면, 아마 현실에서 선택할 결론과 방법이 많지 않을 듯 합니다.


 짧게 쓰려는 편지가 갈수록 길어집니다. 몇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편지가 너무 길어질 것으로 생각되어 다음 편지 나머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혹시 가을산님에게 부담 드릴까 우려됩니다. 제가 문제를 제안하고 가을산님이 답변하는 것 같아서요.

 

새로운 달이 시작됐네요. 좋은 9월이 되십시오.


2004년 9월 1일

마립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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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0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제가 굉장히 광범위해진 것 같습니다.
다른 부문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견해의 확인이 이루어진 것 같은데,
마립간님의 글 중 개신교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굉장히 의외였고, 그 경위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계속 실망을 반복하면서도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의 사정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유아세례를 받고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대학생때까지 성당에 다녔고,
중고등학교는 감리교 미션 스쿨에 다녔습니다.
성당에서는 주일학교, 성체성사, 견진성사를 위한 교육도 받았고, 창세기에 대한 교육자 프로그램도 이수했습니다. 수도원에 묵상을 주로 하는 '피정'도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학교에서는 매주 예배를 보고 성경이라는 과목을 배웠습니다. 학생 수준에서나마, 친구들에게 교리와 믿음에 대한 상담역도 했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랑, 섭리에 나의 생활과 기도를 일치시키고자 노력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해보지 않은 '비기독교의 세계관'을 경험해보아야 할 것 같다는 충동이 쌓여갔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인이 된 후에 기독교에 귀의하신 분들의 선택이 늘 궁금합니다.
본과3학년때 떠나보기로 결심을 했는데, 그때 시작된 여행이 아직도 끝나지지 않고 있습니다.
요즘은 다시 기독교인이 된다는 기대를 거의 접고 있습니다.

더이상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된 후에도 기독교 신학에 나름대로 여러 방면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하고, 같이 활동하시는 여러 성직자, 신자들과의 대화의 끈도 놓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에게 '포교'하려는 사람들의 설득에 늘 귀기울여봅니다만, 늘 씁쓸한 실망을 느낍니다.

저의 경우, 예수님의 기도 - 주의기도 - 는 그 한줄 한줄에 공감을 합니다. 이 기도는 요즘도 가끔 마음속에 되새깁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거의 한줄도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만'해서 그런것이라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요즘은 아는 종교인들에게는 '차라리 예수님 스카우트가 있다면 가입하겠다.'고 농담을 합니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는 '易敎' 적인 요소와 '難敎'적인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종교는 '易敎' 적인 요소가 강한 교파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본주의가 경쟁력이 강해서 득세하고 있는것과 마찬가지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저의 '구원'이나 '영생'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는 것으로 인해
'신자'가 될 동기가 없어져버린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관심의 초점도 좀 더 현세적인 것으로 옮겨갔구요.

그냥, 제가 요즘 이렇습니다.
종교를 선택하신 분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가을산 2004-09-0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또 금방 답글을..... 죄송합니다.... (무척 궁금하던거라서....)
마립간님의 다른 주제들은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마립간 2004-09-0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답글 금방 주시면, 저야 좋지요. 가을산님에게 부담지우는 것 같은 것이 저의 부담입니다.

갈대 2004-09-02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친상간을 기피하는 성향이 본능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학습된 결과인지는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학습되므로 둘 중 하나라고 결론내리기가 어려우니 영장류나 포유류를 관찰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근친상간의 대상을 크게 두 가지로- 부모와 형제자매-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새끼의 입장에서 늙은 부모는 분명 매력이 없을 테니 기피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이 다른 형제자매와의 관계인데, 이건 뭐라 말하기가 어렵네요.

마립간님 바뀐 지붕이 아주 멋집니다~^^

마립간 2004-09-02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 저도 지붕이 너무 멋있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좋아하고 있습니다.
 

* 마차

- 마차는 마구Harness에 해당하는 재갈과 고삐, 말굴레, 채찍, 등이 있고 마차를 구성하는 덮개, 의자, 바퀴, 바퀴축, 등이 있습니다.


- 스님과 제자의 대화입니다.


스님 : 재갈이 마차냐?

제자 : 아니요.


스님 : 말굴레가 마차냐?

제자 : 아니요.


스님은 마차의 구성요소를 하나 짚어 계속 묻습니다.


스님 : 의자가 마차냐?

제자 : 아니요.


스님은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마지막으로


스님 : 바퀴 축이 마차냐?

제자 : 아니오.


계속 질문이 계속됩니다.


스님 : 마차에서 재갈을 떼어내면 마차냐?

제자 : 예.


스님 : 그럼 거기에다 말굴레를 떼어내면 마차냐?

제자 : 예.


스님의 질문은 계속되고 덮개를 떼어내면 하고 질문을 하니 제자는 너무 많이 없어져 마차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어찌 보면 마차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제자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계속해서...


스님 : 그러면 의자를 떼어내면 마차냐?


해도 너무한다. 이제 바퀴와 축만 남았는데, 마차라 할 수 있나? 그래서 제자는


제자 : 아니요.

스님 : 아니 조금전에 의자가 마차는 아니라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의자를 떼어내기 전에는 마차라고 하더니, 의자를 떼어낸 후 마차가 아니라고 하니 어떤 이유인고?


- 나의 상상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지금 보다 얼굴이 잘 생겼으면. 그리고 나면 키가 컸으면. 그리고 외국어도 세 네가지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면. 그리고 나면 각종 고전에 관한 책은 모두 읽었고 과학지식도 풍부했으면. 아니지 이왕이면 돈도 많고, 학벌도 좋고, 배경이 되는 부모님도 근사하게... 이런 상상이 진행된 후 상상속의 그가 한 일은 별 볼일 없는 저와 인연을 끊는 것입니다. 나와 용모, 지적 능력, 환경이 다른 상상속의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죠.


 평범한 여대생^^님의 댓글에 올렸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의 저의 모습은 용모도, 지적 능력도, 가치관도, 그리고 환경도 지금의 현격하게 다른 현재의 자아와 어떻게 공통점을 찾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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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09-01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마차이야기는 어느 불경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제가 정확한 출전을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알라디너 중에 알고 계시는 분은 저에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개미

- 생명에 대한 고찰.


 유기물에 대한 정의는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탄소화합물이 인공적으로 생성되지 않는 전제 하에 많은 탄소화합물이 유기물로 분류되었지만 인공적으로 탄소화합물을 만들 수 있게 된 후로는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등 몇 가지를 제외한 모든 탄소화합물을 유기물로 분류하였습니다.


-  생물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합니다.


1) 개체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가 있다./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2) 동화작용, 이화작용, 성장을 포함한 물질대사를 한다.

3) 자기 복제를 한다. (생식, 유전, 발생을 포함하여)

4) 환경에 적응하다. (진화를 하기도 한다.)

5) 반응을 한여 항상성을 유지한다.


 이들 다섯 가지 중 두 가지만 우선적으로 선택하자면 2), 3)이 중요하고, 그 중에서도 하나만 고르자면 3)을 생명의 특징으로 삼습니다.


 개미는 조직적 사회를 이루는 몇 안 되는 동물 중의 하나입니다. 꿀벌도 있고, 사자도 가족 단위의 사회를 이루기는 하지만 대표적으로 사회 생활하는 동물도 회자됩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협동과 사회를 위한 개체의 희생입니다. 사람의 사회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지만 개미는 주어진 임무에 일률적인 행동을 보여줍니다.

 개미 집단 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병정개미는 굴 밖으로 나와 싸움을 하고 굴 안의 일개미는 여왕개미를 보호하기 위해 굴 입구를 막습니다. 병정개미는 전투에 승리하고도 굴 밖에서 죽습니다. 전체를 위해 희생, 이 고상한 것이 작은 곤충에게 있다니... 어쩌면 도덕성에 대한 해답이 있을지...


 생물학자는 일개미의 개체가 단위생식을 통해 발생한 것으로 (단위생식이란 부모로부터  두 종류의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쪽에서만 받은 유전자로 개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일개미로서는 번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일개미 한 마리의 개체에는 없는 것입니다. 유전학자가 보기에는 한 마리의 여왕개미를 정점으로 한 개미사회의 한 집단이 사람의 개체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일개미는 체세포와 같는 것이죠.


 사람이 길을 가다가 머리 위로 높은 곳에서 떨어진 물건을 발견하면 손과 팔로써 머리를 보호합니다. 떨어지는 물건에 의해 팔이 잘린다면 떨어져 나간 팔에 있던 세포(즉 생명)는 죽지만 그 개체는 살아남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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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08-31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글을 올리는 것이 조금 늦었지요. 내용도 조금 부실한 것 같고. 이글은 불경에 나오는 마차에 대한 이야기하고 함께 올려야 되는데, 그냥 먼저 올립니다. 이 이야기는 '자아'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찾아서 읽은 내용인데, 생물학을 다루는 여러 책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열린책들)에 개미에 대한 잡다한 것이 많이 쓰여 있습니다.

2004-08-31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08-3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님이 보내주신 책갈피 잘 받았습니다. 낯이 익은데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새겨진 이쁜 책갈피 말입니다. 거의 일주일이 걸려서야 도착을 하는군요. 우리학교 시스템이 원래 그렇습니다. 제가 다른 분들께 받은 책갈피도 워낙 잘 잃어버리는지라 님의 선물은 책상 안에 넣어두고 가끔씩 들여다볼까 합니다. 벌써부터 냄새를 맡은 조교 선생이 달라고 하네요. 이벤트에서 당첨된, 그것도 1등으로 당첨된 건데 제가 어찌 남에게 주겠습니까. 선물 감사드리며,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조선인 2004-08-3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받았습니다. 일단 퍼갑니다.
 

가을산님께


 벌써 8월이 다 지나갑니다. 저는 바쁜 생활 속에서 지금과 같은 망중한이 되면 유수流水같은 시간을 느끼고 조금은 감성적이 됩니다.


 가을산님이 8월 27일 저에게 주셨던 댓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가을산님의 글에서 동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가을산님의 글이 진실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회의를 느낍니다.


 첫 번째로 ‘자연스러운 인간으로서의 생각이 있다면, 현재의 우월적인 위치나 이익에 빠지지 않고, 앞날을 대비해서 염려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주셨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공대 지망생이었습니다. 당연히 제조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기에서 환경오염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되었습니다. 당시 친구가 한 이야기는 현재의 과학이면 무공해, 또는 저공해 물품을 만들 수 있음에도 단기적 이윤 추구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쓴 글 (마립간 페이퍼 2004년 1월 2일자) ‘신석기 혁명, 농경사회로 전환’과 (마립간 페이퍼 2004년 1월 13일자) ‘가게를 가려고 하는데’에 저의 의견을 나타낸 바 있습니다. 당장에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으면 대비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그리고 당장의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날지 못하는 새 모아giant Moa가 있는데 이것을 멸종시키지 않고 사냥을 했다면 자자손손 이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봐, 친구 이렇게 사냥하다가는 이 새가 멸종하겠어. 글쎄, 하지만 우리가 사냥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사냥해서 마찬가지일 텐데. 방학이 끝날 무렵 방학 숙제를 미리 하지 않아 고생했던 일, 미리미리 할 것을. 시험이 닥쳐오면 미리미리 공부 할 것을. 반복되는 후회지만 항상 현재의 즐거움을 희생하여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건 단순히 동정이나 이타적인 생각이 아니라 언제라도 내가, 나의 자녀가, 나의 가족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라고 생각하여 미리 대비하고 싶지만 생각만 그렇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모두 교통질서를 지키면 도로 소통이 잘되고 전체적으로 이익이 되지만 남들이 질서를 지킬 때 새치기, 끼어들기를 하면 그가 제일 빠르게 갈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과학적 수학적 접근은 게임의 이론에 의한 모델인 Evolutionary Stable Strategy로 설명합니다.


 한 가지 고백을 하면 위 글은 현시점에서의 상황입니다. 미래의 사회가 더 도덕적인 사회가 될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는 인간의 도덕성이 진화를 할 것인가의 문제와 닿아있습니다. 이는 다시 인지과학에 대한 것과 연관되어 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로 시스템에 관한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투표 방법이 있을까요. 답은 없습니다. 여러 팀이 운동 경기를 하는데 가장 합리적인 경기 진행 방식은  토너먼트 아니면 리그. 역시 답이 없습니다. 세 팀이 경기를 하는데, 경기스타일 때문에 A는 B를 항상 이기고, B는 C를 항상 이기고 C가 A를 항상 이긴다면 토너먼트 대진표가 작성하는 것이 결국 우승팀을 결정하게 됩니다. 리그 경기 방식은 어느 팀이 다른 팀에게 일부러 져 주어 종합 성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는 것 경우를 이미 실제에서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회 구조의 80:20에 대한 설명은 보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저의 글 (마립간 페이퍼 2004년 8월 24일자) ‘보수와 진보’와 (마립간 페이퍼 2004년 7월 20일) ‘불평등의 기원’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한 듯 합니다. <80/20법칙>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것인데, 현재 시스템에서 이것을 극복할 방법이 당장에 저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가을산님의 실천의지는 제가 알고 있지만, 조선인님은 ‘개인적 실천으로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저는 ‘아니오’로 대답했습니다. 개인적인 실천이 대부분에서 개인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 질 경우만 가능합니다. 가능성이 매우 적습니다. (알라딘너 중 몇 분이 가을산님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제도에 의해 강제될 경우에는 강제할 수 있는 기관(국가자체이든, 아니면 국가기관이든)이 필요하고, 힘을 가진 이 기관이 순수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만약 부패한다면 제동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산술체계 하에서 스스로의 완전성을 증명할 수 없는 불완정성의 원리를 떠 올리고 있습니다.)


 저의 의견은 최선(시스템)이 안 되면 차선(동정)을 택하는 것이며, ‘동정’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주지만 저는 저의 나름대로 의미를 달리 하는 용어입니다. 이 아이디어 의미는 아담스미스 경제 이론으로 안 되면, 케인즈 이론으로 밀어 붙이자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첫 편지에 사용된 저의 보수에 대해 간단히 추가 말씀드리면 경제적 정의에 의한 추구하는 가치는 진보입니다. 즉 자발적 가난을 일컫습니다. 정치권의 가장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도 저는 진보로 보지 않습니다. 자발적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 스스로를 보수로 정의하는 것은 아버지 원리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이유는 제가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기독교의 개신교) 때문입니다.


 오늘은 휴일인데 잘 보내십시오. 태풍이 온다고 하던데 이곳 지금 밖의 날씨가 화창합니다.


2004년 8월 29일

마립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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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8-2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공이 높은 글이라 감히 댓글을 달기가 어렵네요. 추천만 합니다.

가을산 2004-08-3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곧 답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태님, 부채질 하시니, 시원하시죠? ^^

가을산 2004-08-3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

주말 잘 보내셨는지요?
어제 오후는 다른 일로 차분히 글을 읽거나 쓸 수가 없어서 답글이 늦어졌습니다.

1. 우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저는 토론이라는 것은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상대방과 생각을 교류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거나 상대를 나의 생각과 같게 교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나 수학의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진위를 밝혀낸다는 것이 무척 어렵고, 그 주제가 ‘가치’와 관계될 때에는 하나의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생각을 언어라는 도구로 소통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구요.

2. 제가 지난 번 마립간님의 글에 답글을 단 이유는 ‘이타적인 행위’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이타적인 행위는, 즉 좀더 큰 ‘우리’를 위한 행위의 필요성에 의해 우리 본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2.1 사회생물학

사회생물학 논쟁을 촉발시킨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보면, 윌슨은 ‘이타주의’에 책의 한 chapter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타적인 행위는 한 개체에는 불리하지만 인간이라는 공동체에는 이익이 되고, 이 때문에 실재로는 이타적인 것도 이기적인 본성의 발로라고 합니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에서도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장과 주부가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 국가가 위기에 놓였을 때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재에도 한 개체의 희생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확대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2.2 종교와 본성.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볼 때, 그 가르침에서 이른바 ‘원시 종교’와 다른 주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그것도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입니다.

악의 퇴치와 기복의 차원을 넘어선,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자신의 깨달음을 중생들과 나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류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이타적인 메시지는 작은 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인 인류 차원의 포용을 가르치는데, 이것이 인류 역사에 뿌리내렸다는 것은 이런 메시지에 공명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설사, 제국의 성립시기에 부족적인 기복을 넘어서는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에 의해 선택된 종교라 하더라도, 그 메시지에는 분명 보편성이 있고, 우리에게는 그 메시지에 공명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3.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른 문명을 이루게 된 주요 요인으로 - 불의 발견 이외에 - 농경의 시작과, 레비 스트로스가 지적했듯이 ‘근친결혼 금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공통된 특징이 미래를 위해 당장의 이익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립간님께서 예로 들으신 모아새 뿐 아니라 많은 생물들을 멸종하게 한 우를 범한 반면, 농경과 가축을 발명해 냈습니다. 즉, 식량이 되는 식물과 동물을 지금 베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잘 익을때까지 기다리는 것, 당장의 식량이 부족하더라도 내년의 농사를 위해 열매의 일부를 남겨 겨울을 나는 것은 인간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사회에 성적 도덕이 문란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우자 이외의 대상에 대한 성적 욕망을 억제하고, 특히 가까운 친족간의 결혼을 금기로 하는 것은 어떤 미개한 부족사회를 가더라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간사회의 특징입니다. 이 역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당장의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회와 종족의 보존에 더 유리한 장치로 작용합니다.

숙제나 공부 같은것, 물론 밀리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현재의 노동력을 공부에 투자함으로써 미래의 더 큰 생산성을 바라보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미래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욕망 혹은 이익을 보류하는 인간의 특성에서 나오는 인간의 독특한 행위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두고 농경을 발전시킨 면을 볼 것인지, 동물들을 멸종시킨 면을 볼 것인지,
교육이라는 문화를 볼 것인지, 아니면 숙제와 공부를 미루는 심리를 볼 것인지,
결혼과 근친결혼 금기를 볼 것인지, 아니면 문란한 성도덕과 범죄행위를 볼것인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공중도덕의 존재를 중시할 것인지, 새치기 하는 사람의 존재를 중시할 것인지에는 각자의 시각차가 있겠습니다.

단, 앞부분의 특성을 무시했을 때, 인간이 인간으로서 현재와 같은 문명을 건설할 수 없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4. 인간의 도덕성은 더 강하게 진화가 될 것인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의 인간들이 현재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현재의 시스템으로 얼마나 더 문명을 지속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다고 봅니다.

4.1 의사 결정 과정의 문제

인간은 인간 역사의 90% 이상을 부족사회로 지내왔습니다. 부족 단위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의사 결정 과정이 비교적 공정하고, 빈부격차도 크지 않습니다. 집단 내의 동질성도 큽니다. 그런데 인류가 점점 큰 단위의 공동체와 국가를 이루어 살게 되면서 집단 내의 동질성도 떨어지고, 의사결정 과정이 상층부의 권력계층에 집중되게 됩니다.

이런 새로운 변화에 의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 사람들은 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대의제니, 대표 소환제, 지방자치제, 이익집단의 등장 등, 점차 정교한 사회 시스템을 고안해 왔습니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개인이나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대중’으로서의 의사결정이 매우 미숙하고 혼란스럽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고 이끌 지도자는 키워지지 않고, 그때그때의 여론에 정치가 휩쓸리는, 그리고 그것을 잘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편, 의사 결정의 문제에서, 한 지역의 현안울 결정할 때 그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배재한 채, 중앙정부에서 밀어붙이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새만금 간척사업, 부안의 원전폐기물 저장소 건설 문제, 천성산 공사 문제 등은 그 사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당사자의 의견을 소외시켰기 때문에 부작용이 컸습니다. 필요한 일은 진행하되, NIMBY 현상을 배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아직 우리는 고안해내지 못했습니다.

4.2 인간의 얼굴을 한 시스템

부족시대에는 부족원들의 친족관계도 동질성이 있었고, 사회의 빈부격차가 있어도 한 공동체 내에서 소외되어 죽어가는데 한쪽에서는 그런 계층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채, 혹은 알더라도 무시한 채 지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가 ‘발전’했다고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이 없도록 시스템을 복원해야 합니다. 최소한 인간적인 삶과 죽음을 영유할 수 있는 사회는 그 수혜자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갈등과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도 줄일 수 있습니다.

계층간의 언어와 세계관과 가치관이 요즘처럼 갈라지고 갈등이 커지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사회가 ‘발전’한다는데 이런 일이 오히려 심화되는 것은 시스템이 거대화 되어가면서 ‘인간적인’ 면을 잃어가기 때문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보지 않고 ‘자본가’와 ‘노동자'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사람으로, ’빨갱이‘와 ’보수 꼴통‘으로 보면 인간적인 면을 잃어가는 겁니다.

이제는 ‘발전’이라는 단어의 뜻을 ‘인간의 얼굴’을 찾아가는 것과 동의어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4.3 자본주의, 그 경쟁력!

이런 사회와 시스템의 물적 바탕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입니다.

금년 초(2월 9일)에 올린 페이퍼 “발자국 - 북방계와 남방계 - 오늘날은?” 에 설명한 대로, 현재의 경제사회체제는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체제라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가장 경쟁력이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분명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시장경제가 인류의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한 바가 크고,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주객이 전도된 듯 합니다. 인간의 생명보다도 자본의 이익과 특허권이 존중되고 있고, 수백 수천년 한 곳에서 살아온 부족이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기업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납니다. 분명히 재생가능한 에너지체제가 실현 가능한데도, 석유/자동차 산업계와 원자력 산업의 로비가 더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체제를 이루면서도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삼켜지지 않을 대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실천'으로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한 개인이나 집단, 심지어 몇몇 국가의 힘으로도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국제연합이나 WTO 등의 초국적 시스템을 만들었던 인류이니만큼, 초국적 대안운동도 가능하기를 희망합니다.

5. 그간의 마립간님의 글에서 보수적 - 아버지의 원리 - 사고가 지배하는 것은 익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종교적으로 개신교이신 것과 일맥 상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신교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분들도 많습니다만.... )

분석적 사고는 타고난 것일 것이고, 종교는 어려서 주어진 것이든지, 본인의 선택이겠지요.

개신교에 따라 보수적 원리를 따른다기보다는 마립간님의 보수적인 성향이 개신교를 선택하게 했고, 개신교의 성향이 그 보수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선택해 주셨다’고 하시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립간님의 과학적, 분석적 사고의 틀과 개신교는 어쩐지 묘한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아직 종교 - 개신교 - 가 마립간님의 분석적 사고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의외입니다.

6. 자발적 가난과 녹색당..... ^^ 먼 길을 돌고돌아 의외로 또 일치점이 생기는군요.

저도 지속가능한 인류의 문명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치관과 사회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정치적 성향도 - 원래 회색분자라 자처하지만 - 굳이 정당을 선택하자면 녹색당에 가깝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서늘한 밤입니다. 평안하세요.


가을산 드림.
 

 가을산님께

 가을산님이 ‘당연하지 않은가!’ 댓글을 써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가을산님의 글을 보고 갑자기 떠오르는 몇가지 장면과 단어가 있었습니다.


 우선 이단異端. 이단은 다를 이에 끝 단자로 주로 종교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꼭 나쁜 뜻이 아니라도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이 너무 의미가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단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이렇게 합니다. 숲에 나무가 있고 나무가 우거진 숲이라 이 나무, 저 나무의 파란 잎사귀가 뒤섞여 있습니다. 한 잎사귀가 바로 옆에 있는 잎사귀를 보고 가까이 있으니 같은 나무에서 나온 잎사귀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뭇가지를 쫓아 가보니 옆 나무에서 나온 잎사귀였습니다. 오히려 저 멀리 있던 잎사귀가 같은 나뭇가지에서 나온 잎사귀였습니다.


 가을산님 또 다른 댓글에서 “상황을 보는 출발은 같은 것인데, 결론의 차이는.... 아마 우리의 ‘선택’의 영역 아닐까 합니다.”라고 글을 남기셨습니다. 어쩌면 출발도 같고, 결론도 같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방법이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이 행정수도 이전에 같이 반대하지만 생각은 다른 것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아마 가을산님과 저의 차이는 <도덕의 정치>에서 이야기했던 보수와 진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을산님은 진보, 저는 보수. 이 책을 안 읽으신 분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을 바꾸면 어머니의 원리에 무게를 둔 가을산님과 아버지 원리에 무게를 둔 저 마립간.


 말을 꺼낸 기회에 저의 정치 성향을 돌아보면 보수에 더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녹색당을 지지하더라도. 학생 때는 온건 좌파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올해 있었던 총선 때에 알라디너 소개해 주신 인터넷 어느 사이트에서 자신의 정책이 어느 정당과 가까운지를 평가해 주었는데, 저의 경우는 어떤 정책 사항은 민주 노동당이 일등으로 나왔습니다. 제 스스로가 놀랐습니다. 저에게 이런 진보적인 면이 있다니. 다른 정책 사항에 관해서는 자유민주연합이 일등으로 나왔습니다. 당시에 당을 이끌던 분이 너무 기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여 싫었고 그 분을 정치인으로도 그 당을 정당으로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나머지 분야에도 일등인 점수를 보인 당이 다 다르고, 총점으로 보니 네 당이 높이 거의 같고 민주 노동당이 매우 낮았습니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깔깔 웃으면서 민주 노동당은 '오직 자기 당만이 진보이고, 열린 우리당과 새천년 민주당이 어떻게 진보냐'하고 주장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정책 사안 별로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저는 사회과학에 관한 책을 거의 읽지 못했습니다. 주로 자연과학의 책을 읽었지만 대학에서 전공과목의 깊이가 깊어지면, 과학은 교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인문 서적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순수한 저의 직관에 의해 과학 학설이 사회과학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몇 가지 과학 학설은 엔트로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Relativity theory’,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Incompleteness theorems', 수리 철학에서의 상대주의 출현 등이 해당합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며 엔트로피가 연상되고 <슬픈 열대>라는 책은 문화의 상대주의를 읽으면서 저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연상되고, 자유와 평등의 상보성을 보면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가, 유토피아가 없다는 것에서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가 연상됩니다.


 제가 세상의 불완전을 이야기했을 때 갈대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전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갈대님 맞죠. 댓글의 정확한 문구를 찾기가 힘드네요.) 저는 완전한 세상을 원하지만 이유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상보성을 염두하고 제시한 세상을 사는 법에 대해서는 sweatmagic님이 답변을 주셨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정답은.... 세상 사는데 있지요.’라고 하셨습니다.


 불완전한 목표와 확신이 없는 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점을 놓고 싶지 않은데, 진리와 도덕입니다. 그러나 제 안에서는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상이 너무 어려워 제가 이해할 수 없거나 너무 깊이가 얕아 충분하지 않거나. 어쩌면 알라딘 서재에서 저한테 적당한 대답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 대한 비평은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저의 페이퍼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다.’라는 글을 읽고 연보라빛 우주님은 저에게 편견이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당연히 편견이 있지요. 제가 무엇을 근거로 평균적인 가치관을 가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정확히 평균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평균에서 1 만큼의 표준편차standard deviation(SD)를 벗어나는 것이 2 SD 만큼 벗어난 것 보다 낫다고 이야기 할 수 도 없지요.


 저의 서재는 재미가 별로 없어 일일 방문객이 10명 정도 (이번 주는 방문객이 꽤 많으시네요.) 그 중 댓글을 남겨주시는 분은 그 중에서도 일부분입니다. 제 글을 읽고 반대 의견도 많을 것 같은데.... 가을산님은 소신있는 의견을 남겨 주셨고 저는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 했듯이 ‘아이들이 너무 빨리 죽어요.’의 댓글을 읽고 떠오른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호강호에서 일형산파 유정풍과 마교장로 곡양의 우정입니다. (가을산님이 정파, 나는 사파?) 무협에서 나오는 정파와 사파의 도저히 우정을 나눌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눈 것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퇴계와 고봉이 편지를 주고 받은 것입니다. 주자학내에서 사상적 조류를 달리 했던 두 사람은 나이와 직책을 뛰어 넘는 교류였습니다. 사실 이 비유는 글을 쓰면서도 많이 쑥스럽네요. 학문의 깊이가 너무 다르므로. 친분관계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가을산님이 저의 이야기에 동의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가을산님은 퇴계, 저는 고봉?) 지나가는 이야기로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참 좋은 책이죠. 읽으면서 헷갈리고, 읽고나서 내용을 금방 잊어버렸지만. 또 다른 장면은 매트릭스 1편에 나왔던 네오와 모피어스의 무술대결이 생각납니다. 그 때 느부갓네살호의 승무원들은 네오를 응원했지만 알라딘에서는 가을산님이 응원을 받을 듯 합니다. (가을산님은 모피어스, 저는 네오?)


 이 글은 가을산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에 앞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글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따로 페이퍼를 쓰겠습니다. 가을산님 놀라운 직관에 대해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환원주의자라... 저의 사고는 종합적이기 보다는 분석적입니다. 즉 환원주의적 가치관이 많이 바탕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카오스와 창발성이라는 과학의 발견 후 종합적 사고와 균형을 이룰 때 그 의미가 있습니다. 제 글에 가능하면 환원적 사고 흐름을 배제하려 했건만, 가을산님에게 들켜 버렸네요.


창 밖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참 좋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2004.  8. 27.

마립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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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8-2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을산 2004-08-2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마립간님 같은 사고를 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를 하더라도 그것을 소신있게 글이나 말로 표현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속으로야 어떻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겉으로는 '진보적인' 가면을 쓴 사람이 더 많은 현실 속에서, 특히 인터넷 상에서는 '보수'라 하는 사람보다는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더 높기 때문에 마립간님의 글은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님의 편지대로, 서로 다름에 있어 서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지인도 무척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환원적 사고와 종합적 사고의 균형...'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마냐 2004-08-28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분의 댓글과 편지...정말 '즐감'했고, 꼭꼭 씹고 있슴다.

마태우스 2004-08-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수끼리의 서신왕래군요^^ 잘 읽었습니다. 두번째 편지도 기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