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나리

 우리나라에 봄이 되면, 분홍 빛의 진달래와 노란 빛의 개나리. 개나리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나리가 어느 순간, 멸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개나리는 양성화이나 이형예현상(장주화, 단주화가 있음)을 갖는 식물로 수분에 의해 번식하는 방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씨에 의한 재배는 거의 이루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꺾꽂이의 재배되고 있습니다. 씨에 의한 재배와 꺾꽂이,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전자의 다양성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전자가 동일한 개나리에 치명적인 어떤 바이러스가 발생하게 된다면 대부분의 개나리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종할지도 모릅니다. 자연보호나 환경보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죠. (이런 상황에서 개나리를 자생식물로 분류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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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10-0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서 흔히 보는 개나리는 장주화나 단주화 중의 어느 하나인데, 어느 것인지 모르겠네요. 혹시 알고 계시는 분, 알려주세요.

마냐 2004-10-12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워낙 어려운 질문인가봐요...암튼, 궁금해서 검색했더니..

"장주화는 암술이 수술보다 긴 것이고, 단주화는 반대로 암술이 작아서 커다란 수술에 둘러 싸여 있는 겁니다.

음... 영리하신 분은 물론 예상하셨겠지만, 이 두 종류의 꽃이 서로서로에게 꽃가루를 날려보낸다는 군요....그렇게 해서 좀더 다양한 개나리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로 인해 환경변화에 따른 멸종 위기에 대처한다는 좀 거창한 의미도 있더군요.
...만약 지나가다가 장주화가 핀 개나리를 보셨다면, 근방에는 분명히 단주화를 피우고 있는 개나리가 있다는 말씀이죠..."

흔히 보는 장주화 개나리 옆에는 단주화가 있고, 둘이는 함께 살아간다니...음..영영 답을 못드릴듯 합니다. ^^;;;


마립간 2004-10-1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이 말씀하신 것이 거의 맞기는 한데, 마지막에 말씀하신 장주화, 단주화 개나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현재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근대화가 되기 전에는 장주화와 단주화의 수분에 의해 개나리가 번식했는데 (이때는 지금 처럼 개나리가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근대화 이후 사람이 인위적으로 꺾꽂이해서 번식시킨 이 후로는 둘중에 하나만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 이해와 실천이 나아지는 때는 '둘이 함께 살아가길 기대합니다.'
 

  가을산님께

 지난주에 시간이 없어 편지가 늦었습니다. 이야기가 다국적 기업에 대한 생각의 교류에서 시작하여 정치관을 포함한 가치관과 자아를 포함한 약간의 철학적인 문제를 거쳐, 이번에는 종교적인 문제에 이르렀습니다. (가을산님이 '자아'에 대한 의견은 안 주셨네요.^^)


 좌파, 우파에 대한 저의 견해는 미리 말씀드린 대로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정권의 두 사람이 만나도 좌우가 있다고 생각하고 미국 공화당 정치인 두 사람이 만나도 좌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 지구적인 세계적 평균을 추측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하겠다고 하면 그것으로도 나눌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저도 아래로부터 세워지는 권위를 진정한 권위로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기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나를 제가 2004년 1월 17일 ‘할머니에 관한 추억’을 읽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많이 야단맞고 자랐습니다. 무슨 일 시키면 ‘예’라는 대답하는 대신 ‘왜요’라고 물어서, 어른한테 따지고 대든다고.


 저는 불가지론자, 다원주의자에게 신앙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도 저는 신기하게 까지 여겨집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도 어렸을 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교사까지 했음에도 지금은 신앙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상상이 안 됩니다. 어떻게 신앙이 없는데 교사를 하지? 신앙이 있었다면 어떻게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지?


 저의는 고민의 시작은 성경의 문구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가장 큰 고민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캘빈의 예정설이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든 어디까지 자유의지로 볼 것이냐. 그런데 이것은 꼭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의 고민은 불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의 관계는 완전한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고민했던 창조론, 진화론에 대한 고민,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육신의 부활, 영생이라는 고민을 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그 외에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의 의미 등등.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복음 2:18-22)]


 제가 군복무 시절 신학대 학생인 군종병에게 이것저것을 물어 보았는데, 선악과가 사과냐, 선악과를 하와에게 건네 준 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사과가 맞나, 가인과 아벨은 누구와 결혼했냐 등등. 그리고 그 친구에게서 신학적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에 성전temple을 예수님 자신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구절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이 고민하는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성경의 단어 의미를 사전적 단어로 해석할 것이냐, 상징적 단어로 해석할 것이냐에 대답을 현 시점에서 누구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mannerist님은 사전적 단어 해석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근본주의자라고 말씀하였지만, 글쎄요 그렇게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나온 하루 지금의 하루일까요 아니면 비유일까요. 선악과를 준 뱀이 뱀일까요. 수면 중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이 빛을 나중에 창조했다고 성경 말씀에 의지하여 소립자 물리학이 발견한 빛보다 수소가 먼저 있었다고 좋아해야 할까요.


 저는 인간의 창조론과 진화론도 깊이 갈등하지 않는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영혼을 만드시고 이에 걸 맞는 신체를 주셨다고 쓰여 있지 않고, 또는 신체와 영혼을 동시에 창조하지 않았고, 흙으로 지으신 후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쓰여 있습니다. 물질의 육체가 있은 후에 정신을 나중에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이 되질 않고 현대 과학으로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이 진화했다라고 하면 궤변이 되나요.


 창조에서 수십억년의 광대한 우주를 수천년짜리의 작은 상자에 넣게 된 것은 어느 신학자(이름을 정확히 기억 못함)가 ‘아담의 계보를 쫓아 한 사람의 세대가 얼마이니 세상이 창조된 것이 수천 년이다.’라고 했지만 현대 신학에서는 누구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것이 실제로는 손자를 포함한 아들이 아닌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육신의 아들이 아닌 신앙의 계보라는 것이 개신교(아마 가돌릭도 - 신교도 모르지만 구교는 전혀 몰라요.)의 정설입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우선 무한과 시간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빅뱅에 공간과 같이 태어났는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빅뱅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어떤 과정을 통해 빅뱅이 생겼냐 하는 질문이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땅이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지만 지구라는 것으로 유한이듯, 시간이 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예화를 들면 두 친구가 있었는데, 선의경쟁을 한 후 승리를 한 친구를 패배한 친구가 높여주는 의미에서 위(up)에 위치하자고 약속했고 선의경쟁 후에는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목마를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나중에 우주비행사가 되었습니다. 우주 공간에서 선의경쟁을 하고 승패가 갈렸는데, 어디가 위의 방향이죠.


 영생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의 개념에서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시간이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개념과 연관됩니다. 닫힌계의 두 사진을 비교하여 시간적 선후관계를 파악하려면 두 사진의 엔트로피를 계산하여 낮은 것이 앞선 시간이고 높은 것이 뒤의 것입니다. 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이 <시간의 역사>에 기술하였습니다. ‘우리의 우주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가고 가역적이지 않지만 다른 빅뱅으로 만들어진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도 전혀 모순이 없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긴 국토를 갖고 있습니다. 왜 동서로 긴 국토면 안 되나. 안 될 것 없지요. 그저 그런 국토일 뿐인 것처럼. 우리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시간이 흐르지만 다른 우주에 엔트로피가 증가하거나 일정한 우주가 있다면... 어느 알라디너는 영생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관심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아직은  그렇습니다. 시간의 개념도 정확하지 않는데, 게다가 무한의 개념까지. (참조 : 시간의 개념은 과학동아 2004년 1월호에 특집으로 실려 있습니다.) (마립간 페이퍼 2003년 8월 18일자 무한의 신비 리뷰 ‘부모의 무한한 사랑’)


 ‘육신의 부활’도 육신의 사전의 의미와 상징적 의미의 구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정신세계의 상대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정신세계도 기독교내에 논란이 있는 부분입니다. 영, 혼백 이분법과 영, 혼, 백의 삼분법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학생 때에 알고 있던 것이어서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가치판단을 유보했다는 분야가 인지과학이라고 몇 번 말씀드렸으니 여기에 대한 설명은 더 진행을 못 하겠습니다.


 ‘우리의 를 사하시고’에서 이야기를 하지만 죄의 정의로부터 문제가 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죄를 사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죄, 육신, 악, 사망, 세상, 지옥이 모두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씀드렸고 가을산님이 현재 교회의 장벽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한 친구는 귀신이 있다고 믿는 친구고 한 친구는 귀신이 없다고 믿는 친구입니다. 두 친구가 밤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길에 흰 무엇이 앞에 둥둥 떠다니다가 사라졌습니다. 한 친구는 그것을 귀신이라 우기고, 한 친구는 하얀 비닐, 천, 또는 외계인일수 있지만 귀신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친구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제가 판단할 수 없지만 보았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아니면 어떤 광선에 의해 두 사람 모두 헛것을 보았다고 해도 비닐과 귀신이 없다는 것이지 광선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도 어렵습니다. 성서 고고학이라는 학문도 있으며 창조 과학회라는 모임도 있지만 과학적 증명하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것에 저는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은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의 판단에 대한 근거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문자적 해석은 요한복음 2:18-22에 의거하여 기대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나오면 그 때 판단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제가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죠?’하고 저보다 깊은 신앙을 갖고 계신 분에게 물으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하고 그분이 되물으셨습니다. 저는 ‘아마 외로우셔서 그렇게 하셨나.’라고 대답하니 그분은 어느 정도는 맞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고 쓰여 있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주의 생성원리, 목적, 미래, 결론에 관하여 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쓰여 있지요?


 ‘성경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것 외에 저는 다른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책은 과학책이 아니므로 성경에서 Theory of everything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부모의 비유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예화로 들자면,

 부모가 자녀를 위해 여려 편지를 남겼는데 자녀가 초등학교 때 그 중에는 늦게 식사하지 말라는 행동적 교훈도 있고 공부하라는 지침도 있고 네가 아팠을 때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심정을 담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아기가 어른이 되고 직장을 갖게 되면 이 부모의 편지는 모두 소용이 없는 걸까요. 늦게 식사하지 말라는 것은 건강을 염려하라는 뜻이고 늦게 음주를 하지 않으면 되고, 학교는 졸업했지만 공부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직장생활 열심하고, 부모님 마음을 생각하고.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순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공부를 열심을 하려면 늦게 자야 되는데 건강을 생각하지, 사회생활을 하려면 술도 마셔야 되는데, 직장생활 잘 하면서 어떻게 절제된 생활을 해.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이 편지에는 점심에 무슨 식사를 해야 할지 쓰여 있지 않습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죠.

 성경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 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렸고,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약을 통해 알려주셨는데 예수님을 통해 회복이 가능합니다.)


 이교난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가을산님의 표현을 빌자면 저는 난교를 쫓고 있지만 종교적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잘라 말하기 곤란합니다. 경전, 수행,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관계죠. 이 인격적 관계가 가을산님의 표현으로 하자면 깨달음이 되겠네요. 부모와 자식관계지만 어떤 가족은 부모님께 전화하고 편지하고 찾아뵙고 선물하고 그리고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가족은 그렇지 못하고. 그것이 없다면 부모님의 편지는 잔소리죠. 교회나 종교 단체하고 하나님과 혼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부모 집에 방문해서 집 자체나 집에 일하는 분들이 부모가 아닌 것처럼, 혹 형이나 누나가 있더라도 이는 형제이지 부모가 아닙니다.


 저는 제 자신을 가누기도 힘이 드는데 누구를 전도하고 가르치겠습니까? 더욱이 저는 미혼으로 자식 키우는 부모 마음도 모르는데. 가을산님이 화두로 던지신 내용에 대해 제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글로 적었습니다. 저의 신앙이 기독교의 정통이나 기본이 아닌 것을 이해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추석이 다가오는 가을산님도 바쁘시겠습니다. 저의 집은 할머니 돌아가시고 찾아오는 친척도 없고 동생도 멀리 살아, 어머니가 하시는 일은 줄었지만 어머니도 한편으로 섭섭한 마음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편지 쓰다가 글도 길어지고 날짜 넘겼네. 다음에는 다른 주제로 글을 쓰겠습니다. 평범한 여대생님^^의 서재에서 몇 권 골라서 읽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좋은 휴일 되십시오.


 마립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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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19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긴 글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사족이지만..... '다윈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 입니다.)

마립간 2004-09-1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합니다. 다원주의로. 틈틈이 실수를 많이 합니다. 다윈주의를 다원주의로 바꾸면 문맥이 이상하나? 문맥이 어색할지 모르겠으나, 불교를 믿기 때문에 기독교가 싫다거나 기독교를 싫어 하지 않지만 불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개종할 필요가 없다는 다원주의라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을 전도(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강요로 생각하더라도)하다는 입장을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가족

 제가 알고 있는 많은 알라디너들(제가 즐겨찾기 한 많은 분들, 제가 즐겨찾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틈틈이 방문하는 서재의 주인장 들)이 마이페이퍼에 영화 카테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카테고리가 없더라도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올려주셨는데.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평이 안 올라오네. 이번 주말에 한 번 볼까하는 영화인데... 재미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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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09-1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이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올려주셨던데요. 한 번 읽어 보시는건 어떨까요.

마립간 2004-09-1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에서 받은 인상과 전혀 다른 영화평이네요. 가족 영화가 아니라 조폭 영화다. 글샘님이 '가족'을 보자 말자... 라고 하셨네. 이것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얀마녀 2004-09-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안 보려구요. ^^

마냐 2004-09-1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눈물이 너무 날거 같아 안보고 싶은데...
옆자리 후배가 "와이프랑 보러가는데 피곤해서 그냥 자다올려구요"라며 갔다가 "어, 생각보다 꽤 괜찮아서 안 자고 봤어요"라고...^^;;;

비로그인 2004-09-17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싶습니다. (마립간님 오랜만입니다. 쭈~우욱 함께 하고 있다는거 알아주세요 ^^::)

stella.K 2004-09-1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봐서 손해 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감이라는 게 생기면 포스터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영화들이 있죠. 최민식의 <꽃피는 봄이오면>도 상당히 괜찮을 것만 같다는...!

마립간 2004-09-1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눈물 흘릴 수 있을 때, 흘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눈물 흘릴만한 영화도 흔치 않는데.
폭스바겐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폭스바겐님의 서재 방문에 뜸한 것이 죄송스럽네요. 자주 인사하고 지내지요.
 

 * NGO의 세계화

 - 마냐님의 <세계화와 싸운다> 리뷰의 댓글에서 바람구두님이 질문하신 것과 마냐님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 부제 : '세계화를 반대하기 위한 NGO의 세계화, 내재적 모순'

 

 저의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rhetoric 모순이 그대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설명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생각의 단초로 중세시대에서 근세시대로 오는 상황을 먼저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지방 분권이 중세 즉 당시의 지배 계급의 꼭대기에는 물론 왕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지배력을 가졌던 것은 지방 영주였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 국가가 형성되면서 왕권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져 있던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타당 하느냐'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둘 다 부도덕하다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 사람에 권력이 집중되는 근세 제국주의 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중세가 그보다는 더 호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까? 아마 근세 국가 형태의 지배를 위해서는 장원이라고 하는 것의 연합보다 왕권이라는 것이 국가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적합하다고 하는 것은 힘을 발휘하기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지배구조보다는 근세 국가의 지배구조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를 느낀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로마의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되는 것입니다.


 NGO는 왜 세계적 연대를 갖으려고 할까? NGO의 상대, 즉 국가(대개의 선진국) 또는 다국적 기업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NGO가 세계적 연합이라는 형태를 갖고 그 목적을 성취했다면 세계적 연합을 풀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NGO의 상대는 지속적으로 힘을 비축하는 대로 세계를 향해 자기 자신의 확대를 다시 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NGO도 지속적인 힘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NGO가 힘을 갖게 된 이후에도 지속적인 도덕성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을 쉽게 기대하지 못 하겠습니다. 어떤 강대국이 또는 독재적인 지도자가 철인적 도덕성을 갖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죠.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할 때는 자본가가 사회개혁의 주도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 계급은 신분보다는 능력이 중시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신분제도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된 이후 그들 즉 자본가들은 다시 지배계급으로 올라섰습니다.


 제가 가을산님이 세계 보건 포럼에 참석하러 떠나실 때 했던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NGO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구가 비대해지거나 영향력이 생기면서 권력화하는 경향을 보이거든요. 이런 이야기 아세요. '천사가 악마를 이기기 위해 한참을 싸우고, 다 이긴 후에 자신을 돌아 보았더니 자신이 악마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추어를 지향하던 올림픽도 과연 아마추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초심을 잃기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냐님이 이야기하셨듯이 NGO의 세계화는 영미 거대 기업과 금융의 다를 수 있습니다. 출발 선상에 있을 때는, 아니면 힘을 없을 때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을 수 있죠. 힘(경제적, 정치적 힘)을 갖게 되면 그리고 시간이 지났을 때에 처음의 순수함이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국가내의 인권문제도 처음에는 순수한 인간적 마음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강대국이 약소국의 내정 간섭의 한 가지 도구로 사용됩니다.


 NGO의 영향력 역시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도 문제인데, 예를 들면 이라크 전쟁이 진행되는 있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세계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죠. 그러나 지구상에 이라크 전쟁 이외에는 전쟁이 없기 때문에 제가 다른 전쟁을 모른 것일까요. 아미 그곳에 NGO의 적절한 상대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제가 이야기한 ‘NGO의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세계화가 강대국 또는 다국적 기업이 힘을 추구의 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NGO 역시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힘을 반대하기 위한 또 다른 힘 이것을 저는 내재적 모순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저는 어렸을 때 (1970년대) 많이 들었습니다. 전쟁 억지를 위한 군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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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9-1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직이 커지고 힘이 생기면 권력화한다..맞는 말입니다. 실제 얘기안되는 조직 이야기도 가끔 전해듣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며칠전 라디오에서 월 80만원 주는 단체에서 언론운동 하시는 분 얘기를 들었슴다. 힘이 없을 때는 순수해도 힘이 생기면 저들과 닮아갈게 뻔하다..고 해서 그들의 현 시점에서의 노력들을 지레 검열할 필요가 있나 싶네요.
세계화. 그거 폐해 많습니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 혹은 보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견제하기 위해..뭔가라도 하는 건 그들 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그들이 '연대'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싸움의 상대방과 자본력이나 정치력이나 힘의 차이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일단 눈앞의 전선이 분명한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본질적으론 비슷한거 아니냐, 어느 쪽도 편들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초심을 잃지 말라구 비판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겠지만 말임다. ^^;;;

마립간 2004-09-1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렵게 일하는 분들의 노고를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순수성을 잃더라도 순수함을 갖고 일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저의 가치관은 공功과 과過가 서로 상쇠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잘못의 가능성을 갖고 (없을 수도 있는데) 폄하한다는 것은 더욱 더 말이 안 되죠. 저는 내재적 모순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가을산님도 힘의 차이에 대해 같은 평을 주셨습니다. 전쟁의 억지를 위한 군사력도 반드시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 속에 내재적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한 비판의 눈길 - 얼마전 '맹목적 추종이 아닌 무정한 압박'에 대한 설명을 가을산님에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선을 향해 나가고자는 마음이겠죠. NGO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길 바랍니다.
 

* 바람구두님의 선물

 가끔 꿈을 꿉니다.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나. 자연 속에 있는 나. 죽림칠현처럼. 작은 초가에서 텃밭을 가꾸며 책도 읽고. 자연의 위대함으로 인해 저의 몸속 깊이 있는 악마성과 죄가 밖으로 나오려는 조금만 준동도 없는, 그런 곳에 사는 나.

 

 바람구두님, 고맙습니다!

 


 

 

* ‘바람 구두’이라는 이름을 듣고...


 저는 기하학적 논리적 사고를 좋아합니다. 한 가지 원인에 의해 한 가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출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람 : 그러나 바람은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달나라에까지 우주선으로 다녀오는 세상이지만 일주일 뒤의 날씨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기류가 카오스적 행동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인간의 통제와 예측에 구애받지 않는. 비기학적인 사고는 동양적이 사고와 일맥상통합니다. 멋과 흥이 있는!


구두 : 역시 자유가 연상되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용기와 호연지기를 느낍니다.


그러나 찰나와 같은 인연이 아쉬움을 남깁니다. 언제가 다시 만나겠지...라는 기대를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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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9-0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전 왜 님들게 더 좋아보이는지... 못된 만두입니다...

바람구두 2004-09-0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에도 길이 있다 - 천상병 시인의 말이죠. 저도 제 나름의 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쉽사리 잡히지 않을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