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이상주의와 테러리즘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에 맞춰지는 것이다. 그럼,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알콜 대신에 종교를 집어넣은 것이다. "종교생활, 좋습니다. 일생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기업가 도덕? "도덕, 아주 좋지요. 기업가는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단, 기업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요."

* 2007년 9월 17일 로쟈님의 페이퍼 '도덕적 이상주의와 테러리즘(진행중)'의 마지막 부분의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이라크 전쟁'과 '근본주의'란 두 단어는 매우 친숙하지요.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를 포함한 근본주의로의 회귀가 위와 같은 이유에서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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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왜 책을 읽는가

 

경향신문(07. 05. 14) 왜 책을 읽는가

“50여년 전 이야기이다. 어떤 박문(博文)·다식(多識)으로 자부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고금의 어떤 저적(著籍)이고 그 내용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설명했다. 홍명희 벽초옹은 그를 평하여 ‘아무개는 남의 서문만 읽어 행세하는 친구였지’ 하곤 했다. 이는 남의 ‘서(序)’만을 읽고 그 원전을 독파한 듯이 행세하는 얕은 지식의 소유자들에게 일퇴를 내린 것이다.”

-외부로부터 불어온 독서열풍-

7년전 타계한 연민 이가원 선생이 ‘한국의 서발(序跋)’ 머리말에 쓴 글이다. 물론 책의 서문만 읽고 다 읽은 듯이 행세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선생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완벽한 지식을 획득하려면 ‘서(序)’의 번역이 있기 전에 그 원문이 있고, 원문이 있기 전에 그 원전(原典)이 없지 않음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며 문집의 서·발문을 번역한 것은 책의 원문 읽기에 나아가기를 권면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오래전에 사둔 책을 다시 펼친 것은 ‘책읽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다. 사실 요즘만큼 책읽기가 운위되는 때도 없는 듯하다. 언론사·시민단체 등이 잇따라 캠페인을 벌이고, 그 때문인지 기업체·지자체·관공서에서 독서 열풍이 일고 있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개권유익(開卷有益)’. ‘책은 펼치기만 해도 이익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독서 캠페인으로 책읽는 풍토가 확산되고, 나아가 위기에 처한 활자문화까지 일으켜 세운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쯤에서 물어보자. “왜 읽느냐?”고.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까’ ‘삶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서’…. 많은 대답이 돌아온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모두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들이 아닌가.

그렇다. 책읽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신의 것이 아니듯, 지금의 열기는 책읽는 사람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읽는 사람의 대부분은 스스로가 필요성을 느끼고, 손수 책을 고르며, 책읽기의 방법을 터득해 가는 게 아니다. 혹시 누군가가 꾸며준 서재에서, 남이 공짜로 보내준 책을 생각없이 읽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과 세상을 바로보는 일-

너는 얼마전 한 인사가 “기사를 정독하다 보면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효과를 얻을 때도 있다”고 말한 인터뷰를 접하고 의아해 했다. 그 인사는 신문 서평기사를 읽으면 도움이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앞서 벽초가 비판했던 ‘서문’만을 읽는다는 ‘아무개’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서문이 고전의 원문을 다 말해주지 않은 것처럼, 어떤 서평기사도 책 전체의 내용과 아우라를 전해줄 수는 없다. 서평은 서평일 뿐, 중요한 것은 책과 씨름하는 일이다.

작금의 독서 캠페인의 열기를 받아들인다고 할 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왜 읽는지’에 대한 철학을 갖는 일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에 따르면, 2005년 한해 출협에 납본된 신간은 4만3586종이었다. 하루 평균 120종의 새 책이 쏟아진다는 얘기다.

지천으로 깔려있는 게 책이지만 ‘책읽기’의 철학을 다룬 서적은 찾기 힘들다. 한 독문학자로부터 철학자 볼프강 이저의 ‘읽기 행위’(Der Akt des Lesen)가 책읽기를 철학적으로 논한 책이라고 들었지만,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독서행위를 여러 관점에서 분석한 모티마 아들러의 ‘자유인을 위한 책읽기’(How to Read a Book)는 20년 전에 나온 뒤 절판됐다.

책읽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저술은 주희의 ‘독서법’이다. 전 140권의 ‘주자어류’ 가운데 제10권·11권으로 들어간 ‘독서법’은 책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의 공부와 독서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이이와 이황, 박지원, 이덕무, 정약용 등 조선조 학자들이 설파한 독서론의 뿌리가 바로 주희의 ‘독서법’이다.

주자에게 독서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도, 시간 때우기 수단도 아니다. 단순히 ‘글을 보는(看文字)’ 것 이상이다. 자기를 돌아보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맥상의 틈새를 읽어야 한다’. 그래서 숙독이 강조된다. 거듭 깊이 생각하며 읽으라는 주문이다. 주자는 현실적 문제의식 없이 행해지는 독서에는 비판적이었다. 그가 독서론을 ‘독서는 배우는 사람의 두번째 일이다(讀書乃學者第二事)’라는 말로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주자에게 독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답게 사는 일, 그리고 현실을 바로 아는 일이었다. 독서는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조운찬 문화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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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30 1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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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경향신문-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입력: 2007년 04월 22일 17:50:26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지난달 30일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현대마르크스 경제학’강의를 하고 있는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강의실. 210명이 들어올 수 있는 대형강의실이지만, 빈 자리가 많아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손제민기자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

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김종목·손제민기자〉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87년 이후 지식인상의 변화
입력: 2007년 04월 24일 17:29:28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지식인상은 저항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은 80년대 대학 신입생의 필독도서였고, 그들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안내서였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사회와 현실로 나아가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
1971년 전태일 추모기도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구국강연을 펼치고 있는 함석헌 선생.

-탈근대화, 천대받는 ‘진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강연회에서 종종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를 칼날과 칼등의 관계로 비유하곤 했는데,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지식인들은 비유 그대로 ‘민중의 칼날’이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지식인은 근대적 합리성과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많이 교육받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담지자로 기능했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이들에 의해 만질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실재로 감지됐다. 민중의 계몽가이자 선구자로서 지식인은 사회의 각 영역에 큰 자취를 남겼다. 시대의 선생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의 저작들, 장준하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과 김현이 주도한 비평의식의 고도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탈춤과 같은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은 그러한 현상의 몇몇 예에 불과하다. 70, 80년대에 걸쳐 지식인은 민주화 투쟁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린 교사였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민족’과 ‘문화’의 창안자이기도 했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
하지만 이제 이런 일들은 추억 속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굳이 푸코나 리오타르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 현저하게 추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설명돼야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같은 세계사적 전환이 바탕을 이루며 거기에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이 조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바닥에 탈근대적 현실이 있다. 근대 극복을 목표로 출발한 탈근대주의는 근대가 창출한 각종 제도, 가치, 개념, 역사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데 일조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근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실과 진실의 관계가 흔들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진실’이라는 단어가 천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가 가르친 진실이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이거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붕괴로 대표되는 이념의 붕괴는 한국 지식인상의 변화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다. 박노해나 조정환, 이진경처럼 이 무렵 새로 등장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채 선배 세대인 4·19세대, 유신세대와 자신들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시작되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러한 구분법의 의미도 모호해졌다. 이념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사상의 해방을 몰고 왔다. 분수처럼 사상이 흩어졌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급진좌파에서 뉴라이트로, 헤겔에서 들뢰즈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사상의 백가쟁명 시대를 새롭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상의 대변인으로서, 혹은 안내자로서 지식인의 사회적 입지는 현저하게 약화됐다.

아마도 지식인을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일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신지식인’이다. 현재까지 3316명이 선정된 것으로 알려진 신지식인은 외환위기 속에서 경제적 가치창출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국민을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이었다. 신지식인은 한편으로는 기존 지식인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수량화, 물질화, 공유화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지식인의 ‘유용성’에 강력한 의문부호를 새겨놓았다.

-IMF뒤 평등에서 양극화로-

외환위기의 극복이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귀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었다. 신지식인은 이제 하나의 해프닝이 되고 말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이었다. 자본의 거칠 것 없는 자유와 제국으로의 수렴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담론의 중추를 민주주의로부터 돈으로, 평등과 인권으로부터 양극화와 개방으로 옮겨놓았다. 황우석이 찬양되던 시절, 각종 뉴스는 앞으로 벌어들일 로열티를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지식인, 아니 환산되어서는 안 되는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다. 또한 황우석 사태는 지식인의 보루였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마지막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연이어 고위공직자나 총장 등의 표절사건이 불거지면서 ‘지식인의 종언’은 엉뚱한 방식으로 현실화됐다. 이것을 ‘관행’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그러한 관행으로 지탱돼 온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을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썩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란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화라는 지상과제와 총체성을 강조하는 거대담론의 존재는 사상과 이론의 성찰을 억압해왔다. 이로부터 해방된 지식인들은 낡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근본을 파고들었다. 근대성, 젠더, 민족주의, 기억, 일상권력 등이 비판목록에 오르면서 전선(戰線)은 갈라졌고 심화됐다. 문제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전체’로서 존재하는 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는가이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식인의 기능화 양상은 지식인 자신이 부분성에 매달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에 지식인과 관계된 논의가 여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국가’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가 애국주의의 광풍을 등에 업고 등장·확산됐던 상황, 현재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 모두 ‘선진(화)’ 담론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국가정책 마련에 부심하는 경향, ‘인문학의 위기’론이 국가의 지원 요구로 귀결되는 풍경,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국가기관이 학문의 기반을 좌우하는 현실 등은 지식인의 국가종속성 내지는 국가지향성을 강하게 예시한다.

이런 상황은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권력의 민주성 문제만이 초점일 수 없다. 많은 논의들이 국가로 수렴될 때 그로 인해 가려지는 부분들이 상당하며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지식인의 질문과 대답을 기다리는 곳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은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하고 있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민주화되었을지언정 지식인의 국가론이 지혜로워졌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국가와 지식인의 관계 설정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그간 일어난 지식인상의 변화 중 ‘독립적 지식인’의 확산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강준만, 박노자, 고미숙, 이정우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탈근대적 사유에 기반을 두면서 탈권위주의, 다원화 그리고 ‘대중’과의 직접소통을 지향한다. 여러 방면에서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과 다른 차원을 선보이는 이들의 활동은 향후 지식인상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다른 궤도에 속하지만 공병호나 이덕일처럼 직접 대중을 상대로 한 자유저술가의 확산도 현 단계 지식인상의 또 다른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

-새로 떠오르는 ‘대중지성’-

최근에 ‘대중지성’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지식인의 몰락과 대중의 등장이라는 현상과 연관이 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자율주의에 기반한 ‘다중네트워크’가 주도적으로 제창하고 있는 이 개념은 지식인의 위계적, 엘리트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대중을 근원에 두는 새로운 지식 창출·향유 방식을 겨냥한다. ‘대중지성’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역할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자 창조자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과 변별되는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생 중 상류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고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박사가 최고고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를 괄호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져야 할 화두이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박헌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이념분포’ 지식인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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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여기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만 지식인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오프 신문에는 지식인들의 계보도가 이념적으로 구분되어 그려져 있다. 그게 재미있는데...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2.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지식인 사회가 분명한 ‘민주 대 반민주’ 전선으로 양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사상해방’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분화됐다. 반공주의자는 냉전적 사회인식이 힘을 잃어가면서 세가 줄었다. 특히 2000년 6·15공동선언 등 남북한 화해무드가 지식사회 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파 지식인들도 반공주의를 배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자의 경우 위세는 여전하지만, 인권·시민사회· 탈민족주의자의 부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너도 나도 자유주의를 자처할 만큼 자유주의자가 증가하고 있다. 노동, 성, 환경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면서 지식인의 분포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부상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동아시아론’ 등 대안 담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우파 전향 및 ‘중도선언’이라는 새 경향도 나타났다. 80년대 중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포기한 좌파 경제학자 안병직(뉴라이트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해 90년대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김영환(시대정신 편집위원),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등 ‘주체사상파 운동권’들이 전향했다. 최근 홍윤기(동국대 교수), 황석영(소설가) 등은 ‘급진적인 좌파나 경직된 우파가 아닌 통합적 대안으로서의 중도’를 천명했다.

2006년 유신체제를 재평가한 역사교과서 편찬을 추진하다 4·19유족회원에게 멱살을 잡힌 서울대 이영훈 교수.

2003년 입국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던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
경향신문은 최근 이들의 사상 궤적을 토대로 ‘2007년 한국사회 지식인 지도’를 작성했다. 정치·경제·사회 이념의 좌우 성향(가로축), 민족주의 성향 여부(세로축)로 한 2차원 공간에 주요 지식인을 배열했다. 두 축의 교차점에서 멀수록 이념적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강정구(동국대 교수)와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좌파 성향에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강정구는 좌파 민족주의자,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는 좌파 탈민족주의자, 복거일(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은 우파 탈민족주의자를 각각 대표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우리의 지식인 이념 분포 양상은 서구 사회와 다르다. 서구적 틀로는 좌파가 탈민족주의, 우파가 민족주의 중심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는 좌파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많다”며 “이는 김구 등 우파 민족주의 그룹이 몰락하고 나서 수십년간 반공체제가 공고해진 탓”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자

좌우 이념 성향에 따라 북한체제의 포용 및 통일 방식의 개방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좌파 민족주의자는 ‘분단 국가의 일부’로서 남한이 가진 정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70년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써 통일지향의 필요성과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 강만길, 남북한 모두의 내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분단체제론)을 주장한 백낙청(‘창작과 비평’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진보적 민족주의자다.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북한도 우리의 일부’란 시각에서 반외세 자주 통일을 지향한다. ‘민중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강정구,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이 있다. 우파 쪽의 대표적 인사로 신용하(독도학회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서경대 교수) 등이 있다. 남한 체제 우위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통일보다는 대외 영토·역사 문제에 천착한다. 중도적 민족주의자로는 ‘전통 문화·정신’을 강조하는 김지하(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를 들 수 있다. 북한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통일지향 세력으로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인사로는 97년 월남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들 수 있다.

#좌파·진보주의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결함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시민사회론, 근대비판주의 등으로 분화해 있다.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사회 구성과 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강조한다. 특히 불평등 문제를 주시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상환(경상대 교수)은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선을 추구한다.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은 좌파 학자들 위주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인 진보적 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을 추진중이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계급·민중적 시각의 사회평론에 적극적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그룹으로는 문화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율주의자가 있다. 문화주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 내 문화가 계급 및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강내희(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를 통해 음악 저작권 강화 반대,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문화축제 등을 펼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세계 수준의 혁명을 추구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같은 노선에는 국제사회주의 단체 ‘다함께’가 있다. 자율주의자 조정환(갈무리출판 대표)은 스탈린식의 일당(전위당) 독재를 거부하고 노동자 자율에 의한 혁명과 발전을 추구한다.

진보적 시민사회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변화의 주체를 ‘억압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본다. “민중이 자신의 다양한 이익을 체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 담론이 이와 연계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 조국(서울대 교수)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비판주의 지식인의 스펙트럼은 넓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근대론 등 체제 비판 이론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국가주의, 개발론, 민족주의 등 근대적·권위주의적 담론을 거부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가지는 폭압적 구조를 반대한다. 여성운동의 대가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시작된 페미니즘은 ‘여성의 신체’(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에서 ‘여성노동자’(조순경 이화여대 교수)까지 논의의 폭을 넓혔다.

생태주의는 ‘대안적’ 삶·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개발반대론이다. ‘지속가능한 발전’(환경주의)을 넘어 ‘인간의 탐욕’이란 문제 의식에 기초해 “생태 문제를 최우선시하고 생태가치를 생활의 전반에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장회익(녹색대학 석좌교수)이 있다. 탈근대론자들은 ‘민족주의 비판’(임지현 한양대 교수), ‘냉전적 국가론 비판’(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소수자 소외 비판’(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을 통해 가부장적 획일주의, 순혈주의를 비판한다.

#우파·보수주의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반대, 자본주의 지향을 유지한다. 반공주의, 반공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뉴라이트, 시장자유주의 등이 분포하지만 각각 명백히 구분되지 않은 채 혼재된 양상이다.

반공주의 지식인들은 ‘정통 보수’를 자칭하며 ‘대한민국의 법통’을 강조한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대한민국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한·미동맹과 보안법을 최우선시한다.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가 이 그룹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산업화 세력’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폄훼 시도를 적극 방어하는 이들은 “뉴라이트는 위장 전향한 빨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뉴라이트는 신지호 및 홍진표, 최홍재(각각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조직위원장) 등 ‘전향 386’들이 주도하는 ‘신우파’ 그룹이다. 자유주의, 북한인권 중시, 대외개방 및 시장주도 경제, 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주장한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에서 드러나듯 “자폐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애국적 세계주의를 지향”한다. 대외 개방을 중시하는 탈민족주의자들이다.

“전통적 반공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사회 담론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지호의 지적처럼 뉴라이트 그룹은 최근 보수진영의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추구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세일(서울대 교수),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 다룬, 잘못된 역사쓰기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박효종(서울대 교수)이 같은 노선이다.

시장자유주의는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복거일, 자유시장 경제 지상론을 펴는 민경국(강원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이 있다. 경제·통상 이슈에 집중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작은 정부론’을 주창한다.

#자유주의자

국내 자유주의 개념은 포괄적이며 모호하다. 사회복지를 내세우는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와 시장자유주의(libertarianism) 모두 자유주의로 해석된다.

최장집과 신지호 등 좌우파 지식인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상대적으로 이념 성향이 강하지 않은 지식인 그룹을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총체적 시각으로 현상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나 군부 독재 하에서의 ‘동원체제’ 등 억압적 권위를 거부한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며 “사회의 여러 이념들 간의 괴리를 메울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최근 ‘중도’를 선언한 홍윤기(동국대 교수)가 자유주의자 가운데 상대적 좌파, 유럽적 우파로 통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출신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이 상대적 우파로 분류된다.

〈장관순·손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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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이 요새 기획기사를 잘 하고 있네요.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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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7-04-2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자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할 때,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할 때, 수학자들이 수數에 고민할 때 돈(사회)으로 부터 자유로왔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추억으로 남았지만.
 
 전출처 : 바람구두 > 알라딘 서재 커뮤니티에 대해 끄적이다...

알라딘 서재 커뮤니티에 대해 끄적이다...

이런 류의 넋두리를 늘어놓게 될 때, 자칫하면 신파에 빠질 수도 있기에
자기검열을 제법 하는 편이다. 비도 내리고 간만에 감상적이 되는 탓도
있지만, 사실 이전부터 생각해왔던 것 중 하나가 그것이다.

내가 알라딘에 무엇을 얼마나 요구하는 것이 적당한가에 대한 고민인데
알라딘 서재가 좋지만, 가끔 이곳을 떠나고 싶다거나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알라딘 서재가 좋은 건, 이곳이 적당한 온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고슴도치들이 겨우내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적당한 거리가 이곳에 있다.
가끔 좌파도 좋고, 진보도 좋고, 개혁적인 것도 좋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알라딘은 대안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비교적 균일한 계층 구성을 보이는 것처럼
이곳에 모인 이들도 거칠게 말하면 쁘띠 부르주아지들이다.
큰 부자는 아니어도, 그렇다고 당장 오늘내일 끼니 걱정할 사람은 아니란 말이다.
그 같은 중산층 사람들이 보이는 계층적 특성이 알라딘 서재엔 있다.

알라딘 서재에 모인 사람들의 계층적 분석을 세밀하게 시도해보진 않았더라도
올라오는 글들로 분석해보면 알라딘 서재에서 나름 활동하는 이들의 성분은
적당하게 살만한 사람들이고, 전문교육을 받았거나 현재 전문교육을 이수하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를 이룬다고 보인다.

책을 주된 매개로, 설령 책이 주요콘텐트가 아니더라도 페이퍼에 올라오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지식과 교양의 수준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는 편이다.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쇼핑몰이라 할 수 있는
알라딘 서점의 커뮤니티는 독특한 아우라를 가진다.

가끔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냉혹하게 바라보았을 때, 대개 그들은 소수의 매니아(동료)들을 거느리거나
그와 같은 매니아를 구축하지 못한 이들은 도태되거나 스스로 발길을 끊게 된다.
그런 흐름이 실제로 알라딘서점의 이용 자체를 멀리하게 되는 결과를 빚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알라딘이 좋은 것은 일단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적당하게 유지되는 거리가
주는 편안함에 있다. 내가 운영하는 커뮤니티가 아니므로 책임져야할 구성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세한탄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오늘 제가 약 먹었나? 오늘 생리라니? 하는 이도 없다.
그것도 따지고보면 중산층적인 적당한 예의와 내숭의 결과물이긴 하다.

초딩, 중딩들이 많이 모인다는 '웃대'란 곳이 있고,
논쟁을 즐기는 이들이 즐겨찾는다는 다음 '아고라'가 있듯
알라딘 서재가 만들어내는 커뮤니티의 캐릭터는 또 그런 곳에 있다.
노동자는 포장마차에서 연탄불 위에 곱창 구워먹으며 참이슬을 털어넣어야 한다는 식의
이미지에 매몰되는 것이 착각이듯 그렇다고 알라딘 서재 구성원들이 노동자가 아니라거나
뭔가 남다른 노동자란 말은 아니다. 다시말해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이들이라거나 하는 오해는
받을 필요가 없단 말인데...

난 가끔 알라딘 서재란 커뮤니티에 대해 느끼는 편안함에 비례해서
이곳이 사용하기에 너무나 불편하단 생각이 든다.

이곳이 서점 이용량에 비례하는 서열구조를 내면화하고 있다거나
(예를 들어 마이리뷰, 리스트 등등)
이곳의 기본 콘텐트가 리뷰라는 점 등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수 있겠으나
최근 진화해가는 웹 블로그의 사용자의 조작성, 편의성에 대한 고려가 너무 부족하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끔 다른 블로그...
예를 들어 네이버 블로그의 리뷰로그 코너를 활성화해버릴까? 와 같은 고민들도 해본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이 구축한 커뮤니티가 주는 편안함을 버릴 수가 없어서 주저하게 되곤 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까지 통째로 옮겨갈 수 없다는 현실이...
알라딘을 훌쩍 뜰 수 없게 한다는 거다.

뭐 결심만 한다면... 훌쩍 떠 버리는 일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지만...
그 보다는 먼저 알라딘 서재가 사용자 중심으로 좀더 이용하기 편안한 곳으로 바뀌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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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한미FTA, 경제성장, 민주주의

한미 FTA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고위급 회담'에서의 담판만을 남겨놓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달의 '사회적 독서'에 관련서들을 올려놓긴 했는데,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사실 각종 언론의 분석/비판 기사들만으로도 여러 권의 책이 묶일 정도이다. 오늘자 프레시안에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글이 재수록되었기에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스크랩을 공개하는 건, 그래야지 내가 미루지 않고 읽어보게 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07. 03. 14) "지금, 민주주의의 적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5년, 실패의 경험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인가?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최근 발행된 이 잡지 2007년 3~4월호(제93호)에 실린 '한미 FTA, 경제성장, 민주주의'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지적한다. 성장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오늘날의 현실이 그 방증이라는 것이다.

김종철 발행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그것의 추진 배경에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한국 사회에 팽배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김 발행인은 또 "빈부 격차야말로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토대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제 발전으로 빈곤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김종철 발행인은 "민주주의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폭군적인' 경제 권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R. H. 토니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온갖 문제들이 무분별한 생산력 증대를 부추기는 경제 성장을 통해서 극복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대신 "평등한 인관관계에 토대를 둔 사람들 사이의 우정(友情)과 환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프레시안>은 김종철 발행인과 녹색평론사의 양해를 얻어 이 글을 재수록한다. 그간 한미 FTA에 대해 둔감했던 이들이라면 이 글 한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미 FTA가 가져올 여러 가지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손님은 하늘이 보내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어느 집에서나 늘 손님이 묵을 방과 입을 옷을 준비하라. 온 정성을 다해서 밥상을 차려라. (터키 이슬람 사회의 격언)
  
수많은 이의제기(異議提起)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하려는 정부의 의지에는 아무런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이 정한 시한이 가까워옴에 따라 모든 절차를 서둘러 끝내려는 조급한 움직임들이 여기저기서 노출되고 있을 뿐이다.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꼼꼼하게 챙기면서 협상을 하겠노라는 정부 측 홍보는 여전히 넘쳐나고 있지만, 그게 결국 헛된 약속이 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자세는 강경일변도이다. 최근 인터넷 뉴스매체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대통령은 한미 FTA로 인해 서민들의 삶이 더 어려워지고,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제시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그동안 수많은 독립적인 학자, 지식인, 활동가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밝혀온 숱한 자료와 분석, 그리고 현지 취재와 탐방의 기록들이 정부에 의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아왔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생각이 옳다면, 그동안 국가권력에 의한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거리에서 끊임없이 싸워온 농민과 노동자, 시민들은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나라를 시끄럽게 해온 어리석은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과연 민주정부인가?
생각해보면, 지금 한미 FTA를 둘러싼 여러 문제 중에서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간단히 답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민의(民意)를 존중한다는 대원칙을 저버리고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치자의 리더십의 원천은 그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을 넘어 기본적으로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에 있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적 지도자는 구성원들에게 오직 '복종함으로써' 그들을 '이끌어갈' 수 있을 뿐이다.
  
한미 FTA는 만약 타결이 되고 국회에서 비준된다면 거의 헌법에 준하는 구속력을 가지고 국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위력적인 통상조약이다. 더욱이,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 농민과 노동자, 영세상인을 포함한 대다수 서민들에게는 거의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여러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무엇보다도, 소위 '참여정부'가 왜 이 시기에 꼭 이 협정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부 측의 설명은 처음부터 매우 설득력이 부족했고, 협상을 위한 사전준비도 어이없을 만큼 불철저했다는 것이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분명해졌다. 따라서, 협상의 내용은 별개로 하더라도 최소한 이와 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협상의 졸속성과 부실함에 대해서 항의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하한 성실한 답변도, 관련 자료의 공개도 거부하고, 오로지 한미 FTA를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가능한 한 억제하거나 봉쇄하면서, 막대한 국가예산을 들여 정부 측 홍보물을 온갖 매체를 동원하여 광범위하게 유포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주사회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인 시위·집회의 자유마저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한편, 정부 측 홍보물에 맞서서 시민들이 자주적으로 제작한 대항 광고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방송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미 FTA에 관련하여 지금 정부가 민중의 목소리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완강히 되풀이하고 있는 독선적인 행태를 보면 대체 이 나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인지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고서도 자신을 민주정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몇몇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와 향후 한국의 '진보진영'의 과제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논쟁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논쟁은 말할 것도 없이 '민주화' 운동세력이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에 의해 민중의 생존조건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열악해지는 데 따른 불만과 함께 '민주세력'에 대한 다수 국민의 혐오증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상황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참여정부'와 '민심'의 괴리현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진 게 분명하고, 이에 동반하여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 한국의 '진보적' 정치세력이 몰락하다시피 내려앉은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라도 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일 것이다. 이것은 차기 정권을 누가 맡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을 떠나서 건전한 민주사회를 위한 필수적인 구성요건으로서 정치적 이념과 가치와 세계관을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정치세력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일임에 틀림없다.
  
군사독재 체제로부터 벗어난 지 20년이 경과한 이 시점에서, 그것도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주도해왔다는 정부 밑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장래를 심각히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장래문제가 아니라, 오늘 당장 여기서 우리의 민주주의에 가해지고 있는 위협이다. 지금 한미 FTA라는 현안(懸案)에 관련하여 정부가 보여주는 일방주의적 처리방식은, 따져보면, '참여정부'에서는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 전형적인 통치방식이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평택 대추리 농민들이 가장 생생한 증언자가 될 수 있겠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약속함으로써 집권에 성공한 정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참여정부'는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국민의 의사를 묻거나, 해당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데 지극히 인색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국가권력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폭력과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풀뿌리 민중은 자신들이 주권자로서 존경은커녕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괴로운 느낌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의 소위 '진보논쟁'을 촉발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현재 한국사회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두개의 상이한 이해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중 지배적인 이해방법이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에 한정된 원리일 뿐 경제는 시장과 성장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경향신문>, 2007년 2월 28일). 지배적인 이해방법이라는 것은 아마도 현재의 집권세력과 이 나라의 기득권층 특히 경제 엘리트들이 그러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반해 최장집 교수를 포함한 '소수파'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중의 열악한 사회경제적인 지위가 개선되지 않거나 더 나빠지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일반적으로 민중은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이 확산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정치적' 영역에서 이룩한 몇몇 개혁적 성과나 치적이 최장집 교수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부분적인 성과나 치적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정책이 '양극화'의 심화로 귀결되고, 그 과정에서 민중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개선이 갈수록 요원한 일이 된다면, 그러한 '정치적' 업적이 근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것은 대체로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의 기본적 경제정책이라는 것은 정책 결정자들의 주관적인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결과적으로 대통령 자신의 말처럼 시장권력에 국가권력을 넘겨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고, 이것은 한미 FTA 협상의 추진에 극적으로 집약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경제의 오늘날의 현실이 현 정부의 전적인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과거로부터의 누적된 모순, 뿌리 깊은 타성에 의한 정책의 실패들로 인해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양극화 추세가 심화되어온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참여정부'의 출범 당시에 새로운 정부가 과거 어느 정부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가 대중 속에 근거가 있든 없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는 것도 '참여정부'에 대한 그러한 기대가 환멸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정부 밑에서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점할 정도로 양산되고, 역대 어느 정권에 못지않게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농촌공동체를 괴멸상태로 몰아넣고서도 정부가 이 사태가 갖는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 등에서 현 정부의 '민주적 성격'이 근본적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부 밑에서도 꾸준히 수출이 증가되고, 국가 전체의 부의 총량이 증가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흔히 지적되고 있듯이 '고용 없는 성장'으로 특징지어지는 오늘날의 경제성장 방식 속에서 그러한 부의 증가는 결국 대기업을 비롯한 경제 엘리트들의 헤게모니 혹은 사회지배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할 뿐,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지지해주는 데 기여한다고는 말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유례없는 수익을 올리는 대기업과 부동산 투기꾼들이 존재하고 있는 다른 한편에 평생직장이라는 전통적인 개념 자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절대 다수 민중이 존재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심각한 '격차사회'로 빠르게 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불균형과 왜곡된 고용구조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항구적인 틀로 고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 상황이 계속되는 한 민주주의를 들먹인다는 것은 희극이 될지도 모른다.
  
성장할수록 삶을 죄어오는 '가난'의 정체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잠시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민중의 사회경제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유지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요건이라고 할 때, 그때 해결되어야 할 민중의 사회경제적인 욕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절대적 궁핍상태의 해결을 말하는가, 아니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말하는가. 물론 이 두 가지를 엄격히 갈라놓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경우에 두 가지 차원은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하는 한국에서도 최소한의 생존 자체를 어렵게 하는 비참한 빈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적 산업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전통사회에서는 '결핍'으로 느끼는 일이 전혀 없었을 산업문명 특유의 물자와 서비스를 획득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기 쉽다. 전통사회에서 사람은 대개 보행을 통해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지만, 산업사회의 우리들에게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이 일생을 통하여 단 한 번도 체험하지 않았던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지 않으면 우리는 문명적인 삶에 참여하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동차나 정기검진과 같은 문명의 이기나 '혜택'에 접근하지 못할 때 느끼는 것이 오늘날의 '가난'이며, 이것을 철학자 이반 일리치(*일리히)는 '근대화된 빈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핍되어도 생존 자체에 당장의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이러한 '근대화된 빈곤'이 참을 만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물이나 식량이 없어서 당장 고통에 직면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많은 도시 사람들은 물이나 식량을 사먹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 자동차를 타야 하거나, 아플 때나 혹은 아프지 않을 때도 병원에 가야 한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근대화된 빈곤'을 견디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난을 견디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통사회에서는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물자와 서비스의 혜택은 없었지만, 그 대신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풍부한 인간관계에 토대를 둔 공동체의 상호부조적, 호혜적 그물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아무리 궁촌(窮村)일지언정 마을 속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을사람이 홀로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마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생활에서는 돈이 없으면 속절없이 굶어죽거나 냉랭하고 기계적인 관료적 관리대상으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랫동안 가족과 친지들이 위기 때의 구명정 노릇을 해주었으나, 이제 그것도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돈이 없으면 곧바로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날 우리는 너나없이 돈을 벌기 위한 투쟁에 필사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도시에서 월수(月收) 평균 110만 원으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우선 조금이라도 소득이 향상되거나 약간이나마 안정된 일자리를 얻는 것보다 더 절실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먹고사는 게 더 절박한 문제라는 주장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도 이 열악한 고용구조를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사회 속에서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제적 평등이 없는 상황에서 공평한 정치적 발언권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궁핍이 바로 재앙으로 이어지기 쉬운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경제적 평등화는 한갓 관념적인 이상이 아니라 다수 민중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실천적 과제가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한미 FTA를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하는 시장개방 만능주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경제적 평등을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세계무역기구(WTO) 혹은 FTA로 대변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체제는 한마디로 초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무제한한 이윤추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려는 목적으로 여러 다양한 사회에서의 공동체 및 자연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보호조치를 남김없이 철폐할 것을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오늘날 세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권력은 어느 국민에 의해서도 선출된 바가 없는 초국적기업이나 금융기관의 간부, 그리고 그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경제학자, 전문가들이 밀실에서 행하는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력 엘리트들은 세계적 기업들의 무제한한 영리활동을 통해서 '세계 전체'가 부유해질 것이며, 그럼으로써 세계의 빈곤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말해왔고, 이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원래 철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경제사상으로 출발하였다.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나 공적 권력에 의한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면서 오직 시장의 규칙만 따를 것을 강력히 주문해왔다. 그들에게 시장은 무소불위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늘 경제는 어디까지나 경제논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경제논리란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요구에 의해서도 제어(制御)되지 않는 자율적인 시장 메커니즘을 뜻한다. 그러나 이 무한대의 자유경쟁을 부추기는 시장만능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은 극단적인 약육강식의 상황, 즉 세상의 가장 힘없는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피나는 경쟁, 투쟁 속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 결과 당연히 경쟁에서 진 패배자들이 속출하지만, 이들을 껴안는 시장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대처 수상이 매몰차게 말했듯이, 자유시장주의의 교의(敎義) 속에서는 "사회적 연대라는 개념은 없다."
  
모든 종류의 경제발전이 민중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신자유주의 노선에 충실하면서 민중의 복지를 말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취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은 가령 '복지 프로그램'과 같은 정치적인 의제(議題)로 다룬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관한 근원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에 설마 고의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고, 민중을 배신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자신의 정책의 결과가 민중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변함없는 신념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나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서 시장원리주의가 최우선적인 경제논리가 될 때, 거기에는 사회적 약자들과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는 공공성의 공간이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세계 전역에 걸쳐 충분히 증명되어온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제논리를 계속하여 고집한다면, 그것은 결국 정책 결정자들이 무슨 이유로든 사회적 약자와 환경, 그리고 민주주의를 제물로 바치더라도, 국내외의 자본과 기업 혹은 경제 엘리트들의 이해관계에 굴종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동조해야 할 동기(動機)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미 FTA,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
앞에서 말한 대로, 지금 한미 FTA 협상은 무엇보다도 국민에 대한 정부의 설명책임의 방기(放棄) 등 절차상의 문제에 있어서 이미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두려운 것은 실제로 이 협정이 맺어져서 발효가 되었을 때의 예상되는 상황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한미 FTA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에 관한 규정이다. 이 규정이 갖는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소상하게 지적해왔지만, 핵심적인 것은 이 조항으로 인해 향후 한국사회에서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공공기관이 공익을 위한 정책을 펴는 일이 극히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이 조항은 투자자의 사적 이익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을 최우선적인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사실상 국가의 공공정책 능력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국가의 주권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이 점 때문에 벌써 몇몇 법률전문가들에 의해서 이 조항의 위헌성(違憲性)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미 FTA는 단순히 무역에 관한 협정이라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여타의 FTA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포괄성'으로 인해 한국경제가 미국경제에 통합된다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를 뿌리로부터 흔들어놓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변화 그 자체를 기피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초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리 겁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한미 FTA로 인한 이러한 예상되는 변화 혹은 전면적인 '혼돈'을 생각하면, 실로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간과해서 안 될 것은, 한미 FTA와 같은 통상조약이 한번 맺어지면 일방이 원한다고 해서 폐기하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쉽게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예컨대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와 같은 규정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를 말하고, 그 실천에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시장개방을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얼마나 일방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다시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필리핀 대학의 사회학자이자 세계적인 '반세계화' 이론가, 활동가이기도 한 월든 벨로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미국정부가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는 자유무역주의를 설파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철저한 '보호무역주의'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이 근년에 와서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한 다자주의 무역방식 대신에 개별국가와의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따져보면, 미국이 국제사회의 게임의 규칙을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정당한 요구에 응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년 WTO 도하라운드 협상에서도, 미국은 자국의 농업에 대한 막대한 보조금을 철폐하라는 개발도상국들의 일치된 요구를 끝끝내 거부했고, 이것이 협상의 좌절을 자초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다자주의 무역의 이상'을 스스로 훼손하면서까지 자기중심적인 입장에 철저한 미국이 FTA와 같은 양자 간 무역협상에서 그 기본적인 자세를 달리할 리가 만무하다. 실제로, 지난 1년간 진행되어온 한미 FTA 협상의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더라도 미국의 자세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하는 여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이 협상 종료시까지 변함없이 계속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 오늘날 '자유무역협정'을 열심히 추구하면서, 정작 협상과정에서 상대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신은 거의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은 결국 미국경제가 허약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현재 미국은 점점 불어나는 막대한 재정적자 및 무역적자로 매우 위태로운 경제상황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최대의 시장을 가진 국가로서 당면한 인류사회 공통의 난제들에 대응하는 데 너그러운 지도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오히려 세계평화를 어지럽히고, 지구온난화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까지 위협하는 장본인이 되고 있는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악화일로에 있는 경제가 그 주요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일찍이 소련의 붕괴를 정확히 예측하여 주목을 받은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엠마뉘엘 토드는 2002년에 처음 출판된 그의 저서 <제국 이후>(*<제국의 몰락>)에서, 오늘날 미국이 '연극적 소규모 군사행동주의'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은 미국 자신의 산업적 기반의 허약함을 은폐하려는 기도라는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행동주의'가 반드시 '연극적'인 은폐수단에 그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라크에 대한 침략이 석유자원 확보라는 숨겨진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의 군사행동은 경제적 목적을 추구하는 유력한 수단으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뉴욕타임스〉의 논설필자 토머스 프리드먼이 솔직하게 말했듯이, 미국의 군대는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여하튼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하여 시장개방을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집요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지금 한미 FTA 협상과 병행하여 커다란 쟁점이 되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BSE) 소가 발견됨으로써 수입이 중지된 미국산 쇠고기는 그후 우여곡절 끝에 작년 하반기에 다시 수입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세관의 검역과정에서 쇠고기 속에 뼛조각들이 들어있는 게 확인됨으로써 다시 잠정적으로 수입이 중단되었고, 그 때문에 이 문제는 지금 한미 간 주요 통상현안이 되어있다. 그런데, "광우병 위험물질은 뇌와 척수 등 신경조직에 고농도로 축적되어 있으며, 뼛조각이 들어있다는 것은 배근신경절 등 신경조직이 살코기에 포함되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뜻한다."('미국산 쇠고기 수입 저지 국민운동본부 성명서' 2006.12.7)

따라서 뼛조각은 수입되는 쇠고기 속에는 당연히 포함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하도록 양국 사이에 이미 양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뼛조각이 포함된 쇠고기에 대한 통관금지를 결정한 한국정부의 조치에 불쾌감을 표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향후 미국산 수입쇠고기에 대한 위생검역 자체를 면제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자기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최소한의 소임마저 포기하라는 이러한 요구는, 간단히 말하면, 국가주권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압력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가 과연 안전성이 보증될 수 있는 것일까.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되기까지 미국의 전체 성우(成牛) 4200만 마리 중 검사를 받는 소는 연간 2만 마리에 불과했다. 즉, 0.05%만의 소가 검사를 받고 있었다. (검사 규모의 축소는 1주일간 100만 달러 정도 드는 검사비용과 관계있을 것이다.) 광우병 발생 후 여러 나라 학자들로 구성된 국제조사단의 권고에 따라 미 농무부는 그 후 2년간 약 76만 마리를 검사하였다. 그 결과는 "광우병 발생률은 어른소 100만 마리 당 1마리 이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소는 건강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06년 2월의 미 농무부 감사국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검사체제로는) BSE(광우병) 발생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추계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검사 표본을 채취하는 방법이 엉터리인데다가 그 수도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大野和興,〈檢證―美國産牛肉(上)〉日刊ベリタ, 2006년 7월 24일)
  
광우병 소가 발생하면 그 목장은 수많은 소를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엄청난 손해를 입기 때문에 과연 미국의 축산업자들이 그러한 원칙을 지키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모든 소에 귀걸이를 부착해놓고 일평생 소를 관리, 추적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 아마도 괴상한 동작을 나타내거나 땅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소만 목장의 한 구석이나 사막에 묻어버리고 말 가능성이 있다고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문제를 생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또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육골분(肉骨粉)을 소의 사료로 쓰는 것을 아직도 전면 금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나 양 등 반추동물의 시체나 내장을 원료로 해서 만든 이 육골분 사료로 인해 초식동물인 소들이 육식을 강요당했고, 그 과정에서 광우병의 원인물질이 생성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과학자들이 경고해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반추동물의 육골분을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것만을 금지하고 있을 뿐이다. 즉, 죽은 소의 시체나 내장으로 만든 육골분을 닭이나 돼지에게 주는 것은 허용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광우병의 원인물질이 먹이사슬에 따라 계속 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도 그 사슬 가운데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영국 수의(獸醫)시험장에 의하면, "소는 광우병에 걸린 뇌조직의 불과 10밀리그램을 먹어도 감염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허다한 문제가 있지만 또하나 특기할 것은 미국의 쇠고기 처리공장에서의 작업과정이다. 2004년 여름 일본을 방문한 미국 최대 식육회사 '타이슨푸드'사의 노조위원장의 증언에 의하면 "12초에 1마리라는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의 빠른 속도로 소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노동재해가 빈발하고,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늘 인부들이 교체되고, 그래서 숙련노동자가 드물다. 게다가 위험 속에서 작업을 늘 거칠게 하는 탓에 특정위험부위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섞이는 일도 드물지 않다."(大野和興,〈檢證―美國産牛肉(下)〉日刊ベリタ, 2006년 7월 27일)
  
미국산 쇠고기가 이렇다고 해서 한국정부가 언제까지 미국정부의 압력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버티는 척은 하겠지만, 결국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재개를 허술한 검역과정을 거쳐서 받아들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미국산 쇠고기를 회피하려면 그것을 먹지 않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소비자들은 쇠고기의 원산지 표시를 명확히 해줄 것을 상인들이나 정부당국에 강력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한미 FTA가 발효된 상황에서, 쇠고기의 원산지 표시가 미국산 상품에 대한 차별조치 금지 규정에 걸리거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의 대상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꺼림칙한 고기를 먹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두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가 한미 FTA라는 덫에 빠진 것은, 좀더 깊이 따져볼 때, 지금 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성장동력'이 꺼져간다고 하면서 '이대로 가면' 선진국 진입은 고사하고,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토로하는 목소리는 이른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허다한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고 있다.

한평생 문학에 관한 글을 쓰고,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쳐온 어느 원로 문학평론가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난"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간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한 지식인은 최근 들어 "지금 한국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어쩌면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심정을 토로하면서, "한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고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노동운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다소 뜻밖의 제안까지 내놓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반드시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조만간 어떤 정부, 어떤 정책 결정자이든, 그것이 돈이 되고,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말해지는 것이라면 한미 FTA건 혹은 다른 어떤 도박이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뛰어들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니까, 정말 문제는 한미 FTA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고, '성공'을 해야 한다는 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이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하는 한국의 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20년 남짓 "무섭게 성장 질주를 해온" 중국이나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있다"는 일본과 같은 이웃나라들을 포함해서 소위 글로벌화 시대의 세계 전체의 현실을 냉정히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와 같은 성장지상주의에 입각한 경제발전이 더 확대되어서는 조만간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공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인간성과 농촌공동체의 파괴를 비롯하여 빈부격차, 전쟁, 환경 및 에너지 위기 등 온갖 난제를 안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시급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들이지만, 이러한 과제들이 계속적인 경제발전에 의해 극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이야말로 이 모든 위기와 난제들의 원인이었거나 이러한 사태를 악화시켜온 주범이었다. 우리는 이 기초적인 사실을 정확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흔히 우리는 경제성장을 통한 빈부격차 해소를 운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빈부격차란 경제성장의 필연적인 산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토대라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이윤창출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힘의 격차라는 구조적 조건에 의해서만 작동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제성장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성장의 결과는 또 필연적으로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정말로 고르게 산다면 거기에는 자본주의도, 경제성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임이 확실하다.
  
실제,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확대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그 내부든 외부든 식민지의 존재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왔다. 오늘날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는 국가들은 실은 모두 과거에 어떤 식으로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토착민들에 대한 식민지적 침탈과 지배에 연루되어 있었던 나라들이다. 그러니까, 식민지가 없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추구한다면 해외가 아니라 국내에서 식민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농촌공동체의 와해와 하층민에 대한 착취는 불가피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경제 시대에는 국경을 넘어 초저임금 노동자와 세계 각처의 농민들이 사실상의 식민지 역할을 떠맡게 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근대화 혹은 산업화라고 불러왔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경제발전 혹은 근대화라는 기획의 계속적인 확대를 통해서 빈곤도, 누추함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가 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의 명민한 관찰처럼, 대도시의 화려한 고층빌딩만 근대 건축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고층빌딩들 사이의 누추한 슬럼도 틀림없는 근대 건축이다. 근대화된 세계란 이처럼 현대식 빌딩이 대변하는 표(表)와 슬럼이 대변하는 리(裏)의 동시적 공존에 의해서 구성되는 구조물이다. 여기에서 표리관계를 무시하고, 표의 세계만의 독자적인 발전을 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슬럼을 원하지 않는다면 화려한 현대식 빌딩도 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근대교육을 받아온 우리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미신의 하나는 일반적으로 문명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물질적 풍요와 생산력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생활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고 선진적이라는 검토되지 않은 믿음이 확산되고, 그런 맹목적인 믿음 속에서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 2만 달러로, 그리고 다시 3만 달러의 시대로….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가야 할지도, 또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끝없는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질주가 허망한 것임을 설혹 모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 달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다른 사회들도 똑같이 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절멸 직전의 '이스터 섬(Easter Island)' 사람들의 상황과 흡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국내에서도 소개된 제레드 다이어먼드의 책 <문명의 붕괴>에는, 한때 풍요로웠던 문화를 일구었던 남태평양의 고도(孤島) 이스터 섬의 주민들이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거대한 석상(石像)들을 부족간에 경쟁적으로 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석상의 제작과 운반에 필요한 나무를 함부로 베어냄으로써 마침내 불모화된 자연 속에서 절멸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 생태계가 붕괴되고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최종 단계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침내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동료인간을 죽이고, 식인(食人)까지 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내몰린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그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직도 숲이 남아있었을 때 이 절해고도의 숲을 죄다 파괴해서는 자기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태까지 계속해왔던 관성대로 석상 건립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권력욕망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섬의 마지막 남은 한 그루 나무까지 베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이스터 섬' 외에도 생태적 조건에 적합하지 않은 생활방식을 고집하다가 결국 지상에서 절멸되어버린 몇몇 인간집단의 경우가 더 소개되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이런 사례를 소개하는 것은 단순히 신기한 옛날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먼드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악화일로를 치닫는 생태적 위기 앞에서 한사람의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손자들의 할아버지로서 깊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이들 인간집단이 절멸되어버린 공통의 원인은 그들 자신의 생태적 조건에 반하는 생활방식에 있었지만, 그러한 생활방식이 계속된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삶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핵심적 가치(core values)'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인류사회를 절멸의 벼랑으로 데려가고 있는 '핵심적 가치'란 바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적당한 성장'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회에서든 경제성장이란 언제나 그 사회의 가동(稼動) 가능한 모든 인적·물적 에너지를 전면적으로 투입할 것을 강요한다. 경제성장은 절제라는 개념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고도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어떤 경제성장이든 그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일종의 국가총동원체제이다. 그러므로 성장지향 국가란 본질적으로 군사국가 혹은 독재국가와 동일한 '폭력'의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도의 개발독재 시대가 과거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 '개혁'이니 '구조조정'이니 '노동시장 유연성'이니 혹은 '경쟁력 없는 농업의 퇴출'이니 하는 갖가지 이름에 의한 인권 탄압과 시민적 권리에 대한 제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 새로운 억압은 그 강도와 방식에 있어서 어쩌면 개발독재 때보다 더 가혹하고 간교한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 군사독재 치하도 아닌데, 노동운동을 제약하고, 필요하다면 노동쟁의 자체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압도적인 지배하에 들어가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반대개념은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희망의 보루, '우정'과 '환대'
일찍이 근대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대체로 민주주의의 성립과 발전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과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의 관점과는 달리,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달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파괴할 가능성에 대해 깊이 우려해온 사상가들도 적지 않게 존재해왔다. 지금은 이러한 사상가들에게 좀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사상사가 셀던 월린 교수도 그러한 사상가 가운데 하나인데, <정치와 비전>이라는 고전적인 저서 속에서 그가 예민하게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양산되는 것은 이기적이고, 약탈적이고, 경쟁적이며, 불평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에 대해 심히 두려워하는 인간들, 즉 민주적 시민으로는 부적당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이다.
  
건전한 민주사회가 성립되기 위한 가장 필요한 조건의 하나는 사적 이익에 못지않게 공공성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을 동일시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서는 이런 의미의 정신적 능력에 대한 관심은 희박하다. 그들은 자유시장의 발달만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역사적인 현실로도, 과학적인 분석으로도 입증될 수 없는 주장일 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오직 형식적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차원으로 축소시켜 이해함으로써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극히 왜소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란 물질적 생산력이나 생활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며, 개인들의 정신적 자질에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는 이 점을 좀더 명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역사가로서 영국 노동당의 지도적 이론가이기도 했던 R. H. 토니가 오래 전에 했던 발언은 매우 인상적이다.―"가난하기 때문에 올바른 인간사회가 될 여유가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사회도 단순히 부유해짐으로써 올바른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투철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토니는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정치제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폭군적인' 경제권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하였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제도에 머무를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되지 않는 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부형태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회유형이며 생활방식이다. (…) 하나의 사회유형,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되려면 첫째, 그것은 모든 형태의 특권을 단호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둘째, 그것은 흔히 무책임한 폭군이 되어있는 경제권력을 제어하여, 사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전환시켜야 하고, 그 권력이 또한 명확한 한계 내에서 활동하도록 하여, 공적 권위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R. H. Tawney, Keeping Left, 1950)


  
토니의 말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집약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온갖 문제들이 무분별한 생산력 증대를 부추기는 경제성장을 통해서 극복될 것이라는 미신에 더 이상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끝없는 생산력의 증대와 물질적 풍요를 겨냥하는 성장경제 논리는 차별과 격차를 끊임없이 양산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세계의 황폐화를 초래한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궁극적으로 평등한 인간관계에 토대를 둔 사람들 사이의 우정(友情)과 환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07.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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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7-03-15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므로 성장을 통해 가난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다는 ***당의 말도 평등을 통해 가난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다는 ##당의 말도 저는 믿지 않습니다.
평등하며 (지금 보다 더) 가난하게 살 것이가? 아니면 불평등을 감수하며 잘 (부유하게) 살 것인가? 양자 택일 뿐. 여러분은 허리띠를 졸라 맬 마음의 준비가 되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