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중유보와 거짓말

* 의중유보2

 
신의 성실의 원칙( 줄여서 신의칙)은 법률 용어로 시작은 민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결혼이나 계약 관계를 법을 판정할 때 이용되는 민법 원리입니다. 근래는 공법 분야에도 적용되는 법원리라고 하는데, 저는 공법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신의칙의 개념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부부 사이에 신의칙, 임대인과 임차인의 신의칙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저와 대중 또는 공공에 (도덕, 윤리와 다른) 어떤 신의칙이 있을까하면 떠오른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립간과 알라디너 사이에 어떤 신의칙이 존재할까요? (글 ‘의중유보와 거짓말’에서 저와 제 안해와는 신의칙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만.) 조선인님이 이야기하신 ‘상대방을 기망하여 해하려거나 나만 부당이득을 얻는 경우’를 고의적으로 했다면 가치 판단이 쉬운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암묵적 소통은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둔하고, 좌뇌 지배적인 사람은 우뇌 지배적인 사람보다 둔합니다. (글 ‘의중유보와 거짓말’에서 TV 영화 속에는 고의가 포함되어 있으니 조금 다른 평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에서 발생하는 오해는 많다고 생각하는데, 단순한 신의칙으로 분석되지 않습니다.

* 실화2

 
제 경험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결혼하기 전 어느 여성을 소개받았는데, 그녀와 한 동안 만남을 갖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 사실은 결혼했다가 이혼한 사람입니다. 미안합니다.” 그 전화를 받았을 때, 제 감정은 무덤덤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미안할 것까지야, 내가 그쪽에게 결혼 했었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는데.’

 
다음 만남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 주위에 남편도 애도 없으니 직장등 주위에서 미혼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굳이 결혼했다가 이혼했다고 광고할 필요 없다고, 저와 만나러 나올 때도 사귐이 어느 정도 진행될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지 않으며,) 신의칙에 어긋났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와의 관계는 결혼을 전제했으므로 결혼 전에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했고) 만남 초기에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신의칙을 어겼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제 의견에 동의하시다면, 신의칙 범위에 대한 의문이 다시 생기게 됩니다.

* 실화3

 
제가 작년 가을에 10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습니다. 사표를 내야겠다는 마음은 입사 때부터 갖고 있었고 봄, 여름에 지나면서 암묵적인 신호를 주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후배에게 “내가 없더라도 회사와 부서, 그리고 후배들을 부탁한다.”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고, 명시적으로도 “얼마 안 있어, 사표를 쓰겠다.”고 이야기 한 적도 있지만 오히려 10년 동안 언제든지 사표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 터라 그 이야기가 (진짜로) 작년 가을에 사표를 쓰겠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부서 업무 중 가을에 맡아야 할 것에 제 이름을 뺐습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어, 왜 마립간 이름이 빠져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중에 사표가 제출된 뒤, 명시적 대화를 한 몇 명을 빼고 주위 사람은 무척 놀랐습니다. 놀랐던 사람 중에는 (6개월에 걸쳐) 암묵적 신호를 통해 알려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의 의미는 이런 뜻으로 한 것이었어.”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치 퍼즐 맞추기와 같이 이해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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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4-26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의성실의 원칙은 둘 간의 명백한 계약관계가 존재하거나, 혹은 계약관계에 준하는 감정적 유대가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실화2는 둘 사이의 감정적 유대가 깊어졌거나 계약관계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해요.
실화3의 경우... 고용주와 나 사이의 신의성실 원칙에 의거하면 난 퇴사예정일 적어도 1달 전에 퇴직원을 제출해야겠지요. 그러나 자본주의 기업에서 동료직원과 나 사이에 어떤 신의성실의 원칙이 있을까 라는 점에서 전 좀 회의적이에요. 비영리단체에서 일할 때는 관둘지말지 의사결정의 과정을 6개월 이상 협의했지만, 모 기업에서 퇴사할 때는 고용주 외의 모든 직원에게 마지막 날까지 비밀을 지켰거든요.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거니와 오히려 저의 퇴직으로 인해 다른 직원이 업무에 집중하지 못 하고 동요하게 되면 고용주에게 약속한 성실한 노동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어요. 덕분에 동료들에게 욕은 좀 먹었죠. 야멸차고 냉랭한 인간이라구요.

마립간 2011-04-26 11:21   좋아요 0 | URL
계약은 비교적 명확하지만 감정의 경우는 일방적 (또는 동등하지 않을 경우)일 수 있지요. 저의 퇴직의 경우 한달 후 퇴직을 하였고 회사 업무에 무리가 없는 선에 퇴사하여 회사와의 신의칙은 지켰다고 생각하지만, 위의 글의 초점은 주위 동료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 조선인님과 논쟁하자는 것은 아니고 원칙에는 조선인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Hot issue인 인터넷 기사를 읽고 생각한 것을 정리한 글입니다.

조선인 2011-04-26 13:01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과의 대화는 늘 즐거워요. 한 번 더 생각하고 정리하는 기회가 되서 참 좋아요.

마립간 2011-04-26 15:04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감사합니다.^^ 몇분 안 남은 서재 1세대라 소중한 분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댓글 통해 자기 점검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황량한 서재라 악플도 없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4-26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적으로 신의칙의 원칙을 논하느냐
아니면 법 외에 기본적으로(또는 상식적으로, 사회 통용적으로, 인간적으로) 신의칙의 원칙을 논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관점이 되겠네요.

그리고 전, 신의칙이란 법을 떠나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상대가 진정으로 배신감을 느끼고 아파할 거라면, 그리고 제가 그것을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무시한 상태라면... 그건 신의칙의 원칙을 지켰다고 하기 어렵지요.

마립간님과 조선인님의 대화 읽기 잼나네요. 제 의견은 살짝 다르긴 하지만요.

마립간 2011-04-26 15:3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의 의견도 존중합니다.^^ 저는 좌뇌 우세 남자라서 위와 같은 생활 철학이 나왔겠죠. 법의 신의칙은 판사가 판단할 일이고, 상식이나 사회통념은 가변적이며 진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철학(이나 윤리)를 추구합니다. '상대가 진정으로 배신감을 느끼고 아파할 거라면, 그리고 제가 그것을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무시'한 것이 신의칙을 어겼다고 생각하며 살기에는 제 (삶의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큽니다. 마녀고양이님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것이죠.

2011-04-26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1-04-27 07:56   좋아요 0 | URL
이글을 읽으시는 다른 분들을 위해 open글로 댓글을 답니다. 일반적으로 좌뇌를 이성적, 논리적, 명시적으로 생각하고 우뇌를 감정적, 인간관계지향적, 암묵적으로 표현합니다. 공공관계에 있어서는 신의칙이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더 포괄적인 윤리도덕이 있으므로 따로 윤리도덕과 구분된 신의칙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상식과 사회 통념도 가변적으로 보편성이 떨어지는 것이지 필요없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면, 예를 들어 부부, 친구 등으로 한정하면 그들 관계만의 신의칙이 존재하죠.) 대개 (전통,) 상식과 사회통념은 (예를 들어 남존여비, 일부다처제라도) 그것이 형성되어 공공히 되는 과정은 그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친교육 때문에...

* 불의에 대한 저항

 
우리 애들은 나를 닮았는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키웠는지... 불의에 저항하는 마인드가 강하다.

 
순오기님의 글을 읽다가 제 자신을 비추어 생각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씁니다. 저는 머리가 나쁘기도 하지만 좋은 면도 있어, 어떤 사람이 명시적이던, 암묵적이던 명제가 주워졌을 때, 신속하게 그 나름대로 가치판단을 하게 됩니다.

 
대화 상대가 수평적일 때는 논쟁,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고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여기서 감정의 앙금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 저의 경우는 할머니와 친척 분들이 해당됨.)나 선생님, 선배, 직장 상사의 경우 처음에는 의견 교환처럼 수평적으로 시작되나 결국에는 아랫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 사람의 주장을 관철시킵니다. 더욱이 더 분노하게 하는 것은 위 사람의 의지를 관철한 것을 가지고 회의를 통해 아랫사람으로부터 의견 수렴을 거친 모양새를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불의에 저항하는 마인드가 강하지 않습니다. 제가 피해 받지 않는 선?에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적극적인 정의 실천자보다는 소극적 정의 실천이지요. 보다 정의로운 세상이 되려면 적극적 정의 실천자가 많아야 되겠지만 저는 소극적 정의 실천만으로도 살만한 세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 자의적인 적극적 정의正義 실천과 소극적 정의 실천의 정의定義는 예를 들어 부적절한 지역 재개발을 - 이하 재개발로 설명하면) 적극적 정의 실천는 재개발로 인해 피해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재개발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소극적 정의 실천은 그 지역 안에 살면서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개발이 악이냐, 불의냐, 무엇이 부적절한 것이냐고 물으시면 안 됩니다. 논지에서 벗어냐요. 재개발로 이익을 얻지 못하므로 상대적인 손해도 물론 동반합니다.) 다른 예로 장애인 시설 유치가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장애인 복지 시설을 반대하기도 합니다. 반대하지 않는 정도의 실천. 또 다른 소극적 실천으로 투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투표율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지하는 대상도 이기적은 공약을 하는 정치인을 지지합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표현했던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선생님이 그 일을 갖고 불이익을 준다면 달게 받으라고 한다.

 
저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살아왔지만, 표현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불이익을 가능하면 피하려 하면서 살아왔고 어쩔 수없이 주어지는 불이익을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결론은, 월욜에 선생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기로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위 문장 때문입니다. 뭐가 죄송할까? 자신의 의견을 표시한 것이 죄송한 것일까? 어른 입장에 대한 버릇없는 짓이 죄송하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버릇 있게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은 있을까? 특히 학생을 올바르게 지도해야 할 선생님의 입장에서 로비와 관련된 것이라면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려면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 실력 기르는데 몰입하다 보면 방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핵심적인 문제는 실력이 아직 길러지지 않았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잡설雜說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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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5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6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6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 공교육 시험
- 기절할 노릇

 
얼마 전 퇴근하던 중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새로 바뀐 교육과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대담자로 나오신 분이 수학의 경우, 답만 구하는 것이 아니고 풀이 과정도 채점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선생님께서 채점하는 수고는 엄청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자가 이것이 사교육을 줄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책에 나온 방식대로 풀어야 점수가 주어지고 설령 풀이 방식이 맞더라도 책에 없는 방식이면 감점이기 때문에 사교육이 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립간 ; 엥? 이게 무슨 소리.)
 
사회자가 마립간을 대신해서 질문을 계속합니다. “아이가 뛰어나서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면 어떻게 해요?” 대담자 ; “그래도 감점입니다. 교과서의 내용대로 풀어야 ......”
 (마립간 ; 에~엥? 이게 무슨 소리!)
 
이 방송 끝에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얼마 전 어느 여학생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는데, “우리 아이 반에는 외국에 거주하다 온 아이가 많아 영어를 잘하는 (? 아마도 듣기와 말하기로 추정) 아이가 많지만, 우리 아이는 책(영어 교과서)만을 열심히 해서 점수가 친구들 보다 좋아요”
 (마립간 ; (아마도 듣기와 말하기가 잘 못하는) 영어를 잘 못하는 아이가 시험만 잘 본 것이 자랑인가?)
 
그런데 결론이 놀랍습니다. 이 시험 및 채점 방식이 창의적 교육이랍니다.

 
물론 취지는 이해합니다. 사교육을 줄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선행학습을 없애고 학교 교육( 즉 공교육)에 충실하자는 뜻입니다. 부모의 계급같은 계층이 교육을 통해 자녀에게 유전되지 않도록. ; 이런 생각이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선행 교육과 적기 교육에 대한 의견도 재미있는데, 능력이 되어 앞선 공부를 하는 것은 적기 교육이라고 했습니다. 즉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학습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여 중학교 과정을 배운다면 이것은 적기 교육이고 제대로 초등학교 과정도 이해하지 못한 아이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친다면 선행학습이라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학부모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선행학습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3-4년 전) 제 친구의 말 ; “공교육은 주입식 교육이고 인성이 고려되지 않는데, 창의적인 교육은 사교육에서 나오는 것 같아.”
 
공교육에 계신 선생님을 질타하기보다 교육 평가제도(와 사회제도)를 바꿔야 하는데, 이것에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사교육에 지나치게 밀리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는데, 오히려 역행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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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11-03-2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교과서의 내용대로 풀지 않으면 감점이라고요??? 그 많은 학생들의 제각각 답안을 어찌채점하나 했더니 ... 중1 아이를 둔 저로서는 참으로 우울한 답이네요. ㅠㅠ

마립간 2011-03-29 07:56   좋아요 0 | URL
정말 제대로 하자면 문항수를 줄이고 채점의 수고가 있더라도 올바른 답에 대한 채점이 있어야 하는데, 교과서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교과서 외를 인정하지 않겠다니 붕어빵 만드는 교육이죠.

조선인 2011-03-2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미 우리 딸은 곱셈 문제를 정석대로 풀지 않아 몇 번이나 감점을 당했답니다. 교과서대로 풀이과정 쓰는 건 너무 어려워요. ㅠ.ㅠ

마립간 2011-03-29 07:57   좋아요 0 | URL
제가 분노하지 않고 오래 살려면 제 딸 아이의 성적은 포기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저는 제 성적에는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왔는데, 딸에게도 그것이 가능할지 궁금할 뿐입니다.

BRINY 2011-03-2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점기준대로 채점을 안하면 채점교사가 감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교과서대로'를 외치게 됩니다. 대학처럼 서술형 문제 채점에 대해 완전자율권을 주지 않는한, 결코 창의성 향상 안됩니다.

마립간 2011-03-29 08:00   좋아요 0 | URL
저도 교직에 있으면서 시험 출제와 출제방식에 관한 workshop에 많이 참가했습니다. 각 출제방식에 장단점을 비교한 논문도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서술형 채점에 대한 자율권을 주지 않으려면 A형 문제 출제가 좋다는 것이 연구의 결과로 나왔는데, 왜 형식에 얽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bookJourney 2011-03-29 08:54   좋아요 0 | URL
BRINY 님 말씀 들으니 더 가슴이 답답해요. ㅠㅠ

꼬마요정 2011-03-28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절할 노릇이군요.
대화와 토론, 창의적인 사고, 인성교육.. 힘드네요..

마립간 2011-03-29 08:24   좋아요 0 | URL
창의적 사고와 인성교육은 학교교육 포기하고 홈 스쿨링하려 합니다.

반딧불,, 2011-03-2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죠. 이게 우리 나라 공교육의 현실이랍니다.
더 재밌는 이야기가 차고 넘칩니다만 참습니다.

마립간 2011-03-29 08:25   좋아요 0 | URL
공적인 부문에서는 흉내 좀 안 했으면 합니다. 현실적으로 창의적 교육이 안 된다면 안 된다고 할 것이지, 느낌이 꼭 어묵 먹으면서 서민 경제 살리겠다는 것 같습니다.

BRINY 2011-03-29 11:13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창의적 교육이 안된다면 안되는거지, 올해는 서술형 출제비율을 더 늘리라고 하는군요. 요즘 애들 말 빌려서 '헐~!'소리밖에 안나옵니다.

순오기 2011-03-29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안타까운 교육현장~~~~~ 선생님과 아이들 모두 피해자가 아닐지요.ㅜㅜ
뭔가 새롭게 하려는 시도를 원천봉쇄하는 현실에서 창의성 교육은 어불성설입니다.ㅜㅜ

마립간 2011-03-30 11:27   좋아요 0 | URL
아이가 학교 갈 나이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학교 교육에서 안되면 가정교육으로 해결하지'라는 생각도 있고 창의성 인성 교육이 삶과 분리된 것 같지도 않고. 아마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수 많은 글들을 알라딘에 올릴지 모르죠.
 

* 슬픈 예감 2

問 ;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答 ;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아마도)

<강의> p82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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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예감

 다음 주 중 알라딘에서 논란이 있은 <삼성을 생각한다>를 포함해서 책 몇 권을 구입하려 합니다.

 ‘건달은 깨질 때 깨지더라도 쪽 팔리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쪽 팔리고 싶지 않다.’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사실 표면화되지만 않았을 뿐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문제이고, /결국 남의 일에 왜 신경 쓰느냐고 한다는 논리라면 /내가 서 있는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인 거죠.


 역사는 ‘광기와 우연의 결과’의 결과이고 <유괘한 경제학>에서 ‘p 96 사람들이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해도 과감히 행동할 수 있을 때 문명은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p 98 오히려 인류의 문명은 별다른 생각없이 수행한 수많은 작업에 의해 진보해왔다.’라고 말합니다.

 글샘 ;
한 사람의 사소한 사건...으로 인간의 역사는 이루어진 것들 아닌가.

 ‘3점 슛’에 대한 비유보다 ‘달걀로 바위치기’가 더 적절한 비유였다고 생각합니다. 달걀로 바위를 치더라도 바위에는 흠집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쪽을 팔면서 구차하게 사는 삶이 더 힘든 선택일 수 있음’을 변명으로 명확한 원인과 결과를 추구하는 저에게 사소한 것은 사소한 것으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할 수많은 것에 대하여 우리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완전히 별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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