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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ㅣ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유진이는 중학교 학년에 올라가서 자신과 같은 반에 또 다른 유진이가 있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성도 똑같은 이유진이다. 자세히 보니 같은 유치원을 다녔던 동창생이다. 그런데 작은 유진이는 나 큰 유준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런 유치원에 다닌 적도 없다고 한다. 분명 같은 아이인데... 작은 유진이는 왜 기억을 잃어버렸을까...
이금이 소설 유진과 유진은 성장 소설이다. 한참 사춘기를 겪을 중학생 소녀가 주인공이다. 두 유진이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성격과 특징을 갖고 있지만, 둘은 동시에 같은 기억을 가진, 그래서 같은 이름이 운명같기도 한 아이들이다.
유치원 시절, 유치원 원장에 의해서 성추행을 당했던 아이들중에 두 주인공 유진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상처를 꿰매느라 애썼다. 큰유진이의 부모님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아이를 안아주고, 네 탓이 아님을 강조하며 아이의 드러난 상처를 자연상태로 치유하고자 했다. 반면 작은 유진이의 부모님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아이에게 기억을 잊어버릴 것을 강요했다. 할머니는 깨진 그릇 취급을 하였고 어머니는 너무 쌀쌀맞았다. 성장과정에서 작은 유진이는 자신의 엄마나 아빠가 새엄마 내지 새아빠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동생들과 다른 그 차별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작은 유진이는 봉합되었던 기억을 큰유진이를 만나면서 조금씩 상기하게 된다. 그 파장은 놀라웠다. 내 탓이 아닌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죄인 취급하는 가족을, 강요된 기억상실에 아이는 설 곳을 잃어버린다. 전교1등을 하며 악착같이 모범생의 모습으로 자신을 지탱해오던 작은 유진이는 이 일을 계기로 반항을 하기 시작한다. 담배를 피우고, 학원을 가지 않고 춤을 배우러 다니고 지금껏 못했던 일탈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들이 들통나면서 균열은 더욱 커진다. 부모님은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망가지기 전에 미국에 보내겠다는 엄포와 무서운 매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한편, 큰유진이는 유치원 동창생인 건우와 예쁘장하게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건우 어머니로부터 유진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는 그만 헤어지자고 한다. 어머니께서 '그런 애'와 사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건우의 어머니는 사회운동가로서 사건 당시 피해자의 어머니들을 위해 발벗고 도와주었던 사람이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에 대한 전문적 조언을 아끼지 않던 그녀의 이중성과 건우의 모습에 유진이는 큰상처를 받는다.
집에 갇혀버린 작은 유진이는 큰 유진이에게 도움을 청하고 큰유진이는 단짝 친구 소라와 함께 작은 유진이를 구출(?)한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은 바다를 보기 위해 정동진행 기차를 타고 나름 무모하면서 기대되는 일탈을 해버린다.
그러나 정동진에 도착했을 때는 학원비로 챙겨두었던 돈을 도둑맞은 뒤였고, 결국 아이들은 부모님께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팽개치고 달려오신 큰유진이의 부모님은 혼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를 보듬어 안고 무사함에 감사하기만 했다. 슈퍼마켓 운영으로 늘 바빴던 소라의 어머니는 딸을 때리며 혼내키기도 했지만 그 끝에 묻어나는 울음과 따뜻한 포옹은 소라의 마음도 울려버린다. 그러나 멀찍이 떨어져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작은 유진이의 어머니는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차를 돌려 어느 호텔에서 묵자고 하였다. 내내 억눌렀던 울분을 작은 유진이는 터트리고 만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어머니의 미숙한 모성애와 서툴렀던 사랑을 확인한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사랑하는 방법은 저마다 모습이 달랐다.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애정은 오해와 불만을 만들고, 작은 유진이의 경우처럼 긴 상처를 남겨 서로를 상처내기 일쑤다.
이 책은 열다섯 소녀들의 감수성과 그들의 고민, 그들의 행동들을 딱 그 모습 그대로 묘사해내고 있다. 건우와의 문자 데이트를 소라를 통해서 해야 했던 큰유진이는 핸드폰을 사달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어머니에 의해 무시되었고, 아버지께서 핸드폰을 사러 같이 가자는 말에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 여겨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핸드폰을 장만하신 거였고, 자신이 넘겨짚은 거지만 상처받은 유진이는 동생과의 싸움에서 기어이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이 보여주신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 읽었던 소설 "홍당무"에서 무섭기만 했던 홍당무의 어머니와 비슷했달까. 결국 부모 마음이란 그렇지... 라는 안도감과 유진이의 반응들이 너무 귀엽고 생생해 어릴 적 내 모습도 같이 떠올릴 수 있었다.
단짝 친구 소라의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슈퍼마켓을 운영하시는 부모님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앞가림을 하면 모를까, 아니라면 가게에서 배달을 시키겠다고 하셨다. 언니인 보라는 죽어라 공부를 하지만, 소설가가 꿈인 소라는 차라리 배달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 겸험을 늘려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공부는 못하고 딴 궁리만 하는 소라가 우등생은 아닐지언정,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나름 확고한 인생관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유진이와의 우정은 또 얼마나 깍듯하던가.
건우와 건우 어머니의 캐릭터도 생각의 여지가 있다. 멋진척 쿨한척은 다했지만 사실은 마마보이였던 건우와, 사회적 명예와 위신은 지켜도,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은 아니었던 그녀의 가식은 유진이를 향한 반응에서 이미 드러났다.
작은 유진이를 가졌을 때 너무도 가난했던 부모님은, 자신들에게 닥친 사건이 가난 때문이라고 탄식했다. 부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던 그들은, 부모님께 순종하여 집으로 들어가며 자신들이 감당해야 했던 책임과 상처를 외면해버렸다. 그것은 결국 그들과 딸 작은 유진이에게 더 큰 상처로 돌아오고 말았다.
성장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이 책이 시사해주는 바는 작지 않다. 비단 청소년들의 읽기 책으로 국한할 수도 없다. 거기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소재의 위험성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는 유독 건드리기 어렵고 민감한 부분이다. 전통적 유교 질서에 얽매여 있는 이 사회는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발뻗고 자지 못하게 만들고 가족이나 이웃들도 어떤 의미로든 가해자의 입장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의 건우와 건우 어머니, 그리고 작은 유진이의 부모님과 조부모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래 들어 더더욱 성폭력 사건이 많았는데, 이는 단지 피해자들이 마음을 독하게 먹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대책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의식이 먼저 바껴야 함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성폭력은 재범죄율이 높은 만큼 거기에 대한 시급한 대책이 요구된다. 이 책이 그러한 여러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릴 수 있기를 바란다.
참 아프고 참 강동적이었던 글을 만나서 기뻤다. 도서관에서 책을 골라 본 것인데, 아무래도 구입해서 소장해야겠다. 두루두루 선물도 하면 좋겠다. 오늘 수업에 학생들에게 얘기해주면 열다섯 소년소녀들은 즐거이 들을까? 음... 솔직히 모르겠다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