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서도 역사로서도 서러운 이름, 소현
최종병기 활 - War of the A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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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영화 제목을 보면 弓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자막을 보니 活로 뜬다. 이중적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영화의 시작은 인조반정에서 출발한다. 한 때는 촉망받던 무인 집안이었지만 광해군을 따랐다는 이유로 이제는 역적의 집안이 되어 남이와 자인은 쫓기는 몸이 된다. 아버지는 절친이 있는 개성으로 두 아이를 보내고 칼을 받는다. 신궁이었던 아버지의 활은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맡겨진다. 아버지의 최후를 기억하는 남이,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떠난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는 자인. 두 아이는 그렇게 서럽게 성장하며 13년이 흐른다. 그러니까 1623년에서 1636년으로 건너뛴다. 인조반정에서 병자호란으로 가는 셈이다.  

어린 남이 역을 맡은 배우는 이다윗이다. 고지전에서 청아한 목소리로 전선야곡을 불렀던 그 아이가 이젠 슬픔을 집어삼킨 서늘한 눈매의 남이로 분했다. 박해일 역시 쌍커풀이 없는 눈이어서 두 사람의 싱크로율은 상당히 높았다. 캐스팅 잘 골랐다.  

남이와 자인이를 키워준 분은 아버지의 절친이지만, 그의 부인인 안방 마님은 이들 남매가 버거웠을 것이다. 차마 내칠 수는 없지만 역모로 몰린 집안의 아이이니 바깥으로 소문이라도 나간다면 안 그래도 권력과 멀어진 집안이 더더욱 기울어갈 거라고 여길 것이다.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서군(김무열)이 자인을 연모하고 있으니 복장이 터질 일이다. 그리고 그걸 잘 아는 남이 역시 사랑하는 자인이를 서군에게 보낼 수가 없다. 아버지는 충분히 어렸던 남이에게, 이젠 자인이에게 네가 아버지라고 했다. 남이에게 자인이는 사랑하는 동생이면서 딸자식과 마찬가지인 존재다. 세상에 의지할 수 있고, 또 세상에 지켜야 하는 유일한 피붙이였던 것이다.   

외유내강형의 자인 역할은 문채원이 맡았다. 사극과 인연이 많은 그녀다. 꽤 예쁘장하지만 인형같은 미모가 아니라 좀 더 생기 있는 미모랄까. 아직까지는 연기가 좀 아쉽지만, 스크린과 브라운관 안에서의 그녀는 충분히 빛난다. 이 작품에서는 활도 쓰고 칼도 쓰는데 활 쏘는 자세가 무척 근사했다. 시위를 놓았을 때 오른손이 등 뒤쪽에서 펴져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이 자세는 박해일(남이)에게서도 나왔는데 둘 다 그 자세를 배웠을 것이다.  

여차여차 과정을 거쳐 서군과 자인이의 혼인날! 얄궂게도 하필 그날 청군이 몰려온다. 혼인식이 진행되는 동안 홀로 산에 올라가 활을 쏘려던 남이는 몰려오는 청군을 보고 도망치다가 그들의 표적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한다. 그의 신묘한 활솜씨에 놈들의 압박을 벗어났지만 절벽으로 떨어져 죽을 위기를 겪는다. 혼인 잔치는 아수라장이 되고 신부와 신랑이 모두 포롤 잡혀간다. 싸우다가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못마땅해했지만 정작 며느리가 위기에 처하자 발 벗고 나섰던 시어머님도 돌아가셨다. 뒤늦게 집에 도착한 남이는 자신이 선물한 꽃신 한짝만 남았을 뿐이다. 이때부터 남이의 동생 찾기 여정이 시작된다.  

 

표적의 목을 꿰뚫고, 나올 수 없는 방향에서 휘어지는 화살을 쏘는 남이의 실력은 신궁 그 이상이었다. 영화가 내내 흥미진진했던 것은 활을 통해 내보이는 강렬한 액션에서 오는 쾌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흡사 '원티드'에서 휘어지는 총알을 보는 듯했지만, 그보다 더 짜릿했달까. 특히 시위를 떠난 활이 바람과 공기를 가르며 목표물에 명중할 때 들려오는 음향 효과가 대단했다. 이런 영화는 기술적 뒷받침이 되어주어야만 진정으로 완성될 수 있으리라 여긴다.  

동생을 잡아간 부대를 찾기 위해 홀로 청군을 상대로 싸우는 남이. 자신의 활은 살리기 위한 활이지 죽이기 위한 활이 아니라는 대사가 처음 나왔을 때는 적절하지 않은 멋부리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여태 죽인 놈들은 다 뭔가! 일부러 병사를 살려주었다고 보기에는 당시 남이의 입장이 너무 위험했으니 진정 살검이 아닌 활검의 마음이었다고 봐야 할 텐데, 얼핏 바람의 검심의 주인공 켄신이 떠올랐다. 남이가 자신의 활을 살리기 위한 활로 쓴 것은 사실이다. 그의 사랑하는 동생을 구하고, 동족을 구하고, 또 의로운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장면에서 죽음의 활을 거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화에서 큰 매력을 담당한 또 다른 이는 류승룡이 맡은 쥬신타다. 만주어를 모르니 완벽하게 소화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는 바지만, 그의 입을 빌어 나오는 만주어는 진정 그를 만주의 사내로 보이게 만들었다. 단순히 외국어를 잘 소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적절한 억양과 톤, 그리고 무게감까지 더해서 그를 용사 중의 용사로 변신시켰던 것이다. 늘 기대하지만, 기대한 것 이상을 보여주는 특별한 배우다. 그의 이름도 '주연' 칸에 나오는 것도 무척 기뻤다.  

오른쪽 사진은 쥬신타가 모시고 온 왕자 도르곤이다. 왜 하필 이름을 도르곤으로 했을까? 도르곤, 혹은 다이곤이라 불리는 인물은 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이자 청 태종의 동생이다. 훗날 볼모가 된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베이징 남정 길에 올라 중원에 입성하는 것을 목격시키는 실력자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찌질한 인간은 아니었다. 도르곤 왕자 역을 맡은 배우는 추노로 얼굴을 익혔는데, 그때 배신자의 인상이 강렬해서 잘 생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악역으로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 이미지를 벗어내는 변신이 그에겐 숙제가 될 것이다.  

 

영화의 대략적인 스토리 진행은 비교적 단순하다. 이런 영화에서 결국엔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지는 대체로 짐작 가능하지 않던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설들력 있게, 그리고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감독은 영민하게 잘 보여준 듯하다. 남이가 지키려던 게 누이이자 딸같은 자인이가 아니라 연모의 대상이었다면 오히려 그 느낌은 덜 다가왔을 듯하다.  

여주인공을 청순가련으로 만들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문채원의 얼굴은 청순 그 자체이지만, 그 안에서 강한 액션도 소화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닌 인물로 표현한 게 좋았다. 그리고 이 부분은 박해일의 캐스팅과도 상통한다. 두 배우 모두 얼굴이 선하고 유해 보이지 않던가. 박해일의 강점은 그런 얼굴을 지녔지만 눈빛이 살아 있어서 때로 연쇄 살인범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이렇게 활의 전쟁을 벌이는 신궁이자 천궁으로도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병자호란은 인재에 가까웠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을 전쟁을 유발시킨 비루한 임금 인조는, 그 후로도 오래 살아남아 제 자식과 손주까지 다 잡아먹었지만, 제 백성을 살려 돌아올 노력 따위는 그닥 기울이지 않았다. 수십만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고향에서 핍박을 받았다. 참으로 비참했던 역사였다. 그런데 그게 수백 년 전 과거의 일뿐이겠냐고 되묻게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과연 하고 있는지...... 

영화와 함께 김인숙 작가의 '소현'을 추천한다. 아주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다. 만화 바람의 검심도 같이 읽는다면 더 좋겠다.(애니로 보아도 좋겠다.) 

이미 보았으니 스토리의 전후를 다 알지만, 그럼에도 한 번쯤 더 보고 싶은 영화다. 나 역시 두려움을 직시하고, 바람을 극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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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08-1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현과 일맥상통한다면 이 영화도 왠지 무척이나 슬프겠네요. 마지막 "그게 수백년 전의 일뿐이겠는가"라는 부분에 많은 공감이 가네요.

마노아 2011-08-13 13:56   좋아요 0 | URL
그래도 책처럼 슬프지만은 않고 일견 웃음도 있고 통쾌한 액션도 있고 그래요. 7광구에 이어서 보았더니 더 만족스럽네요.^^

BRINY 2011-08-13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틸컷 멋진네요~ 마노아님 리뷰는 늘 영화를 보고 싶어지게 만드네요.

마노아 2011-08-13 23:25   좋아요 0 | URL
스틸컷 정말 잘 나왔죠? 포스터에서 이야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아요. 좀 전에 울 언니도 이 영화보고 나서 아주 재밌다고 전화가 왔어요.^^

블루데이지 2011-08-14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 요 영화 정말 평좋네요..
오늘 하루 여유가 있어 하루 종일 차안에서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참 소개 많이 하더라구요...평균 별 4개 수준으로다가...
마노아님 덕분에...저 오늘 영화 <활>, 책<소현> 두가지 건졌어요...
두가지 다 볼꺼예요..(주먹 불끈)

마노아 2011-08-14 23:11   좋아요 0 | URL
헤헷, 영화 최종병기 활과 책 소현 모두 추천작이에요. 블루데이지님도 재밌게 보실 것 같아요.
김인숙 작가님 문체는 무척 아름다워서 읽는 동안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주먹 불끈을 응원합니다!(응?)

하이드 2011-08-1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 주인공 나온 포스터가 정말 멋지네요. 매력있어요

마노아 2011-08-14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저 포스터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영화 속에서보다 포스터 속의 표정이 더 절절하게 나온 것 같아요!

timpark 2011-08-14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평 잘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숨겨진 심리묘사가 뛰어나시네요...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는 그 한줄이 마음에 와닿네요...

마노아 2011-08-14 23:12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한국 영화의 내공이 점점 깊어가는 걸 느꼈어요.^^

순오기 2011-08-16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박해일!!
난 박해일 나오는 영화는 거의 안 빼고 다 본 듯해요.^^
김인숙의 소현에선 다르곤이 꽤 괜찮게 나오는데~
이 영화는 꼭 봐야겠군요. 감사~~~

마노아 2011-08-15 11:57   좋아요 0 | URL
극락도 살인 사건을 못봤어요. 박해일은 정말 믿을만한 배우 같아요.
작품 고르는 눈도 좋구요. 신뢰를 주는 눈빛이에요.^^

순오기 2011-08-16 00:47   좋아요 0 | URL
아~ 나도 극락도 살인사건은 못 봤어요. 안 봤다는 게 맞지만...^^

마노아 2011-08-16 13:50   좋아요 0 | URL
당시 보고 온 울 언니가 재밌었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못 봤어요.
무서운 영화가 아니라면 나도 보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고지전 - The Front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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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분단을 소재로 해서 만든 영화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많았다. 쉬리, 공동경비구역JSA,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 동막골, 의형제 등등. 이 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몰이를 한 작품은 '태극기 휘날리며'이지만, 영화적으로 가장 촌스러웠다고 생각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동건의 눈빛은 기억에 남지만 그것이 곧 영화의 완성도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웃으면서 웃게 한 공동경비구역JSA와 웰컴투 동막골, 의형제 등이 모두 내게 좋은 감상을 남겼는데, 이제 여기에 '고지전'도 추가해야겠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에 조인하면서 중단되었다. 휴전협상은 무려 2년 반이나 끌었지만, 휴전 얘기가 나오기 전보다 휴전 협상 기간에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누군가는 협상 테이블에서 말로 싸웠다면, 그 기간 동안 전선에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고지의 주인이 바뀌면서 삶과 죽음이 엎치락뒤치락 부대끼며 싸웠다. 문득,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이 떠오른다. 


   
  전투는 사십칠 일간 계속되었다. 이십 일째부터 신병들이 투입되었는데, 칠 일 이상 살아 있으면 고참병이 되었다. 대원이 다섯 명 남은 중대장에게 연대장은 고지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돌격하라우!"
시화평 전투는 쌍방이 모두 손실을 돌보지 않고, 죽음으로써 삶을 제거하고 죽임으로써 죽음을 갚는 무한소모전이었는데, 그 전략적 득실관계는 지금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유해발굴단장 강중령은 전사戰史에 썼다. -150쪽
 
   

영화는 1953년 2월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출발한다.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는 상부로부터 동부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동부 전선 최전방 애록고지에서 중대장이 죽었는데 시신에서 아군 지휘관의 총알이 나왔기 때문이다.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그가 받은 임무였다. 애록고지로 가는 강은표의 심정은 복잡하다. 전쟁 초기 자신과 함께 북한군에 잡혔다가 실종된 절친한 친구 김수혁(고수)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고, 당시 자신들을 잡고서 너희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싸우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라며, 이 싸움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호언장담했던 북한군 장교 현정윤(류승룡-목소리에서부터 카리스마가 좔좔 흘렀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면 끝난다던 싸움은 그 후로도 2년 이상을 끌었다. 우리가 왜 싸우고 있는지 지금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애록고지 악어부대는 무척 수상한 곳이었다. 유약하기 짝이 없던 이등병 김수혁은 어느새 중위로 특진해 있었고 부대에서 실질적 리더가 되어 있었다. 뿐아니라 이제 스무살이 되었을까 말까한 어린 대위의 카리스마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영화 파수꾼에서 강렬하면서도 애처로운 눈빛을 선보였던 이제훈은 고지전에서도 특유의 눈빛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굳이 화보집 사진을 같이 보탠 것은 순전히 사심이 더해진 까닭!) 

파수꾼에서도 그랬지만 상당한 동안인지라 나이보다 훨씬 어린 배역을 깊이있게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 (역시 대세는 동안!) 

영화 '시'에서 윤정희의 손자로 나왔던 뻔뻔한 중학생은 이 영화에서 열일곱의 말단병으로 나오는데 미성으로 부른 '전선야곡'이 청아하면서도 슬프게 들렸다. 

 1.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  그목소리 그리워

2.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속에 달려간 내고향 내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오
   아~아~아~ 쓸어안고 싶었오  


 
(나이가 실감나게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그밖에 장훈 감독의 세 영화에 모두 출연하며 씬스틸러의 역할을 해낸 고창석의 능청스런 연기와 류승수의 코믹 연기도 궁합이 잘 맞았다. 까메오라고 생각했던 김옥빈은 생각보다 비중 있는 역할이었고, 영화의 서늘함을 더하는 데에 큰 몫을 담당했다. 

영화는 몇 차례나 극적인 순간이 등장하면서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첫번째는 애록고지를 탈환했을 때 인민군이 지하에 숨겨둔 편지와 술 등을 꺼내다가 강은표에게 들켰을 때였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얼마든지 인민군과 내통한다는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방첩대 출신 강은표가 목격했으니 손발이 후덜덜해지는 게 당연했다. 첫번째 고비는 그래도 유머러스하게 잘 넘어갔다. 워낙 고지의 주인이 자주 바뀌다 보니 서로 남쪽과 북쪽에 가족에게 편지를 대신 전해주면서 술과 담배를 나눴던 게 전말이었다.

두번째 고비는 열심히 싸워왔지만 현재로서는 정신줄을 놓은 군인이 지금 이곳을 아직도 포항전선이라고 착각하며 자기 부대원들을 찾으면서 등장한다. 여기서 앞서 칭찬했던 이제훈의 연기가 몹시 빛났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생존만이 최고의 전략으로 생각하는 병사들의 처절했던 과거가 등장하면서 수혁(고수)이 얘기했던 '지옥'의 참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세번째 최고의 고비이자 절정은 휴전 당일이었다. 모든 전쟁이 끝나는 순간, 그들의 지옥의 끝이 보이는 순간, 고향과 가족과 기다렸던 모든 따뜻하고 평화로운 것들이 떠오르는 그 순간에 들이닥쳤다. 이 부분의 내용은 한국전쟁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의 섬뜩한 상상력이 보태진 것이겠지만, 그 전쟁에서 무엇이 불가능했을까 싶은 마음에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로서는 영화를 본 날이 바로 휴전협정에 조인했던 그 날이었기 때문에 좀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왜 이 영화가 6월이 아닌 7월에 개봉한 것이 더 의미있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안개가 드리워지고 전선야곡이 서로의 진영에서 울려퍼질 때, '크리스마스 휴전'이 떠올랐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크리스마스에 기적처럼 벌어졌던 단 하루의 휴전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같이 낭만스러운 결말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어제는 서로에게 술과 담배를 나누던 사이였어도 오늘은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들이었으니까.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왜 싸우는지 알았는데, 이제 3년을 피비린내 속에서 살았더니 누구도 왜 싸우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던 비참한 순간이 와버렸으니까... 

고엽제 전우회라든가, 6.25참전용사 등등의 이름을 붙인 할아버지들이 가스통 들고 목에 핏대 올리시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한편으로는 연민도 느끼곤 했다. 전쟁을 텍스트로, 그리고 영상 이미지로 접한 우리 세대와, 전쟁을 피부로, 온 몸으로 느끼신 그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스펙트럼은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 연민으로 그분들에게 동의의 한 표를 던질 수는 없지만, 그분들도 피해자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에 누구보다 책임이 있었을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더 솟구친다. 그리고 이제는 함께 나누어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전쟁의 기억을 전쟁으로 덮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분노와 응징이 아닌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의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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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건축학개론-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from 그대가, 그대를 2012-03-26 23:44 
    서른 다섯 승민은 야근과 밤샘을 밥먹듯하는 건축 사무실에 근무한다. 여전히 밤을 새서 피곤에 찌들어 있던 어느 날, 미모의 여성이 자신을 찾아와 말을 건다. 누구...세요? 하고 묻는 그에게 그녀는 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냐는 얼굴로 자신을 소개한다. 스무살 대학 새내기 시절 첫사랑 그녀와 다시 만난 순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나운서 시험에 몇 차례 떨어지고 의사 남편 만나서 결혼을 했다던 그녀가 제주도의 고향 집에 집을 짓고 싶다고 건축을 의뢰한다
 
 
무해한모리군 2011-08-0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쟁을 경험하신 분들의 말씀은 늘 어느정도의 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가르치려하거나 바로잡기보다 그 진실을 이해해 주는 쪽이 옳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이 불과 얼마전이었다는게 늘 믿어지지 않아요.

마노아 2011-08-01 15:14   좋아요 0 | URL
서로 가르치려 들고 바로잡으려 하기 때문에 더 대화가 되지 않나봐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정말 아주 오래 전 일도 아닌데, 참 멀어져버리고 아득해져버렸어요. 낯설어요.

프레이야 2011-08-01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심 담긴 이제훈 페이퍼 좋아요.ㅎㅎ
류승용은 매번 나오는 역할마다 멋이 있어요.
다윗군의 전선야곡은 좀 청승인가싶었는데 조금 쉬어가는 의미로 나쁘지 않았어요.

마노아 2011-08-01 21:20   좋아요 0 | URL
이제훈의 콧날이 날카로워서 베일 것 같아요. ^^ㅎㅎ
류승용은 정말 카리스마가 넘쳐요. 예전에 여섯 개의 시선인가 다섯 개의 시선인가, 단편 영화에서 비정규직 고민기술자로 나왔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전선야곡을 처음 들어봤는데 여자가 부르는 줄 알았어요. 엄청 미성이던걸요. 청승맞았지만 짠한 노래였어요.(>_<)

순오기 2011-08-02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거론한 전쟁영화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만 안 봤어요~~~다른 영화는 다 좋았고요.
이제훈에 담긴 사심은 좋아요.ㅋㅋ 고수가 나오는 영화는 처음 봤는데 괜찮았어요.
전쟁은 정말 미친짓이죠, 동족간의 피터지는 전쟁으로 내몬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 ㅜㅜ

마노아 2011-08-02 12:59   좋아요 0 | URL
대한민국 국민 4명 중 한명이 본 영화를 보지 않은 뚝심 깊은 순오기님!
사실 저 중에 그 영화가 제일 별로였으니 못 보셨어도 무방합니다.^^
고수의 연기는 백야행에서 더 절정이었는데 이 영화도 괜찮았어요.
무얼 위해 싸웠는지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게 더 힘들 거예요...ㅜ.ㅜ

순오기 2011-08-02 14:47   좋아요 0 | URL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대놓고 애국심으로 마케팅하는 영화 우리 가족은 체질적으로 거부해요, 그래서 제아무리 난리를 쳐도 모두들 안보기로 뜻을 정했거든요. 그러면서 한반도는 개봉하자마자 봤어요.ㅋㅋ
어쨋든 한국전쟁에 금기시하던 것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하는 영화들 아주 좋아요. 그래서 우리가 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처절하게 죽어가야 했는지 진실을 알아가면 좋겠어요.

마노아 2011-08-03 07:34   좋아요 0 | URL
태극기는 장동건과 원빈으로 일단 보고 넘어가야 하는 영화였어요. ㅎㅎㅎ
그렇게 대놓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영화로 저는 '태풍'이 가장 짜증났어요.
이후 곽경택 감독 영화는 등을 돌리게 되던걸요.
영화 한 편이 얘기해줄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아요. 이래서 종합예술이라고 하나봅니다.

순오기 2011-08-03 09:53   좋아요 0 | URL
아아악~~~원빈은 꼭 봤어야 했건만OTL
태풍을 먼저 봐 버렸기 때문에 태극기를 안 봤던가~~~ 뭐가 먼저 나왔나 가물가물~~ ㅜㅜ

마노아 2011-08-03 12:33   좋아요 0 | URL
원빈이 연기를 참 잘했는데 장동건의 눈 흰자 돌아간 얘기만 회자되어서 안타까웠어요.
뭐, 원빈은 작년에 그의 해였지만요.^^

saint236 2011-10-01 09:45   좋아요 0 | URL
태극기의 원빈은 가을동화의 복사판이었습니다.^^ "얼마면 돼?"와 "누가 집에 보내 달라고 했어?"의 어투가 완전히 일치... 아저씨에서 그의 모습은 변신 그 자체였죠

마노아 2011-10-02 23:09   좋아요 0 | URL
원빈의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되어요.^^

꿈꾸는섬 2011-08-0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싸우는지 선뜻 답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정말 들어요.
이 영화 보고 싶어 점찍어 놓긴 했는데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ㅜㅜ
이제훈..저 처음보는 배우인데 너무 멋진데요. 게다가 정말 동안이군요. 사심 페이퍼 정말 좋아요.ㅎㅎ

마노아 2011-08-02 12:59   좋아요 0 | URL
이제훈이 일일드라마 세 자매에서 '은국'이라는 순수 청년으로 처음 알게 됐는데 저리 서늘한 눈빛을 간직한 친구일 줄이야, 앞으로가 더 기대된답니다. 영화는 좋고도 슬펐어요...ㅜㅜ

saint236 2011-09-29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승룡 짱입니다. "아우들, 안녕하신가? 나 장순탄이여." "너는 몰아붙여 나는 퍼부을테니" "개떼처럼 오라우, 다 개박살내 주갔어!" "확실이 알았는데 너무 오래돼서 까먹었어." 그의 주옥같은 명대사입니다.

마노아 2011-09-29 15:09   좋아요 0 | URL
대사를 치는 힘이 끝내주지요? 최종병기 활에서도 만주어가 그의 목소리를 빌어 나오자 정말 만주족 전사가 부활한 느낌이었어요. 대단한 배우예요. ^^

saint236 2011-10-01 09:44   좋아요 0 | URL
아직 활은 못봐서요. 활을 보고 그의 어록을 작성해 보죠.

마노아 2011-10-02 23:09   좋아요 0 | URL
하핫, 기대하겠습니다.^^
 
그을린 사랑 - Incendi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가 시작되면서 라디오 헤드의 You and Whose Army가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중동의 어느 지역, 한 소년이 머리를 삭발당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아래서부터 위로 이동을 했는데 소년의 오른발 뒤꿈치에는 세개의 점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소년의 눈은 카메라를 뚫을 듯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 눈에는 저항과 분노가 가득합니다. 소년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일까요. 소년은 왜,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런 눈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 시간을 점프합니다. 한 공증인이 유언장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쌍둥이 남매에게 남긴 글입니다. 그런데 이 유언이 아주 황당합니다. 

“내 시신은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엎어놓아라. 약속을 어긴 자는 비문이 필요없다. 잔느, 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하거라. 시몽은 형을 찾아 편지를 주도록 해라. 편지가 모두 전달되면 너희에게도 편지를 줄게.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우고 내 이름을 새겨도 된다. 햇빛 아래에.”

남매는 아버지가 전쟁 와중에 돌아가셨다고 알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뜬금 없는 형의 존재라니요. 어머니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평소 말씀이 없으셨고, 아마 자식들에게도 다소 차갑게 군다 느껴지는 인상이었을 겁니다. 누나 잔느는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만 동생 시몽은 회피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거라고, 공증인의 비서로서는 좋은 동료였을지라도 자신들의 어머니로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거칠게 말해버립니다.  

 

잔느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뚜렷하게 답이 나오는 문제만 풀어왔을 테지만, 그런 잔느의 직관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어머니는 수영장에서 갑자기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놓으시고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엄마의 촛점 잃은 눈을 마주했던 잔느의 마음 속에는 석연치 않은 부채감이 자리합니다. 마침내 잔느는 따라오지 않는 동생을 두고 혼자서 엄마의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캐나다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지만 원래 어머니는 중동 출신이었지요. 영화는 현명하게도 특정 나라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원작 연극에선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했고, 영화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내고 있지만 사용되는 지명은 모두 가상의 곳입니다. 가상의 나라, 가상의 장소를 배경으로 풀어나가지만 영화의 모든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실의 우리를 반영합니다.  

엄마가 다녔던 대학을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35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엄마의 흔적을 찾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그러다가 사진 한 장이 단서가 됩니다. 사진이 찍힌 장소가 남부의 감옥이라는 것을 누군가 알아본 것입니다. 감옥이라니, 내 어머니가 감옥에 수용될 만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잔느는 알지 못합니다. 영화는 엄마의 과거를 되밟아 가는 잔느의 여정과 고향을 떠난 어머니 나왈의 행보를 겹쳐서 보여줍니다.  

나왈은 중동에서 태어났지만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회교도 난민이었고요. 두 사람은 몰래 마을을 떠나려고 했지만 형제들에게 들켜버렸고, 그 자리에서 사랑했던 연인은 총살을 당합니다. 할머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나왈 역시 그 자리에서 명예 살인 되었을 테지요. 당시 나왈은 임신 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나왈에게 하나의 약속을 받아냅니다. 아이를 무사히 낳고 삼촌이 계신 곳으로 도망가서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라고요. 할머니는 갓 태어난 아이의 발 뒤꿈치에 점 세 개를 문신으로 새겨넣습니다. 당장은 고아원에 보내지만 훗날 아이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려는 의도였지요. 맞습니다. 영화의 시작에서 나왔던 바로 그 소년입니다. 그 아이의 신산스러웠을 삶의 여정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지요. 

 

잔느는 어머니의 고향에서 어머니가 불명예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합니다. 그녀들의 마을에 수치를 안겨주었다는 것이지요. 4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명예는 찾아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은 인류가 서로 다른 종교 문제로 수천 년이나 싸워온 지난한 역사를 그대로 대변해 줍니다. 이제 잔느는 어머니가 수감되었던 감옥으로 향합니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어느 할머니의 제 엄마의 삶도 모르면서 아빠를 찾느냐는 일갈을 가슴에 새긴 채로 말입니다. 

나왈은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며 신문을 만들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내전이 터져서 학교는 습격을 당했고, 날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한 아들을 찾기 위해 아들을 맡겼던 고아원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른 고아원으로 옮겨졌고, 그녀가 도착하기 하루 전에 폭격을 받아 그곳엔 폐허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곳으로 옮겨져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놓치지 않던 나왈은 회교도들이 탄 버스를 얻어타다가 기독교 민병대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는 총신에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사람을 죽이지만, 신이 원했던 참 사랑과는 지극히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왈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내세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버스 안의 생존자는 단 세 명. 한 회교도 여인과 그녀의 딸이 또 있었지요. 그 여인까지 살릴 수 없었던 나왈은 여인의 딸이 자신의 딸이라며 안고 나오지만, 아이가 엄마를 쫓아 달려가는 바람에 결국 모두 죽고 맙니다. 이 비극적인 참사 앞에서 그녀는 테러리스트로 거듭납니다. 한때 글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녀는 이제 저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줄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왈은 기독교 민병대의 지도자 집에 가정교사로 부임했고, 기회를 노려 그 자를 쏘아 죽입니다. 그렇게, 남부의 악명높은 감옥에 수감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무려 15년이나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렸다는 게 각별했지요. 그녀의 의지를 꺾기 위해서, 그녀의 노래를 그치게 하기 위해서 더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고, 그래도 그녀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잔느가 마주친 어머니의 진실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고, 어머니의 고통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는 먹먹한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 잔느는 동생 시몬을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해왔던 공증인도 그 자리에 동행합니다. 이들은 점점 더 어머니가 침묵해 왔던 진실에 다가갑니다. 진실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버거웠고, 점점 드러나는 아버지와 형의 존재도 그들의 가슴을 압박합니다.  

1+1=2라는 것이 수학적 진실이었는데, 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합리적인 결론이었는데, 1+1이 2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남매는 부둥켜안고 오열합니다. 수영장에서 미친 듯이 헤엄을 치며 힘을 빼보지만 그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함께 있던 그때처럼 남매는 물 속에서도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눈물을 삭입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을,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과 마주한 그들도 어머니처럼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남매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내었고, 또 그들의 형제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편지들을 전달합니다. 이제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남긴 편지를 열어볼 차례지요.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진실의 위력은 지나치게 무서웠기 때문에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한 시간을 주었던 것입니다. 공포였을 시작을 사랑이라고 바꿔준 어머니,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기 위해서 약속을 지켰던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자신의 삶을 평화와 위로로 바꾸어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속을 지켜낸 어머니는 당당히 햇볕 아래에 비석을 세우고 그 이름을 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비석을 알아볼 수 있게, 누구라도 찾아와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영화의 충격적인 소재와 흐름은 관객을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듭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올해 최고의 영화는 '인 어 베러 월드'였지만, 벌써 그 기록을 갈아치우게 됐습니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은 노미네이트로 그쳤지만, 적어도 제게는 이 영화가 준 전율이 더 절절했습니다. 이 정도의 메시지라면 청소년들도 충분히 소화하고 새길만 하건만, 18세 이상 관람가는 적잖이 불만을 줍니다. 영화의 의의가 전쟁과 폭력보다 평화와 사랑에 있다는 것을 우리의 청소년들도 분명히 인식할 텐데 말입니다.  

라디오헤드를 비롯해서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르는 음악들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악이 부각될 때는 대사 없이 카메라를 멀리서 잡아주는데, 화면속으로 진하게 빨아들이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열연을 보여준 나왈 역의 루브나 아자발의 연기가 훌륭했고, 잔느는 엄마와 비교적 닮은 배우를 기용해서 더 몰입감을 주기도 했지요. 영화의 원제는 'incendies'로 불어로 '불에 그을린'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강렬하고 과격한 사건을 의미한다고 감독은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현대판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의 내용과 제목은 몹시 잘 어울립니다. 이탈리아에선 '노래하는 여인'으로, 스칸디나비아 개봉명은 <나왈의 비밀>이라고 하니, '그을린 사랑'이라고 명명한 한국판 제목은 꽤 시적입니다. 무분별한 영어 제목을 한글로 옮기는 행태에 평소 불만이 많았는데, 이런 식의 제목은 언제든 환영이지요.  

큰 비극을 겪고도 그것을 복수가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섣불리 말하기도 힘들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영화는 130분에 걸쳐서 오감을 다 자극하며 대변해줍니다. 태양 볕이 뜨거운 여름날의 연속이지만, 그보다 더 강렬하고 숭고한 열기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개봉관이 많지 않으니 좀 더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영화 '그을린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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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7-2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꼭 보겠어요, 불끈! 어디서 하죠? 두리번 두리번 (" )( ")

마노아 2011-07-22 16:06   좋아요 0 | URL
일단 무비꼴라쥬에서 합니다. 그밖에 시네큐브까지만 알고 저도 몰라요.^^;;;;
어쨌든 꼭 보는 겁니다.^^

웽스북스 2011-07-2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찜해놨어요! 시네큐브~

마노아 2011-07-22 16:06   좋아요 0 | URL
오, 통했습니다! 시네큐브면 훌륭하죠!

다락방 2011-07-2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예매되어 있지요. 움화화핫

마노아 2011-07-22 16:0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와락 울고 나오겠어요.(>_<)

레와 2011-07-22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요일 부산에서 봅니다! ^^

마노아 2011-07-22 16:07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두루두루 봐야 해요. 쏘우 굿이에요! ^^
 
음모자 - The Conspirato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865년 4월 14일,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어가던 즈음,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극장에서 암살된다. 대통령 암살에 가담한 8명의 음모자 중 한 명은 그들에게 장소를 제공한 셈이 되어버린 여관 여주인 메리 서랫이다. 남부 출신의 그녀는 남편을 잃고 딸과 아들과 함께 여관을 꾸려나가던 중이었다. 정부측 증인들은 그녀가 암살에 가담했다며 증언을 하고 있고, 정작 암살 음모에 한 축이 되었던 그녀의 아들은 도주한 상태다. 군사재판이 열렸고, 피고측 변호인으로 프레데릭 에이큰(제임스 맥어보이)이 지정된다. 그는 전쟁 영웅으로 변호사지만 아직 재판 경험은 없다. 대다수의 국민들처럼 그 역시 대통령의 암살에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피고인의 변호를 맡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변호사로서의 본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맡았지만 초기의 그는 경멸을 가득 담은 채 피고인을 바라볼 뿐, 그 안의 진실에 다가서지 못했다.   

 

(이 사진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삘이 난다.)

허나, 재판이 계속 진행되어 가면서 정부 측 증인들이 위증을 하고 있지만 판사와 검사 모두 그걸 덮어두고 있으며 자신이 내세운 증인조차도 정부측 압력에 의해서 증언을 바꾸는 일이 생기자 에이큰은 중요한 본질이 왜곡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피고 메리 서랫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그녀에게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자신이 살고자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누이 안나도 동생을 감싸느라 처음엔 진실을 감추고 얘기하지 않는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로빈 라이트는 무척 절제된 연기를 잘 해내었는데, 언뜻 보고는 '피아노'의 주인공으로 착각했다. 

  

동생과 엄마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딸 안나. 엄마와 분위기가 닮아 있다. 눈매가 강단있어 보인다. 

이 재판은 에이큰에게 몹시 불리한 것이었다. 이기면 공공의 적이 될 것이고, 지면 그의 경력에 큰 흠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자신을 내던진다. 이런 그를 친구들과 애인, 그리고 정부측 인사들 모두 말린다. 국민들이 사랑하는 대통령이 비참하게 죽었고, 그 범인들이 현재 눈앞에 있다. 모두의 눈에 복수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 시점이다. 메리 서랫의 집은 공공연히 테러를 당하고 있고, 에이큰은 사교계에서 자격 박탈을 당하며 보이콧 된다. 사랑하는 여인도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어 가고 있다. 더불어 재판 역시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분명히 모든 증거는 메리 서랫이 대통령 암살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가 전쟁에서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인권이었다. 헌법에서 분명히 명시한 그 인권은 누구에게라도 공통으로 지켜져야 마땅했다. 메리 서랫 아니라 총을 직접 쏜 존 부스라고 할지라도 부당한 재판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복수 그 자체가 정의는 아니니까. 지금 하나의 희생자를 내어서 잠시 속이 시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인류의 진보에 장애가 된다는 걸 우린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번쯤 질문하게 된다. 피의자의 인권과 피해자의 인권에 대해서 말이다. 누구라도 자신이나 혹은 가족이 연루된 사건이라면 진실을 눈감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저 사람은 욕 먹어 마땅해, 혹은 죽어 마땅해 이러면서 말이다.  

영화는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던지게 하면서 차분하게 진행된다. 이 세기의 재판은 미국 역사에 또 한 줄을 그었으니 전시 중에라도 마땅히 보호해야 할 인권에 대해서 한 발자국을 나아가게 만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의 이름이 나오는데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감동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급하게 고른 영화여서 사전 정보가 거의 없었는데 기막히게 운이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온 노래가 참 좋았는데 아직 ost 정보가 없어서 노래 제목도 모르겠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음악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데, 그래서 마지막에 영화가 다 끝나고 흘러나오는 노래에만 집중하게 된다.  

제임스 맥어보이는 작년에 본 '원티드'에서 처음 알게 된 배우다. 그 사이 일 년 동안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과 'X맨'에서 그를 또 만났다. 제법 다작을 하는 듯하지만, 그래도 영화 고르는 눈이 있는 배우인가 보다. 앞으로도 그의 선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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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7-02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제임스 맥어보이는.......(개인적 관점이지만)
수염을 길렀을 때가 훨 낫군요. 그를 펌하하는 건 아니자만 원티드에서나 기타 다른 영화에선
몰입하기 힘든 배우였습니다.

마노아 2011-07-02 17:46   좋아요 0 | URL
저도 수염 기른 쪽이 더 나아 보여요. 제임스 맥어보이의 영화는 세 편을 보았는데 이번 영화가 가장 좋았어요. 엑스맨은 영화가 별로 제 취향이 아니었고, 톨스토이는 그럭저럭, 원티드는 배역이 좀 안 어울려서요.^^ㅎㅎㅎ 그래도 일년 사이에 꽤 각인이 된 배우여서 자꾸 주목하게 되네요.

BRINY 2011-07-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에도 나왔어요? 혹시 그 비서?? 반쯤 졸면서 보긴 했지만...

마노아 2011-07-07 18: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비서예요.^^ㅎㅎㅎ 전 옆자리 아주머니가 코골면서 자느라 시끄러워서 못 잤어요.ㅋㅋㅋ
 
풍산개 - Poongs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 남자가 있다. 휴전선을 넘나들며 영상편지와 유품 등을 배달하는 사내. 평양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해서 차디찬 강물을 맨 몸으로 건너고, 진흙으로 위장전술을 펴 감시병의 눈을 피하고, 마지막엔 철책을 장대로 뛰어넘어 3시간에 배달을 완료하는 남자다. 통 말을 하지 않는 사내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그가 진정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누구도 아는 바가 없다. 그는 다만 돈을 받고 물건을 배달하고, 가끔은 사람도 배달할 뿐이다.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유품으로 알고 배달한 물건이 북에서 유출시킨 문화재 밀수품이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잡힌 밀수업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풍산으로 통하는 배달부의 존재를 알렸고, 국정원에서는 그를 시험해 볼 기회를 만든다. 때마침 북한에서 망명한 (아마도 고위 공직자였을) 중년 사내가 평양에 두고 온 애인 인옥을 애타게 찾고 있었고, 배달부는 인옥을 평양에서부터 데리고 오는 임무를 맡게 된다. 

 

고작 3시간에 불과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자의 실수로 사이렌이 울렸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물속에 숨었다가 여자는 실신하기까지 했다. 인공호흡으로 겨우 살아난 여자는 마지막 철책 앞에서 긴장감을 잃고 장난을 쳤다가 사내의 노여움을 사기까지 했다. 혼자서 장대를 타고 철책을 넘는 사내. 여자, 하마터면 버려질 뻔했다.(영화의 진행이 있으니 설마 그럴 리야 없지만...) 

평양에서 서울까지 여자는 목숨을 걸고 건너왔지만 남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감시의 눈길들, 내내 돌아가는 촬영 카메라, 게다가 망명한 뒤부터 내내 암살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옛 애인은 이제 의부증을 보이듯 인옥을 괴롭힌다.  

한편 배달을 완료하고 돈을 받아야 했지만 국정원 요원들은 뒷통수를 쳤고, 수갑 풀고 도망친 풍산은 미수금을 받기 위해 인옥과 망명남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에게 고마움과 연민을 느끼는 인옥, 그런 인옥을 참을 수 없는 망명남의 배신으로 풍산은 국정원 요원들에게 사로잡힌다.  

영화에서 풍산은 남측에도, 그리고 북측에도 연이어 잡히고 고문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마다 제일 먼저 묻는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네 소속이, 네 정체성이, 네 마음이 어느 쪽에 있냐고 연신 묻는다. 그들은 확언이 필요했다.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가 해내고 있던 그 위험한 일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순수한 메신저라고 결코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필요할 때 이용하는 것이고, 내가 이용하지 못하면 제거하는 것 뿐이다. 그것은 남이든 북이든 똑같았다.  

영화는 중반까지 어느 정도 멜로 라인을 잡아 주었다. 불과 3시간이었지만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정도 들었을 것이고, 또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면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모습을 본 사람이니 인옥의 입장에서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다. 풍산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현재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 모른다면 모를까, 자신이 데리고 온 사람의 인생이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연민과 책임을 아니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소소한 부분들에서 웃게 해준다. 어린 아이를 운반할 때는 가벼워서 거뜬히 장대로 넘었지만, 성인 여자는 다르다. 몇 번이나 안아 보면서 무게를 가늠하는 이 무뚝뚝한 표정의 사내를 보면서 관객은 한숨이 나왔다. 저렇게 중요한 순간에 걸핏하면 잘 달리지 못하고 넘어지는 여자라고 한심하다 손가락질을 하지만, 저런 위급한 순간에 번쩍 들어올릴 만큼 가볍지 못하면 총알받이가 되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120분 내내 남자 주인공은 대사가 없다. 그는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소리는 내도 말은 하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는 그가 말을 하면 남측 사람인지 북측 사람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것 뿐 아니더라도 영화의 의미상 그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배우는 연기하기 답답했겠지만, 목소리 없이도 그는 몸으로 하는 연기를 묵묵히 수행해 나갔다.(운동도 많이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 서로에게 서로밖에 없던 젊은 남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말이 아니라 몸짓이었을 것이다.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아서 서로에게 전달하는 것. 그 짧은 시간에 그것 말고 또 무엇을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을까. 

 

남자는 곧잘 담배를 피웠다. 답답해지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 그는 담배를 물었다. 그의 이름이 되어준 풍산개 담배. 

담배를 얼마나 깊고 진하게 피우던지 전혀 담배를 피지 않는 나도 맛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얘기일 테지. 

아마도 실제로 남쪽에 잠입해 있는 간첩들이 꽤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에도 그럴 테고... 

그럴 경우, 남쪽에 있는 공작원들이 더 정신적으로 유혹을 느끼지 싶다. 견물생심! 

영화에서도 그랬다. 다이아 목걸이와 반지 앞에서 그들이 보인 행태라니...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극단적인 비극과 해학을 겸해버린다. 그 심각한 상황에서 보여주는 냉소와 블랙 유머는 지구 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를 잘 대변해 준다.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든 버릴 수 있는 자들. 그게 한 핏줄을 이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1대1로 대면할 용기도 없고, 일촉즉발의 수류탄 위로 내 몸을 던져 부하를 살릴 마음도 없고, 함께 살기 위해 동시에 무기를 버리는 모습도 가질 수 없다. 입으로는 무슨 약속을 못하며, 무슨 다짐인들 못할까.  

반드시 필요한 통일, 당위성으로는 어떤 걸로도 뒤지지 않는 통일인데, 그 당연한 통일이 말로는 얼마나 낭만적이던가.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무섭고 서글프다. 과연 우리는 통일된 조국에서 살아갈 자격은 있는 것인지 의문까지 느껴진다. 진정 통일된 땅에서 살아야 할 이산가족들은 아무 결정권도 없는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저 위의 사람들에게서 진정 어린 통일의 자세가 있는 것인지 재차 묻고 싶어진다.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제작을 맡았고, 그의 제자 전재홍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전 출연진이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는데, 영화는 상업영화로도 성공할 만큼 매우 훌륭했다. 다만, 감정의 조각들이 아프게 박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김기덕 감독이 언제 관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 적이 있던가. 너무 날카롭고 직설적이어서 늘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인정하게 되는 그만의 매력은 분명히 있다.  

덧)배우 윤계상은 아이돌 가수 출신이어서 좋은 연기를 펼쳐도 본전을 못 찾곤 했는데, 이제 그에게선 완연히 배우의 향기가 난다. 노래하던 그가 이젠 전혀 아쉽지 않다. 김규리는 이제 바뀐 이름 '김규리'도 어느새 익숙해져 간다. 습관이 놀랍다.   

인상 깊었던 마지막 씬은 테르미도르의 유제니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더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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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풍산개
    from 별다방 2.0 2011-07-11 11:55 
    재미있지만, 뭔가 아주 불편한... 김기덕 감독은 사람의 오감을 아주 잔인하게 자극하는 감독이다. 사실적인 화면 묘사로 영화의 주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스타일의 감독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는 지극히 그의 스타일이다. 그리고 김기덕 보다는 대중적으로 김기덕 스러운 영화를 만들어 낸 전재홍은 좋은 감독이다. 영화는 재미있다. 적당한 곳에서 적절하게 '개그'를 넣어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무려 주인..
 
 
블루데이지 2011-07-01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남북분단..이 단어만으로는 도저히 관심이 안생기던 풍산개!
마노아님의 글을 읽으니 이제 좀 워~워~ 진정이 되네요!!
김기덕님의 영화는 사실 제 취향이 좀 아니더라구요^^ (저 또한 그분 취향이 아니시겠지만요..ㅋㅋ)
이번영화는 그분의 영화치고는 상업적인 냄새가 좀 풍기는 영화인것 같아서...그나마 휴^^
글 잘봤습니다!! 대사없는 남주의 연기가 궁금해집니다...

마노아 2011-07-01 18:20   좋아요 0 | URL
김기덕 이름 석자가 너무 세죠.^^;;;
아무래도 감독은 다른 분인지라 기존 김기덕 영화만큼은 불편하지 않아요.
영화가 불편했던 것은 부끄러움 때문인 것 같아요.
막판에 가면 그 조롱이 참 낯 뜨거웠거든요.
대사 없이 연기하던 분들이 매번 상을 탔던 것도 같은데 윤계상도 기대해 봄직해요.^^

2011-07-01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하(紫霞) 2011-07-0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윤계상이었습니까?
놀랐습니다!

마노아 2011-07-01 18:21   좋아요 0 | URL
이 영화와 최고의 사랑을 비교하니 너무 대조적이지 뭡니가.^^ㅎㅎㅎ

프레이야 2011-07-0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어떤 사람은 저게 말이 되냐고 했지만
전 너무 좋았어요. 뭔가 할말이 너무 많이 떠오르는 영화였지만
역시 풍산처럼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은 영화이기도 해요, 제겐.
그래도 리뷰는 곧 쓰게 될 거 같아요.ㅎㅎ
적나라한 대사들 너무 와닿던걸요.^^
그리고 윤계상도 김규리도 최고였어요.
마노아님, 좋은하루!!

마노아 2011-07-01 18:22   좋아요 0 | URL
별 넷과 별 다섯 사이를 잠시 방황했는데 프레이야님도 좋다고 하시니 저도 흔쾌히 별 다섯이에요.^^
7월에도 미션 수행 계속 하시나요?
프레이야님의 영화 리뷰는 늘 풍성해요.
주말 즐겁게 보내셔요.^^

2011-07-01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rrow 2011-07-1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얼리즘으로 보면 이해도 안되고 재미도 없는 영화죠.

풍자 라고 본다면.. 아주 즐겁게 볼 수 있었는데 말이죠..

불편한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트랙백 남겼습니다..

마노아 2011-07-11 18:03   좋아요 0 | URL
풍자라고 생각해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웃다가도 슬퍼서 울고 싶어지더라구요.
김기덕스러운 불편한 영화, 분명했어요.
sorrow님의 리뷰도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