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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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 크리스마스 날 아침, 도쿄의 조토 제3중학교 교정에서 2학년 남학생이 시신으로 발견된다. 경찰과 유가족은 죽은 학생 다쿠야의 사인을 자살로 결론 짓는다. 다쿠야는 이미 한달 간 등교 거부를 하던 중이었고, 부모는 아이가 우울해 하고 있었으며 평소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위태로워 보였다고 고백했다. 다쿠야가 학교에 다니던 때에 교내 불량배 학생 3인조와 마찰이 있었지만, 그것이 아이의 죽음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사건은 정리되는 듯했는데, 뜻밖에도 그 불량배 학생들이 다쿠야를 옥상에서 미는 것을 보았다는 고발장이 날아온다. 하나는 교장선생님께,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경찰인 다쿠야의 같은 반 여학생에게, 또 하나는 담임 선생님께.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 교장 선생님과 경찰 측은 고발장의 내용은 신뢰하지 않았지만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다쿠야의 학급 학생들 위주로 조토 제3중학교 학생들과 면담 시간을 갖는다. 경찰과 학교 측에서는 고발장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윤곽을 잡아내고 결정적인 심증도 갖고 있지만, 어린 학생인지라 이걸 표면화시키지 않고 수습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담임선생님께 보냈던 마지막 고발장이 문제가 되어서 미디어까지 가세하고,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고 제2, 제3의 희생자를 내면서 학교 전체에 검은 오로라를 덮어 버렸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사건이 아주 천천히 진행된다. 시신의 첫 발견자가 보냈던 크리스마스, 학생이 죽은 뒤 찾아온 학교의 혼란, 학부모들의 항의, 학교측의 대응,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고민과 그것에 대한 나름의 해법이 불러온 더 끔찍한 사태 등등... 사건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면서 더 크게, 역시 천천히 확장하면서 그 외연을 넓혀버렸다. 진행이 느린 탓에 700여 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직장에 두고서 조금씩 읽다 보니 다 읽는 데에도 무척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생각해 보면 모방범이나 이유도 이렇게 힘들게 읽었다. 가장 화끈하게, 가장 뜨겁게, 그리고 가장 급하게 읽어내려간 것은 처음 만났던 '화차'였다. 그때만큼의 격한 울렁임은 줄었지만 여전히 미미 여사의 내공은 무시할 수가 없어서, 캐릭터가 하나 등장할 때마다, 그 캐릭터의 심연을 들여볼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자아낸다. 작가가 이토록 정교하게 그물을 짜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급해지는 마음만 좀 달래놓는다면 이 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혹은 질러가며 이야기 속에 풍덩 빠지는 재미가 매우 크다. 


내가 아직 1권밖에 읽지 못한 관계로 다쿠야가 정말로 자살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쿠야의 가족, 특히 다쿠야 덕분에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던 형이 밝히는 에피소드를 보면 자살로 보인다. 이 어마무지하게 냉혹하고 독점력 강한 소년이 자신의 몸을 던져서 사람들에게 주었던 각인과 상처를 생각하면 그는 거의 천재적인 두뇌를 타고난 게 아닐까 싶다. 


형에게 맞은 뺨이 부어오르고, 세면실 바닥에 웅크려 앉은 그의 찢어진 입술에선 피가 흘렀지만, 그럼에도 사실 그는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고, 두려움에 떨고, 울부짖고, 슬퍼하는 얼굴 바로 아래 그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형을 바라보는 눈에 그 냉혹함이 깃들어 있었다.

발버둥쳐봐야 소용없어. 내가 이겼으니까.

형이 진 거야.

히로유키는 깨달았다.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 진실. 그가 설마설마하며 물러서고, 시선을 피하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자라도록 거들어버린 끔찍한 것.

이것이 녀석의 본성이다. -132쪽


몸이 약한 탓에 더 품안의 자식으로 싸고 돌던 다쿠야가 죽었으니 그 엄마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는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엄마가 보여주는 병적인 집착은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다쿠야가 아낀 러그를 그 방에 들어온 형이 밟았다고 적개심을 갖는 엄마라니! 심지어 아이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의혹을 갖게 되자 그 형한테 네가 죽인 건 아니지? 라고 묻는 엄마라니! 아, 이런 것도 엄마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심정이었다. 막장 부모는 다쿠야에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불량배 3인조의 우두머리 격인 오이데의 아버지는 어떠했던가. 많은 재산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협박하고 회유하고 윽박지르는 행태가 아주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막장 학생의 뒤에는 언제나 막장 학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달까. 


반면 이상적인 부모님도 계셨다. 학급의 반장을 맡은 료코의 아빠는 형사, 엄마는 부동산 감정사다. 두분 모두 바쁜 직장생활을 보내지만 한참 예민할 나이의 큰딸과, 사고뭉치 어린 여동생들에게 보여주는 다정함이 참 보기 좋았다. 열다섯이면 아직은 어리다고 보기에 충분할 텐데(게다가 이 작품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이니!)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을 내릴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는 신뢰의 부모님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이의 선택권은 보장해주되 외부의 위험으로부터는 철적히 지켜주려는 본능도 잊지 않는다. 


마쓰코의 부모님도 그랬다. 뚱뚱한 탓에 오이데 패거리는 물론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괴롭힘을 당해 다이어트를 결심한 딸 아이에게 부모님이 전해주는 충고는 따스하고 믿음직했다. 


살을 빼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더없이 진지하게 마쓰코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아빠는 슬퍼보였다. 둘 다 마쓰코가 다이어트를 한다면 기꺼이 거들겠다고 약속했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올 줄 알았다면서.

그리고 이런 말도 해주었다.

-하지만 마쓰코, 네가 살을 빼든 안 빼든 오이데와 이구치의 그런 행동은 잘못된 거야.

-네가 단지 그 두 사람에게 놀림받기 싫어서 살을 빼고 싶은 거라면 그것도 잘못이야.

-너는, 적어도 네 일에 대해서는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해.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기준으로 뭔가를 결정하면 안 돼. -578쪽


이런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마쓰코는 건강한 아이로 자랐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한 기운을 나눠줄 수 있는 씨앗을 스스로 제 안에 심어버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마쓰코의 따뜻함과 사랑스러움을 이용하는 아이도 있었다. 미야케 주리. 안쓰러움을 느낄 만큼 심한 여드름 때문에 아이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건만, 무심하고 이기적인 부모들은 아이의 고민을 진지하게 여기지도 않고, 조금의 부지런함을 떨어 아이의 상태를 개선시켜 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이기적인 부모 아래에서 이기적인 주리가 나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다. 착한 친구를 자신의 아래로 깔보고, 그 아이의 선함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채우려고 하고, 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도 죄책감마저 갖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폭력을 휘두르는 오이데 패거리도 위험하고 나쁘지만, 미야케 주리가 보여주는 폭력성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아찔한 위험을 동반한다. 또한 '말'이 가진 그 아득한 위험성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언론은 어떻던가. 모기 기자는 학교의 부당한 사후처리와 태도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여러 차례 이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잘못 짚었다. 그가 단두대에 올려서 가차 없이 머리를 치게 한 쓰자키 교장 선생님은 진심으로 학생들을 위해주는 분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위치한 아이들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첫째도 둘째도 학생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교육자였다. 그러나 그가 언론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제기한 의혹은 학교를 더 위험하게 만들었고, 더 큰 구덩이로 밀어붙이는 역할을 했다. 그걸 제대로 간파하고 휘둘리지 않으려고 정면도전한 료코의 반격이 1권의 끝을 장식했는데 무척 짜릿한 쾌감을 주기까지 했다. 역시 똑부러지구나, 료코!


당신은 단 일 초도 우리 편이 되어준 적 없어요. 우리에게, 우리 학교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긴 해요?”

말을 할수록 몸이 떨렸다. 료코는 그 떨림을 억누르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모기 씨가 우리 마음을 알 리 없어요. 미야케의 마음도, 아사이의 마음도, 하시다의 마음도 전혀 몰라요. 그저 우리 모두를 이용해 자기한테 유리한 이야기를 만들고, 자기가 싸우고 싶어서 안달난 적과 싸울 무기로 삼으려는 것뿐이잖아요!” -690쪽


지나치게 예민하고 그래서 몸이 약한 엄마를 둔 노다 겐이치의 이야기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가족이 건강하지 못한 것도 아이를 불안하게 만든다. 당연하다. 부모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자꾸 뒤흔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한 아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할 때의 긴장감이 어마어마했다. 아이가 맞닥뜨린, 아이가 선을 넘겨서 목격하고 만 자신의 또 다른 얼굴에 얼마나 절망했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본의아니게 웃자란 아이들,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미 그 마음에는 비정상적으로 자라버린 마음이 불안하게 자리한 애처로운 아이들을 부모가 만들어 낸다. '부모'라는 존재가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산이며 하늘로 존재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담임 교사 모리우치라는 캐릭터도 할 말이 참 많다. 이 여자의 위선과 무책임함은 진절머리가 나지만, 그래도 그녀가 당한 억울함에는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찬물을 씌운 인물의 부당한 복수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이 누구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누가 미운지에 대한 표적을 잘못 세운 인물 덕분에 사건은 이렇게 커지고 말았다. 정작 자신은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고, 피해를 입은 모리우치와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모든 사람이 이 엉뚱한 판 위에서 제 의사와 상관없이 춤을 추고 있다. 애처로울 지경이다.


자, 이제 사건은 던져졌고, 배경 설명도 모두 끝마친 셈이다. 작가는 이렇게 커다란 판을 벌려놓고, 이제는 마치 자신이 창조해낸 주인공더러 알아서 뒷 이야기를 꾸려보라고 뒷짐지고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 작가의 창조물들은 엄청난 불행 속에 풍덩 빠져버렸고, 이제는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입시를 앞두고 있어 시간도 없고 마음도 급하고, 죽은 아이는 나랑 친하지도 않았고, 여러모로 이 모든 것에서 이제는 발을 빼고 잊고 싶었지만, 줄을 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이들의 발목을 자꾸 잡는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간접적으로는 이 모든 사건들의 당사자이기도 한 아이들의 손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숙명처럼 되어버렸다. 피할 수 없으니 바지 걷고 뛰어들게 된 것이다. 


해가 바뀌어 이제 겨우 열여섯. 아직도 많이 어린 이 아이들이 이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 갈지, 어떤 방식으로 진실을 향해 다가갈지 기대가 되고 염려도 된다. 그래도 미미 여사니까, 이 아이들을 가볍게 보지 못하게 한다. 어려도 진실을 알아보는 눈이 분명 이들에게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런 마음으로 아직도 한참 남은 뒷이야기를 겁먹지 말고 시작해보련다. 손목은 좀 아프겠지만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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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2-2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연말 잘 마무리하고 계세요? 한 해 수고하셨어요. 고마워요^^

마노아 2013-12-22 23:1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반가워요!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어요. 한해의 마무리가 벅차네요.
한숨 돌리고 차분히 시간 보내야겠어요. 프레이야님 올 한해도 고마웠어요. ^^

2013-12-2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2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5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12-25 14:14   좋아요 0 | URL
네네, 우리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오월의 달리기 푸른숲 역사 동화 7
김해원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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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이라고 늘 찬사받기 일쑤였던 '오월'이 핏빛으로 기억되는 것은 광주의 학살 흔적 때문이었다. 오월의 달리기라는, 운동회를 연상시킬 법도 한 이 책의 제목에서도 서늘함을 느꼈던 것도 바로 책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광주였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아버지를 둔 명수는 뜀박질을 잘해서 할머니의 자랑거리였고 아버지의 한풀이를 해주는 아들이었다. 전국소년체전 전남 대표 달리기 선수로 뽑힌 명수는 '다크호스'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멋진 거라고, 명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합숙소에서 운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 지쳐서 다른 무언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호기심 많고 장난끼 많은 악동들이 몰려 있으니 사단이 아니 날 수가 없다. 몰래 만화책 빌려오기 내기를 하다가 코치님께 딱! 걸려서 단체를 벌을 서기도 했던 아이들. 명수는 자기보다 앞서 달려 결승선을 통과했고, 이후로도 내내 자기를 앞지르는 황정태를 이기는 게 목표였다. 어린이다운 목표이자 나름의 꿈이었다. 라이벌을 이기고, 만화책을 마음껏 빌려 보고, 군것질도 좀 하는... 딱 그만큼의 목표를 이루고 싶던 아이들 앞에 1980년의 광주는 그야말로 지옥의 문이었다.



작품은 광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단지 그 학살의 순간의 끔찍함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이들 각자가 갖고 있는 내면의 목소리를 끄집어 내었는데, 명수가 시장에서 불편한 다리 때문에 망신을 당한 아버지를 외면했던 부분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머지 않아 아빠를 잃게 될 이 아이가 그때 아버지를 외면했던 자신의 죄책감을 어떻게 견디며 살지 암담했기 때문이다. 



합숙소 6호 방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어서 시내로 나갔던 날이 시작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군인들이 시민들을 구타했고 죄없는 학생들이 군홧발에 사정 없이 짓밟혔다.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고,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끔찍한 일들이 눈앞에서 재현되었을 때 아이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나가 아까부텀 생각혔는디, 아무래도 저 군인들은 우리나라 군인이 아닌갑다. 북한 김일성이가 보낸 인민군이 분명허당께. 우리나라 군인이믄 한나라 사람을 복날 개 잡드끼 두들겨 패겄냐?"
진규가 몸서리를 쳤다. 명수는 뒤를 돌아봤다. 광주천 건너 멀리 한 무리의 군인들이 뛰어가는 게 보였다. 그라믄 우리나라 군인들은 워디 있는 겨? -96쪽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자국민 지키라고 가 있는 군대에서, 그 국민들 세금으로 만든 총 들고서 자국민을 해칠 수 있을까.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혼란스럽고 두렵고 무서웠다. 이런 와중에 작가님은 잠시 쉬어갈 틈을 주시니, 이런 문장은 웃으면서 웃게 만든다.


"니들은 내 비밀을 알믄 깜짝 놀랄 거신디?"
진규 말에 셋 모두 윗몸을 일으키며 그게 뭐냐고 물었다.
"긍께 그기...... 나는 로보트여. 인조인간 로보트 마징가 제트 맹키로. 팔이 무쇠라 던지기 선수가 된 거랑께."
진규의 터무니없는 말에 셋은 어이없어 하면서 도로 자리에 누웠다. 진규는 다리까지 무쇠였으면 저기 밖에 있는 악당들을 다 물릴칠 텐데, 아쉽게도 박사님이 다리를 빼먹었다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랑께 군인들이 악당인 거여라?"
성일이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제. 만화서 보믄 나쁜 로보트를 조종허는 진짜 악당은 뒤에 숨어 있잖여. 군인들은 악당헌티 조종당허는 로보트인거제."


미국에서 월남 전에 파병되었던 군인들이 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많이 앓고 자살도 많이 했다는 글을 보았다. 우리나라 가스통 할배들 중에도 파월 군인이 많을 터인데, 그 후유증의 한 반동이 아닐까도 싶다.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럴진대, 자국민을 상대로 그랬다면 그 폭풍은 더 심하지 않을까? 그 의문과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 더더욱 상대방은 빨갱이가 되어야 하고 종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아닐까? 


명수는 나주 출신이었다. 이렇게 위험할 때에 아버지가 합숙소로 아이를 데리러 오신다고 했다. 길이 막혀서 접근하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버지는 기어이 광주 시내로 들어오셔쏙, 그 바람에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불편한 다리로 시계를 고치며 열심히 사셨던 아버지, 시장 바닥에서 넘어져서 빨간 사과와 함께 뒹굴었던 아버지, 무뚝뚝하시지만 대회 나갈 아들을 위해서 제일 좋은 운동화를 사주셨던 그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어머니를, 또 아들을 딸을 잃은 사람이 그곳에 얼마나 많았던가. 아직도 그치지 않는 눈물을 가슴에 품은 채 살고 계신 많은 분들이......


여기까지는 이 책의 배경을 알면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은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간다. 그곳에서 사람 냄새 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하여 사죄하기 위해서 발품을 팔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서럽고 고통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자그마한 희망 한줄기, 옅은 미소 한자락 지을 수 있게 만드는 마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님의 이름을 눈여겨 보게 된다. 이렇게 뭉클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님은 꼭 기억해 둬야지...


광주에서 이리 참혹한 짓을 저질러 놓고, 정부는 태연하게 전국 체전을 열었다. 3S정책이 실감난다. 그게 33년 전에만 그랬을까? 지금은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광주의 슬픈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어린이 친구들에게는 간략한 정리 목록이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26년'이나 '화려한 휴가'를 같이 보면 좋겠다. 잔혹한 내용이 있으니 어른과 같이 시청하거나 읽으면 좋겠다. 의외로 차분히 일러주면 아이들은 귀를 기울이고 또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으로 이해를 한다. 



민중 항쟁의 역사와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도 정리해 주었다. 진지한 눈으로 들여다 본다면 더 깊은 이해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소중함도 함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 지도... 그 소중하고 귀한 기회와 가치에 대해서 차분하게 이야기 해보자. 아이들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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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12-08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계절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열일곱 살의 털>과 <우리는 가족입니까>를 쓴 김해원 작가, 나도 주목하고 있어요.
오월에 출간되자마가 사서 읽었는데 리뷰는 못 썼어요.ㅠ

마노아 2013-12-08 23:35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보고 나니 말씀하신 책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요. 작가님 이름을 기억해야겠어요. 롱런하실 분 같아요.
이 책 저도 그쯤 산것 같은데 한참 뒤에 읽었네요. 오월에 읽었다면 더 뜨겁고 더 벅찼을 것 같아요.ㅜㅜ
 
파리의 노트르담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4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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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파리와 노트르담 성당, 고딕양식과 건축, 철학... 이런 분야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아주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 지루함에 거름을 준 것은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 번역 때문이었다. 사실 훨씬 재밌게 읽은 2권에서도 별을 다섯 개 줄까 말까 잠시 망설였던 것은 번역 때문이다. 지나치게 옛날 말, 지금은 쓰지 않는, 국어사전 찾아봐야 되는 말들이 등장하는 것은 둘째 치고, 문장도 무척 어색하게 들린다. 입말도 아니요, 문어체도 아니요, 이 어정쩡한 조합들에 민음사 책을 고른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아무튼, 그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2권은 무척 재밌게 읽었다. 아무래도 보다 인물 중심이고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어서 그런가 보다. 


1권에서 군인 페뷔스와 사랑에 빠진 이집트 아가씨 에스메랄다는,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린 프롤로 신부가 저지른 살인 미수의 누명을 쓰고 위기에 빠졌다. 잔혹한 고문에 바로 짓지도 않은 죄를 인정한 에스메랄다는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페뷔스는 약혼녀에게로 돌아간다. 약혼녀의 집에서, 식도 올리기 전에 그녀의 육체를 먼저 탐하려던 이 젊은 군인은 광장에서 벌어지려고 하는 에스메랄다의 처형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 몹쓸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외도가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을 뿐이다. 죽을 뻔한 에스메랄다를 구한 것은 노트르담의 종지기, 꼽추 콰지모도였다. 그가 여자를 처형장에서 구출해 내는 장면은 좀 설득력이 없었지만, 아무튼 그는 에스메랄다에게는 구원의 존재였다. 그녀는 그 고마움을 그다지 알지 못한 것 같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프롤로였다. 이 똑똑한 신부는 이제까지 종교와 학문과 명예의 전당에서만 살았다. 그가 살아온 세상을 한순간에 버리게 한 것은 에스메랄다,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한순간의 욕망의 화신으로 돌변한 이 부주교는 그녀가 사랑한 남자를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서 그 죄를 그녀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래놓고는 그녀에게 목숨을 구해줄 테니 자신의 여자가 되라고까지 한다. 이 놀랍도록 뻔뻔하고 근거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심지어 그는 콰지모도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자신의 양아들을 질투한다. 외모상으로 흠없는 페뷔스에 비하면 귀머거리에 애꾸눈에 절름발이에 꼽추이기까지 한 콰지모도는 연적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그였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또 그의 오만함과 교만함에 비추어 보아 그가 기분 나빠했음은 물론이다. 


콰지모도에게만 그랬던 건 아니다. 거리의 음유시인 그랭구아르에게도 비슷하게 접근했다. 거지패들에 의해서 에스메랄다의 남편이 되어버린 그랭구아르에게는 그의 가난함을 들어서 찍어누르려고 했던 프롤로. 그러나 그랭구아르는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했다. 그 당당함이 프롤로를 더 역정나게 했을 것이다. 


이 뻔뻔한 사내는 그랭구아루에게 여장을 한 채로 에스메랄다 대신 죽으라고 한다.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자 어쩌면 이렇게 배은망덕하냐고 욕을 하기까지 한다. 하하핫, 이 양반 정신분열증이 심하군!


"그 여자가 없었더라면 자네가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 자네는 그 여자가 죽기를 바라나, 자네게 살아 있는 건 그 여자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여자가, 그 아름답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그 여자가, 이 세상의 광명에 필요한 그 여자가, 하느님보다도 더 거룩한 그 여자가 말이다! 그러는 반면 자네는, 반은 현명하고 반은 미치광이 같은 자네는, 어떤 것이 되다 만 자네는, 스스로 걷고 있는 줄 알고 생각하고 있는 줄 아는 초목 같은 존재인 자네는, 그 여자한테서 훔친, 대낮의 촛불같이 무용한 목숨을 가지고 계속 살고 말이다!" -298쪽


신부의 위치에서 하느님보다 더 거룩한 존재라고 떠받든 에스메랄다에게 프롤로는 어떻게 했는가. 내것이 될 수 없다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는 게 그의 논리다. 이렇게 파괴적이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성직자였다. 임금은 또 어떻던가? 어리석은 군주는 신하의 혓바닥 위에서 놀아났고, 신하는 군중들의 의도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전달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한다. 에스메랄다의 친모는 어떠했던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잃어버린 아이가 그녀인줄도 모르고, 그녀가 죽음에 이르도록 잡아두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 얄궂고도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라니!


에스메랄다는 아름다웠고, 착했지만 현명하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찾아온 단 한번의 구원의 기회를 망나니라는 이름도 아까운 페뷔스의 이름을 부르다가 날려버렸다. 안타까운 여심이여!


작품의 마무리가 여운이 있었다. 콰지모도가 죽음으로써 완성한 사랑이, 그 흔적이 애잔했다. 


얼마 전에 과천에서  진행하는 어린이 뮤지컬 '노틀담의 꼽추' 광고를 보았다. 콰지모도가 프롤로의 명을 받고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려고 한 원작의 내용을, 납치 당할 뻔한 에스메랄다를 콰지모도가 구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흠, 이건 아니잖아. 내용을 축약해도 이렇게 왜곡하는 것은 곤란하지! 


1권을 워낙 건성으로 읽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 책으로 다시 읽지는 못하겠다. 혹여 시간이 더 흘러서 다시 이 작품을 찾는다면 그때는 다른 사람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음반 예약 판매 소식을 들었는데 금세 품절로 바뀌었다. 다시 풀렸는지 확인하고 주문해야겠다. 문학과 음악이 만나면 이렇게 좋은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 반갑다 노트르담, 반갑다 콰지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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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3-11-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 뮤지컬, 아니 그런 과감한 왜곡이라니! 웃음이 나는군요;;;

나는 이런 명작 참 못 읽는데, 마노아님 글 읽으니까 이거 좀 읽어야 하나 싶네요. 우앙. 빅토르 위고라니. 나한텐 너무 장엄하잖아.

마노아 2013-11-08 23:33   좋아요 0 | URL
그 아이들이 나중에 원전을 읽게 되면 배신감을 느낄 거예요.ㅎㅎㅎ
저도 빅토르 위고 완역판은 이게 처음 같아요. 어릴 때 읽은 주니어판 장발장 이후로요.
레미제라블은 사두고서 열어보질 못했네요. 너무 길어서 좀처럼 엄두가 안 나는 것 있죠.
이 책은 뮤지컬 보러 가기 전에 부랴부랴 읽느라 1권은 대충 읽고, 2권은 뮤지컬 보고 나서 보았어요.하하핫^^
 
무슈 린의 아기
필립 클로델 지음, 정혜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무척 잔잔하게 시작한 소설이었다. 전쟁이 났고, 그래서 난민이 되어 이방인의 자격으로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 무슈 린. 어린 손녀딸을 품에 꼭 안고서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남은 것처럼 행동하는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다. 그가 떠나온 나라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도착한 나라는 프랑스로 보인다. 그가 겨우 배운 한마디 인사가 불어였으니까. 


등장인물도 얼마 나오지 않는다. 그가 산책길에 매일 마주친 한 남자가 어느새 친구가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벗이 되었다. 담배를 피우는 친구를 위해서 합숙소에서 얻은 담배를 모아두는 무슈 린. 그 담배를 전해 받고 가슴이 벅차올라 감동을 어쩌지 못한 바르크 씨. 그리고 무슈 린의 과보호 속에서 안전하게 지켜지는 손녀 상디유와, 사람들의 무관심과 조소 등이 간간이 양념처럼 뿌려졌다. 


합숙소에서 처소가 옮겨졌는데, 그곳은 수용소나 혹은 병원의 성격이 강했다. 말도 통하지 않아서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무슈 린은 친구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시설을 탈출하는 모험을 강행했고, 지금도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울 바르크 씨를 만나기 위해 사막을 걷듯 도심을 가로지른다.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이면서 도달하는 그 여정이 안타깝게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된 친구,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무슈 린의 진실. 


이 책의 제목이 왜 무슈 린의 '아기'인지 궁금했다. 작품의 말미에 가서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 소리가 나오면서 더 큰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이렇게 쓸쓸하고, 이렇게 허무하고, 이렇게 아픈 진실이라니...... 


무슈 린의 머리는 피로와 고통에 절고 환멸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많은 혼란과 너무 잦은 떠남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산다는 게 무언가? 자신이 살면서 받은 상처들을 목걸이처럼 엮어 차고 다니는 게 인생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점점 약해지고 상처받기만 하는데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도 이미 충분히 힘겹건만 어째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 힘들고 쓰라려야 한단 말인가? -118쪽


길지 않은 내용의 소설인데, 명확하지 않고 뜬구름 잡듯 몽환적이면서 희미한 느낌의 글인데도 여운이 깊었다. 인용한 글에서처럼 무슈 린이 느끼는 피곤함과 혼란이 잘 전해졌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두 남자의 우정은 아름다웠으며, 그렇게 빗나가면서도 서로를 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소통이 근사했다. 작품의 느낌을 잘 살린 번역도 훌륭했다. 필립 클로델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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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김성민 글, 이태진.조동성 글 / IWELL(아이웰)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죄한다. 


제목이 주는 섬뜩함이 있었다. 안중근이 죽인 이토히로부미가 안중근을 쏘았다? 호감이 갈 법하다. 

이 책은 굉장히 짧은 역사소설이다. 폰트도 아주 커서 15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는 죽었고, 안중근도 사형 당했다. 그는 나라 잃은 조국에 큰 획을 그으며 영웅의 이름으로 잠들었지만 남겨진 가족의 생은 분명 서러웠을 것이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아들 못지 않게 담대하시고 큰 배포를 가지셨지만, 안중근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도 그럴 수 있었을까? 큰 아들은 일곱살 어린 나이에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어버렸다. 낯선 사람이 준 과자였다. 배고팠던 아이가 허겁지겁 삼켰을 과자에 발라져 있던 독. 끔찍하다. 그러니 그 어미가, 남은 아들과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책은 바로 그 둘째 아들 준생의 힘겨운 성장과정을 극화시켜서 독자에게 보여주었다. 심지어 임시정부가 습격을 당할 때 안중근의 유가족을 챙기지 못해서 김구 선생이 진노한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어쩌면 준생은 버림 받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민족의 영웅이고 조국의 영웅이지만, 그에게는 처자식을 버린 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가 모진 세월을 견디면서 아버지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이토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하며 전국을 순회한 일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의 행위는 아버지를 배신한 것뿐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행위였다. 한 사람이 견디기에는 가혹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장준하 선생님의 아들 장호권 씨의 인터뷰를 보면 민족의 큰 발자국을 남긴 거대한 아버지를 둔 아들의 비애가 잘 느껴졌다. 가족은 돌보지 못하고 조국과 민족만 생각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비명에 가시고 남겨진 가족도 테러를 당하며 험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서 원망이 드는 것과 별개로 인간 장준하를 존경했다. 아버지가 남긴 족적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며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안준생도 그래야 했다. 그게 쉬운 일도 아니고, 당장 입에 풀칠하며 살기도 어려울 때에 보통의 결심과 각오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역시... 이건 아니었다. 호부 아래 견자가 나온 꼴이니... 아버지는 물론 그에게도, 또 나라 전체에도 비극적인 행보였다. 


이 책은 안준생의 입장을 많이 옹호하는 느낌으로 쓰여졌다. 역사 소설이라고 이미 밝혔지만, 안준생의 입장에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한 것은 아닌지, 다소 위험하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이게 다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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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7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10-08 23:09   좋아요 0 | URL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고 30년 뒤의 일이었어요.
제가 어제 몰아서 급하게 쓰다 보니 너무 생략을 많이 했네요.
집에 가서 조금 더 보충해서 써야겠어요.
안준생은 안중근의 아들이에요. ㅜㅜ

2013-10-08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10-08 23:09   좋아요 0 | URL
앞에는 준생이라 쓰고 뒤에는 중생이라 썼네요. 오타예요. 수정했어요.^^;;;;

아무개 2013-10-0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중생이 실제로 사과한거 였어요? 헐...저는 소설속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네요.
이래서 어설픈 정보가 더 나쁘다는 ㅜ..ㅜ

잘지내시죠?
날씨가 쌀쌀해지니 여기저기 감기 바이러스들이 난리난리입니다.
감기조심~~ ^^

마노아 2013-10-07 13:21   좋아요 0 | URL
부끄러우니까 사실은 잘 언급이 안 되죠.
뭐, 윤봉길의 손녀도 지금 새누리당에 가 있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최필립 정수장학회 전 이사장의 아버지도 독립운동가였죠. 하하핫...ㅜㅜ

어제는 태풍이 오려는지 바람이 엄청 거셌는데 오늘은 바람이 별로 안 부네요.
추울 줄 알았는데 은근 덥구요. 이런 날씨가 감기 걸리기 정말 좋죠.
우리 건강 유의하고 완연한 가을날에 만나요. 낙엽 좀 밟아 봅시다.^^

transient-guest 2013-10-0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운동 한 분들이 해방 후에 자식들은 독립운동 시키지 말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죠. 기억도 희미한 아버지보다는 당장의 밥이 더 급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더구나 이런(?) 일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매우 교묘하게 당위성을 조작하니까요.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입니다. 친일청산은 커녕 정치, 사회, 경제, 언론, 등등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다양하고 많은 분야에서 상위자리를 차지한 것은 친일 매국노와 그 후손들이잖아요. 속상하네요.

마노아 2013-10-08 15:1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은요, 다시 우리나라가 식민지배와 같은 국난을 당하면 두팔 걷어부치고 독립운동할 수 있을 것인가 묻게 되어요. 이 꼬라지를 보면 말이지요. 한숨 나와요... 정말 속상하네요.ㅜ.ㅜ

maestroX 2013-10-1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아들이 독살당할 때 나이가 7세 였다면 안준생씨는 다 어렸겠죠. 당시 힘없는 사람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너무 호되게 나무라지 마시길... 당신이라도 별 수 없었을겁니다^^ 이러쿵 저러쿵 논하는 것도 안증근 의사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마노아 2013-10-12 22:37   좋아요 0 | URL
7세보다 더 어렸을 나이의 안중생 씨를 얘기하는 게 아니니까요.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었다-로 마무리 짓기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오죽하면 안준생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가 호부견자일까요. 안중근이란 빛을 얘기하면서 안준생이라는 그림자도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쉬쉬하는 게 더 욕되게 하는 것 아닐까요.

maestroX 2013-10-13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은 부모에게서부터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난 환경도 그 이상 중요합니다. '호부견자'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아버지와 아들을 대조하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결국 안준생씨를 만든 안중근 의사나 그를 돌보지 못한 우리 사회의 과거 모습을 탓하는 것이 됩니다. 당시 손가락질을 받는 반 고아를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마노아 2013-10-13 10:33   좋아요 0 | URL
저는 안준생 씨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끝까지 헌신해 놓고 해방된 조국에서 오히려 억압 받고 탄압받은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가족들이 가난에 시달리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살게 된 우리의 현실이 더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역사가 기막히다고 쓴 겁니다. 2년 쯤 전에 한국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가 사망을 했는데 암투병 중에 돌아가셔서 장례비 포함 1000만원의 부채가 있었다고 해요. 조의금으로 500을 갚고 500이 남아서 정부에 탄원서를 올렸다고 하네요. 이명박 대통령께서 친히 '10만원'을 조의금으로 냈다고 합니다..;;;;;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인 거죠...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