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표현을 무서워한다. 그게 부메랑같은건데, 내 옆사람이 불편하면 그 불편해하는 모습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특별히 나쁜일이 있을 때는 가까운이들에게 더 살갑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습관이 되었고 어느새 나는 표현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려서 내가 원래 무딘 사람인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표현하지 않았던 감정들은 불행버블이 되어 도통 꺼지지를 않는다. 이러면 펀더멘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감정표현의 걸음마를 떼려니 다자란 키와 늘어진 팔다리가 내게 앵겨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섭섭함도 마찬가지다. 나는 섭섭하지 않으려고 남들이 나에 대해 어떤 걱정이나 기대, 관심을 가지리라 애초에 생각하지 않는다. 근데 사람은 관심을 먹고 사는 영장류이다 보니 자꾸 혼자서 외로움을 타는 것이다. 속으로는 나도 누군가가 참 걱정해주고 그랬으면 하는데 겉으로 표현할줄도 모르고 말할줄도 모르고 생각할줄도 모른다. 이렇게 글자로 표현하기까지 자그마치 26년이 걸렸다. 이 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또 섭섭해하지 않으려고 부다다 노력하면서 한쪽으로는 또 안그럴려고 테라피테라피 오오오옹오오오오오옴 하겠지 싶다.

아, 이럴 때 남자친구가 필요한가!

좋아 새해에는 집사람을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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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 맞으면서 피아노를 배웠다. 엄마는 자신의 재능 없음을 조기교육으로 당신이 음악시간에 받은 상처를 대물림 시키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반면 아빠는 음악가였기에 나에게도 그런 재능을 기대하며 자신은 관악기를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이 바스라진 이후에도 부모님은 여전히 나에게 가방을 들려보냈다. 나는 알고 있었다. 5살의 나는 좋고 싫음 정도는 알 수 있는 생각과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두가 침묵했지만 나와 피아노 사이의 거리를 나는 알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감히 누를 수 조차 없다는것을.

그래도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은 것은 손아래 동생의 장애 때문이었다. 그 때는 엄마가 시키는대로 하고 엄마처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누구도 내게 강요하거나 등떠밀지 않았다.

도시락가방을 한쪽에 던져두고 남들은 10번이면 되는 하농을 20번 30번씩 쳤다. 메트로놈 소리는 끔찍했다. 손을 분명 맞았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꽤나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인가보다. 그렇가 5년을 보냈고 10년차의 어린이 피아노 수강생의 풍월은 즐거운 우리집을 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모두가 나를 한심하게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었다. 난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피아노를 버렸다. 대신 화성악을 택했다.피아노 학원에서 조금씩 배우는 화성법은 내게 꽤나 잘 맞았고 그럭이럭 재미도 있었다. 빈공간에 넣기만 하면 되니까. 그 빈공간을 채우는 것은 연필을 든 한손이면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나를 무작정 미워하지는 못했던 선생님은 화성법을 잘한다고 몇번이나 강조했다고 한다. 지은이는 좀더 시키고 다른 책을 사서 공부시키고 있다고. 강습시간은 좀 빠지지만 재능이 있는거 같다며.

바흐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들리는 바흐의 소리를 소리로도 말할 수 없는 하물며 글자인데. 째즈를 사랑하는 것은 그 시절, 싫었던 모든 리듬들을 파괴하는 그 소리들이 내게 해방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척점의 둘을 나는 모두 품에 넣었다.

그런데 어느날 글렌굴드가 나타났고, 나는 그를 통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위안을 얻었다. 라따뚜이의 레미가 요리하는 이유와 같다. 신선한 채소는 맛있지만 그 궁합을 따져 다른 것들과 함께 먹는 것이, 그게 음식이다. 그리고 그런 귀의 황홀경을 선사한 것이 글렌굴드의 골드베르크 베리에이션 – 굴드베르크 – 이다.

나는 일단 내맘에 들인 어떤 것은 쉽게 놓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모두가 내 기둥이고 성주이다. 나를 구성하는데에 서까래는 없다.

그렇게 나는 나라는 인간을 취향으로 방패 삼는다. 모르겠다. 나는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해 싫지 않은 것을 선택하지는도 모르겠다. 취향이라는 것은 일정부분 구조적이고 나의 고향의 습속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너를 택했다. 나를 보호할 방패로 너를 택했다.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다. 그러니 나는 다른 것에 건 셈이다.


그리고 청량음료.. 굴드베르크. 

http://youtu.be/4lR2rlq-A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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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2012-12-3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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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블로그가 싫었습니다. 인기 있는 사람들, 글 잘쓰는 사람들, 재미있는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이버 공간에 적응하기가 무서웠습니다. 블로그에 쓴 글의 조회수가 0 이며 그걸 확인하기 위해 들어가는 나로 인해 1이 되는 순간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구더기 무서워 장못담그는 심정으로 블로그 시대를 쩜프했어요.

아무도 보지 않는 텍스트가 무슨 의미를 가지겠어요. 먼지 묻은 책, 냄새 나는 필름 같은 것들 말입죠. 해서, 그 101010101111로 된 낱말들은 정말이지 내 그림자조차 들을 수 없는 진짜 혼잣말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냥 시작도 말아야지 하고 손을 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트위터를 알게되었고,   근데  여기알라딘은 이건 스킨설정을 잘하면 조횟수가 안보여요. ???!!!! 신났습니다. 누구나 가끔은 - 그것이 뛰어나건말건 - 창작의 욕구를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를 표현하기엔 트위터는 짧기도 하지만 감성이 충만한 한 때를 불특정 다수에게 쉽게 보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트위터에 포스팅을 해도 그건 클릭을 할 때만 유효하고 그 사람들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 없습니다. 보는 사람만 본다는 거지 뭐.... 그래서 한동안 연동해서 참 열심히 했던 기억이 많아요.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ㅎㅎ 결국.... 부끄러워서라는 이야깁니다. 박박 밀고 다시시작하는 이유는 글쓰는 것을 게을리 하다 멍청해지는 것이 무서워서 그렇습니다. 뭐....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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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이도령 첫사랑 고귀한 사랑의 결정판 후세에 길이길이 남는데
왜 내겐 아직 어리다고만 할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목숨도 아깝지 않을까
정해진 인연이 있다면 내 앞에 지금 나타나줘
기다림은 너무 싫어 외로움도 너무 싫어 우연이 맺은 잘못된 사랑 더 싫어
어른들은 아직 몰라 내가 어린 줄만 알아 옛날 같으면 벌써 시집갈 나이인데

머리가 좋았으면 좋겠어 2세를 생각해야 하니까 큰키에 잘생기면 더 좋아
적어도 나의 인연이라면 혹시나 하늘이 노하여 바보를 맺어준다 해도
평강이 그랬었던 것처럼 내조로 영웅 만들지뭐

기다림은 너무 싫어 외로움도 너무 싫어 우연이 맺은 잘못된 사랑 더 싫어
어른들은 아직 몰라 내가 어린 줄만 알아 옛날 같으면 벌써 시집갈 나이인데

빱빠빠빠 빠빱빠빠 주문 주문 외워 보자
빱빠빠빠 빠빱빠빠 나의 사랑 불러 보자
빱빠빠빠 빠삡빠빠 수리수리 마하수리

기다림은 너무 싫어 외로움도 너무 싫어 우연이 맺은 잘못된 사랑 더 싫어
어른들은 아직 몰라 내가 어린 줄만 알아 옛날 같으면 벌써 시집갈 나이인데
기다림은 너무 싫어 외로움도 너무 싫어 우연이 맺은 잘못된 사랑 더 싫어
어른들은 아직 몰라 내가 어린 줄만 알아 옛날 같으면 벌써 시집갈 나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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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프할때는 일단 걸어놔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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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길 사람속은 절대 알수 없다. 그래 반길도 그의 반길도 그의 반의 반도.  믿었고 또 믿었던 사람의 다른 이야기가 뒤로 들려 오는 것은 사회적인 나를 북북 찢고 광장에서 밀어낸다. 아니, 저절로 걸어나가는 거지.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다. 슬프게도. 정말 슬프게도. 지혜롭고 영민하다 여겼던 사람 하나의 좋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한번 믿고 인격체로 감정을 가지기 시작하게 되면 여차해선 떼어내지 않는, 그래서 구들장이라는 별명도 얻었던 사람이다. 종종 사랑을 표현할 때 그런 표현을 쓰는 듯하지만 내 경우에는 아직 전례가 없으므로 굉장히 가깝고 친밀한 관계 자체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스스로도 깊게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어지간한 충격이 오지 않는 한 버리지 않는다. 버린다기 보다는, 그래. 설사 그 사람이 잘 못했다 한들 그 과오를 알면서도 그쪽에게 “not guilty” 를 선언하는 것이 나다. 우리끼리 있을때는 몰라도 남에게 까지 그사람의 실수를 보이기 싫다는 말이다. 내 잘못만큼? 그래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의 1/10정도는 될거다. 

그런데 그런 내게, 덮어주기 힘들어 보이는 일들이 밀려왔다. 예고도 없이 밀려온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기에 나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냥 묵묵히 수화기를 잡고 쭈구려 앉아 끄덕거리며 응응만 반복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지금에야 조금씩 그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렇게 토로 할 수 있을 만큼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들어봐야 하겠지만, 근데 너무도 터무니가 없어서 너무 이해가 안되어서 그런 기력도 슬슬 떠볼 힘도 재간도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또 한명 보내는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정말일까. 이미 걱정으로 너무 많이 기울고 의심으로 포장된 지금, 올바른 선택은 대체 어디에 매달려 있는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른척? 일주일도 장담할 수 없다.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는 막다른 덤불이 앞에 도사린다.  제발 그런게 아니기를 내가 들은 것들이 오해이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반대의 경우 내 실망이 나의 친구를 내 입으로 얼마나 상처 입히고 얽히고 섥힌 주변인들을 얼마나 거북캐할지 끔찍하다. 

대체 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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