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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 에밀리 디킨슨
  • 10,800원 (10%600)
  • 2020-12-21
  • : 1,906
20210222 #시라는별 13

군함 없이도 책 한 권이면 돼
-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군함 없이도 책 한 권이면 돼
우리를 멀리 대륙으로 데려다주지
군마 없이도 한 페이지면 돼
시를 활보하지ㅡ
이런 횡단이라면 아무리 가난해도 갈 수 있지
통행료 압박도 없고ㅡ
인간의 영혼을 실을
전차인데 이다지도 검소하다니ㅡ

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
To take us Lands away
Nor any Coursers like a Page
Of prancing Poetryㅡ
This Traverse may the poorest take
Without oppress of Tollㅡ
How frugal is the Chariot
That bears the Human Soulㅡ


파시클 출판사에서 2018년에 출간한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첫 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거의 한 달 만에 다 읽었다. 디킨슨의 시는 거의가 짧아서 맘 잡고 읽으면 몇 시간만에 완독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느릿느릿 쉬엄쉬엄 읽었다. 이 시집에는 총 56편의 시가 실려 있다. 번역가이자 파시클 출판사 대표인 박혜란님은 디킨슨의 시들 중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시들을 첫 권에 담았다고 한다. 또한 독자들에게 ˝에밀리 디킨슨을 읽는 즐거움에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시들을 골랐다고. 그런 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듯하다. 기존에 출간된 디킨슨의 시집들에 소개되어 있는 시들이 많아 낯설지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문도 함께 수록돼 있어 영시로 읽기를 원하는 독자는 디킨슨의 시가 가진 군더더기 없는 응축의 정수를 십분 맛볼 수 있다.

내가 절반의 성공이라 한 것은 번역의 아쉬움 때문이다. 시는 사실 번역이 가능한 것인가에 의문 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는 영역 같다. 산문 번역과 달리 운문 번역은 내용 전달 뿐 아니라 운율도 살려야 하는 애로가 따른다. 박혜란 번역가는 디킨슨만의 줄표 기호와 간결함을 잘 살려 번역했다. 이렇게 다듬기까지 얼마나 노고가 컸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다. 내용 번역은 대체로 깔끔한데, 아주 가끔씩 오역이 보인다. 저번에 올린 ‘희망은 한 마리 새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가 그랬다. 물론 시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고, 번역가의 말대로 읽는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원문을 실은 건 번역가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처럼 이런 딴지를 거는 독자가 없지 않으리라 예상하지 않았을까. 예상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용기를 발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좋아한다. 대학원 시절 디킨슨의 영시를 읽고 차암, 좋다, 고 생각은 했지만 생활에 치여 다른 관심사에 쫓겨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시집 외에 다른 것을 일부러 찾아 읽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서 파시클 출판사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계속 출간해 주고 있어 기쁘고 고맙다. 디킨슨 시 전집 첫 권인 이 책은 시인의 주관에 입각해 여덟 개의 소제목으로 나눠 시를 소개한다. 파트별로 나름의 주제가 있다.

‘파시클 fascicle‘은 분할 간행되는 책의 한 권을 뜻하는 말이다. 에밀리 디킨슨이 생전에 발표한 시는 7편 정도에 불과하다. 그녀의 시는 당시의 문학계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파격성과 도발성을 띤 실험시들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디킨슨은 평단에서 외면 당한 후 자기 스스로 평단을 외면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 날마다 썼다. 그녀가 글을 쓰는 시간은 매일 새벽 세 시부터 아침 식사 준비 전까지였다. 그렇게 쓴 시들을 40여 편씩 묶고 바느질로 엮어 책자를 만들었다. 그런 책자를 ‘파시클 fascicle‘이라고 부른다. 디킨슨이 이렇게 만든 시집은 모두 44권이었고 시의 수는 무려 1800여 편에 이르렀다.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 12월 10일에 태어나 1886년 5월 15일에 눈을 감았다. 인생 후반부에는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증은 오래 전부터 내재되어 있던 질환이었을 것이고, 어느 순간 통증이 격발했을 것이다.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오랫동안 쌓여온 슬픔이야. 그게 전부야.˝(<<진리의 발견>> 586쪽) 라고 디킨슨은 한 친구에게 말했다. 마리아 포포바는 고작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에밀리 디킨슨을 삶을 두고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달랠 길 없는 슬픔을 품은 채 그토록 오랫동안 살기 위해서는 영웅적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느낀다. 에밀리 디킨슨은 가장 사랑하는 친구, 통렬할 정도로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36년 동안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해 사랑했다.˝(<<진리의 발견>> 609쪽)

달랠 길 없는 슬픔. 디킨슨이 사랑한 사람은 친구이자 오빠의 아내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을 먼 발치서 바라보며 그녀는 ˝달랠 길 없는 슬픔˝을 시로 달랬다. 그 위안이 얼마나 컸을까만은 55세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줄만큼은 되었다. 오랜 세월 시인은 분명 뼈가 깎이는 고통을 겪었을 테지만, 깎인 뼛가루에서 ‘시‘라는 사리가 탄생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수천 개가. 그 구슬들은 하나같이 반짝거렸다.

에밀리 디킨슨은 이십 대 후반부터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녀는 두 개의 창이 있는, 햇살 잘 드는 작은 방에서 가로세로 대략 45센티미터의 책상에 앉아 세계를 누볐다. 책이라는 ˝군함˝을 타고 시라는 ˝군마˝를 타고 대륙을 넘나들며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아름다움과 추함, 읽기와 쓰기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디킨슨의 시를 읽는 것은 그 노래를 듣는 것이다. 이 노래에는 다운로드 비용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가난해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매일 들어볼까 일단 생각만 해본다.^^;;;

If I read a book and it makes my whole body so cold no fire can warm me I know that is poetry. If I feel physically as if the top of my head were taken off, I know that is poetry. These are the only way I know it. Is there any other way?
내가 읽은 책 한 권이 내 온몸을 어떤 불로도 데울 수 없을 만큼 싸늘하게 만든다면, 그게 시예요. 마치 정수리부터 벗겨지는 느낌이 들게 한다면, 그게 시예요. 나는 시를 이렇게밖에 알지 못해요. 다른 방법이 있나요?
ㅡ 에밀리 디킨슨이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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