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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Libris
  •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 12,420원 (10%690)
  • 2012-05-25
  • : 4,794

도서 반납일이 임박하여 지난 일요일에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다 읽었다. 일주일 전 30페이지 가량을 읽었지만 두어 가지 에피소드 외에 기억이 나지 않아(요즘은 읽자마자, 아니 읽는 그 순간부터 까먹는다 ㅠ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첫 단락에서 나는 감지했다.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 기법. 거리 두기 작법.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 퐁투아즈 병원에서 운영하는 노인 요양원에 들어간 지 두 해째였다. 간호사가 전화로 알려왔다. <모친께서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운명하셨습니다.> 10시쯤이었다.(7) 

작가는 분명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 위주로 글을 썼는데, 나는 이 첫 문장을 시작으로 읽는 내내 눈물을 흘리고, 훌쩍이고, 코를 풀어야 했다. 책 한 권을 내내 울며 읽기는 처음이다. <한 여자>는 맘 잡고 읽으면 앉은 자리에서 두어 시간이면 뚝딱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다. 총 110쪽. 그러나 책의 무게가 꼭 쪽수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무게는 제목 그대로 '한 여자'의 인생 무게다. 

"나는 어머니에 관한 글을 계속 써나가겠다. 어머니는 내게 진정 중요한 유일한 여자이고, 2년 전부터는 치매 환자였다."(18)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들도, 나의 기억도, 가족들의 증언도 내게 진실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길 바란다.(19) 

나는 아니 에르노의 글을 처음 접했다. 특이한 글쓰기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것도 가장 가까웠던 존재의 인생을 이만큼 떨어져 서술할 수 있다니. 작가 스스로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있는 글이라 칭하는 작법. 감정은 밀어 놓고 있었던 사실들을 충실히 따라가는 자기분석적 글쓰기. 

나는 내 인생에 딱 한 권의 책을 쓰고 싶었던 사람이다. '싶었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못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들고 있기 때문이다. 내 나이 열여섯에 내 어미가 들려준 엄마 인생의 한 귀퉁이. 고작 귀퉁이만 들었을 뿐인데 내게는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언제고 엄마 이야기를 써야지.

이 책을 읽다 저자의 어머니의 삶과 성격이 내 어미의 삶과 성격과 너무나 닮아 있어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물론 내 어미는 책, 음악, 영화 따윈 모르는 분이었고 대신 저자의 어머니처럼 한때 가게를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 다 버려두고 어미는 혈혈단신으로 첫 남편의 집을 도망치듯 나왔다.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전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51) ​

 

내 어미는 내게 조금도 살갑지 않은 엄마였다. 완벽주의자적인 기질이 있어 나의 엉성함과 미숙함과 가벼움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내 뒤통수에다 대고까지 지겹도록 잔소리를 해대는 어미였다. 나는 내 엄마가 티비 속 다정한 엄마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교회도 안 다니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도무지 싫기만 한 내 어미를 나는 이십대 중반 무렵부터 저자처럼 개인사와 사회사를 엮어 한 인간으로 이해해 보려 애썼다. 그때 내가 했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너가 엄마같이 살았다면 지금의 엄마만큼 끈덕지게, 의연하게, 살았겠냐고. 답은 '아니오'였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엄마의 삶을 존중하게 되었고 어미를 존경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부분만큼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군가 너를 열두 살에 공장에 처넣어 버렸다면 너도 그렇게는 못할 거다. 넌 네가 누리는 행복을 몰라.> 그리고 또, 종종 나에 대한 분노 섞인 생각. <저런 물건이 사립 기숙 학교엘 다니다니. 다른 것들보다 더 나을 것도 없건만.> / 어떤 순간들에는 자기 앞에 있는 딸 속에 계급의 적이 있었다.(65) 

내 어미의 말은 이랬다. "내가 니년만큼 공부했으면 판검사를 하고 있거나 청와대 들어가 있었을기다!" 그랬을 것도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억척스럽기가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했던 어미가 팔순 생일을 기점으로 생을 부여잡은 손에서 힘을 빼기 시작했다.  

"그녀는 변했다. . .  소소한 불편 거리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정말이지 신물이 나>라고 말했다."(89)​

"일이 보배다"라는 말을 성경 말씀처럼 가슴에 품고 일을 보물단지마냥 끼고 살던 어미가 "사는 게 무재미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런 어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밥을 같이 먹는 것, 아이들 재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것조차 해주기 힘들어지는 날이 오리라는 건 예측하지 못했다.  왜. 내 어미는 언제나 강건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돈에 호기심을 보인다며 그들 전부를 싸잡아 비난하고 . . .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더러운 꼴 보기도 지겹다 지겨워.> 어머니는 형언할 수 없는 위협에 맞서느라 뻣뻣하게 굳어 버린 듯했다."(90) 

쌈짓돈이 없어졌다, 통장이 안 보인다, 도장이 사라졌다, 주민등록증이 보이지 않는다 . . . 도둑이 들었다 . . . 나와 옆지기는 졸지에 "칼로 배때지를 찔러 죽일 년놈"이 되었다. 나는 내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졌지 팔순을 한참 넘긴 내 어미의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살피지 않았고, 살필 생각도 하지 못했다. MRI 촬영 사진 속 내 어미의 뇌는 해마가 많이 망가져 있었고, 전두엽도 쪼그라든 상태였다. 치매 판정과 함께 어미는 심장 부정맥 판정을 받고 스탠드 시술을 받았다. 어미는 점점 여위어 갔다.

"나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 나는 그녀를 먹이고, 만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 여러 번, 요양원에서 데리고 나가 그녀만을 돌보고 싶다는 급작스러운 욕망, 그리고 곧 그럴 능력이 내게 없다는 깨달음. (사람들이 말하듯 <나로서는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는 해도, 어머니를 그곳에 놔뒀다는 죄책감."(105) 

나는 어미를 겨우 6개월 돌보고 요양원에 모셨다. 요양원에 모신 첫 한 달은 많이 울었다. 죄책감에 날마다 한숨을 쉬고 가슴을 쳤다. 이런 전철을 밟아본 많은 사람들과 요양원 관계자들은 어미가 요양원에 정착할 때까지 보러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따랐다. 전화통에 불이 났다. 이런 경우 모든 치매 환자의 말은 거의 동일하다. "왜 나를 여기 놓고 갔어. . . . . ."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더욱 복받쳤다. 하여 나는 그네들의 말을 모두 무 자르듯 잘라버리고 날마다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랑 밥을 먹고 간식을 먹고 엄마가 부르는 노래와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안정을 찾아갔다. 다행히 어미는 기억만 시나브르 읽어갈 뿐 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잘 지내고 계신다. 어미는 여전히 나와 사위와 손녀손자를 기억하고 우리가 오면 반가워 하고 우리가 가져온 음식을 맛나게 드신다. 나는 아직은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110)를 잃지 않고 있다. 

나는 내 어미가 내게 허락한 시간, 내가 어미를 돌볼 수 있게 해준 시간에 감사한다. 켜켜이 묻어 두었던 말들을 기억을 잃어가는 중에 토해내 준  것에 감사한다. 그 말들은 내게 울음을 넘어 통곡을 끌어냈지만, 어미라는 한 여자를, 어미의 삶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로도 이끌었다.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함부로 가여워하지 말라.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그런 상태로 여러 해를 사신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모두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더 나았다. 그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의 문장, 하나의 확신이었다."(15) 

나도 저자와 같은 생각이다. 기억을 잃어간다고, 수족을 못 쓴다고, 누워만 지낸다고, 살 권리를 박탈 당할 이유는 없다. 그것을 결정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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