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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래여애반다라
  • 이성복
  • 8,100원 (10%450)
  • 2013-01-11
  • : 2,977
20210204  시라는별 8 

極地에서 
- 이성복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내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이성복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오라, 서럽더라‘로 풀이되는 <래여애반다라> 는 시인의 나이 예순이 되는 해에 완성된 시집으로 6장으로 나뉘어 있다. 시인이 육십 인생의 자취를 십 년 단위로 돌아본 것, 인생의 여섯 단계를 ‘래 여 애 반 다 라‘라는 여섯 글자로 요약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生이라는 것을 부여받은 인간이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 (시인의 말 중)라는 뜻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오늘 올리는 ‘極地에서‘는 저 여섯 단계 중 네 번째 단계, ˝맞서 대들다가˝ 시기에 들어 있는 시다. 서른에서 마흔 사이.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라는 첫행과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라는 마지막행의 대구가 돋보이는 시. 저 두 행만으로 ˝무언가˝가 북받쳐 올라 가슴이
짠해지는 시. ˝무언가˝가 안 되는 때가 어디 저 때뿐이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면 ˝무언가˝가 될 줄 알았던 자신이 무엇도 될 수 없는 존재로 살다 가는구라 라는 허무와 맞닥뜨리게 된다. 저 때는 아직 그 시기가 아니다. 저 때는 ˝무언가˝가 안 되고 있지만 그 ˝무언가˝를 향해 여전히 ˝맞서 대들˝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시기다. 생이 너를 배반할지라도 살으라 는 명령이 아닌, 살리라는 의지를 따르는 시기. 그래서 이 단계의 시들은 일상의 삶으로 도배되어 있다.

어제도 눈이 나려 오늘 아침 세상도 하얀 눈에 덮여 있다. 살으라.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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