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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 14,400원 (10%800)
  • 2013-06-25
  • : 17,446
20210201 겨울밤 산책, 밤은 선생이다 

​겨울 찬바람이 귓전을 때릴 때면 엄마의 말소리도 덩달아 귓속에서 울린다. ˝니년은 머가 춥다고 그리 웅숭그리고 있노.˝ 엄마는 욕쟁이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작은 아이였고, 엄마는 추위를 모르는 기골 장대한 어른이었다. 추워서 몸이 자꾸만 움츠러드는데도 나는 겨울이 싫지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겨울이 좋았다. 겨울의 알싸한 찬공기, 찬 담벼락에 스미는 따스한 햇살. 차가움과 따뜻함의 접속. 한류와 난류의 교류. 그 둘의 조화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물론, 그 시절엔 그런 줄 모르고 좋아했다. 

​겨울이 문턱을 지나 방안까지 쳐들어올 즈음,  유튜브를 켜놓고 따라하는 실내 운동이 슬슬 지겨워지고 있던 즈음, 기온이 영하 깊숙이 내려간 날 집밖을 나섰는데, 차디찬 공기가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겨울 바람의 매운 손찌검에 뒤따라온 것은 겨울 냄새였다. 내 몸이 기억하는 비릿한 한파 냄새. 아주 반가웠다. 겨울아, 진짜 너로구나. 그날부터 밤산책에 돌입했다. 밤이라 한동안은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돌았는데, 재미가 덜해 요즘은 뒷산을 돈다. 뒷산에도 가로등이 켜져 있다. 나는 밤길을 그닥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늘밤의 기온은 영상 3도. 체감온도는 0도. 얼얼한 추위를 맛볼 기온은 아니지만 낮은 산이어도 찬바람이 들락거려 산 아래보다는 춥다. 바람을 밀며 바람을 쐬며 걷다 보면 몸이 조금씩 데워진다. 밖은 시리고 안은 훈훈하다. 겉은 따갑고 속은 따숩다. 극과 극의 교류는 정신을 깨우고 가슴을 때린다. 행복해진다. 땡전 한 푼 들이지 않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는 행운아다. 비록 그 시간이 길지 않다 해도.  

​밤과 걷기는 사색의 좋은 친구다. 오늘밤이 묻는다. 밤은 선생인가? 두 권의 <<코스모스>>가 내게 알려준 바로는 밤은 확실히 선생이다. 밤은 내가 이 세상에 오기 훨씬 전에, 헤아릴 수도 없이 먼먼 시절부터 존재했으니, 먼저 난 존재 先生이 맞다. 무릇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은 나의 선생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도 내게 선생이다. 그분은 내가 사랑하는 밤과 읽기 몰입의 희열을 동시에 안겨준 이였다. 

《밤이 선생이다》는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의 한 대목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구절,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를 빌어 선생이 밤에 대해 펼친 단상을 엮은 에세이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겸비된 글의 풍경이 펼쳐진 에세이.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셰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 .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220) ​ 

​황현산 선생의 글은 냉기와 온기가 교차하는 겨울밤 산책을 닮았다. 선생의 지성은 차가우면서 따뜻하다. 낮에 벼린 차가운 이성을 밤이 되면 따스한 감성으로 둥글린다. 그렇기에 선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상하다. 또한 선생의 사유는 가슴을 무겁게 누르기보다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한파가 들이닥치기 전의 겨울밤, 걸음과 걸음이 포개지고 포개져 훈기가 발끝에서부터 머리꼭대기로 차오를 즈음 밤은, 말 그대로 나의 ‘선생‘으로 찾아와 내 삶에 윤기를 더해주었다. ​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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