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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고 쓰는 Syo

 

 

 

 

어느덧 딱딱한 복숭아는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아쉬울 여유도 없이 분주한 나 대신 아쉬워하던 사람이 그래도- 라는 말과 함께 복숭아를 보내왔다. 이 여섯 알의 복숭아에서 올해를 끝마친다면 한 알에 두 달을, 한입에 열흘은 베어 무는 셈이겠다. 복숭아는 목을 넘어가면서 그윽해지는 과일. 크게 베어 물어 지나치게 꼼꼼히 씹지 않고 삼키면 여름의 어떤 짓궂은 장난도 다 용서할 수 있는 맛이 난다.

 

좋은 일들은 대체로 겨울에 있었다. 여름은 그저 여름이기만 해도 힘든데 어찌 된 일인지 슬프고 괴로운 일의 시작이나 끝 중 최소한 하나는 여름에 온다. 여름이 길어지면 내 슬픔과 괴로움도 길어질 테고, 나는 추운 나라 서늘한 벌판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밤과 친해진다.

 

그저 이 여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버티는 것은 그래도 이 여름이 복숭아가 있는 여름, 복숭아를 보내주는 마음이 있는 여름이기 때문에.

 

성남이다.

 

 

 

--- 읽은 ---



263.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

 

- 일독(안녕이 하이인지 바이인지도 모르던 시절)

- 재독(210803)


아름다우면서 에두르지 않는 문장.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옮겨 적은 것 같은 마음. 천재의 펜은 이렇게 작동하는 것이로구나.

 

어느 날 저녁 안의 목소리가 그런 우리 둘을 떼어놓았다. 시릴은 내게 몸을 맞대고 길게 누워 있었다. 석양 무렵의 그림자와 불그스름한 빛살 한가운데서 우리는 거의 옷을 벗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안을 착각하도록 했던 것 같다. 그녀가 단호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시릴은 당연히 부끄러워하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이어 내가 그보다 천천히 일어나며 안을 바라보았다. 안은 시릴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마치 그제야 그의 존재를 감지했다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그쪽과는 더 이상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시릴은 대답하지 않고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어깨에 입을 맞추고 자리를 떴다. 그 행동은 나를 놀라게 했고, 마치 약속의 의미라도 담고 있는 듯 감동시켰다. 안은 무슨 다른 것을 생각하는 듯 심각하고 냉담하게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혹시 그녀가 다르게 생각했었다고 해도 시릴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잘못이었다. 나는 순수하게 예의 차원에서 민망해하는 태도를 취하며 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내 목에서 솔잎 하나를 떼어낸 다음 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안의 아름다운 얼굴에 특유의 경멸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안을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게 하면서 내게는 약간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마뜩잖고 싫증 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런 종류의 심심풀이 놀이가 대부분 병원에서 끝난다는 걸 알아야 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선 채로 이야기하면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지독히 불편했다. 안은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서서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나는 이야기를 하려면 안락의자, 붙잡을 만한 물건, 담배 한 개비, 다리 흔들기, 다리가 흔들리는 걸 바라보기 같은 것이 필요했다….

  "이 일을 과장해서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난 시릴과 그저 입맞춤을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 일로 병원에 갈 일이 생기지는 않잖아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부탁인데 그 청년을 더 이상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말에 토 달지 마. 넌 열일곱 살이고, 난 현재의 네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 네가 네 삶을 망치게 두고 볼 순 없어. 게다가 네겐 해야 할 공부가 있잖아. 공부만 해도   오후 시간이 모자랄 거야." 내 말을 믿지 않는 기색으로 안이 말했다.

  그녀는 등을 돌리더니 침착한 결음으로 별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안의 말은 진심이었다. 내 논리, 내 부인에 그녀는 경멸보다 더 지독한 형태의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마치 내 존재가 없는 것처럼, 그녀가 줄곧 알아왔던 나 세실이 아니라 진압해야 할 그 무엇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그녀가 그런 식으로 처벌해 마땅한 대상인 것처럼.

_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안’이라는 캐릭터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의 영역 밖에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토대가 될 만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기가 옳기 때문에 타인을 옳은 방향으로 끌고 갈 자격이 있고 심지어 그럴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 철석같이 믿는 타입. 세실은 이제 하루에 몇 시간씩 골방에 갇혀 베르그송을 공부해야 하고, 시릴과 만나려면 안의 눈을 피해야만 한다. 안에게 세실의 말과 생각은 그저 교정 혹은 무시의 대상일 뿐이고(“난 천박한 말은 싫어. 재치 있는 농담이라도 말이야.”, “요즘 유행하는 생각이구나. 하지만 그건 가치가 없어.”) 안의 그런 태도는 예민한 세실의 마음에 상처로 자꾸만 축적된다. 하지만 안은 그런 걸 모른다.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옳으니까. 내가 옳은 사람은 늘 그런다.

 

그러면서 자기 상처에는 또 지나치게 예민한 안은 결혼할 사람(세실의 아버지)이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바로 집을 뛰쳐나가 차를 절벽 아래로 몰아 자살한다. 그 사건은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과 슬픔이었지만, 읽는 syo는 그저 통쾌할 뿐이었다. 그녀는 항상 세실을 어리고 모자란 아이 취급하며 훈육하려 했지만, 상처를 견디는 마음에 관해서라면 그녀야말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세실은,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 마음속 슬픔 창고에 안의 죽음을 저장한 후, 계속 살아갈 것이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264. 이 짧은 시간 동안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4

- 일독(1804xx)

- 재독(210804)   


  바지락칼국수 국물 위로 떠오른

  조갯살을 날렵하게 집어먹는다고 해서

  내가 붉은어깨도요새가 될 수 있겠는가

  바지락 조개껍질에 아직 남아 있는

  갯벌의 잔모래를 씹어먹었다고 해서

  잔모래에 아직 남아 있는

  파도소리에 고요히 귀기울였다고 해서

  내가 가슴붉은도요새의 가슴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먼저 썰물이 되지 않고서는

  내가 먼저 새들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어대는

  맛있는 갯벌이 되지 않고서는

  어떻게 머루처럼 까만 민물도요새의

  눈동자에 걸린 수평선이 될 수 있겠는가

  이제 돌아가실 날만 남은

  틀니뿐인 늙은 아버지와

  자장면보다 맛있는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식탁 위에 젓가락으로 수북이

  조개껍질을 쌓아놓았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거룩한 패총이 될 수 있겠는가

_ 정호승,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며> 전문

 

활자로는 보이지만 음성으로는 들리지 않는 종이 위의 시도 좋지만,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채록하여 활자에 매어둔 듯한 시도 좋다. 이 시인 말고는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은 시들도 눈부시지만,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고르고 부드러운 말들로 길을 잡아나가는 시들도 찬란하다.

 

 

 


265.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리디아 더그데일 지음 / 김한슬기 옮김 / 현대지성 / 2021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내 이름을 적어 넣은 날, 고르지 않은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새벽까지 앉아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의 모호한 구획과 포함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죽음을 삶에 반대되는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수렁으로 생각하면서도,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삶의 한 부분으로, 대단원으로 향하는 피할 수 없는 전개로 여기기도 한다. 그렇게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의 끝단이라면, 죽음이 삶의 마지막 단추라면, 죽음을 생각하면 좋을 시간이 비단 아침뿐일까.

 

혼자 죽지 말기를. 죽음의 순간에 공동체가 나의 죽음에 뭔가를, 내 죽음이 공동체에 또 뭔가를 더하는 풍성한 삶은 늘 죽음을 잊지 않고 준비하는 현명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바그다드의 상인이 하인을 시장으로 보냈다. 하인은 심부름을 간 지 얼마 안 돼 집으로 돌아왔다. 겁을 먹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인은 상인에게 이야기했다. "장을 보다가 어떤 여자가 등을 떠밀기에 뒤돌아봤더니 죽음이 지척에 있었습니다. 죽음이 저를 위협했어요. 주인님, 제발 말을 빌려주세요. 죽음을 피해 도망가야겠습니다. 사마라까지 말을 타고 가서 죽음이 저를 찾지 못하도록 숨어야겠어요."

  사연을 들은 상인은 하인에게 말을 빌려줬다. 하인은 지체하지 않고 사마라로 떠났다. 그날 오후, 상인이 직접 시장에 갔다가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죽음을 목격했다. 상인은 죽음에게 그날 아침 하인을 위협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죽음이 대답했다. "위협한 게 아니었소. 놀랐을 뿐이죠. 오늘 밤 사마라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바그다드에서 봤으니 얼마나 놀랐겠소?“

  바그다드 상인 이야기는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도, 재촉할 수도 없으니 언젠가 마주하게 될 사마라의 밤을 준비해야 한다. 죽음 또한 삶의 일부다.

_ 리디아 더그데일,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266. 나의 사랑, 매기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


- 일독(1902xx)

- 재독(210804) 

 

인간은 매사에 서투르다. 관계를 다루는 일에는 더욱 그렇다. 특히 사랑을 운전하는 일이라면 인간은 악셀이 왼쪽인지 브레이크가 왼쪽인지 헷갈리니까 눈 감고 한번 생각해 보려 드는 위태천만한 운전자 비슷한 주제에 운인지 뭔지 잘도 안 죽고 사랑하는구나 싶을 때가 잦다. 깜빡이를 켜요. 와이퍼 말고 깜빡이를 켜라고요……. 마음속에 사랑이 흥성하는 도시보다 폐허를 더 많이 지어놓고 사는 것이 다 그런 이유에서겠지. 여기는 폐허입니다, 끝났어요. 한때는 빛나던 이 도시에 살던 수많은 감각과 감정 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안 돼요. 저 흔적들은 깨끗하게 치울 수가 없든 거거든요. 그러니까 다음 사랑을 하려거든 다른 넓고 푸른 땅을 찾아보세요. 여기는 이제 못 써요. 잘 해야 박물관입니다.

 

우리가 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리고 이미 그 궤도를 돌리기에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일 사이의 시차는 멀수록 좋은 걸까? 그 반대일까? 어떤 사랑은 그 시차가 광대하여 결별 후에도 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는 거였구나, 하고 깨닫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랑이 정말로 끝나는 시점은 어디라고 봐야 좋을까? 그것은 중요하다. 지나간 사랑을 폐허로 정의하고 울타리를 둘러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다음 사랑의 도시를 그 폐허 위에 건설하다 종종 망하곤 하기 때문이다. 시점. 시점.

 

그러니까 망하고 있음과,

 

그렇게 매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폐점한 뒤에도 어딘가에 배어 있다가 밤공기를 타고 이 방으로 들어서는 닭기름 냄새를 느끼고 있자면 매기가 정말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리니까. 그 불규칙한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때 그 순댓국집에서 아줌마가 노래한 없어지고와 사라지고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사라진다는 것은 부재하는 대상의 강력한 능동이 감지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매기는 지금 내 곁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저 욕실의 자락자락한 물소리가 여전히 매기를, 좀 전에 끝난 우리의 섹스를, 사랑해, 라는 말과 시간을 간신히 환기하고 있는데도.

_ 김금희, 『나의 사랑, 매기』

 

 

그리고 망했음에 대하여,

 

스토어가 폐점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 안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히 매기와 마주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망설이다가 이내 길을 건넜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많은 물건들은 팔린 뒤였다. 그리고 여행을 온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그 가게에 별로 없었다. 나는 제주에서만 난다는 천혜향을 몇 개 집고 먹을지 알 수 없지만 단단한 감자를 몇 알 샀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는데 잘 있던 아줌마가 잠깐 일을 본다며 자리를 떠났고 졸지에 사무실에서 나온 그, 이미 지역신문에서 마르고 닳도록 내가 들여다봐서 아주 친근하게 얼굴을 새겨버린 매기의 남편이 내가 산 물품들을 계산했다. 18000원입니다, 담아드릴까요? 나는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넣어달라고 했고 그가 비닐봉지를 뜯어 그것을 넣고 내게 건넬 때 어쩔 수 없이 손가락들이 스쳤다. 나는 그것을 주고받았을 때의 느낌을 아마 긴 시간이 흘러도, 어쩌면 매기와 관련한 기억들 중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로 가져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디에도 미뤄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매기에게도 정권에게도 이 세상이나 어느 사랑에게도. 아무리 동산 수풀은 사라지고 장미꽃은 피어 만발하더라도, 모두 옛날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시간이 지나 나의 사랑, 매기가 백발이 다 된 이후라도.

_ 같은 책

 

 

 


267. 필요가 피로가 되지 않게

안나미 아쓰시 지음 / 전경아 옮김 / 필름(Feelm) / 2021

 

‘제목이 다 했다’라는 지나치게 편리한 말은 쓰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내용은 여기저기 존재하고 문장은 글자의 나열에서 그리 멀리 달아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존심 강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초합금으로 만든 로봇에 물총으로 맞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에 스스로 자존심이 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방호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로켓포를 마구 쏘아대는 것과 같다.

  뭔가 불손한 대우를 받거나 매정한 소리를 듣고도 여유롭게 받아넘기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진짜 자존심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얄팍한 자존심은 버려야 십중팔구 몸도 마음도 가볍게 살아갈 수 있다.

_ 안나미 아쓰시, 『필요가 피로가 되지 않게』

 

 

 

--- 읽는 ---


애매한 재능 / 수미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장우진

글쓰기의 쓸모 / 손현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강신주

어려웠던 경제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 가미키 헤이스케

소설의 정치사 / 낸시 암스트롱

문해력 공부 / 김종원

수학의 모험 / 이진경

마르크스를 읽자 / 미카엘 뢰비 외

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사조영웅전 3 / 김용

파이썬으로 시작하는 데이터 분석 /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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