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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동안 토머스 하디의 <이름없는 주드 Jude the Obscure>를 읽었다. 하디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이 막장 드라마 같은 스토리라서 흥미진진,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런 막장 드라마 같은 스토리임에도 그러한 스토리를 이루는 배경, 즉 사회나 제도에 관한 날선 비판과 빼어난 통찰력 때문에 역시 고전은 이런 맛에 읽는구나 싶어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면서 짜릿했다. <이름없는 주드 Jude the Obscure>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가난한 집안에서 고아나 다름없이 태어난 ‘주드 폴리’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고 지성적인 세계에 매료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 그가 꿈꾸는 지성의 세계, ‘사상과 종교의 유일한 중심지이자 이 나라 지성과 정신의 곡창’이라 불리는 ‘크라이스트민스터’에 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 꿈은 번번이 좌절되고, 그가 사랑하는 여인 ‘수 브라이드헤드’와의 사랑마저도 실패로 끝나고 마는 비극의 이야기이다. 그의 인생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두 가지, 지성의 세계에 진입하여 그 안에서 살고자했던 꿈도,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꿈도 모두 실패하는 비운의 주드. 그의 실패는 여러 면에서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책의 세계와 돼지의 세계
<이름없는 주드 Jude the Obscure>의 “Obscure”는 여러 의미가 있다. 민음사 번역본에서 선택했듯이 “이름없는” 즉 무명(無名)의 뜻도 있으며 ‘외딴, 벽지의, 미천한,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흐릿한, 어두컴컴한, 구름 낀’ 등등의 의미가 있다. 이 모든 형용사가 주드에게 어울린다. 그 자신도 번번이 실패를 겪은 후 “그건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구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지 않는가. 실제로 주드의 생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고난의 연속이다. 머리 위에서 구름이 걷힐 날이 없다. 그리고 그 구름은 그가 태생적으로 미천한 출신이라는 점(물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선조대에서는 그래도 명망이 있었노라...고 하디는 쓰기는 하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꿈을 이룰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는 점이 그를 이름없는, 비운의 주드로 살다 가게 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의아함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주드가 너무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렇다 할 지원과 자원이 없었기에 그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을까? 과연 그의 모든 실패가 가난 때문일까? 토머스 하디의 펜은 분명 주드에게 주어진 가정과 사회 환경이 미천한 신분, 빈곤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노라 당시의 사회 제도나 구조, 계층 문제를 비판하고는 있다. 그러나 꼭 거기에만 그쳤던 것은 아닌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름없는 주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그와 비슷한 인물인 <마틴 에덴>의 ‘마틴 에덴’이 떠오른다. 그런데 마틴 에덴은 주드와 비슷한 조건을 갖고 태어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죽기 살기로 노력해 자신이 꿈꾼 것을 이룬다(작가). 토머스 하디(1840~1928)와 잭 런던(1876~1916)이 살았던 시간과, 두 작품의 배경이 저마다 19세기 말 영국(빅토리아 시대), 20세기 초 미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비슷한 시기에 한 인물은 꿈을 이루지만(물론 그 꿈 때문에 또 다른 환멸을 맞닥뜨려 스스로 생을 등진다는 점에서 마틴 에덴도 비극의 주인공이긴 하다), 한 인물은 왜 일생 내내 머리 위의 구름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더 어두운 곳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자처하게 되는 것일까? 

마틴 에덴과 주드의 가장 큰 차이는 자기의 욕망, 특히 성적 욕망을 어떻게 다루었느냐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의 주드는 자신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서 푼돈이라도 벌어보고자 새를 쫓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새를 쫓아내지 못한다. 새가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새들의 좌절된 욕구에 동정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새들이 자신처럼 그들이 원하지 않는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알게’(31쪽)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벗어나려면 책-그러니까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책을 구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등 지성의 세계를 열망하며 언젠가는 ‘불빛의 도시’이자 ‘지식의 나무’가 자라며 ‘인간의 스승들이 나오고 또 찾아가는 곳’이자 ‘학문과 종교로 무장된 성’인 크라이스트민스터에 갈 것이라고, 그곳은 ‘나한테  잘 어울릴’거라고 ‘끈기는 나의 특기’이므로 ‘크라이스트민스터는 나의 모교가 될’ 것이며 ‘나는 모교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고, 모교는 그 아들에 만족할’ 거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며 시골길을 걷던 주드에게 누군가가 무언가를 툭 던진다. 어떤 물체가 그의 귀를 날카롭게 때리고 그 부드럽고 차가운 물체는 주드에게 던져졌다가 발에 떨어진다. 주드는 한눈에 그것이 동물의 살점, 그것도 ‘거세된 돼지의 특정 부분’(71쪽)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거세된 돼지’라는 묘사가 눈에 들어온다. 주드는 어떤 의미로는 거세된 자이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미천한 신분의, 너무나 가난해 꿈꾸기조차 거세당한 사람. 그런데 왜 하필이면 거세된 ‘돼지’의 특정부분이 그에게 던져졌을까. 그것을 던진 사람은 주드에게 호감을 가진,  그를 신랑감으로 점찍은 동네 처녀 ‘아라벨라’이다. 주드와 아라벨라가 살던 웨섹스 지방에서는 돼지를 키우는 농가가 많았고, 아라벨라네 집이 돼지농장을 하고 있었기에 돼지를 죽여서 내장을 씻고 하는 일이 아라벨레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소도 아니고 말도 아닌 돼지일까? 돼지는 영리하긴 하지만, 동물이며 본능에 충실하다. 먹고 자고 교미하여 번식한다. 아라벨라는 이 돼지의 특성과 어울리는 여자이다. 육감적이고 자기의 욕망과 본능에 충실하다. 시골 마을에서는 좀 남다른 주드, 잘생긴 주드에게 호감을 갖고 거세된 돼지의 특정 부분을 툭 던지면서 구애를 하는 넉살좋은 행동이 그래서 그녀에겐 어울린다. 

그런데 주드가 좀 신기하다. 줄곧 지성의 세계를 갈망하고 ‘크라이스트민스터’에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연연해 마치 ‘젊은 애인이 숨겨둔 연인에 대해 말을 꺼내듯 도시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는 얼굴까지 붉히는’(47쪽) 이 수줍음 많은 청년은 아라벨라의 이 단 한 번의 구애에 너무나 쉽게 넘어간다. 심지어 아라벨라의 집안을 엿보고는 그녀가 속한 세계는 너무나 세속적이고 비속하여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학에 대한 연구와 크라이스트민스터에 대한 눈부신 꿈에 집착한 그의 생활에는 맞지 않는 그 무엇이 그녀에게 있’다고 심지어 자기에게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그런 무기를 선택한 것은 순수한 의도의 표현은 아니었다.’는 것까지도 ‘자신의 지성의 눈으로 꿰뚫어’ 본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 스쳐 가는 분별력은 금세 사라지고 그는 다가오는 새로운 야성적 쾌락의 조건에 빠져’(77쪽) 든다. 뭐 잠깐 놀면 되는 거야, 생각하고선 아라벨라와 첫 키스를 하더니 자기가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보낸 세월을 무려 ‘낭비’라고 느끼기까지 한다. 그러느니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교황이 되는 것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게 더 나으리라’(89쪽)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낭비'라니! 그 긴 시간 읽은 책과 언어와 공부가 낭비라니! 이것이 정녕 지(知)를 사랑하는 자의 태도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주드는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 성공하려고 책을 읽고 공부한다. 그것이 자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마틴 에덴 또한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려고, 성공하려고,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신분이든 재산이든 사회적 명성이든 기타 등등의 모든 면에서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공부한다. 그런데 주드는 저 돼지의 특정 부위를 던진,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는 육감적인 여자와 단 한번 키스로 인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너무나 성적인 욕망, 육체적인 욕망에 쉽게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사람이다. 그토록 지성의 세계를 갈망한다면서도 단 한 번의 키스, 단 한 번의 섹스로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인물이다.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돼지는 주드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그 후로도 돼지는 이 작품에 번번이 여러 형태로 등장한다. 거세당한 특정 부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국 아라벨라와 결혼하여 돼지나 돌보면서 사는 인생을 견디며, 종국에는 돼지를 죽이는 일에서조차 아라발레와 갈등을 빚고 두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로도 등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2권에서 ‘수’와 ‘주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주드가 또 한 번 여자 때문에 자신이 가려던 길을 포기할 때이다. 이때 돼지의 그림자는 또 한 번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이상한 것은 그의 첫 번째 소원-학문적 숙달을 향한-이 한 여자에 의하여 제지되었는데, 그의 두 번째 염원-사도가 되려는-도 또한 여자에 의하여 제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건” 그가 중얼거렸다. “여자의 잘못인가? 아니면 사물의 인위적인 체제 때문인가? 그래서 정상적인 성적 충동이 무서운 집안의 올가미로 변해서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을 붙잡는 것인가?”(2권 43쪽) 



아라벨라와의 결혼이 실패한 후, 사촌인 ‘수’를 향한 열망을 꽃피우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주드는 그날 바로 정원으로 나가 얕은 구덩이를 파고 그가 가지고 있는 신학 서적과 윤리학 책을 모조리 들고 나와 구덩이 속에 쌓아 올리고 불태운다. 1권에서 아라벨라와의 육체적 결합 이후 결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더니 이번에는 아예 책을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이때 하디는 이렇게 쓴다. “찢어진 책에 불꽃이 붙어서 거의 재로 사라질 때까지 집 뒤쪽과 돼지우리와 자신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2권 44쪽). 주드가 번번이 성적 욕망에 무릎을 꿇어서 자기가 가려던 길을 포기하게 될 때마다 돼지가 여러 형태로 등장하는 것이다. 

작품 말미에 주드가 아라벨라와 재결합한 후에도 돼지는 또 등장한다. 아라벨라는 남의 남자(수의 남자)가 된 주드가 탐이 나서 술수를 쓴 끝에 그를 자기에게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다. 함께 살 집이 마땅치 않아서 그녀의 아버지가 빌린 작은 집의 아래층 뒷방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데, 그 집 앞쪽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돼지고기 가게가 있다. 여기서 일하던 아라벨라의 아버지는 흡사 ‘돈육 전문 백정’(2권 325쪽)처럼 보인다. 이 백정의 집에서 주드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다. 이처럼 주드의 첫 여자 아라벨라는 책이 아닌 돼지, 동물적인 세계에 어울리는 여자이다. 그런데 주드는 아라벨라와 다름없는 육체적 욕망 때문에,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세계를 등지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의 선함과 자신의 긴박함보다 결혼이나 그 밖의 다른 의식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구교도나 신교도임을 밝혀도 그는 바리세인보다 못한 자니라....... -존 밀턴



2권이 시작되는 “4부 새스턴에서”애는 존 밀턴의 위와 같은 글귀가 인용된다. 1권이 주드가 처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사회 제도의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면 2권에서는 결혼제도와 인습에 관한 통렬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물론 1권에서도 주드와 아라벨라의 결합을 통해 결혼이란 제도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지만).     

결혼식이라는 장례식
주드는 사회적으로 ‘거세당한 돼지’이기도 했지만 성적으로도 ‘거세당한 돼지’에 가깝다. 아라벨라에 이어 그가 두 번째로 관심을 갖는 여성인 ’수 브라이드헤드‘는 애초부터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두 사람은 사촌 사이이다. 주드의 할머니는 주드의 예민함, 그의 쉽게 열정적으로 변하는 성정을 잘 알기에 사촌인 수의 사진을 보여주면서도 걱정을 떨치지 못한다. 사촌이니까 다른 관심은 갖지 말라고, 섣불리 가까이 가지 말라고 여러 차례 주의를 준다. 그러나 할머니의 염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만다. 

수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주드는 호감을 갖기는 하지만 성적인 집착은 아니었다. 주드가 수의 사진을 처음으로 보면서 스스로 했던 생각을 떠올릴 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아한 유형. 그의 인상은 이것이 전부였다. 화가가 그녀를 잘생겼다거나 아름답다고는 하지 않을 유형.’(162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수에게는 역시나 그에게는 없는 것, 아라벨라에게도 없는 것,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동떨어진 그 무엇이 있다. ‘그녀는 주드를 특징짓는 투박한 시골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주드는 그녀의 사진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결이 빗나가고 불행하고 악운이 끼인 집안의 자손이 이렇게 섬세함의 정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런던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그의 가슴속에 갇혀 있던 고독감과 시로 승화된 크라이스트민스터에 대한 사랑이 자신도 모르게 이 환상의 여인에게 옮아’(162쪽) 간다.

그러니까 시골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이 주드에게는 늘 환상, 자기가 처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줄 환영이 필요했다. 이것을 애초부터 알아본 사람은 아라벨라이다. 훗날 곤궁함에 빠진 주드는 빵을 만들어 팔게 되는데 그때조차 ‘크라이스트민스터 케이크’를 만들어 판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아라벨라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크라이스트민스터 노래군요. 케이크를 가지고도요!” “꼭 주드다운 짓이에요. 그를 지배하는 열정이에요. 그는 별난 사람이에요. 항상 그럴 거예요. 그에게는 크라이스트민스터가 일종의 고정된 환영이에요. 그 사람은 그 환영에 대한 믿음을 떨쳐버리지 못할 거예요.”(2권 209쪽) 주드를 사로잡는 환영, 그것은 처음에는 크라이스트민스터였지만 이제는 크라이스트민스터와 닮은, 시골적인 특성이 없는,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 런던에서 살았을 것이 분명한 ‘수’이다. 그러니까 주드는 하나의 환영이 부서진 이후에는 또 다른 대상을 이상화해 거기에 자기의 온 정신을 갈아 넣는 사람인 것이다. 

수의 사진을 본 이후로 그녀는 주드에게 이상이 된다. 사촌이니까, 심지어 자기는 한 번 결혼한(그 결혼은 이혼이라는 분명한 결과로 매듭짓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이어지고 있기에) 사람이기에 수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런데 이 사랑도 육체적 욕망을 동반한다. 수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그녀를 몰래 따라다니며 염탐하면서도 수를 욕망한다. 그녀에 대한 자기의 관심이 틀림없이 성적인 성격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상 이제 수 브라이드헤드와 내밀한 친분 관계를 시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더욱 강하게 고개를 든다. 그러나 ‘외로운 저녁이 반복되면서 그녀를 잊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렬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머릿속에서 잘못되고 관행을 벗어나는 예기치 않은 짓을 상상함으로써 거기서 놀라운 희열을 경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175쪽)하면서도 스스로 ‘나에게 궁극적인 문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욕정이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면서 자기가 수를 사랑하는 것은 ‘수가 남달리 총명’해서 이며 ‘내가 바라는 것은 부분적이지만 지적 공감’이라고 ‘내 고독에 대한 애정 어린 친절’일 뿐이라고 자위한다(176쪽). 정말로 그러할까? 

주드와 수는 결국 가까워진다. 수는 여러 차례 주드를 거부한다. 심지어 다른 남자(‘필롯슨’)와 결혼한다. 그러나 결국 그 결혼을 파기하고 주드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그럼에도 쉽사리 주드와 육체적인 결합은 하지 않는다. 주드를 거의 미칠 지경으로 몰아간달까? 그런데 이게 단지 그 둘 사이가 ‘사촌’이기에 두 사람 모두 결혼 전력이 있고 그 결혼이 법적으로 완전히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기에 수가 주드를, 주드의 육체적 욕망에 응답하기를 내내 거부한 것일까? 수는 굉장히 정신적인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주드와 그의 전처 아라벨라가 속한 돼지의 세계와 가장 극단적으로 반대쪽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수의 남편 필롯슨이 수와 더 닮은꼴에 가깝다. 물론 필롯슨 또한 아내를 안고 싶어 하지만 수의 거부를 존중한다. 

그런데 주드는 어떠한가? 필롯슨을 떠나 주드와 함께 도피한 수. 주드가 호텔을 잡았는데 방은 하나. 수는 필롯슨을 떠난 바로 그 밤에 주드와 나란히 한방에 머무는 건 용납할 수 없다면서 그와 같은 방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이때 주드가 하는 말이 가관이다. “함께 있는다는 건 나라는 비참한 인간에게는 과분하지....” 한껏 자신을 동정하면서 수를 공격한다. 그녀를 “정령이며 육체가 없는 존재, 사랑스럽고 감미롭고 간장을 애태우는 유령. 거의 육체가 없는 사람. 내가 몸에 팔을 얹으면 그 팔이 공기를 뚫고 지나가듯 모을 관통할 것 같은 사람”(2권 93쪽)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이 한번만이 아니다. “내가 자기를 사랑한 만큼 자기는 날 결코 사랑하지 않았소. 결코! 자기의 가슴은 열정적인 가슴이 못 되오. 자기의 가슴은 불꽃 속에서 타지 않소! 자기는 대체로 요정이거나 정령의 일종이지, 여자가 아니오.” 

수를 사랑하지만 수가 자신과의 섹스를 거부하기 때문에 요정이거나 정령의 일종이며 급기야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주드는 이혼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라벨라가 자기를 찾아와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아라벨라를 만나러 가겠다면서 수를 협박하듯 말한다. “수, 난 자기를 사랑하오. 그러나 자기에게 오랫동안 시중을 들었는데 보상은 너무 초라해요.”(2권 128쪽) 여기서 말하는 보상이란 육체적인 접촉, 그러니까 섹스를 의미한다. “나에게서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면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2권 128쪽) 말하면서도 섹스를 하자고 안 그러면 여관에서 기다리는 전처한테 가겠노라 졸라대는 것이다. 아라벨라에게 다시 보낼 수는 없다고, 질투에 눈먼 수는 결국 그날 주드를 붙잡고자 육체적인 접촉을 허락한다. 주드가 거침없이 키스를 하도록 내버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는 식으로 주드의 키스에 답례를 한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촉인데도 쓸쓸하다. “작은 새가 드디어 잡혔네요!” 수는 말한다. 그녀의 미소에는 쓸쓸함이 떠 있었다.(2권 131쪽) 함께 밤을 보낸 것이 틀림없는 그밤 이후의 묘사는 더욱 쓸쓸하다. 그다음 날은 비가 내리고, 수는 우울하기 짝이 없다.

수는 그렇다면 그토록 사랑하는 주드를 위해 남편을 떠났음에도 왜 다시 결혼하기를, 성적으로 결합하기를 거부한 것일까? 정말 ‘사촌’이라는 관계 때문일까? 수는 주드 못지않게 아니, 주드보다 더 정신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여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공부했으며 필롯슨과 주드 이전의 남자(‘미스터’)와도 깊은 우정을 나누면서 정신적인 교감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늘 상대-남자는 그 이상을 바란다는 것, 수가 자신에게 속한 여자(육체적으로도 완전히)가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꼭 법이나 제도로 묶여서 확인받아야 한다는 것에 늘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며 그런 이유로 ‘결혼’이라는 말 앞에서는 번번이 극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사람의 연인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시간부터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본성에 낯선 일이에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랑을 계속 할 기회가 더 많은 것이 인간적인 일이에요.”(2권 116쪽) 이렇게 생각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녀이기에 주드와의 결혼을 거부하면서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므로 더 주드를 사랑한 것이다. 


“난 오빠가 생각하는 만큼 예외적인 여자는 아니에요. 결혼을 좋아하는 여자는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 수가 적어요. 여자가 결혼을 하는 이유는 결혼이 주는 위엄 때문이고, 때때로 사회적 이점이 따르기 때문이죠. 난 위엄과 이점은 없어도. 살아요.” (2권 117쪽)


이런 수에게 주드가 고작 하는 말은 온갖 맹점을 알면서도 결혼하는 사람들, “그들은 평범한 열정을 가졌기에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한 거야. 수, 자기는 환영 같은 육체가 없는 존재야. 자기에게는 동물적인 정열이 없어. 문제가 생겼을 때 이성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지. 그런데 우리처럼 둔한 몸뚱이를 가진 가엾고 불행한 인간은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아.”(2권 116쪽) 이렇게 변명처럼 둘러 댈 뿐이다. 사랑이나 현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때 수와 주드의 이런 정신적인 차이, 육체적인 욕망에서의 큰 차이가 두 사람을 끝끝내 불행으로 내몬 것은 아니었을까. 수가 인습을 거부하면서도 끝내 거기에 얽매여서 사촌과 결혼하기를 거부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엔 그녀의 본질을 절반만 본 것이리라. 만일 수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녀는 필롯슨에게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하며 해방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나를 떠나면 주드와 결혼할 것이냐고 묻는 필롯슨에게 ‘내 방식대로’ ‘내가 선택한 대로 그와 살 것’이라고 대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가 주드와 마찬가지로 비운의 수가 되고 마는 까닭은 사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촌과 ‘결혼’이라는 인습적 제도 안으로 들어가기를 끝끝내 거부한 탓이다. 평범한 여자처럼, 그러니까 아라벨라처럼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위엄이나 사회적 이점 안으로 숨어들기를 선택하지 않은 탓이다.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내가 잘못하는 거죠. 난 항상 잘못하고 있어요! 하나의 신조를 믿는 것처럼 항상 사랑에 자신을 매어두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에요. 어떤 특정한 음식이나 음료수를 항상 좋아하겠다고 서약하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거예요!”(2권 54쪽)


항상 사랑에 자신을 매어두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이 특별한 여자, 결혼이라는 위엄과 사회적 이점 안에 정착하기를 거부한 여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육체적인 접촉보다 더 숭고한 우정과 애정,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그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으며 거기에서 더 큰 만족을 느꼈던 여자. 그러므로 결혼도, 결혼이 강요하는 의무 안에서 자식을 낳아 번식하기를 끔찍하게 여겼던 여자. 그 여자의 정신을 품기엔 지성의 세계를 갈망하긴 했으나 마침내 “식구 입이 더 많아진 것 빼고는” “다른 곳으로 가서도 별로 큰일을 한 게 없는 것”같은(2권 231쪽), 그 남자 주드가 애초부터 너무나 미천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의 특기라는 끈기는 왜 공부에서는 끝까지 발현되지 못하고 수에게 졸라대는 것에서만 발현된 것일까.... 주드의 이 개인적인 한계도 그를 영원히 이름없는 자로 남게한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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