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길 위에서

그럼요. 얼마 안 걸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번에도 대답은 그녀의 몫이었다.
남편이 자전거를 안으로 옮겨오는 동안 그녀는 바닥에 흩어져있는 공구 중 필수적인 것들을 따로 챙겼다. 남편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래서 그녀는 늘 그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남편이 바퀴를 분리하려고 손을 뻗기 전에 얼른 앞바퀴를 들어주고, 그가 타이어 레버를 집어들 때 다음에 사용할 펑크패치를 바로 옆에 가져다놓는 식이었다. 두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질서정연하게, 마치 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어쩌면 그런 것이야말로 삼십여 년 결혼생활의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녀는 종종 했다. 둘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아이를 가지려고 애를 쓰던 시기가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적당한때 마음을 접었고, 자신의 노력을 배반하지 않을 만한 목표로 눈을 돌렸다. 남편이 목표로 삼은 건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공구, 타이어, 가죽 안장, 로드 자전거, 미니벨로 같은 결과적으로 손에 돈을 쥐여줄 수 있는 것들.
그럼 자신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P167
몇 해 전, 오스트리아 빈의 구시가지를 걷다가 상점에서 파는빈티지 엽서를 보았다. 사실 그때는 누가 누구에게 썼는지도 모를 그 오래된 엽서들을 사고판다는 게 신기했고, 여느 관광객처림 엽서들을 잠깐 뒤적거렸지만 크게 관심은 두지 않았다.
당시엔 빈티지 엽서로 소설을 쓰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 쓰는 일은 내 삶과 타인의 삶 사이에 반투명한 종이를 겹쳐놓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타인의 삶은 내가 모르는 것이어서 힘껏 상상해야 겨우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엔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삶과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삶, 한때갈망했던 삶과 단 한 번도 그려보지 못했던 삶이 모두 있다.- P182
"부족하다거나 초라하다거나 보잘것없다는 생각도 충분하다거나 만족스럽거나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자신의 일상은 두 가지 상반된 마음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고.
이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일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 사이. 그래서 이 해석할 수 없는 엽서는 버릴 수 없다. ‘빈티지 엽서‘
라는 수신자와 발신자, 타인과 연결된 얇고 납작한 사물이 바로 그 점을 상징하는 것만 같기에.
소설은 친절과 선의 나누기의 어려움으로 시작해 익숙한 일상지키기의 어려움으로 이어지며 한 겹 더 나아간다. 단순한 엽서읽기에서 마음 들여다보기로, 빈티지 엽서를 읽는 ‘그녀‘는 어느새 희미해졌거나 놓쳐버렸을지 모를 꿈을 간직한 ‘나‘의 이야기로 되돌아와 이제 여기 놓여 있다. 소설에 작가가 집중한 힘, 문장을 고른 세심함과 함께 또다른 해석을 기다리며.-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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