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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사회·경제체제를 봉건제나 노예제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유럽의 봉건제와 노예제의 핵심에는 국가와 교회 등이 인지하는 법적 종속이 있었다. 중세 유럽과 고대 로마의 도시에는 법적으로 인정되는 자유의 조건이 있고, 이 조건은 자본 축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자본 축적은 마침내 자본주의의 등장을 이끌어냈다. 이와 비교해보자면동남아시아의 체제는 더 개인적이고 금전적이었다. 법보다 충성이 중요하고 모두에게 주인이 있었다. 돈은 채무를 통해 사람의 충성을 사는 데는 유용했으나, 일시적인 임금으로 노동력을 사는 데는 무용했다. 자본을 보호하고 사용할 하인을 모으지 않고 자본을 축적하기란 가능할지는 몰라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P203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 일부일처제와 정절(이혼으로 쉽게해소되는), 여성의 강력한 지위 등 성관계의 전반적인 양상은, 교역의 시대에 동남아시아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던 세계종교와 여러 가지로갈등을 빚었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이슬람 율법과의 충돌이었다. 이슬람 율법은 여성을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남편에게 의존적인 존재로만들고, 여성이 이혼을 요구할 권리도 철저히 제한했다. 혼전 성관계(지- P229
나zina) 또한 아주 엄하게 처벌받았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아랍 부모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딸이 사춘기가 되면 곧 결혼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P230
도서부 동남아시아에 관해 주장하고 싶은 바는 서기 1000년 이전에종교적 문헌을 읽을 목적으로 인도에서 문자체계가 처음 들어온 것이분명하겠지만 수마트라, 남술라웨시, 필리핀의 여러 지역에서는 상당히다른 일상적 목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확장 이전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 여성이 상업과 사회 면에서 능동적이었던 애니미즘 문화에 의해 문자 체계가 받아들여졌다. 여성은 글쓰기를 남성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신을 주고받고 여성의 영역이던 채무와 상거래 문제를 기록했다. 따라서 문자 교육과 전승은 가정의 영역이자 대개 어머니와 손위 자매의 책임이 되었고, 배타적인 사제계급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었다.- P314
교역의 시대는 바람 아래의 땅에서 엄청난 변화의 시기였다. 문화와교육의 형태, 대중 신앙, 법체계, 심지어 의복과 건물의 양식까지, 교역도시들은 자신들이 중심이었던 공동체들을 개조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는 이 연구가 그 시작점도 변화의 방향도 세계의 다른 지역과 유사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해왔음에도) 유럽에서 유사한 시기인 르네상스 시대와 비교할 만하다.-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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