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그리하여 멀리서
  •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 핍 윌리엄스
  • 16,650원 (10%920)
  • 2021-01-29
  • : 1,287

지금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어원이 궁금할 때가 있다. 아주 어렸을 적 처음 글을 배울 때 새로운 단어에 대해 하나씩 그 뜻을 외우고 기억하던 것처럼. 내가 사용하는 뜻과 다른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신기하고 놀라웠다. 소리로 익히는 말이 아닌 단어, 그러니까 글자로 적어 익히는 건 뭔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소리는 금방 사라질 것 같고 글자로 기록하면 영원할 것 같다고 할까. 아마도 사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말, 같은 뜻으로 정의할 수 있는 말,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실리적인 말들 말이다. 하지만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읽으면서 시대가 원하는 단어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 재확인했다. 어떤 사회가 특정 단어에 얼마나 민감하고 불편해할 수 있는지 말이다. 누구에 의해 사전이 만들어지는지, 누가 그 사회의 주류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빅토리아 시대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 제작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내게 다양한 의미를 안겨주었다. 자신을 낳고 죽은 엄마 릴리를 그리워하며 아빠와 단둘이 살아가는 에즈미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이자, 사전을 만드는 과정은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이며 여성의 삶을 다루는 페미니즘 소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시녀, 노예가 존재하던 시절, 어떤 계급이 여전히 관습으로 남았던 시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보여주는 날것 그대로의 단어가 상징하는 것들이 현재 우리 시대의 ‘혐오’나 차별’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소설은 1887년 2월 에즈미가 아빠와 함께 단어 공부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는 사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에즈미는 아빠를 따라 사전을 만드는 ‘스크립토리엄’에서 시간을 보낸다. 머리 박사를 중심으로 아빠와 많은 조수들이 그를 도와 각지에서 도착한 단어에 대한 수많은 쪽지들, 그것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 사용할 수 없는(사전에 등재할 수 없는) 단어들은 바로 버려진다. 그러나 에즈미에게 그 단어는 다른 의미다. 처음 에즈미에게 온 단어는 ‘여자 노예(Bond-Maid)’였다. 머리 박사님 댁에서 살림을 하며 자신을 돌봐주는 ‘리지’였다. 모두가 다 아는 단어인데 존재하는 단어인데, 사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단어. 어린 에즈미는 충격을 받았고 그 쪽지를 트렁크에 소중하게 담았다.


그렇게 에즈미는 자신만의 단어, 아닌 여성들의 잃어버린 단어를 수집하는 일을 시작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지는 단어들이 하나씩 트렁크 속에 쌓였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이들에게는 알릴 수 없었다. 그들에겐 의미 없는 일이라 여겨질 게 뻔했으니까. 단어들을 모으는 일은 흥미로움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었고 주변을 둘러보며 성장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에즈미가 만난 메이블, 틸다, 빌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었다. 어떤 선택(고통과 슬픔을 동반한)과 그에 따른 책임과 결과는 에즈미를 성장하게 만든다.


모두가 그러하듯 에즈미도 주변의 도움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스크립토리엄에서 머리 박사의 심부름을 하면서 사전 제작에 힘쓴다. 하루 종일 단어를 설명하는 쪽지를 분류하고 기록하는 일은 단조롭고 지루할 것이다. 그 일에 대한 책임과 사랑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에즈미를 비롯한 사전에 들어간 단어를 결정하고 그 뜻을 조율하고 인쇄를 하는 그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


하나의 단어를 발견하고 그 뜻을 기록하기 위해 쪽지와 연필을 가지고 다니는 에즈미,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문장으로 담아, 누구의 말인지 기록한다.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말로, 누군가에는 나쁜 말로 남는 말들. 사전을 만드는 과정도 무척 재미있지만 에즈미가 아이에서 소녀를 거쳐 여자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도 무척 감동적이다. 에즈미와 함께 나도 성장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에즈미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이 소설에서 중요하다. 영원한 지원군인 아빠와 디토 고모와 리즈, 여성 운동에 대해 토론하고 실천하는 틸다, 에즈미가 만든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책으로 만들어 청혼한 인쇄 조판원 개러스.


한 권을 사전을 만드는 시간이 지루하고 긴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도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나의 단어를 놓고 그 뜻을 토론하듯 서로의 단어를 수용하고 품어주는 것이다. 이 소설이 특히 좋았던 건 단어의 확장이었다. 에즈미는 처음에 수집했던 여성들의 단어에서 시작해 누군가의 고유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을 채집한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후의 감정, 전쟁으로 인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을 경험하며 감당해야 하는 상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단어가 존재하며 그것들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년의 에즈미가 엄마를 떠오릴 수 있었던 단어에 대해 디토 고모가 한 말과 개러스의 말은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단어들은 부활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란다.” (47쪽)

“진짜 단어들은 소리 내어 말해지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죠.”(137쪽)


사전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방대한 일인지 상상한 적이 없다. 어떤 과정으로 어떤 말들이 어떻게 하나로 규정되고 사전에 등재될 수 있는지 그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사전을 만들고 기획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당시의 사회상과 문화가 가장 중요했다. 여성의 말, 여성의 단어는 사전에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나를 존재하는 말과 단어가 존중받지 못한다면 몹시 화가 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무척 남다르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수많은 단어들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완전하게 소멸될 것이다. 살아 움직이다 끝내 소멸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단어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의 권력과 통치로 인해 갇혀 있다 사장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단어는 자유롭게 바람을 쐬고 날아다닐 권리가 있어야 한다. 에즈미의 트렁크 속 단어가 그랬던 것처럼. 단어로 상징된 존재하는 모든 삶에게도.


“이 단어들 말이에요.” 트렁크 속으로 손을 뻗어 쪽지를 한 움큼 꺼내며 내가 말했다. “이것들은 숨어들려고 나한테 온 게 아니었어요. 이 단어들은 바람을 쐬어야 돼요. 읽히고, 공유되고, 이해되어야 해요. 어쩌면 거부당할 수도 있겠지만,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고요. 스크립토리엄에 있는 다른 단어들처럼요.” (353쪽)


아마도 존경받는 책의 리스트가 있다면 이 소설이 포함되지 않을까. 존재하는 모든 삶이 존엄하고 거룩하다는 걸 말해주는 소설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